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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77호
2022.6.2 (음 5.4)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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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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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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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지 않아도 그대로 굴러오는 것은 나이뿐. ―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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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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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어려움
누구든지 대화라는 말을 들으면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머리에 떠올린다. 커피 향이 퍼지고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곳, 그런 곳에서 웃음꽃이 피어나는 대화를 연상하는 사람은 분명히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대화의 실상은 싸움의 또 다른 실존적 모습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진지한 대화 한번 해보자고 하면 자칫 부부싸움이 되기 쉽다.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이 학생한테 대화 좀 하자고 하면 반갑기보다는 금방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반대로 학생이 선생한테 상담 한번 해달라고 해도 선생은 은근히 긴장한다. 현실적으로 해결이 잘 안되는 것이 대화의 의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사 간에 대화를 하다가 삐끗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여야 간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한번 대화하다가 말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금방 뉴스는 시끄러워지고 국회는 헛돈다. 온갖 휴전회담은 마치 전투를 재개할 핑곗거리를 찾는 대화처럼 보인다. 대화 중에서 가장 싸움을 하지 않는 대화는 상인들의 대화이다. 최선을 추구하지만 어려우면 차선도 마다하지 않는다. 차선이 어려우면 또 그다음을 찾아간다.
즐거운 축제는 지나가고 골치 아픈 대화의 시기가 돌아왔다. 남과 북의 대화도 잘해 나가야 한다. 우리와 자손들의 명운을 가르는 만남이다. 미국과의 무역 문제도 의미 있는 대화로 풀어나갔으면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과도 피할 수 없는 대화의 쟁점들이 남아 있다. 우리의 자존심과 공동체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큰 욕심 내지 말고, 이익을 서로 나누도록 하며, 아무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는 지혜로운 타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대화에서의 이익이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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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하기
한때 ‘칭찬합시다’라는 방송 프로가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 학교나 회사에서는 ‘칭찬 릴레이’라는 것이 조직 내 분위기를 훈훈하게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 모두 칭찬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확실히 칭찬은 격려와 응원의 동력이 되는 게 사실이다.
‘칭찬’이라는 행동의 구조는 참으로 흥미롭다. 먼저 칭찬할 만한 행위를 찾아야 한다. 착한 일을 했다든지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낸 사람에게 그 행위의 가치를 높이 기리는 말을 해 준다. 좀 과장을 해도 절대 무례한 일이 아니다. 그럼 거의 예외 없이 칭찬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낮추며 겸양을 나타낸다. 그러면 또다시 칭찬을 퍼붓는다. 그리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겸양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칭찬이 가져오는 일종의 긴장 국면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말다툼의 양상하고 거의 비슷한 긴장감도 감돈다.
그렇게 칭찬과 부정이 반복되며 팽팽한 긴장이 임계점에 이르는 순간 칭찬받는 사람이 그 칭찬을 수용함으로써 팽팽함이 끝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우호 관계는 더 돈독해진다. 이것이 칭찬 활동의 구조인 동시에 칭찬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미치는 영향이다. 칭찬은 사회적으로 유대감을 강화하는 매우 귀중한 언어활동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국제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보기 드물게 우리의 외교 활동이 강대국들의 바둑판을 흔들어 놓았다. 백여년 동안 바둑판에서 흔들리기만 하던 우리 남과 북이 참으로 재치있게 칭찬의 한 수를 함께 놓았다. 한동안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의 말다툼 구조에서 절묘하게 칭찬의 구조로 갈아탄 것이다. 이젠 바야흐로 고래들이 춤출 차례이다. 그리고 우리는 고래들의 춤을 구경할 순서가 된 것 같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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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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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煙氣) - 김수영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선수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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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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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모호치(明眸皓齒) / 눈동자가 맑고 이가 희다는 뜻으로, '미인'을 형용하는 말.
《出典》杜甫의 詩 '哀江頭'
안록산(安祿山)이 난리를 일으켜 낙양(洛陽)이 함락된 것이 755년, 두보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그해에 두보는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을 처자에게 통고하기 위하여, 당시 소개(疏開)되어 있는 長安 근처의 봉선(奉先)으로 갔다. 도적들의 수중에 있는 長安에서 봄을 맞이한 杜甫는 남몰래 江頭를 찾아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이 江頭를 슬퍼하며, 목소리를 삼키고 울면서 이 <哀江頭>란 시를 지었던 것이다.
밝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피로 더러워진 떠도는 혼은 돌아가지를 못하네.
맑은 위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은 깊은데,
蜀나라로 끌려가 사니 피차간 소식이 없네.
인생은 情이 있어 눈물이 가슴을 적시니,
강물에는 강꽃이 피니 어찌 마침내 다함이 있으랴.
황혼에 오랑캐 기마들은 티끌로 城을 채우는데,
城 남쪽으로 가고자 하여 城 북쪽을 바라보네.
