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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월계관을 선생님께
무선전신을 발명한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1874-1937)에게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실화가 전해져 옵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태어난 마르코니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지고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열두살 때에 벌써 유명한 과학자인 어거스트 리기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르코니가 리기 교수의 실험실에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이상한 기계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일어 그 기계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리기 교수가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말했습니다.
"마르코니,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지."
리기 교수가 이렇게 말하며 기계의 스위치를 돌리자 찌직하는 소리를 내며 전기의 불꽃이 두 개의 진공관 사이를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과학자 헬쯔가 발견한 전파야. 전기가 공중을 뛰는 원리지."
리기 교수의 설명을 들은 마르코니는 전파의 원리에 대한 놀라움으로 인해서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것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 지금까지의 전신은 쇠줄로 보내는 것인데, 전파라는 것이 공중을 뛰는 원리라면 쇠줄 없이도 전신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이러한 생각을 리기 교수에게 말했습니다. 리기 교수는 어린 제자의 생각에 다소 놀랐고 대견스러워했으나 유선 전신이 발명된지도 겨우 30 년이 되고, 전화도 최근에야 발명된 사실을 들어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리기 교수는 어린 제자의 착상 자체에 격려를 보냈습니다.
"마르코니, 그것 참 대단한 착상이구나. 그래, 너는 꼭 그 생각을 실현해 보아라. 그러한 발명이야말로 네가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아까울 것 없는 사안이야."
리기 교수의 격려에 힘입은 마르코니는 무선 전신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 년, 이 년이 지나고 연구에는 진척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위사람들, 많은 과학자들까지도 '쇠줄이 없이 통신이 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어린애 같은 꿈이다.' 라며 비웃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가엾게도 저 애는 전기 때문에 미쳤어.'라고 말하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리기 교수만은 마르코니의 성공을 믿고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마르코니는 간신히 조그만 무선 전신기 하나를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의 어느 날, 밤이 으슥한 무렵에 마르코니는 넓은 들판에서 십 년의 외로운 싸움 끝에 만들어진 기계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 시도를 했건만 발신기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실패! 십 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그대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문득 들판 저 멀리 정적을 깨는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마르코니 곁에서 멎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니라 리기 교수였습니다. 선생은 말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마르코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됐나? 오늘 밤 자네의 실험이 궁금해서 이렇게 달려왔네."
그리고 리기 교수는 다시 한 번 실험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깊은 밤중에 사제는 한마음으로 실험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자, 준비는 다 되었지?"
선생이 수신기 가까이에 서자 마르코니는 떨리는 손으로 발신기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찌찌' 하는 소리가 수신기에 들려왔습니다. "성공! 성공! 마르코니, 대성공이다."
선생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마르코니는 선생의 두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대견스럽구나. 마르코니야, 정말."
리기 교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힘없이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의 실험을 보려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달려오느라 병을 얻고 만 것입니다. 마르코니는 선생을 말에 태우고 돌아왔습니다. 신열이 대단했습니다. 얼마 후 기운을 회복한 선생은 마르코니를 대견스러운 듯 바라보며 거듭 말했습니다.
"정말 장하구나. 성공이야."
그로부터 2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몇 마일을 두고서 전신 없이도 송수신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 후 영국에 건너가 빅토리아 여왕과 황태자가 탄 요트에 기계를 놓고 실험할 때였습니다 황태자가 요트 위에서 급병이 났다는 사실을 무선 전신으로 해안에 통지하여 무사한 일로 말미암아 영국 정부는 특별히 마르코니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힘을 입은 마르코니는 1899 년에 영국에서 도보 해협까지, 1901 년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마르코니의 나이는 불과 27세에 불과했습니다. 이탈리아로 마르코니가 귀국할 때에는 그야말로 개선장군과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열렬한 환호와 사랑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마르코니는 시장의 안내로 군중 앞의 연단에 섰습니다. 그는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조용히 환영에 대한 답사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소녀가 그에게 월계관을 내밀었을 때 관중들은 떠나갈 듯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니는 뒤에 자리잡고 있던 유명인사들 가운데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한 노신사 앞으로 월계관을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리기 선생님, 이 월계관을 받으십시오. 이것은 선생님의 것입니다."
리기 선생은 한사코 그것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이 월계관을 선생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선생님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오늘날 저의 영광이 어떻게 이루어 졌겠습니까? 받아 주십시오."
