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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82호
2022.6.13 (음 5.15)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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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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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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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우리 모두가 지니고 다니는 일기장. ― 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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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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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차이
약 30년 전, 1990년에 있었던 일이다.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었다. 늘 그랬듯이 정치적으로는 이런저런 입씨름이 있었다. 분위기는 요즘 못지않게 부드러워져서 북측 기자들이 ‘비교적’ 자유로이 여기저기 취재도 하고 다녔었다. 그러나 미처 서울 사정에 익숙지 않아 답답해했었던 것 같다.
서울의 길거리를 지나던 어느 초등학교 학생한테 북측 기자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월사금을 얼마나 내느냐”는 질문이었다. 문제는 그 초등학생이 월사금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것 같다. 얼떨떨해서 대답을 못 하니까 “수업료, 학비 말이야” 하고 힌트를 주었건만 그 학생은 “그냥 학교에 가기만 하면 되는데요”라는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매우 예리한 질문에 매우 정확한 답변을 했는데도 문답이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꽤 일찍 공교육의 무상화를 이룩했던 북측은 취재 과정에서 북측의 체제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테마로 ‘무상 교육’을 노렸던 것 같다. 그러나 사용한 어휘가 지나치게 구식 개념인 ‘월사금’이어서 남측 어린이와의 소통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50년대만 하더라도 월사금 때문에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 집으로 쫓겨온 아이들, 부모가 불려간 아이들 등의 일화가 꽤 많았다. 수업료니 학비니 하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쪽 사회는 ‘교육 비용’의 문제가 녹록하지 않다. 차라리 ‘사교육비’가 얼마나 드냐고 물었다면 기대했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남과 북의 사회 체제와 제도의 차이까지 염두에 두고 이러한 ‘개념의 소통’까지 나누려면 아마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일상어의 차이는 별로 심하지 않지만 사회적, 제도적 개념의 격차는 사실 엄청나게 심각하다. 하나하나 꾸준히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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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어
한국어의 한글맞춤법은 1933년에, 그리고 표준어는 1936년에 정해졌다. 그 후 약간의 변화를 겪으며 정착되어오다가, 분단 이후 북쪽에서는 서울말 중심의 표준어가 심하게 오염됐다고 비판하면서 1966년에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는 이른바 ‘문화어’를 제정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어의 서울말 중심의 변이는 표준어, 평양말 중심의 변이는 문화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평양말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는 바람에 오해도 생겨났다. 전통적인 평안도 방언처럼 ‘정거장’을 [덩거당]이라고 하는 식의 언어를 문화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문화어는 과거 반공영화에 나오던 억센 억양의 ‘평안도 사투리’와는 크게 다르다. 북의 문화어는 20세기 중반 즈음에 중부방언하고 매우 비슷해진 상태의 평양말을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남쪽의 표준어하고 큰 차이가 없고 어휘 및 억양의 차이가 약간 드러나는 정도이다.
또 정책적으로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줄이고 순화했기 때문에 비록 남쪽의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의미 파악에는 별문제가 없다. 큰 차이라고 한다면 ‘두음법칙’이라는 것 때문에 남쪽에서 ‘노인, 여성’이라고 하는 말을 ‘로인, 녀성’이라고 하는 정도이다. 그것 역시 알아듣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사실 남쪽에서도 외래어에는 말머리에 ‘로켓, 뉴스’처럼 ‘ㄹ’이나 ‘ㄴ’이 얼마든지 나타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북의 문화어를 ‘북한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자칫 북한에서 사용하는 별개의 언어라는 식으로 해석되기 쉽다. 북한의 문화어는 한국어에서 벗어난 딴 언어가 아니라 북쪽 변이형을 참조해서 정리한 ‘규범 체계’일 뿐 별개의 언어가 아니다. 정확하게 사용한다면 북쪽에서 사용하는 말은 ‘북한어’라고 부르는 것보다 ‘문화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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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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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 김수영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아무 목적 없이 앉았으면 어떻게 하리
남이 일하는 모양이 내가 일하고 있는 것보다 더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웁게 보이면 어떻게 하리
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도 좋다는 듯이 구수한 벗이 있는 곳
너는 나와 함께 못난놈이면서도 못난놈이 아닌데
쓸데없는 도면 위에 글씨만 박고 있으면 어떻게 하리
엄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곳에 사는 친구를 찾아왔다
이 사무실도 네가 만든 것이며
이 많은 의자도 네가 만든 것이며
네가 그리고 있는 종이까지 네가 제지한 것이며
청결한 공기조차 어즈러웁지 않은 것이
오히려 너의 냄새가 없어서 심심하다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덧없이 앉았으면 비로소 설워진다
어떻게 하리
어떻게 하리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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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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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성시(門前成市)
// 권세가나 부자가 되어 집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함.
《出典》'漢書' 孫寶傳 鄭崇傳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 : B.C 6-7)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저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 정씨(丁氏)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이 간(諫)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 중 상서복야 (尙書僕射)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창은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鄭崇)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옵소서."
애제는 그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신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鄭崇)의 소청을 묵살한 채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鄭崇)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尙書令趙昌?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崇 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
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下崇獄窮治 死獄中.