明眸皓齒今何在 血汗遊魂歸不得
淸渭東流劍閣深 去住彼此無消息
人生有情淚沾臆 江水江花豈終極
黃昏胡騎塵滿城 浴往城南望城北
여기에서 '明眸皓齒'라고 한 것은 楊貴妃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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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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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가판대 아저씨 - 진형준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을 돕는 마음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
월요일 아침은 항상 허전하다. 매일 아침, 별 신통한 기사가 없는 줄 알면서도 부리나케 펼쳐 보는 신문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허전함을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가두 판매대에서, 월요일 아침에도 쉬지 않고 발간되는 스포츠 신문을 사는 것으로 메우곤 한다. 꾀죄죄한 얼굴에 꾀죄죄한 옷, 거기다 꾀죄죄한 손으로 건네주는 가판대 아저씨의 인상이, 그 꾀죄죄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따사로워보임은 웬일일까? 하기야 하찮은 130원짜리 신문 한 장을 사면서, 사는 사람의 송구스러울 정도로 아저씨로부터 꼬박꼬박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기는 했었다. 처음에는 속으로 '신문 한 부 가지고 뭘 그러시나?' 정도로 생각하며 무심코 그 인사를 넘겨 버렸었다. 그러나 매번 그런 인사를 받게 되자 요즈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줄곧 아저씨의 행동을 살펴볼 정도로 관심이 깊어졌다.
가판대 옆에 자그마한 의자가 있는데도 아저씨는 거기에 앉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신문, 성냥, 주간지, 껌, 사탕 몇 종류 등 그냥 하찮게 펼쳐 놓은 것 같은 물건들을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수시로 털고 닦고 하는 것이다. 그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저 아저씨 하루 매상은 얼마나 될까, 한 달 수입은 얼마나 될까 식으로 금전적인 문제만 궁금해 하던 내가 부끄러워지곤 한다. 그날 아침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아저씨의 부지런한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도착한 버스에서 웬 아줌마가 내리더니 그대로 구토를 하고는, 기진한 듯 가로수에 기대어 쓰러져 버렸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 행인들은 그 광경에도 그냥 무심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먼지털이를 가판대 위에 던지더니 그 아줌마에게 다가가 등을 쓸어 주며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아마 병원에라도 데려다 달라고 했는지 아저씨는 그 아줌마를 들쳐 엎고는 가판대를 팽개쳐 둔 채 성큼성큼 뛰어가기 시작했다. 혀를 끌끌 차면서. 그래, 저게 사는 거야. 그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하찮은 내 일상이 자꾸 부끄러워짐을 어쩔 수 없었다. (홍익대 불문과 교수)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 이수광
그 무렵 우리가 세들어 살던 옆방엔 공단의 여공들이 여러 명 자취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작업을 마치고 주인집 옥상에 올라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대개는 고향 얘기였지만 그녀들은 열악한 작업 현장의 얘기라든지 밀린 봉급 얘기, 야근을 할 때 졸지 말라고 바늘로 여공들을 찌르는 작업 반장의 얘기를 하곤 했다. 그 여공들 중에 시골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늘 단발머리를 하고 낯빛은 창백했다. 그러나 병적이리만치 창백한 얼굴 모습과는 딴판으로 언제나 쾌활하고 마음 씀씀이가 착했다. 다른 여공들과는 달리 한가할 때는 우리들의 작업복을 빨아 주기도 하고 남자들끼리 밥해 먹는 것이 딱해 보였는지 손수 밥을 지어 주거나 밑반찬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소녀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다고 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소녀는 어머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오빠의 학비도 보태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의 오빠는 의과 대학생이어서 졸업을 하면 의사가 된다고 했다. 그 소녀는 오빠가 대학교를 졸업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하루의 일과가 조금도 피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앓기 시작한 것은 그해 장마가 한창일 때였다. 우리는 그녀가 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그녀의 얼굴이 퉁퉁 부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녀가 자기의 몸이 아픈 것을 숨기고 있었던 탓이었다. 어느 일요일, 우리는 옆방의 여공들과 함께 돈을 모아서 과일 꾸러미를 사들고 그녀의 병문안을 갔다. 뜻밖에 그녀의 병세는 위중했다. 얼굴이며 온몸이 퉁퉁 무어 있었을 뿐 아니라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병문안 온 것을 몹시 고마워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억지로 눕게 했는데 그래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하루 빨리 일어나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병실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대학생인 그녀의 오빠와 어머니가 계셨다.
그녀가 잠이 들자 그녀의 오빠는 그녀가 자기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서 라면 두 개로 하루의 끼니를 때운 적도 있다고 했다. 지난 겨울 모처럼 동생이 자취하는 방을 찾은 그는 한눈에 그녀가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 흔한 링거 주사 한 번을 뇌주지 못하고 게란 두 줄을 사서 놓고 나올 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고 울먹였다.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그녀는 꽃다운 나이로 고달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걸린 병은 영양실조 아니라 납중독이었다. 그녀가 다니던 공장은 납을 많이 취급하는데 공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태양이 중천에 떠서 이글거리고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웠던 그날, 그녀의 오빠가 그녀의 셋방을 정리하기 위해 왔다. 그녀는 소지품도 단출했다. 앉은뱅이 책상 한 개와 몇 권의 책, 비키니 옷장 하나가 그녀의 소유품 전부였다.