마르코니는 애원 반, 강제 반으로 월계관을 쓴 리기 선생에게 정중히 절을 했고 리기 선생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내렸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박수 소리에 묻힌 두 사람의 얼굴 위에는 조국, 이탈리아의 따스한 햇살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Fortune aids the brave. Fortis fortune adiuvat. (테렌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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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니(Marcony, Gugliemo, 1874-1937)
이탈리아의 전기 기술자, 발명가이자 후작으로 불로나에서 출생. 1865 년 헬츠의 전자파에 기초하여 실험을 거듭하여 무선 전신 장치를 발명했으며 이밖에도 광석 검파기. 수평 공중선 전파 등을 발명했다. 1909 년 브라운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하고 파리 평화 회의의 이탈리아 전권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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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시키지 말라. 그것은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치명적이다.
Away with delay; It is always fatal to those who are prepared. (루카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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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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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여덟번째 이야기 - 나무 위의 여자
옛날에 한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연화였다. 그녀는 그림 같은 눈매에 복숭아 꽃 같은 얼굴을 가진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마음씨가 곱고 슬기로웠으며 예의를 알았다. 그런데 남편인 바라문은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완벽한 미인인 연화보다는 조금은 천박해 보이는 계집종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는 온종일 계집종과 더불어 희희낙락했으며, 계집종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결국 바라문은 계집종에게 눈이 먼 나머지 연화를 집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바라문은 연화에게 소풍을 가자고 했다. 연화는 남편의 마음이 돌아선 줄 알고 기뻐하며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들은 한 동산에 올라 열매가 가득 열려 있는 나무를 보게 되었다. 바라문은 나무 위로 올라가 잘 익은 열매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덜 익은 열매를 연화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연화가 말했다.
"여보, 당신은 잘 익은 열매를 드시면서 왜 저에게는 덜 익은 열매를 주시는 거죠?"
"잘 익은 열매를 먹고 싶으면 직접 나무 위로 올라와보시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올라가겠어요."
바라문은 연화가 나무 위로 올라오자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얼른 나무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가시덩굴을 잔뜩 가져다가 나무 밑에 깔아놓았다. 당황한 연화는 남편에게 얘기했다.
"여보,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 거죠? 그렇게 하면 제가 나무에서 내려갈 수 없잖아요?"
그러나 바라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시덩굴로 나무 밑을 발디딜 틈도 없이 에워싸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하면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겠지? 이제서야 눈엣가시를 뽑겠구나.'
연화는 나무 위에서 남편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며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했지만 헛일이었다. 그때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던 그 나라의 국왕이 우연히 그 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다. 국왕은 나무 위에서 웬 여인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발을 멈추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인의 자태는 마치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 국왕은 말을 몰아 나무 근처로 다가가 연화에게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슨 일로 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 나무 밑에 가시덩굴을 깔아놓았는가?"
연화는 울먹이며 계집종에게 홀린 남편이 자기를 그렇게 만든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국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선녀와 같은데, 그 남편이라는 작자가 도리어 죽이려 들다니? 천하의 보배를 몰라보는 그 자는 정녕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다!'
국왕은 신하들을 시켜 가시덩굴을 치우고 연화를 나무에서 내려주었다. 연화는 자신을 구해준 국왕과 신하들에게 예를 갖추어 감사를 표시했다. 국왕은 연화가 미모 뿐만 아니라 예절까지 갖춘 것을 보고 궁궐로 데려가 후궁으로 삼았다. 연화가 그곳에 온 이후 궁궐 내에는 연화의 지혜와 재치를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그녀는 도박을 무척 잘했다. 그녀와 도박을 해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연화의 미모와 신기한 도박 기술에 관한 소문이 궁 밖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연화의 전 남편이었던 바라문 역시 그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미모가 출중하고 도박 기술이 신기에 가깝다? 그러면 그 후궁은 혹시 전처 연화가 아닐까?' 그 바라문 역시 도박에는 정통했으므로 후궁을 찾아가 한 판 겨뤄보고 소문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집을 나섰다. 궁궐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후궁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바라문을 살펴 본 후 연화에게 가서 그 생김새를 보고하였다. 그녀는 그 얘기를 듣자 그가 곧 자신의 전 남편임을 알 수 있었다. 후궁과 도박을 겨루어보겠다고 기다리던 바라문은 후궁이 나오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궁은 역시 짐작한 대로 전처 연화였던 것이다. 바라문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말했다.
"본 지도 한참 되었구려. 당신은 정말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도박 기술도 훨씬 나아졌다고 들었소. 나는 당신이 과거지사를 모두 잊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오."
"과거의 일은 모두 잊어버렸지만, 나무 위에서 있었던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 당신과의 인연은 이미 다했으니, 나는 나 당신은 당신일 뿐이에요. 그리고 더 이상 나눌만한 이야기도 없는 것 같군요."
바라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궁궐을 나왔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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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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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혁명가 홍경래(1780-1812, 33살, 전사).