【유사어】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문전작라(門前雀羅),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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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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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사십에 사표를 던지고 - 김광수
나는 나이 마흔에서야 철학공부를 하러 나섰다. 친구들도 부러워하던 외국 기관의 좋은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대책 없이 가족을 서울에 남겨 둔 채미국 유학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첫걸음부터 어려움에 부딪쳤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 대사관 영사는 내가 유학이 아니라 위장 이민을 가려고 한다면서 비자를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영사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네 나라 대통령인 레이건은(당시에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쉰여섯 살에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남들 같으면 인생을 마무리 지어 갈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해 봤습니까?"
영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비자를 주겠습니다." (한신대 철학과 교수)
너무 예쁜 내 새끼들 - 조혜숙
안옥순(65세, 서울 종로구) 할머니는 올해로 5년째 종로구의 한 파출소에서 주방일을 맡고 계신다. 하루 세 번 출근해서 파출소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것이다. 주방이라고 해야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일하는 사람은 할머니 혼자뿐이다. 자식들은 그 연세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그냥 편하게 집에서 지내시라고 다들 말리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맘에 들고 다달이 월급을 타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가 이 파출소를 쉽게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지희, 지연이와의 추억 때문이다.
할머니가 이 두 아이들을 만난 것은 1990년 여름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건넌방에서 세를 살던 젊은 애엄마가 하루만 애를 좀 봐달라면서 지희와 지연이를 데리고 왔다.
"그래, 놓구 가. 언제 올 거야?"
애엄마는 대답 대신 두 홉 정도 되는 쌀 봉지를 내밀었다.
"애들 하루 봐주는데 쌀은 무슨..."
할머니는 며칠 전 애아빠가 돈 벌겠다고 집을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어디 일자리라도 구하러 가는구나 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거였다. 우선은 급하고 겁나는 마음에 친구 집에 애들을 맡겨 놓고 애들 엄마를 찾으러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작정을 하고 없어진 것 같다는 짐작뿐 헛일이었다.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이들을 차마 고아원에 갖다 맡길 수는 없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큰애인 지연이가 다섯 살, 작은애 지희는 이제 겨우 말 몇 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세 살바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안쓰러워서 먹이고 씻기고 밤이면 양팔에 꼭 끼고 잠을 잤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시작된 아이들과의 생활이었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금세 정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예쁜 짓을 하고 재롱을 떨었다. 함께 사는 두 아들은 항상 든든하지만 사내녀석들이다 보니 지희, 지연이를 데리고 있는 즐거움은 남달랐다. 당신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들이 예쁘고 살가웠다. 내 자식 기를 때도 이렇게 못해 줬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식들 보기에 미안할 정도로. 할머니께서 파출소의 주방일을 시작하신 것은 아이들을 맡은 지 1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아직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고 월급을 받게 되면 지희, 지연이에게 이것저것 사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소장님이 어려웠고 다른 직원들도 낯설 때라 애들이 일하는 데 오지 못하게 단단히 이르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할머니와 붙어 살다가 자기들끼리 남겨진 아이들은 심심하다고 보통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애들이 심심해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일일이 들어와서 새로 밥을 해먹이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파출소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소장님을 대장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고 뚱뚱하다고 호빵 아저씨, 빼빼하다고 멸치 아저씨 하는 식으로 파출소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탐탁치 않게 여겼던 파츨소 직원들도 모두 너나없이 아이들을 귀여워했고 지희와 지연이도 제 또래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는 파출소에서 지낸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해 했다.
지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할머니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다들 다들 제 부모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니까 취학통지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망설였던 자신이 죄스러워서 지연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날은 결국 집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울었더니 지연이도 따라 울고 영문 모르게 보고 있던 지희마저 울고... 아이들은 가끔씩 제 엄마 소식을 물어 할머니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특별하게 말썽부리는 일 없이 잘 자라 주었다. 가만히 눈여겨보면 큰애는 속이 깊고 착실했고 둘째 아이는 사근사근한 데가 있고 아주 명랑했다. 지연이는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다. 파출소 직원들은 조금씩 돈을 거두어 생활비를 보태 주기도했고, 아이들의 사정을 아는 담임 선생님이나 수녀님들, 심,지어 동네 속셈 학원 선생님까지 많은 분들이 자매를 보살펴 주었다.
할머니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둘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명절이면 만두를 넘치게 만들어서 집집마다 나눠 준다고 지희, 지연이가 만두 할머니라고 부른 재동 친구도 늘 얘기하곤 했다. 비록 부모품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컸으니 이 애들은 곧고 바르게 자랄 거라고. 1994년 8월, 지연이가 3학년이 되었고, 처음 왔을 때는 대소변도 제대로 못 가리던 지희도 초등학생이 된 해였다. 입학하고 처음 맞는 여름 방학이었는데 난데없이 아이들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얼마 전에 귀국을 했으며 아이들을 데려가겠노라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짧고 냉정한 통보였다. 애들 부모뿐 아니라 그 누구로부터도 치하받자고 어린 것들을 거두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잠깐 동안 서운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제 이것들과 헤어지는구나 싶으니 왈칵 눈물부터 쏟아졌다.
이틀 뒤 아이들은 며칠 있다 따라가겠다는 할머니의 거짓말을 믿고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5년 동안 아무 연락도, 왕래도 없었고 지연이는 아빠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나이였는데 피라는 게 저렇게 끌리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순순히 제 아버지를 따라갔다. 늘 적적하던 집에 해바라기 씨같이 화사한 생기를 뿌려 주었던 지희와 지연이. 그애들이 없는 집 안이 너무 갑갑해서 가슴을 탁탁 치면서 늦도록 집 밖을 서성이는 날들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것 보라고, 남의 자식 키워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하지만 매번 친손녀들처럼 예뻐했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같이 울었다.