우리는 그녀의 오빠가 짐 정리하는 것을 돕기 위해 그 방에 갔는데 주인 없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글귀가 서툴게 쓰여진 흰 종이가 초라하게 붙어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다섯 글자를 읽는 순간 나는 갑자기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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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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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몸은 언제나 꼿꼿이 가지자
사람이 저를 아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할 것은 몸 생김의 뜻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모든 형상은 뜻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보뜬 것이요, 발이 평평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라 한 말이 웃을 말이 아니다. 눈, 코, 귀, 손, 발이 다 쌍으로 된 데도 뜻이 있어야 할 것이요, 육체적 생명의 근본 되는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과 정신적 생명의 양식인 말이 나오는 것이 한 구멍으로 되었고, 더러운 찌꺼기를 내보내는 것과 새 생명의 창조를 하는 것이 역시 하나로 되어 있다는 데도 반드시 무슨 뜻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그만두더라도 사람이 두 발로 꼿꼿이 서게 생겼다는 것만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사람에게서만 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매양 그 여럿 속에 공통된 점을 들어 힘써 말하나, 사실 의미있는 것은 여럿 속에 공통되어 있는 점보다 그 어떤 것에만 독특하게 있는 점에 있다.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 처음이 어떤 것을 따라 나중 결과가 결정되는 것은 물질에게서 하는 말이고 정신의 세계에 들어오면 달라진다. 그와 반대로 목적되는 것이 먼저 있어서 그것에 따라 그에 앞선 것들이 결정된다. 정신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목적이 처음부터 들어 있는 운동이다. 두 발로 일어선 것은 사람만이라면 그것은 나중에 나타난 현상이니만큼 처음부터 그 목적이 생물진화의 긴 역사 속에 들어 있었다고 보아야 옳은 일이다.
사실 생물의 신체구조의 변천을 단순히 환경의 변천에 대해 맞추어감으로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나, 마지막에 일어서자는 목표를 둔 운동으로 보면 환히 풀려나가는 것이 있다. 아메바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관한 계통 있는 운동이다. 물론 그 계통이란 우리의 의식작용같이 요렇게 작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의 의식은 놀랍지만 정신 전체에서 보면 그리 큰 것이 아니다. 의식은 정신의 옅은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는다. 근래의 심리학은 사람의 인격의 고갱이가 되는 것이 의식보다는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잠재의식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것은 할 수 없이 붙이는 이름이다. 의식은 정신의 일부이지만, 그것으로 전체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식할 수 없다고 정신 아닌 것은 아니다. 일관한 계통이 있다는 것은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다. 분명히 설명은 할 수 없으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목적이 있다고 가정하면 여러 가지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으나, 없다고 하면 점점 더 풀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두 발로 일어서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위험한 일이요 무리한 일이다. 무슨 환경이 그런 것을 요구했을까? 무턱대고 변천되어가는 환경에 임시 임시 맞추어가잔 것 아니라 목적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서도, 모함을 하면서도 그리 내몬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기가 완전히 서기 되기까지에 얼마만한 고생을 하나? 두 발로 서는 인간을 하나 내기 위해 생물 전체는 억천만 년에 걸쳐 얼마만한 희생을 냈는지 모른다. 그럼 그 처음부터 잠재하여 있는 목적이란 무엇인가? 다른 것 아니고 두골의 발달이란 것이다. 두골의 발달과 일어서는 것과의 사이에는 깊은 관게가 있다. 동물에서 보아도 몸이 땅에서 떨어질수록, 곧추서는데 가까워올수록 두골이 커간다. 사람도 두골이 등뼈 위에 똑바로 와서 놓인 때에야 맑은 생각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다가 허리와 목의 생긴 것을 겸하여 생각해보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 허리와 목은 잘록하게 늘어졌다. 모양 내는 여자는 허리를 가늘게 하여 곡선미를 낸다 하고 목을 날씬 빼어 아양을 부리기에 쓰지만, 사실 뜻을 말하면 그렇게 쓰란 것 아니다. 그것은 두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두 발로 곧추 일어서 백 근 넘는 몸을 늘 고이고 있자니 늘 불안정이다. 또 쉬지 않고 걷고 달려야 하니, 언제 어떻게 거꾸러질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허리를 잘록하게하여 운동이 자유자재하여, 어느 때 넘어져도 몸의 위 절반을 일으켜 부딪치지 않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래야만 가슴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내장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두골이다. 그러므로 목에서 또 한 번 잘록하게 하여 그것을 보호한 것이다.