조선 실록에는 만고의 역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홍경래.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 정권에는 반역자일지 몰라도 역사의 반역자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죽은 후에도 일반 백성들은 그가 다시 돌아와 고통받는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줄 것으로 상상하여서 백성들에게 그는 전설속의 영웅이 되었으며, 구원의 지도자 영원한 장군으로 자리잡았었다. 그에 따라 그를 흉내낸 대소 봉기가 잇달았으며 그의 거사는 각종 민란에서도 빠짐 없이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는 33세의 짧은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로서는 엄청난 생의 궤적을 역사 속에 남긴 셈이다. 어쩌면 그의 인생 전체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어려서부터 큰 뜻과 웅지를 가졌던 인물이었지만 그것을 펴나갈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투쟁의 길로 나서 일로 매진하다가 마침내 타율에 의해 삶을 끝내고 말았다. 그의 인생 자체는 다른 내용이 전혀 기여들 수 없는 한가지 색으로 일관되어 있다. 철이 난 이후 알게 된 부당한 현실에 대하여 홍경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깨트려 버리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일만을 위해 살아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홍경래는 이와 같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적인 자세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한 가지 일을 도모하는 본받을만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궐기가 성공하였다면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성패에 관계 없이 그의 존재 자체는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다만 그의 한계는 자신의 역량을 과신한 것이고 다수 민중의 힘보다는 자신이 규합한 세력의 역할을 너무 기대한 것에 있었다. 또한 성공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실패의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신음하고 고통받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권리 의식을 일깨워준 선구자였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회한
홍경래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 4년(1780년)에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 꽃장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 홍씨로 그의 조상들은 고려 때 관직에 있었다고 하지만 홍경래가 출생할 당시는 일개 촌부의 집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대담하고 힘이 셀 뿐 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하여 동네에서는 장차 한몫 단단히 할 아이로 치부되며 자랐다. 경래의 비범함에 고무된 그의 부모는 문자를 깨우칠 무렵 중화에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의 외숙 유학권이 그 지방에서 인정받는 유학자로서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유학을 보낸 셈이다. 그의 외숙은 경래를 맡아 기르면서 처음에는 그의 총명함과 빠른 학문적 진보에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점점 어린애답지 않은 야심가적인 기질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했다. 경래가 8살 때 지었다는 글을 보면 그의 웅지를 잘 알 수 있다.
'거좌해압산 세족요포강'
'해압산에 걸터앉아 포강에 발과 허리를 씻는다.'
불과 8살짜리 꼬마가 이토록 큰 호연지기를 가지고 또한 자기의 뜻을 거리낌없이 글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경래의 외숙은 그 당돌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안도 출신의 한계를 숙명처럼 알고 살면서 스스로 시골 훈장 노릇에 만족하던 그의 외숙으로서는 경래가 꺼려지기까지 하였으며, 점점 "장차 이 놈이 무엇이 되려고 이럴까?" 하고 걱정이 앞서기만 하였다. 커가면서 다른 책보다 '사략'에 관심이 많았던 홍경래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대장부가 죽지 않으면 뜻을 이룰 것이고, 죽더라도 후세에 큰 이름을 남겨야 한다"라는 대목들을 특히 좋아하였다. 어느덧 소년으로 성숙한 홍경래가 어느 날 써놓은 글귀 하나는 결국 소심한 그의 외숙을 경악케 하고 더 이상 그의 양육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가을 바람 불 때 역수의 장사는 주먹을 들어 대낮에 함양에 있는 천자의 머리를 노린다.'