아빠를 따라가고 나서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걸어 울먹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말할 수 없이 속이 타지만 애들 장래를 생각하면 늙은 나보다야 제 아비가, 또 함께 살게 된 새 가족들이 아무래도 낫지 싶어 아이들을 살살 달래곤 했다. 그날도 마침 방학이라 며칠 놀다 가면 좋으련만 겨우 하루만이라는 허락을 받고 온다고 했다. 드디어 두 아이들이 숨넘어갈 듯이 뛰어들어와 할머니에게 안겼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세상에 예쁜 내 새끼들..." (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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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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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 박이문
열매
열매는 언제나 깊은 감동의 원천이다. 열매를 보고 흐뭇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한번이라도 열매를 접한 다음 시인이나 화가가 되지 않은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열매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이들 가운데 철학적 사색에 빠지지 않는 예를 들 수 있겠는가? 열매는 성취한 풍요이며, 완성미이며, 철학적 사색이다. 과일 상점에 수북이 쌓아놓은 감, 대추, 석류, 모과, 은행, 밤, 복숭아, 배, 사과, 시장바닥에 늘어놓은 옥수수, 상수리, 도토리, 오디, 가지, 고추, 수박, 포도 등은 바라만 봐도 예외 없이 즐겁고 흐뭇하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의 물결이 곱다. 이 다양한 열매들은 생리학적으로 우리의 구미를 만족시켜주고 삶의 자양이 된다. 그러나 열매의 풍요는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체 자체의 풍요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열매에서 받는 흐뭇함은 그만큼 더 크고 깊다.
열매는 성취된 삶의 개가이다. 주어진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원초적 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생명의 목적은 좌절된다. 탐스럽게 여문 열매는 그러한 조절을 극복한 생명체의 증거이다. 열매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구어진 작품이다. 그러기에 열매가 갖는 풍요는 그만큼 더 흐뭇하고 더 귀하다. 풍요는 경제적 가치를 의미하고 성취는 정신적 가치를 지칭한다. 그러나 열매는 이 밖에도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 그것의 경제적 유용성, 정신적 의의를 넘어 모든 열매는 각자 나름대로 감각적으로 아름답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매달린 우아하고 단아한 감이 나의 미적 감각을 유난히 즐겁게 자극한다. 감동을 주는 것은 감만이 아니다. 산딸기, 꽈리 등의 열매는 다 같이 나름대로 아름답고 귀하다. 그러기에 발길도 내키지 않는 산기슭 이름도 모를 잡목들의 열매가 언뜻 보아 보잘 것 없어도 활짝 열어놓은 마음을 미학적으로 즐겁게 한다. 열매의 미에 전혀 무감각한 사람의 심성이란 상상할 수 없다.
미적 가치는 어떤 의미로든 형식과 뗄 수 없고 형식은 질서의 개념과 분리할 수 없다. 아름다운 모든 생명은 측정할 수 없이 깊고 신비로운 자연의 원초적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가장 궁극적 생명이요 그 생명의 원리가 자기 구현에 있다면 생명의 자기 구현보다 더 고귀한 것이 있겠는가? 모든 열매가 우리에게 순수한 미적 감동을 자극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궁극적 원리와 그런 질서에 따른 자기 정체의 구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열매는 생명의 예술품이다. 열매가 주는 미적 감동은 결국 원천적 생명의 예술적 결실이 동반하는 기쁨이다.
자기 구현은 하나의 맺음이요 맺음은 끝이며 끝은 하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열매가 삶의 내재적 자기 구현의 결실이라면 그것은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끝으로서의 열매는 새로운 시작이며 죽음으로서의 열매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죽은 열매는 열매가 아니다. 나무에 매달렸다가 땅에 떨어져 썩는 열매는 그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싹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지구 아니 우주 전체에 무한히 흐르는 깊은 생명의 물줄기를 잇는 하나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열매는 생명의 화석이 아니라 생명의 창작이며 내일로 뻗어가는 생명을 위한 축제이다. 잘 영글어 익은 모든 열매에서 우리는 결실을 맺은 삶의 형태미를 감상하고 환희에 찬 노랫소리를 들으며 정열에 넘치는 춤을 구경한다. 아름다운 열매는 언제나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열매만이 아름답다. 식탁에 놓인 과실도 아름답지만 나무에 달린 과실이 더욱 미적 감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열매의 미학이 곧 삶의 미학인 데 있다.
돌담을 두른 한국의 시골집 가을 정경은 그지없이 평화롭고 명상적이다. 푸르고 높은 코발트빛 가을 하늘에 걸려 있는 주홍빛 감들로 꾸며진 그 마을은 청아한 미적 감동의 작은 물결을 일으킨다. 까치가 먹다 남긴 찢어진 감과 아울러 몇 개의 완벽한 형태의 감을 달고 있는 산골마을의 정경에서 나는 미적으로 도취되고 철학적 사색에서 깊이 잠긴다. 이러한 감이 무척 좋다. 그러나 아름답고 귀하고 사색적 열매는 감만이 아니다. 모든 열매는 각기 자기 나름대로 똑같이 그러하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한다면 이름 모를 나무들의 무수한 열매들이 한결같이 나름대로 미학과 철학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한다.