사실 우리 몸이 나무통같이 생겼다면 두골이 벌써 언제 깨졌을지 모른다. 다행이 허리와 목이 잘록한 탓으로 그것을 면하여 왔다. 그래서 일의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할 때는 요령이라 한다. 요는 허리요, 령은 목이다. 꼿꼿이 서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살림을 바로잡으려면 그것부터 해야 한다. 설 때면 두 다리에 힘을 꼭 주고 서서 휘청휘청 밖에서 오는 힘에 밀려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서지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하늘 땅 사이에 “나는 나다”라고 서야만 사람이다. 자주독립니다. 사람이란 하늘 땅을 연락을 시키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힘이 내 발로 올라와 머리를 통해 저 까만 하늘에 뻗는다 하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 그래 1만 5천 리 지구 중심까지 울림이 내려가도록 힘있게 디디고 서자는 것이다. 또 앉을 때면 산처럼 부동의 정신으로 앉아야 한다. 그러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 한다. 옛사람들은 거기를 기해라, 단전이라 해서 정신수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다.
기해란 원기의 바다라는 말이요, 단전이란 약밭이란 말이다. 옛날 사람이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하겠다고 약을 많이 찾은 일이 있는데, 그 신선되는 것이 다른 데 있는 것 아니요 이 아랫배에 정신을 모으는 데 있다 해서 하는 말이다. 알약을 가지고 단이라 한다. 그래서 될수록은 눕지 말자는 것이다. 눕는것은 맥이 풀린 것을 뜻한다. 아무리 괴로워도 자는 때, 아픈 때를 제하고는 눕지 말도록. 지금은 문명이 발달한 대신 사람들의 정신의 힘은 척 약해졌다. 10리를 가도 꼭 타고만 갈 줄 알고, 앉는 것도 부족해 안락의자나 소파를 만들어 가지고 반은 누워서 살려 한다. 그렇게 편리만을 따르고 어려움을 견디어 정신을 기르자는 생각을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졌고, 마음이 약하므로 인정이 얇아진다. 우리가 새 역사를 지으려면 어려움을 많이 당해야 할 것인데, 어려움에 견디려면 평소에 꿋꿋이 서는 정신을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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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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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필명의 화
나는 1952년부터 원래 이름 박인희(후박나무 박, 어질 인, 빛날 희)와는 별도로 글을 발표할 때는 언제나 박이문(후박나무 박, 다를 이, 내 이름 문)이라는 필명을 써오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물론 본명을 썼다. 1957년 이래 이화여대 불문학과 창설과 때를 같이하여 나는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불문학과 시간표에 나타난 내 이름은 필명이 아닌 본명이었고, 학생들은 본명 박인희로만 나를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나는 장학금 유학의 기회가 생겨 일 년 동안 파리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 문학은 가장 화려하고, 파리 문화는 가장 우아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곳은 모든 이들, 특히 젊은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불문학 교수는 멋이 있을 것이며, 파리서 불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남자 교수는 불문학을 전공하는 여대생들에게는 더욱 그렇게만 생각되었다.
한 해가 지난 후 내가 파리에서 귀국하기 얼마 전, 이학기초에 교내 신문인 '이대학보'는 본명 '박인희' 대신 필명을 써서 "파리 유학에서 돌아올 박이문 교수가 10월부터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했다. 몇몇 여학생들은 그 교수가 어떤지 궁금했고, 큰 기대를 갖고 그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미 겨울이 왔다. 신문 기사대로 나는 벌써 두어 달 전부터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학생들에게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몇몇 학생들, 각별히 낭만적이었을 아니면 각별히 감상적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 여학생에게는 이상하기만 한 일이었다. 멋쟁이임에 틀림없을 파리에서 오기로 된 '박이문' 교수는 온다는 때가 훨씬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일 년 전에 가르쳤던 그러나 어디를 봐도 시골뜨기 같은 '박인희' 교수만이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여학생을 비롯한 몇몇은 몹시 궁금해졌고, 이상하게 생각되었고 약간은 초조함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그 학생은 이렇게 된 영문을 알게 되었다. 본명인 박인희와 필명인 박이문이 바로 동인이명(한가지 동, 사람 인, 다를 이, 이름 명)이라는 것이다. 그의 실망은 컸다. 그가 상상 속에 그렇게도 믿었던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멋쟁이 박이문은 존재하지 않고, 아무리 봐도 시골뜨기인 박인희만이 실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 일 년 살면서 바게트, 치즈, 포도주를 얼마 동안 즐기고 왔다고 해서, 파리의 멋쟁이들 틈에서 지냈다고 해서 원래 못생긴 나의 얼굴이나 체구가 바뀌어 미남자가 될 수 있겠는가. 멋쟁이 보들레르나 우아한 베를렌의 시를 몇 줄 더 외우고, 프루스트의 귀족적 세계나 말로의 멋있는 삶의 모험을 좀더 배웠다고 해서 나의 촌스러우리만큼 털털하고 소박한 천성이 쉽게 바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파리에서 돌아온 후에도 내 머리는 만화의 주인공 대그우드의 머리처럼 텁수룩하고, 구제품 시장에서 구해 걸친 양복은 파리는커녕 일본에도 가보지 못하고, 불문학은커녕 소설 한 권 읽어보지 못한 듯했다. 또한 내가 신은 양말은 늘 빵꾸가 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이 내가 학생들에게 준 실망의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알고 있다.