'사략'에 나오는 구절로 연태자의 총애를 받았던 형가가 진 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한 고사를 인용한 글이었다. 홍경래를 그대로 자기 집에 두고 기르다가는 훗날 자기에게 화가 미칠것으로 생각한 외숙은 경래를 귀향시키면서 그의 부모에게 당부의 편지를 동봉하였다. "경래의 재능은 비범한 것이 분명한데, 그 뜻이 순수하지 않으므로 각별한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자아가 강했던 경래에게 촌부에 불과했던 부모의 훈도가 이미 통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믿을 바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혼자의 힘으로 갖가지 학문을 탐독하였다. 특히 경사와 병서에 관심이 많았으며, 술서나 풍수에도 깊이 몰두하였다. 또한 "문사라 할지라도 무비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신체 단련에도 열심이었다. 이러한 독학 수련의 세월 속에 어느덧 청년이 된 경래는 천성적인 비범함에다 줄기찬 독서로 박학 다식한 것은 물론 용력과 무예까지 갖추어 주위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또 담력이 크고 의기가 높아 약한 자를 많이 도와주었으며 성품이 쾌활하고 친화력도 좋아서 고향 근처에서는 이미 무엇인가 큰일을 해낼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홍경래가 19살 되던 해(1798년)에 평양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한성으로 가서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당시는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평등한 공직 기회에 대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세력 있는 양반들끼리의 '그들만의 탕평'에 불과하였고 실력보다는 문벌과 혈연, 그리고 뇌물이 과거시험의 결과까지 좌우하던, 극도로 부패된 시기였으며, 더구나 부리깊은 서북인 차별정책 때문에 애초부터 급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고향에서는 천재로 이름이 높던 홍경래였지만 사회적 악폐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시대상 고찰
그렇다면 여기서 시대의 기린아 홍경래도 극복하지 못했던 당시의 비뚤어진 정치와 서북인 차별의 실상을 알아보자. 우선 조선 후기를 극도로 혼란에 빠뜨렸던 김씨 일문 세도정치의 발단과 그 진행 과정은 이러했다. 개혁의 왕 정조가 죽고 겨우 11살의 세자가 보위에 오르니(1800년)이 사람이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다. 왕의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 수렴청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경주 김씨)가 왕의 나이 15세가 될 때까지 근 4년 동안 후견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이 부득이한 조치였다는 주장을 하였던 벽파의 후원자였던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둔 지 1년만에 죽고 말았다. 벽파 정권의 버팀목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 세력을 일시에 몰락하고 이 틈바구니에서 선왕의 고명을 받았던 왕의 장인 김조순이 국구로서 권력을 잡게 된 것이 김씨 척족에 의한 세도정치의 발단이었다.
원래 세도라는 것은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의미로서 중종대의 조광조 등 신흥사류에 의해 제기된 정치 철학이었는데, 이것이 이 시기에 와서는 일부 권력자에 의한 전단을 뜻하는 세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정순왕후가 죽은 후에는 일시적으로 시,벽파계 공동 정권이 성립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의 중요 직책을 김씨 일문이 독차지하여 파당조차 존재하지 않는 기형적인 독재 정권으로 전변되고 말았다. 왕은 완전히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세력을 잡은 김씨 일문이 부패를 일삼자 사회 기강은 급속도로 무너지고 관리들은 공무보다는 사복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연이은 흉년으로 일반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각처에서 대규모 산불까지 여러 차례 발생하자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다.
이렇게 홍경래가 출생하고 장성해 가던 시기는 무슨 변고가 곧 일어날 것 같은 암울한 분위기가 조선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거기에다 홍경래를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조선 조정의 서북인 차별이었다. 자기 발전 의지가 누구보다 강하고 웅지가 높았던 홍경래에게 이러한 사회적 차별은 부당할 수밖에 없었고 세상을 바꿔놓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태조 이후 조선은 서북 사람을 의도적으로 꺼려했는데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이 관습적으로 굳어지고 노골화되어 심각한 차별 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 북방지역은 이민족에게 거의 방치된 상태여서 이곳에는 토착민과 여진인이 혼재하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처음부터 북쪽지방 사람들을 오랑케 수준으로 천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조선 창건 세력은 왕으로 추대된 이성계와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영남지방 출신이 많았다. 영남지역에서는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대결 구도시절부터 고구려 지역이었던 북방지역을 경원시하는 풍조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런 역사적, 심리적 배경 때문에 조선의 주류 세력에 의하여 북변은 진압과 다스림의 대상이었지 결코 조선 사회의 동격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수모를 받았다.