나무만이 열매를 맺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자기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감나무에서 감으로, 대추나무에서 대추로, 석류나무에서 석류로 미학적으로 곱게 나타날 수 있고, 호랑이에서 호랑이 새끼로, 고슴도치에서 고슴도치 새끼로 각기 그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감, 대추, 석류, 고추 같은 과일이나 야채들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의 새끼가 거의 예외 없이 귀엽게 보인다. 비록 고슴도치가 인간에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편견 때문이다. 고슴도치한테는 고슴도치 새끼가 한없이 예쁘고 귀하다. 동물들한테는 그들의 새끼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있을 수 없다. 모든 생명이 영위하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 열매를 맺는 데 있다면 인간의 삶이 일구어야 할 열매는 무엇이겠는가? 동물로서의 인간의 열매는 자신이 낳아 키운 자식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데 있다. 인간의 본질은 그의 정신적 기능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참된 자기 실현은 생물학적이 아니라 정신적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있을 수 있다. 미적 가치가 완숙된 열매의 속성이라면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적 열매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인간의 눈이 나무의 열매나 동물의 열매 중에서도 더 아름답고 덜 아름다운 것을 가려 말할 수 있고, 동물의 새끼 가운데서도 더 귀엽고 덜 귀여운 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인간의 정신적 열매는 그 어느 것들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쩌다가 열매의 깊은 의미를 망각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졌다. 인간의 삶의 궁극적 의미가 인간으로서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는 데 있음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산에 가면 우리가 보려 하지도 않고 보지도 못하는 수많은 나무들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열매를 조용히 그리고 겸손히 맺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나무들, 풀들, 그리고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들, 곤충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고 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도시나 시골에서 혹은 부촌이나 달동네에서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각기 나름대로 삶의 열매를 맺어보려 서로 돕고 혹은 서로 싸우며, 울고 혹은 웃으며 애쓰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하고 궁리하고 애쓰고 있는 듯싶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 의미가 열매를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그외의 다른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느덧 나무나 풀들의 열매를 보지 못하거나 그것을 보아도 그것의 의미에 어둡고 그것의 미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개발이라는 깃발 아래 산이 뭉개지고 나무들이 잘리며, 나무 열매들이 찌그러지고 땅에 밟힌다. 물질적 가치에만 어두워 인간의 참된 열매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고, 그런 열매가 있다 해도 우리들의 눈앞에서 짓밟혀가고 있다. 생명들이 열매를 맺기가 어렵게 됐다. 맺은 열매도 쭉정이가 됐거나 일그러져가고 있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오염된 환경에서 인간의 열매가 썩거나 말라 시들고 말 위협을 받게 됐다. 지금 지구 어딜 봐도 나무가 죽어가고 아직 남아 있는 열매는 쭉정이로 비틀어지고 있다. 머지않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나무, 동물, 그리고 인간은 잘리거나 시들거나 병들어 죽게 될지 모른다. 이런 일은 인간을 위한 개발과 진보라는 명목으로 생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자연의 소유자도 아니다. 자연이 맺는 열매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는 자연의 생태학적 열매에 비추어서만 밝혀질 수 있다. 모든 열매는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을 내일의 삶으로 연결하는 끈이며, 나무의 삶과 풀의 삶, 벌레의 삶과 짐승의 삶, 그리고 자연의 삶과 인간의 삶을 맺는 고리이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그러한 고리의 하나를 구성하는 데 있다. 인간의 열매가 귀하다면 모든 동물, 모든 식물, 모든 생물의 열매는 다 같이 아름답고 귀중하다.
나무에 매달린 투명한 색깔의 감은 물론 산길이나 들길의 이름 모를 나무 열매나 풀이삭, 뽑으면 뿌리에 붙은 못생긴 감자 등 모든 열매가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삶의 근원적 의미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름답고 혹은 탐스럽고 혹은 야무지고 혹은 믿음직한 열매를 접할 때 우리 자신의 삶도 그같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다는 은근한 다짐을 하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가지가지 열매가 제공하는 미적 감동에 무감각해지고 열매의 한없이 깊은 철학적 의미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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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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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아흔일곱번째 이야기 - 거문고와 거문고 소리
옛날에 한 국왕이 국정을 돌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아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감동한 국왕은 좌우의 대신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이길래 이렇게 아름다운가?"
"대왕이시여, 거문고 소리입니다."
"네가 가서 그 소리를 찾아와라."
국왕이 한 대신에게 명령했다. 얼마 후 그 대신은 거문고 하나를 들고 와서 말했다.
"대왕이시여, 이것이 거문고입니다. 방금 전의 소리는 바로 이 악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국왕은 거문고를 받아들고 그것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방금 전의 그 소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다시 한 번 나에게 그 소리를 들려다오."
그러나 거문고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자 국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너에게 거문고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가져오라고 한 것은 방금 전의 그 아름다운 소리란 말이다."
거문고를 가져온 대신이 황급히 꿇어앉으면서 말했다.