그러나 내 필명으로 인해 내가 학생들에게 그토록 실망을 주었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몇 달이 더 지나서 학생들과 더불어 놀던 기회에 바로 그 한 학생이 '박이문'에게 실망했던 얘기를 내게 해주었을 때,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남이 못 된 것을 사춘기부터 괴롭게 여겨왔던 터라 나는 약간 마음이 쓰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털어놓은 그 학생이 고마웠다. 그것은 그의 나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십에 가까워진 옛날의 그 학생은 지금 한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 35년 만에 그 제자를 다시 만나 약 40년 전에 나의 필명 때문에 있었던 그 에피소드를 함께 다시 회상하면서 이미 백발이 된 나와 할머니가 된 나의 제자는 실망과 쓰라린 쑥스러움이 아니라 즐거운 폭소를 나눌 수 있었다.
산
"지자낙수(알 지, 놈 자, 즐길 낙, 물 수) 인자낙산(어질 인, 놈 자, 즐길 낙, 뫼 산)," 공자의 말이다. "지혜로운 이는 바다를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는 지자인 동시에 인자가 되고 싶다. 지자도 아니며 인자도 못 되지만 나는 바다도 좋아하고 산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중 꼭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산을 택할 것이다. 나는 산을 좋아한다. 특히 녹음이 짙은 산을 좋아한다. 나는 벽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지금 돌아가 보면 야산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려서 산과 가까이 살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산을 각별히 좋아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산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소년 시절 고향 산천을 떠나 줄곧 서울, 파리,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보스턴 같은 대도시에 살면서 나는 산을 잊고 있었고 산에 대한 향수를 새삼 느끼지도 않았다. 항상 각박하게 닥쳐오는 눈앞의 문제에 가려 멀리 산을 바라보고 감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나는 산을 새삼 발견하고 그것에 마음이 끌리게 됐다. 석조(돌 석, 지을 조)의 숲과 같은 파리에서 몇 년, 그리고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년을 보낸 다음, 내가 처음으로 객지에서 교편을 잡게 된 직장을 좋아했던 이유의 하나는 그 대학이 녹음이 울창한 북부 뉴욕 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주말이면 한두 명의 친구와 내가 오래 살고 있던 보스턴 근처의 짙은 숲과 높은 산 속에서 별 목적도 없이 시간을 보내며 그저 흐뭇함을 느꼈다.
얼마 전 3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교편을 잡게 된 지금이 고장이 아담하고 푸른 산들로 둘러싸인 시골이라는 점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을 느낀다. 처량하리만큼 헐벗었던 조국의 산들도 이제는 제법 푸른 숲에 덮여 있음을 확인하면서 한없이 흐뭇함을 느낀다. 일요일 오후면 아무 계획도 없이 어울리게 되는 이곳 대학의 동료들과 기분 내키는 대로 이 주변의 토함산, 남산, 운제산, 보경사, 오어사 등을 몇 시간 오르고 내리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산은 푸르다. 아니 꼭 푸르러야만 한다. 푸르지 않은 산은 생각할 수 없다. 산은 푸르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푸르름은 생명을 상징한다. 그저 생명이 아니라 삶의 풍요를 뜻한다. 나날이 도시화되고, 기계화되며 그만큼 건조한, 이른바 문명 생활에 찌들고 피로한 현대인에게 푸른 산은 생명과의 재회를 마련해주고 정서의 휴식처를 마련해준다. 산의 푸르름은 그냥 푸르름이 아니다. 크고 작은 나무, 잡목, 다양한 풀들이 서로 엉키고 의존하며 붉은 흙에서, 바위틈에서 다투어 솟아나고 다 같이 하늘을 향하여 자란다. 나뭇가지와 풀잎들을 헤치고 오솔길을 따라 그늘진 숲속을 거닐거나, 산언덕을 올라가면 바위틈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있다. 인간이 그 동안 그렇게도 짓밟아왔던 자연과 다시 만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된다. 푸른 산은 자연과의 재회를 의미하며 그러한 재회는 오로지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고향임을 일깨워준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며,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원천이며, 인간은 자연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고, 자연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참다운 휴식과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산의 유혹은 원천적 고향에 대한 향수에 기인한다. 힘에 겨운 다리를 격려하고 가쁜 숨을 내쉬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우리는 다 같이 시지푸스가 된다. 있는 힘을 다해 산정에 올려놓은 바위가 다시 밑바닥으로 굴러내려오면 다시 그 작업을 되풀이해야 했던 시지푸스처럼 어렵게 올라간 산정에서 우리는 산 밑 판판하고 시시한 마을로 다시 내려와야만 한다. 그러나 시지푸스가 자신의 노고가 허사로 되고 마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어려운 노력을 하는 행위 자체에 무한한 보람을 느꼈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절정에 오르려는 노력 자체에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삶의 충족감을 체험할 수 있다.