그런데,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동북면(함경도) 지방은 태조가 출현한 지역으로서 대접을 받았으나 서북면(평안도) 지방은 계속 야만족 지역으로 취급하여 은근히 차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 의식도 완전히 불식 된 것은 아니었고, 단지 평안도 지역보다는 다소 완화된 정도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조선 초기에는 정치적 현실에 기인되기는 하였지만 이시애,이징옥의 난 등이 부단히 일어났다. 거기에다 조선 초기 남부지역 주민을 북쪽으로 이주 정착시키면서 범죄자를 사면해 주거나 천인을 양인으로 속량시켜 주는 등 이주 촉진 및 지역 안정 정책을 추진한 바 있었다. 그러나 보니 조선 중심 세력은 이 지역 거주자들을 심정적으로 무시하고 기피하는 자세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정책에도 은연중에 차입되어 실행되었던 것이 서북인 차별의 실상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노골화되어 '평치', '서한' 하면서 이 지역 사람을 멸시하였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문관은 '지평', 무관은 '첨사' 이상으로 출세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시기에 공교롭게도 사도세자의 비극이 평안도 지역을 무단으로 잠행한 것이 결정적인 시비가 되어 발생하자 이곳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더욱 극심해졌다. 사도세자의 죽음 뒤에는 역사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자신을 제거하려는 노론 주도 세력과 부왕에 대하여 평안도의 군사력을 이용하는 쿠데타 추진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당시 평안감사 휘하에는 북변 경비의 주축 부대가 포진하고 있어서 어느 곳보다 군사력이 결집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그곳의 세미도 중앙으로 운송하지 않고 자체 사용토록 허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자의 평안도행은 불순한 의도로 의심받고 비난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회 구조와 현실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홍경래는 가슴속의 한을 품은 채 한동안 고향에서 칩거하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초상을 마친 후 홀연히 집을 나섰다. 표면상으로는 입산독서로 학문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남겼었다. 그때 그의 나이 21살이었는데, 그 해가 바로 정조가 죽고 순조가 등극한 경신년(1800년)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한 때에는 아직 김씨 세도정치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애초에는 서북인 차별에 한을 품고 고향을 떠난 그가 주유천하 하면서 김씨 세도정치가 부패하여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것을 목격하고 혁명의 의지를 다져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방랑 첫 해에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녔는데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풍수와 무속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도사처럼 행세하면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어느 시대나 사회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갖가지 예언이나 참설에 빠져들기 쉬운데 그 당시 분위기가 꼭 그러했다. 홍경래는 자신이 혁파하고자 했던 그 시대에 오히려 불안한 사회 경향을 이용하며 방랑 생활을 영위해 나간 셈이다. 다분히 혹세무민의 행동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로서는 훗날의 거사를 정당화시키려는 사전포석으로서 목적이 있었던 활동이었다.
동지의 규합, 거사 준비
홍경래는 방랑길 첫 해에 그의 최고의 동지이자 모사가 되었던 우군칙을 가산군 청룡사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우군칙은 태천의 명문가 자제였으나 서자로 태어나 신분상 불이익을 얻고 있었다. 부당한 사회 구조의 한계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두 젊은이가 만나게 되었으니 자연 그 뜻이 상통할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에서는 마음만 서로 전달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만났을 때는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일을 같이 도모하기로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 후 홍경래는 압록강 상류 지방까지 두루 돌아다니다가 중국 마적두목 정시수와도 연통하는 사이가 되면서 그의 뜻을 실현시킬 세력을 모으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우선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경제적 능력이 있는 인물을 끌어들이기로 작정하였다. 이 대상으로 떠오른 인물이 가선 거부 이희저였다. 이희저는 당시 신흥 부자들이 그러했듯이 지방 관직을 돈으로 사서 무관으로 관아에 이름을 달아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돈은 있지만 행세하는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한 부류의 인물이었다. 이런 이희저를 포섭하기 위해서는 우군칙과 치밀한 계획을 꾸며서 장기간의 공작을 펴야만 했다. 우선 우군칙의 아내를 점장이로 변장시켜 희저의 집에 출입시키면서, "수성을 가진 인물을 만나면 대운이 터질 것이다"라고 현혹하기 시작했다. 그 후 우군칙이 당대의 명지관으로 행세하며 이희저에게 접근하여 묘자리를 보아주면서, "수성을 가진 자를 가까이 하면 당대에 발복할 것이다"라고 넌지시 꽤자, 이희저는 스스로 몸이 달아 수성을 가진 인물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이때 범상하지 않은 언행을 하는 홍경래가 도사 행색을 하고 슬그머니 나타나자, 이희저는 완전히 귀인도래로 생각하여 홍경래와 뜻을 같이하게 된 것이다. 훗날 혁명군의 본거지가 되었던 다복동도 이희저 소유였으며, 그의 경제적 뒷받침이 거사 추진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음으로 포섭한 인물이 곽산의 문사 김창시였다. 김창시는 문장에 능한 인물로 평안도 내에서는 꽤 이름이 잇던 선비였다. 초시에도 합격하여 김 진사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홍경래는 김창시를 끌어들일 때도 꽤 신비스러운 연출을 했다. 황해도 봉산군 동선령 고개를 지나가는 김창시를 기다렸다가 청의 입은 동자를 보내서 만나자고 청하고는 홍경래가 미리 지어놓은 초막에서 참설과 담론으로 회유하여 포섭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끌어들인 인물이 곽산의 홍총각이었다. 홍총각은 곽산 사람으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힘이 장사였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이판'이었지만 늦도록 장가를 못가서 '총각'으로 불렸다. 또 개천의 이제초와 태천의 김사용, 평양의 양소유를 차례로 끌어들였는데, 이들은 모두 힘과 용맹이 좋은 인물들이었다.