"대왕이시여, 거문고는 여러 가지 부분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손잡이이고, 저것은 몸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줄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사람이 이것을 연주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 법입니다. 거문고를 타지 않고서는 소리가 날 수 없습니다. 방금 전에 국왕이 들은 아름다운 소리는 이미 사라져버렸는데, 신이 어찌 그것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그 소리의 허무함이 이와 같은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이것에 정신을 팔게 되는구나. 이건 사용해서는 안 될 거짓된 물건이로구나."
말을 마치자 국왕은 거문고를 던져 산산조각 내버렸다.
<잡아함경>
아흔여덟번째이야기 - 못된 장난
한 바라문이 광야에 우물을 파고 토기로 된 두레박을 걸어두어 목동과 행인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만들어놓았다. 어느 날 저녁 한 무리의 여우가 우물 근처에 나타나 땅바닥에 괴어 있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여우왕만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두레박 속에 있는 물을 마셨다. 물을 다 마신 여우왕이 두레박 속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자 두레박은 깨지고말았다. 나머지 여우들은 여우왕이 저지른 일에 화를 내며 따졌다.
"이 두레박은 행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그렇게 부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여우왕이 대답했다.
"재미로 그랬다, 왜? 나만 기분 좋으면 되지, 다른 일은 내 알 바 아니다."
다음날 한 행인이 두레박이 깨져 있는 것을 보고 바라문에게 알렸다. 바라문은 곧 새 두레박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여우왕이 그것을 깨버렸다. 그러기를 십여 차례 계속하는 동안 여우들은 여우왕을 그때마다 말렸으나, 여우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두레박이 며칠 못 가서 자꾸 깨지자 바라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런일이 생기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하루 동안 바라문이 숨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본 결과 여우가 못된 장난을 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우물을파서 행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여우가 자꾸 못된 장난을 하다니... 이번에는 아예 깨지지않는 단단한 나무로 두레박을 만들어놓자.' 바라문이 만든 나무 두레박은 단단할 뿐만 아니라 여우가 고개를 집어넣을 수는 있지만 빼기는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었다. 바라문은 여우를 혼내주기위해 나무 두레박을 우물 옆에 두고 그 근처에서 방망이를 든 채 숨어 있었다. 행인들이 물을 마시고 난 후, 여우왕이 몰래와서 나무 두레박에 고개를 들이밀고 또 그것을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레박이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도 빠지지않았다. 이때 숨어 있던 바라문이 뛰어나와 방망이를 인정사정없이 휘두르자 여우왕은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법원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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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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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나만의 글쓰기 비법
제2교시 : 문장은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좋은 생각의 덩어리를 문장에 담는 방법
1. 생각의 덩어리란 무엇인가
얼마전에, 어느 법원의 판사 한 사람이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단편소설 한 편쯤의 분량)의 판결문을 단 한 문장으로 썼다고 하여 말썽이 된 적이 있다. 그렇게 긴 문장은 쓰기도 괴로운 일일 뿐 아니라 읽어 내려가기도 숨가쁘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 얼마나 미련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그처럼 미련스럽게 긴 문장의 글을 잘 쓴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 그러면 그것이 왜 미련스러운 글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 붙인 번호에 주의해 가면서, 다음의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1) 어머니가 시장에서 쌀 한 부대를 사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식구들의 식탁 위에 한 부대의 쌀을 올려놓고 그대로 먹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선 그 쌀을 모두 쌀통에 부어 놓으신다. (2) 그 다음에 식구 한 사람에 한 홉 정도씩의 쌀을 바가지에 담아 씻은 후 솥에 안치신다.
(3) 어머니는 솥에 안친 밥이 끓고 뜸이 들기를 기다리셨다가, 그 것을 보온 밥통에 퍼 놓으신다.
(4) 식구들의 수대로 밥그릇을 준비한 다음, 거기에 퍼 담아 식탁 위에 놓아 두신다.
(5) 우리는 그 밥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입을 크게 벌린 채 한꺼번에 들이붓고 꿀꺽 삼켜 버리지 않는다.
(6)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는다.
(7) 우리는 또 그 밥 한 숟가락을 그냥 꿀꺽 삼켜버리지 않고, 입안에서 이로 오래오래 씹는다.
1) 씹은 것 가운데서 잘 씹어진 것 일부를 먼저 삼키고, 2) 덜 씹어진 것들은 더 씹은 다음에 또 일부를 삼키고, 3) 마지막에 나머지를 몇 번 더 씹어서 삼킨다.
사람은 누구든지 한 무더기의 큰 생각 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이나 글로써 전달하려고 한다. 글을 처음으로 쓰는 사람들은 매우 성급하여, 그 큰 생각 덩어리를 통째로 그 큰 생각 덩어리를 통째로 전달해 버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에다가 자기 생각의 큰 덩어리를 다 담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에는 생각 덩어리의 아주 작은 조각 한 개만 담는 것이 좋다 . 너무 큰 생각의 덩어리를 담으면 조그마한 문장의 봉지가 터져 버리고 담아 놓은 생각이 밖으로 줄줄 새어 나가고 빠져나가 버린다. 전하려 하는 생각들이 다 새어 나가고 빠져 나가버린 문장(봉지)은 온전한 문장일 리가 없다. 우리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 오신 쌀 한 부대(생각의 큰 덩어리)를 조금씩 나누어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2)에서 (7)까지의 방법을 아침에 한번 사용하고, 점심에 또 한 번 사용하고 그리고 저녁속에 또다시 한 번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먹어야 그것이 우리 몸 속에 들어가서 피와 살이 된다.