산꼭대기에 다리를 디디고 섰을 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감에 가슴이 흐뭇하다. 오르기가 험난했던 등산일 경우 더 그렇고 산정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그러하다. 산정에 서면 마치 하늘에 올라온 듯하다. 내 눈앞에 시야가 한없이 넓게 퍼진다. 나의 세계가 그만큼 커진다. 하늘이 맑은 날이면 몇십 리 멀리 작은 마을은 물론 큰 도시들도 무릎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산정에 올라와서 나는 지금까지 살고 있는 마을에서의 나의 삶의 위상을 더 넓은 테두리에서 파악하고 그 올바른 의미에 눈을 뜰 수 있다. 그럼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금이나마 겸허해질 수 있다. 자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지금까지 내가 갇혀 있던 좁은 세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더 넓은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산이 내 마음을 끄는 무엇보다도 더 큰 이유는 그곳이 명상적 고장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숲이 짙고 계곡이 깊은 산에서 우리는 비로소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산에서는 누구나 명상가가 되게 마련이다. 한국의 대부분 옛날 절들이 도시나 마을에 있지 않고 깊은 산 속에 있게 된 사실은 그 이유나 원인이 어디에 있든간에 퍽 다행이다. 그것을 우연한 역사적 결과로 친다 해도 퍽 적절하다. 명상적이 아닌 불교의 세계는 진정한 불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인간은 자신의 원래적 고향인 자연을 버렸다. 이제서야 인간은 그 결과로 견딜 수 없는 삭막한 도시의 소음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산은 자연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산이 그리워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산에 가고 싶어진다. 산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발견하고 산에서 삶의 풍요를 느끼며 산속에서 잃어버린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다시 찾는다.
산은 맑고 깊고 의젓하고 조용한 삶의 뿌리를 상징한다. 그곳은 이른바 문명의 오염에 시달린 생명의 마지막 휴식처이며, 인간의 맹목적인 욕망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생명의 마지막 피신처다. 이것은 지구상에서 소멸해가는 많은 생명체들의 마지막 남은 삶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산에 대한 향수는 그만큼 진지하고 절실하다. 지구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으로는 산만이 남았다는 느낌이다. 나는 산을 정말 좋아하게 됐다. 내가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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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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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3장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여든일곱번째 이야기 - 들개
옛날에 먹는 것에 유난히 욕심이 많은 들개가 있었다. 그 들개는 항상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들개가 염색공장에 들어갔다가 그만 남색 물감통에 빠지고 말았다. 들개를 발견한 염색공장 주인이 화가 나 들개를 끄집어내 밖으로 집어던져버렸다.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들개의 몸에는 온통 흙먼지가 묻게 되었다. 들개는 더럽혀진 몸을 씻기 위해 강으로 가 목욕을 한 후 둑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들개의 털은 여전히 남색을 띤 채 빛났다. 다른 들개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가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제석천왕이 보낸 사자다. 천왕께서는 나를 백수의 왕으로 임명하셨다."
남색을 띤 들개는 술술 거짓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에 여러 들개들은 생각했다.
'모습은 들개가 분명한데, 털은 우리와 다르단 말이야.'
들개들은 사자에게 가서 자기들이 들은 이야기를 보고했다. 사자는 또 사자왕을 찾아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사자왕은 부하를 보내 사실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사자왕의 부하가 가서 보니 남색 들개가 커다란 흰 코끼리 위에 앉아있고 뭇 짐승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백수의 왕을 시봉하는 것 같았다. 부하는 사자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본 광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보고를 들은 사자왕은 자신의 여러 부하들을 이끌고 뭇 짐승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랬더니 소위 '들개왕'이 흰 코끼리를 타고 있고 그 주위에 여러 들개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게다가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들도 그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새끼 들개들은 멀리 한쪽 편에 물러서 있었다. 사자왕은 몹시 기분이 나빠 이 들개의 진상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자왕은 들개 무리 중에서 한 마리 들개를 뽑아 들개왕의 어머니를 불러오게 했다 들개왕의 어머니가 물었다.
"내 아들이 그곳에서 어떤 동물들과 함께 있느냐?"
"아드님 주변에는 사자와 호랑이, 코끼리 등이 있습니다. 저는 멀리서서 바라만 볼 뿐입니다."
"네가 가면 분명히 내 아들을 해치고 말겠구나."
들개왕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산 속에 사는 것이 너무 즐겁다네
마음대로 물도 마시고 쉬기도 한다네
네가 들개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내 아들은 코끼리등 위에 있는 한 아무 일 없으리."
들개왕의 어머니를 만나고 온 들개는 다른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백수의 왕이 아니라 바로 들개라구. 나는 내 눈으로 산 속에 있는 저 녀석의 어머니를 직접 봤단 말이야."
그러자 동료들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시험해보자."