홍경래는 참모와 후원자로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를, 생동대장격으로서 홍총각, 이제초, 김사용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장차 혁명군의 수뇌부를 일찍이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계속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힘깨나 쓰는 자들과 지역 유지들을 끌어들였다. 주로 당시 싹트기 시작한 개인 상업으로 돈을 모은 상인과 향촌의 신흥부농 및 지역 하층관리와 몰락하여 불만이 많은 지식층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은 훗날 거사 시기에 혁명군 중간 지도부가 되었는데, 그 당시 사회 상황에 불만은 많았지만 구체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고 동지의식이 약해 사세가 불리해졌을 때 등을 돌리는 자가 많았다. 혁명의지가 충일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처지에 불만만 많은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유입되어서 세력으로는 그럴 듯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혁명군의 힘이 조기에 약해지고 종당에는 실패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사람을 모으는 한편, 홍경래는 자금을 모으고 병력을 기르는 방편으로 광산 개발과 염전도 운영했다. 당시는 개인이 광산이나 염전을 운영할 수 없었지만 모두 뇌물을 주고 비공식적이나마 지방관의 비호아래 운영할 수 있었는데, 이곳으로 가난에 찌든 유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러한 작업을 홍경래는 고향을 떠난 10년 동안 꾸준히 추진하였으며, 스스로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졌다는 판단이 서자, 순조 11년(1811년) 9월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가족들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혁명의 본거지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입산 공부한다고 집 떠난 지 실로 11년만의 귀향이었지만 경래의 숨은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에서 대충 가산을 정리한 경래는 가솔들을 이끌고 다복동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다복동은 이희저 소유의 땅이었으나, 홍경래에 의하여 봉기의 근거지로 일찌감치 지목되어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곳이었다. 다복동은 가산과 박천 사이의 은밀한 곳으로 주위는 병풍처럼 깊은 산이 둘어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였으며, 조금만 나아가면 한성과 의주로 통하는 대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앞으로는 대령강이 흘러서 수륙 양면으로 교통도 좋았다. 특히 이곳은 위치상으로 으슥한 곳이므로 남의 눈을 피해 군사 훈련, 무기제조, 군량 저장등 거사 준비를 추진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홍경래가 완전히 다복동에 들어앉은 다음부터 각지에서 그 동안 포섭한 동지들을 소집하고 본격적으로 병력을 규합하자 그 무렵 다복동에 모인 인원이 2000여 명에 달하였다.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렇게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거사 날짜를 결정하기 위한 비밀 회동이 대령강 가운데 있던 신도에서 열렸다. 이 회동에서 비기에 경도된 문사들은 이듬해인 임신년(1812년) 정원 기병을 주장하였고, 용맹한 무골 출신들은 당해년인 신미년(1811년) 즉시 기병을 주장하였으나, 이미 홍경래가 내정한 임신년 정월로 결론을 내렸다. 이 임신년 거사에 대한 결정은 '정감록' 등 비결에 관심이 많던 혁명 수뇌부의 암묵적 합의를 공식화한 것으로, 이 거사의 운명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세상에 갖가지 참설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일사횡관하니 귀신탈의하고, 십필가일척하니 소구유양족이라" 하는 기괴한 말이 그 한 가지로서 '임신기병'을 파자한 것이다. 또, "30년 전 선천군에 있는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에서 큰 인물이 났는데, 이 사람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제할 것이다"라는 예언도 유포시켰다. 일종의 대민 심리전이자 세뇌 작전을 구사한 셈이다. 암울한 현실에 고통받던 민초들은 이러한 풍설을 듣고 무언가 커다란 변혁을 기대하게 되었고, 긴가민가 하던 어설픈 참여자들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다복동에 대규모 인원이 계속 집결하고 많은 군수 장비들까지 유입되다 보니 아무리 정보가 어두운 시절이고 은밀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결국 외부에 노출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관청에서 눈치를 채고 조사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거사계획을 신미년(1811년) 12월 20일로 앞당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혁명의 기폭제로 삼으려 했던 평야거사가 실패하여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평양에서 폭동을 유도하여 다복동에 쏠린 주목을 분산시키고 혁명군 출동의 기폭제로 삼을 계획 아래, 12월 15일을 평양 봉기 거사일로 정하고 폭동을 유발시키는 도화선을 만들기 위해 거사 당일 폭발시키려고 평양 감사의 관사인 대동관 밑에 폭약을 미리 매설해 두었다. 