2. 생각의 덩어리를 어떻게 문장에 담을 것인가
우리가 '특이한 버릇'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 그 생각의 큰 덩어리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오신 쌀 한 부대 에 해당하는 것이다. 쌀 한 부대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려고 하는 것은 미련 스러운 짓이다. 우리의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소화를 시킬 수 도 없다. 다음의 글은 독자가 보내 온 글 가운데서 한 대목을 따온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곤충을 잡아다가 괴롭혀 죽이거나 집에다가 놓고 며칠씩 놓아 두면 어머니께서 죽은 곤충을 버리시곤 하셨다. 위의 글속에 들어 있는 생각의 덩어리는 너무 크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쉽게 입 안에 넣고 씹을 수도 없고, 목구멍 너머로 삼킬수도 없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그 덩어리를 잘개 쪼개 주는 것이 좋다.
(1)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였다.
(2) 그 때 나는 곤충을 많이 잡곤 했다. 나비, 매미, 잠자리, 메뚜기, 거미, 방아깨비, 풍뎅이......
(3) 그러고는 잡은 그것들을 몹시 괴롭혔다.
1) 꼬리에 실을 달아 가지고 놀기도 했고, 2) 고개를 비틀어 놓고 빙글빙글 돌게 하기도 했다. 3) 그냥 날개와 목을 떼어 죽이기도 했고, 4) 곤충망 속에다가 며칠씩 가두어 놓기도 했다.
(4)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그 곤충들의 시체를 말끔히 치워 놓으셨다. 그리고 그 불쌍한 것들을 다시는 잡아오지 말라며 나를 꾸짓곤 하셨다.
3. 좋은 생각은 좋은 그릇에
자, 이번에는 다른 독자들의 글을 한번 보로록 하자.
(1)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갖게 되는 버릇들이 있다. 내 친구들 중에도 불안하거나 긴장이 될 경우에는 손톱을 물어 뜯기도하고 다리를 떨어 마음을 가라앉히곤 한다. 또 공부를 할 땐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어야만 한다는 친구도 있고, 무언가를 암기하기 위해서는 그 암기 내용을 노래 부르듯이 흥얼거려야 외워진다는 친구도 있다. 참 특이한 버릇이다.
(2) 그러나 이 친구들 뿐 아니라 나 또한 남이 보기엔 특이하다 싶은 버릇이 있다. 손틉을 깎았을 때 양 끝 살에 묻히는 부분을 깨끗하게, 아니 너무 깊게 많이 깎아 아플 정도 까지 해야 마음이 놓인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약간의 손톱이 남아 있을 땐 왠지 더러워 보이고, 금새 때가 낄 것 같고 또 그손톱이 살을 파고들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 듯싶다. 평소에 여러 가지 점에서 지나치다 할 정도로 불안해 하는 날 보고 히스테리가 있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밖의 생활에서는 느긋하고 여유 있느 성격을 가진 나이기에 히스테리란 말은 곳 재 언급되지 않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불안감을 특이한 버릇 탁으로 돌리게 되니 것이다.
(3) 그밖에도 여러 가지 버릇을 갖고 있다. 잠잘 때 볼이 베개에 닿아야 잠이오고, 다리를조금이라도 굽혀야 편히 잘 수 있는 이상한 버릇들을 가진 재가 어떨땐 부끄럽기도 하다.
(4) 그래서 이런 버릇들을 고쳐 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그때마다 따르는 것은 실패
뿐이었다.
(5) 그렇지만 평범함 속에 튀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나는 이젠 버릇들을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특이하니까 튈수도 있고, 그다지 해로운 버릇도 아니니까 말이다.
(6) 항상 자신감을 갖고 살라는 엄마의 말씀대로 나의 특이한 버릇에 내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지낼 것이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막 나올 때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가 우렁차야 어른들은 튼튼한 아이를 낳았다고 좋아한다. 이렇듯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할 때는 그첫소리를 크게, 그리고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이든지 그 글의 첫 문장은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첫문장은 명료해야 한다.
(1)의 첫문장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갖게되는 버릇들이 있다. 이것은 다음에 있는 이 글의 마지막 주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좋다. ......항상 자신감을 갖고 살라는 엄마의 말씀대로 나의 특이한 버릇에 내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지낼 것이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그런데 이 첫문장은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한 듯 하다. 그것을 이렇게 고쳐보면 어떨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특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방법으로 수정하고 가필한 글과 원래의 글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1)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만의 특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내가 친구들 가운데 몇 사람은 긴장이 되거나 불안해 지면,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 다리를 떨기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한다. 또 어떤 친구는 혼자서 공부를 할 때,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어야만 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무언가를 암기하기 위해서는 그 것을 노래부르듯이 흥얼거려야 한다는 친구도 있다.
(2) 물론 나한테도 남의 눈에 특이하게 보일 만한 버릇이 있다. 손톱을 깎을 때 손톱의 양쪽 끝 살 속에 묻히는 부분을 깨끗하게 깎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 아플 절도로 깊게 깎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 부분에 손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더러워 보이고, 금세 그 사이에 때가 낄 듯 싶고, 또 그 손톱이 살을 파고들것만 같아 불안해 진다.