그들은 '백수의 왕'으로 자칭하는 들개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런데 들개에게는 그들만의 특이한 전설이 있었다. 만일 한 들개가 울었는데도 다른 들개가 따라 울지 않으면 그 들개의 털이 모두 빠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들개왕'을 시험해보고자 들개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고, 뒤이어 나머지 들개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이에 들개왕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따라 울지 않는다면 털이 몽땅 빠지고 말텐데... 그렇다고 코끼리 등에서 내려가 운다면 내가 들개인 줄 알고 분명히 다른 짐승들이 나를 죽이고 말 거야. 차라리 여기 코끼리 등위에서 우는 게 낫겠다.' 그래서 들개왕은 코끼리 등위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코끼리는 등위에 있는 녀석이 평범한 들개임을 알아채고 곧장 코로 등위에 있는 들개를 붙잡아 땅바닥에 패대기를 친 후 밟아 죽여버렸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
여든여덟번째 이야기 - 부자와 악사
아름다운 곡만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한 악사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어느 부잣집에 가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 부자는 악사의 재능을 인정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악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자신에게 소 한 마리를 선물로 달라고 했다. 부자는 악사의 연주는 높이 샀지만 소를 주려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 년간 음악을 연주한다면 소를 주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음악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악사는 신이 나서 정성을 다해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음악을 연주했다. 부자는 밤낮없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그만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결국 부자는 하인에게 소를 끌고 오라고 해서 악사에게 줘버렸다.
<잡비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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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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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최명희
“그때가 아조 더운 여름이였는디, 영쇠가, 더워서 그랬등가, 어디로 안가고 여그 눌러 있었제. 하루는 매안으 어뜬 댁이서, 갖신 지어 오니라, 헝게는, 예, 그러고는 하나 잘맹그렁서 갖다 디리고 내리오는 질이었겄다. 시원헌 대청마룽에 덩그렇게 울라앉은 양반을 뵈입고 내리오는 질인디, 여그 오자먼 왜 아랫몰 모퉁이에 다랭이 있잖드라고? 손바닥만헌 논 말이여. 거그서 어뜬 알 만헌 양반 하나가 논바닥에 꾸부리고 지심을 매고 있드란 말이여? 저거이 누구냐, 허고 가찹게 가 봉게 대체나 아는 양반이여.” 그는 매안의 문중에서도 형세가 몹시 빈한한 방죽골양반이었다. 그래서 그 당랑이나마 방죽골양반의 전 재산이었던 것이다.
“샌님.”
“왜 그러는가?”
“멋 허시오 예?”
“보면 몰라서?”
“아이고, 더운디 먼 지심을 혼자 그렇게 매고 지싱가요?”
“암만 더워도 일을 해야지, 내가 안허면 누가 해?”
“양반이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림서 지심을 맹게 왜 우습소예.”
“별 소리를 다 허네. 양반이라고 여름에 더운데 땀을 안 흘리는가?”
“논 안 매먼 땀도 안 나지라우.”
“종이 있어야지.”
“저 원뜸으로 강게 시원헌디 좋게 앉었든디, 샌님도 그러고 앉어 기시먼, 샌님도 안 더웁고, 다른 사람 눈에도 좋아 뵈일 거인디요.”
“그 집은 부자고, 나는 가난허니 서로 여름 지내는 것도 다르지.”
“샌님.”
“왜 또 불러?”
“저 좀 따러오실라요”?“
“일허다 말고 어디를 가?”
“제가 봐둔 묏자리가 한 자리 있는디 일러 디리먼 쓰릴라요? 아 이렇게 더운디, 같은 양반으로 나서 누구는 좋게 살고, 누구는 놉도 없이 지심 매서 어디 쓰겄능교? 샌님이 평소에 저를 백장것이라고 하대 안허시고 저 같은 것 말대꾸도 해 주신 정리를 생각고, 아무한테도 말 안헌디 하나 일러 디리먼, 저를 믿고 쓰실랍니까?”
영쇠가 이끄는 대로 손에 쥔 풀을 놓고 논에서 나온 방죽골양반은 이윽고 한 곳에 이르렀다.
“산천으 꽃은 형아닝기요. 이 혈이 정기를 낳는디, 꽃이 한 가닥 가지에 의지해서 피었다고 허드라도 그 피어난 자리에 따라 탐스럽기도 허고 안 그렇기도 허잖에요? 샌님, 제가 봐둔 디가 사실은 두간디가 있그던요. 한 간디는 지금 바로 발복을 허는, 당대 발복멩당이고, 다른 한 간디는 좀 더 뒤에 후손 발복이라, 샌님 생전에는 그저 끄니 걱젱이야 않겄지만 벨 효력은 없고요. 샌님은 어디다가 쓰먼 좋으시겄능가요?”
“후손 발복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나 되는 후손을 말허는가?”
“한 삼백 년 뒤에 오는 후손이지요. 제세 인물이 나고, 한 나라를 다스릴 만헌 자손이 나오는 자린디요.”
“당대 발복이라면 어느 정도고?”
“샌님 당대에, 한 삼백 석 추수는 실허게 허실 거입니다. 그런디, 여그는 샌님 한 대에만 그렇게 발복허시고 바로 끝나는 자리지요.”
“삼백 석이면 적은 곡식이 아닌데, 내 당대에 그만큼 일어난 살림이 라면 못 가도 삼대는 내려가지 않겄는가.”