그런데, 계획일은 12월 15일에 날이 갑자기 풀리고 비가지 와서 화약이 젖었는지 점화를 시켰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폭발을 기다리던 행동 대원들은 계획이 틀어진 것으로 알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평양 봉기는 무위로 돌아가고 혁명 계획만 노출되고 말았다. 시초부터 불길한 전조가 혁명군의 앞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행동대원 한명이 관가에 붙잡혀서 다복동의 모습이 완전히 노출되었으며, 선천에서는 비밀 동지인 최봉관이 체포되고 철산, 곽산, 가산 등지에서도 관군이 비밀 동지들을 추적하자, 거사 기일을 더 앞당겨서 12월 18일에 서둘러 기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평서 대원수로 자칭한 홍경래는 다복동에서 출전의격문을 선포하고 혁명군을 2개 진영으로 나누어 남북으로 동시에 진격해 나가면서 혁명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곧바로 전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지 않고 2개 부대로 분할하여 북쪽에 대한 공격에도 나선 것은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혁명군의 세력이 나뉘어짐에 따라 결국 힘을 약화시켜서 이 또한 거사 실패의 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북군은 부원수 김사용이 지휘를 맡아 제일 먼저 곽산을 공격하여 군수 이영식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남군은 홍경래가 직접 인솔하여 가산을 홍총각의 선발대로 하여금 치게 하니 이곳도 쉽게 함락되었다. 가산 군수 정시와 그의 부친은 격렬히 대항하다가 혁명군에게 참살되고 말았다. 홍경래는 여기서 홍총각과 이제초로 하여금 북행하여 북진군의 정주성 공략을 돕도록 하고 자신은 박천을 치기로 하였다. 한편 북군은 성 안의 포섭자들의 내응을 얻어 어렵지 않게 정주성을 함락한 후, 북상하던 홍총각, 이제초 부대와 12월 22일 합류하였다. 또한 홍경래의 남군도 20일 새벽에 박천을, 그 이틀 쉬 태천을 점령한 후 안주성 공략을 준비하며 북군의 합류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안주는 평안도의 제일가는 군사 요충지로 평안 병사의 본진이 있는 곳이며 남북을 통하는 큰 길목이고 북쪽에는 청천강이 흐르는 천혜의 군사 요새였다. 이곳은 쉽게 공략할 수 없기 때문에 북군이 빠른 시일 내 북쪽 지방을 평정한 후 남군과 합세하여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북군은 24일에 선천, 25일에 철산, 용천을 점령한 후에 영변, 귀성, 의주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이 지역 의병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더 이상 북상조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북군이 계획된 날짜에 합류할 수 없게 되자 홍경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남군만으로 안주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혁명군이 합류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안주에는 인근 각 지역의 관군 병력이 속속 집결하여 군세가 이미 2000여 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더구나 중앙에서 진압군이 27일에 출발하였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기세마저 높아져 있었다. 결국 혁명군은 초기의 기선 제압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반란이 성공하려면 속전속결로 권력의 중심부에 쳐들어가서 기존 질서를 신속히 무력화시키고 국가 중추기구를 장악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홍경래 군은 기병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평안도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인근 소읍 8개만 점령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실패의 전조가 이미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혁명이란 대규모 군세를 동원한 정벌이 아니기 때문에 거사 즉시 지역 군사 요충지인 안주,평양을 돌파하여 한성으로 진격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홍경래는 병력을 남북으로 분산시켜 힘을 약화시켰고 지역을 차곡차곡 평정해 나가는 방법을 채택하여 혁명의 신속성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상대는 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지게 되어서 혁명군 스스로 강력한 저항을 자초한 셈이었다. 더구나 이때 혁명군은 탄압받는 서북인의 세상을 만들 것으로 공언하여 경기 이남 지역에서는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또, 많은 계층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혁명의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부족하여 차츰 반란군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음을 느끼고 남군만으로 안주성 공략에 나섰으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린 다음이었다.