덜 깎은 손톱 때문에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불안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히스테리가 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밖의 생활에서는 꽤 느긋하고 여유 있는 편이기 때문에 그 말은 내게 맞지 않는 듯 하다. 나는 그냥 그 불안감을 아주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특이한 버릇 쯤으로 돌리고 싶다.
(3) 그밖에도 나에게는 여러 가지 버릇이 있다. 잠잘 때 볼이 베개에 닿아야 잠이 오는 것이라든지, 다리를 조금이라도 굽혀야 편히 잘 수 있다든지 하는 이상한 버릇들, 물론 이러한 버릇들은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4) 그 때문에 이런 버릇들을 고쳐 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하곤 했다. (5) 하지만 이제는 이 버릇들을 굳이 고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평범한 삶 속에서도 남보다 뀌어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해로운 버릇도 아니다. 아니, 특이한 만큼 남보다 뛰어날 가능성도 더 있는 것이 아닐까.
(6)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특이한 버릇에 대하여 나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기로 했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사람의 버릇은 성격을 형성하고, 그 성격은 인격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글에 윤기를 더하기 위하여, 바른 인격의 형성이나 삶에 대해 명상하는 모습을 보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좋은 옷에 예쁜 꽃 장식을 달아 놓은 것처럼 글이 더욱 빛나지 않을까? 좋은 생각은 좋은 그릇(문장)에 담아야 한다.
생각해 봅시다.
1.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커다란 생각의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로써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이 때, 그 큰 생각의 덩어리를 어떠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옳은지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도록 하자.
2.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는 그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듯이, 글을 쓸 때는 첫 문장이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면 첫 문장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설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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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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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장
작은 행복
1. 영상 땅의 一老一少
벼슬보다 한 뼘의 밭을 일구며 땅은 넓게 트이고 하늘은 드높다. 중원이라 일컫는 저 거대한 대지의 한가운데 강이 굽이쳐 흐르고 군데군데 늪과 숲이 흩어져 있다. 지금은 안휘성의 풍치 수려한 곳으로 변해 버린 영상(穎上) 땅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5백 년 전, 춘추 시대엔 잡초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습지대였다. 다만 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안쪽으로 파고들어간 야트막한 구릉지와 드문드문 솟은 산줄기의 아래쪽에 십여 채씩의 초막들이 새로운 간척지를 끼고 몇 개의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옛부터 농작물과 어패(魚貝)를 좋아한 인근 지역 백성들에게는 그런 대로 풍요로운 대지였고,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생명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이 곳이 처음부터 풍요로운 터전은 아니었다.
40여 년 사이, 이 부근은 크게 변모했다. 많은 늪이 매립되었고 강둑이 세워졌다. 또한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오고가는 장사꾼이나 뱃사공의 왕래도 많아졌다. 생활은 점차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새로운 풍물도 선보였다. 그래도 당시 중원에 비한다면 생활 수준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는 주평왕 50년 여름, 가난하지만 새로운 변화가 밀려오는 이 곳에 칠순이 넘은 농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인간의 수명이 짧고 노화가 빨랐던 그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1백 세 정도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는 상당히 연로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백발의 노인은 좌붕(左朋)이라고 했다. 그는 매일같이 노구를 이끌고 밭일을 나섰다. 언덕을 까내고 흙을 퍼서 늪을 메우고, 거기다 새로 농작물을 가꾸고 밭을 일구는 일이었다. 「땀 흘려 일해 한 뼘의 땅이라도 밭을 만든다.」이것이 노인의 신조였다. 그래서 일족(一族) 가운데 농사일을 싫어하거나 하면, 딱 잘라 말하고 내쫓았다.
"땅을 일구고 농작물을 가꾸기가 싫으면 얼씬거리지 말고 아예 이 곳을 떠나거라."
벌써 40여 년을 지켜온 그의 고집이었다. 노인의 땅에 대한 집념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부친의 유언이기도 했다. 노인의 부친은 주(周)나라에서 하대부(下大夫) 벼슬을 한 좌유(左儒)다. 좌유라 하면, 바로 주선왕(周宣王) 때 산뽕나무 활과 쑥대 전통을 팔러 온 시골 아낙을 붙잡아 참형에 처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 후손이 어찌 제나라와 송나라의 접경 지대,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황량한 곳에 흘러들어 밭을 일구고, 강물을 퍼 올리며 살게 되었는가.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주선왕 말년의 일이다.
그 해에 큰 제사가 있었다. 왕은 종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밤 왕은 깜빡 선잠이 든 새에 흉몽을 꾸었다. 소스라쳐 일어난 왕은 기분이 몹시 울적했다. 왕은 내색하지 않고 제사를 마쳤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오자 곧 태사 백양부를 불렀다. 백양부가 들어오자 왕은 어젯밤 종묘에서 꾼 흉몽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백양부는 아직도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에 연관 된 요녀(妖女)가 죽지 않아 이를 경계하라는 귀신의 증거라고 했다. 왕은 요녀가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요녀를 잡아죽이라고 분부했던 상대부 두백을 불렀다. 3년 전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하여 두백을 크게 문책할 생각이었다. 왕이 강경하게 두백에게 물었다.
"그 계집아이 소식은 아직도 없느냐?"
두백이 별 생각없이 아뢰었다.