“여그가 조리 멩당이그던요.”
“조리 명당?”
“예. 왜 쌀이나 보리 일어 먹는 그 조리요.”
“조리 명당은 왜 당대 발복으로 끝나는고?”
“암만 수북허게 쌀을 일어 담어도, 가득 차먼 쏟아내 버리능 거이 조리 아닝교? 그것허고 같은 이친디요, 샌님, 지금 저어그 저 산 말랭이 능선이 뵈이시지요? 저그서부텀 바로 요 앞으까지 쭈욱 뻗어내린 기운이, 저 맥이 조리 자루고요, 지금 서 잇는 여그는 조리 바닥인디요. 샌님이 지금 형편이 궁허시니 바로 발복허실 자리로 뫼시고 오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봉게, 삼백 년 후에고, 삼천 년 후에고, 내 속으서 난 내 후손이라먼 다 내 몸이나 한가지라, 차라리 기왕으 일러 디릴 바에야 한 나라를 다스릴 만헌 인물을 샌님 후손에서 나오게 해 디리먼 어쩌겄능가 싶어지등만요. 어쩌실라요?”
방죽골양반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한참 만에 말했다.
“지금 당장 밥해 먹을 쌀도 없는데, 언제 삼백 년 뒤에 오는 후손 발복을 기다릴꼬.”
그런 후손이 내 핏줄에서 나온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애석한 마음을 떨어버리고 샌님이 하는 말을 들은 영쇠는
“알었습니다.”하더니 땅에 귀를 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소를 머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샌님, 이리 와서 이 소리 좀 들어 보겨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아니, 산중의 땅 속에서 무슨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참 소리 좋다. 이게 맥을 바로 짚었다는 증거지요.”
“어디?”
영쇠처럼 귀를 땅에 댄 방죽골양반은, 저 알 수 없는 신령스러운 곳에서 은밀하게 울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톰방, 톰방. 그것은 참으로 맑은 소리였다.
“아이고, 그렁게 소코리나 조리에 쌀 일어서 두먼 물 떨어지능 거이나 같은 거이지요? 그래서, 방죽골양반은 영쇠가 일러 준 디다가 참말로 산소를 썼당가요?”
“썼제, 방죽골양반 아부님 산소를 그리 이장해 디렸제.”
“그 말대로 되얐대요?”
“하먼, 그렁게 멩사라고 안허능게비.”
“그렁게, 당대에 삼백 석 추수를 바로 했드란 말이요?”
“하아, 남노여비를 거느리고 호제끄장 두었드래.”
“아이고, 그러먼, 또 그 당대에 참마로 조리쌀 털어 내디끼 그 재산을 다 엎어 부렀으까요?”
“방죽골양반 살아 계실 때까지는 그대로 했제잉. 그러다가 그 아들대에 어찌 어찌 스름스름 다 없어지고, 나중에는 그 다랭이 논 한 마지기만 남었드라네.”
“아이고, 아까워라. 한 재산 이룬 거이 무신 꿈꾼 것맹이였겄네요.”
“그렁게 말이여.당대에 잘 먹고 살다 갔응게 그것만으로도 고생헝것보다는 갠찮지마는, 그래도 삼백 년 후를 기약해 두었드라면 그것도 갠찮했을 거인디.”
공배는 볼따구니가 우묵하게 들어가도록 담배를 빨아들이며 그렇게 말했다. 단 하나 어린 것도 무릎 아래 두지 못한 공배는, 삼백 년 뒤의 후손을 바라본다는 호사는커녕, 지금 당장 자신이 죽으면 제삿밥을 챙겨 줄 자식 하나 없는 것이 새삼 한심하였다. 그 공배의 심중을 헤아린 공배네는 얼른 눈짓으로 사람들을 보내고 말았었다. 그것이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하루하루 뼈는 늙어가고, 아무 이루어 놓은 것 하나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처량하여 공배네는, 같이 걸어가는 평순네에게
“그래도 이승이 더 좋은 것일랑가.”하고 말을 붙였다. 평순네는 대답 대신 함숨을 쉬며, 지금 막초혼 고복을 하고 있는 인월댁의 서럽고 긴 목소리를 바람결에 귀기울여 듣는다.
청아암 부이인 보오옥.
차갑게 끼쳐드는 바람이 옷갈피로 파고든다. 그 파고드는 바람에 인월댁의 삼키는 울음 소리가 묻어 있다. 평순네는 고개를 들어 노적봉의 캄캄한 산마루를 올려다보았다. 먹빛으로 쏟아질 것 같은 그 산마루 저 너머로, 어둡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희부윰한 기운이 드리워진 하늘이, 가 본 일 없는 다른 세상 어디론가 그 자락을 아득히 펼치고 있었다. 저 너머가 저승일랑가. 그네는 얼핏, 그 노적봉 산마루 어디쯤으로 청암부인이 아무도 없이 홀로 고적하게 가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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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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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지도. 1913년 출판된 베데커 여행 안내서..]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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