"그 때 산뽕나무 활과 쑥대 전통을 가진 시골 아낙을 죽였고 그 이후에는 별다른 징후가 없습니다. 요녀는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어찌 또다시 묻나이까?"
왕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또다시 왜 묻느냐고? 너는 어찌 3년씩이나 맡은 바 직분을 소홀히 하고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말대답만 하느냐? 이런 불충한 신하를 어디에 쓰겠느냐!"
기분이 상한 왕은 크게 꾸짖더니, 좌우의 무사들에게 호령했다.
"저 자를 끌어내어 참하거라. 불충한 자의 목을 백성들에게 널리 보여 줘야겠다."
졸지에 겪는 임금의 진노인지라 조당의 신하들이 모두 어쩔 줄 몰라했다.
"왕명을 거두소서!"
그때 큰소리로 외치며 무사들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대부 좌유였다. 좌유가 부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요 임금은 9년 홍수에도 임금의 자리를 잃지 않았으며, 7년 가뭄에도 누구 하나 탕(湯) 임금의 자리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천재 지변에도 아무런 탈이 없었거늘, 어찌 요사한 계집아이 하나를 이렇듯 두려워하시나이까. 왕께서 두백을 죽이시면 백성들이 오히려 요사한 기운을 믿게 되고, 자칫 왕실조차 업신여길까 두려워집니다. 바라옵건대 두백을 용서하시고 없었던 일로 해주시옵소서."
원래 두백과 좌유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주선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너는 친구를 위해 왕의 명령을 가로막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더냐! 물러나거라."
"아닙니다. 마땅히 왕의 허물을 간하는 것이 충(忠)이고, 옳지 못한 명령으로 친구가 위험한 것을 막아야 의(義)입니다. 왕께서 두백을 죽이시면 천하가 모두 왕을 밝지 못했다고 비웃을 것이며, 왕의 밝지 못함을 간하여 막지 못했다고 해서 신의 불충을 탓할 것입니다."
왕은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찌 지체하느냐. 짐이 두백을 죽이는 일은 한갓 짚을 베는 거나 다름없도다. 무슨 잔소리가 그리 길더란 말이냐!"
끝내 왕은 명령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 무사들은 두백을 끌고 나가 참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좌유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유언한 후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자결했다.
"이제 머잖아 나라의 기운이 흩어지고 말리라. 나는 이를 경계하여 왕에게 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두백의 뒤를 이어 내 목숨을 던져 마지막으로 왕에게 충성하고 친구의 의리를 천하에 세우겠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모두 짐을 꾸려 먼 남쪽 땅으로 가거라. 그 곳에서 사람 살기가 그리 좋지 못한 강변에 자리잡아 새로운 땅을 개척하거라. 결코 벼슬을 탐하지 말고 한 뼘의 땅이라도 일구고 작물을 길러 살아가거라."
그래서 좌유의 아들 붕(朋)은 식솔들을 이끌고 주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다가 늪이 많고 아직도 황무지와 숲이 흩어진 이 곳 영상 땅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크게 될 인물
그날도 어김없이 노인은 밭일에 나섰다. 일곱여덟 살쯤 된 어린 소년과 함께였다. 날씨가 좋았고, 세상은 그야말로 평온했다. 무엇보다도 몇 년간에 걸쳐 해마다 사람들을 떨게 했던 전쟁과 징병 모집 이야기가 금년에는 전혀 없었다.
'작년과는 전혀 딴판인데.......'
작년의 늦은 봄에는 이 곳 영상 부락에까지 밀려온 전쟁의 발소리로 온 마을이 떨었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전긍긍하다가 병졸로 뽑혀가기도 하고 다행히 징병에서 면제되었더라도 언제 다시 병졸로 끌려 갈지 모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노인은 들판을 걸으면서 어린 손자 녀석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쥐었다.
"이오(夷吾)야, 걷기에 힘이 들지 않니?" 여덟 살 소년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뇨, 할아버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데요."
"허허, 녀석."
노인의 표정에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없이 대견스럽다는 듯 함빡 웃음이 넘쳐났다. 이 소년은 기실 노인의 외손자다. 노인의 사위는 관씨(管氏) 성을 가진 사내였는데 소년이 젖먹이였을 때 집을 떠났다.
"어차피 나중에 병졸로 끌려갈 바에야 낮은 벼슬 자리라도 얻어야 할 게 아닌가."
소년의 아비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훌쩍 가출한 것이다. 사람들은 노인과 뜻이 맞지 않은 탓이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 노인은 농사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위의 가출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땀흘려 일하기 싫으면 이 곳을 떠나라.」노인의 신조는 한결 같았다. 그러나 손자 녀석은 볼수록 마음에 쏙 들고 어딘가 달랐다. 생김생김이 복스러운 등근 얼굴에 원만한 모습이면서도 눈빛을 보면 마치 찌를 듯 내쏘는 것이 있었다.
'이 녀석의 자질에는 빛나는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다.'
노인은 하나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세월을 막연히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적이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운(運)을 믿고 몸을 맡기기보다는 한 번의 삽질이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노인이었음에도 손자와 함께 있다 보면 예감 비슷한 것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크게 될 자질이 있다.'
마치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릴 때 이번 농사는 큰 수확을 얻을 것 같다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농부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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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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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 Zoeker (the Seeker) windmill in Zaanse Schans, North Holland, Netherlands.] 위키백과 2011. 10. 그림을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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