실패의 서곡
12월 28일에 홍경래는 안주성이 바라다 보이는 송림에 진을 치고 안주성 공략에 나섰지만 오히려 관군의 공격을 먼저 받게 되었다. 29일 아침, 혁명군이 채 진영을 정비하기도 전에 얼어붙은 청천강을 건너 1000여명의 관군이 3개 부대로 나누어서 총공격을 감행하고 나온 것이다. 중앙에서는 평안 우후 이해승이, 우측은 순천 군수 오치수가, 죄측은 함종 부사 윤옥렬이 각기 지휘하였다. 이에 홍경래도 부대를 3개진으로 편성하여 홍총각, 윤후험, 변대언이 각각 인솔하여 대응케 하였다. 이때 홍총각은 안주성 공략을 돕기 위해 북군과 헤어져서 이곳에 와 있었다. 드디어 혁명의 성패를 판가름 지을 안주송림 회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혁명군이 우세하였으나 김사용의 북군에게 항복했다가 도망한 곽산 군수 이영식이 지원군을 동원하여 혁명군의 배후를 기습하자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홍경래는 할 수 없이 후퇴를 결정하고 비상시에 농성 장소로 정해두었던 정주성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때 정주성은 이미 북구닝 점령한 후 주력 부대는 의주로 진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다복동에 있던 가솔들과 일부 수비병력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안주성 전투의 패배로 혁명은 이미 실패의 고비를 넘고 있었지만, 홍경래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당초에 홍경래의 혁명군이 궐기하면서 각 지역에서 비밀 동지들이 폭동을 일으켜 호응하고 한성에서는 지배 세력을 암살하고 조정권력을 붕괴시키키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의 전투에서는 패전하였지만 정주성에서 농성을 계속하면 한성으로 진격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굳게 믿었다. 또 외부 동지들이 함경도 지역 포수들의 동원하여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고, 만주족들까지 호응하여 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조하였던 것이 홍경래의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결과적으로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주성에 고립된 홍경래의 바람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아무튼 정주성에 웅거한 홍경래는 북군의 합류를 재촉하기 위해 김사용이 주둔하고 있는 양책참으로 김창시를 급히 보냈다. 그러나 김사용의 북군도 남군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즉시 합류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것은 의주에서 허황과 김현신의 의병군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오히려 혁명군 진압 지역까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라 섣불리 남행하다가는 배후를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득이 이제초 부대를 선천으로 내려보내 남군과의 연결 통로가 두절되지 않도록 응급 조치를 취한 뒤에 김사용과 김창시는 의병군과 계속 대전하기로 하였다.
한편, 안주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은 여세를 몰아 박천, 가산, 태천을 회목하고 혁명군의 본거지인 다복동까지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다복동 잔류 인원 모두가 정주성에 들어가 버린 뒤라서 다행히 혁명군의 추가 인원 피해는 없었다. 이렇게 남군 점령지역을 모두 회복한 관군은 북군 점령 지역으로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곽산 군수 이영식이 순천 군수 오치수의 도움을 받아 곽산을 제일 먼저 회복하였다. 곽산마저 관군의 손에 떨어지자 선천에 있던 이제초의 후원 부대는 곽산을 재장악하기 위하여 황급히 전 병력을 몰고 곽산으로 내달렸다. 결국 곽산 서쪽 사송벌에서 양군이 조우하였고 혁명군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2차 대회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 역시 안주 싸움 못지 않은 격전이었지만 이제초는 중과부적으로 결국 패전하여 생포되었으나 곧 참수되고 말았다. 혁명군의 수뇌부 가운데 첫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개천 출신 역사로서 혁명군의 선봉대장 이제초의 죽음을 알게 된 북군은 급격히 전의를 상실하였다. 부득이 병력 증강을 위해 창성 지역의 포수를 동원하기로 하고 김창시가 급히 길을 떠났다. 그라나 가는 길에 이제초 부대 패잔병 조문형을 만나 휘하에 합류시킨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광부 출신 용병이었던 조문형은 이미 사세가 그른 것을 알고 밤중에 자고 있는 김창시의 목을 베어 선천부사 김익순에게 1000냥을 받고 팔아 버린 것이다. 혁명군의 수뇌부의 두 번째 희생자는 이렇게 내부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김익순은 돈 주고 산 김창시의 목을 가지고 마치 자기의 전공인양 상부에 보고했다가 처음 반군에게 항복한 것까지 문제가 되어 본인은 사형을 당하고 일족은 '폐족'이 되는 화를 당하였다. '폐족'이란 그 집안 출신에게는 공민권을 완전히 제한시키는 것으로 사회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고, 후에 김익순의 손자 김병연이 그 유명한 김삿갓이 되어 평생을 방랑하며 살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아무튼 김사용의 북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남은 병력을 겨우 추슬러서 정주성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군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으며 기나긴 정주성 농성에 명운을 걸여야 했다.
최후의 항전 - 정주성 농성
정주성에 웅거한 뒤에도 홍경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제 장병을 독려하였다. 그로서는 마지막으로 믿는 바가 아직까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거병했을 때부터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이 10년 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보고 느낀 바로서 전국 어디에고 썩어빠진 세상을 한탄하는 소리가 높았으므로 자신이 기병만 하면 각지에서 불꽃같이 호응해 올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또한 곳곳에 동지들을 이미 포섭해 두었으므로 이들이 폭동의 선봉에 서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한성으로 진격 작전을 버리고 인근지역부터 차례로 점령해 나가는 방법을 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서둘러 한성으로 쳐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봉기 소식이 차츰 전파되어 각 지역에서 호응해 올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인 착오였다. 어쩌면 자기 확신이 강한 인간의 자기 함정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10년 동안 자신이 목격한 세상은 고통과 불만이 한계까지 차 올라 있는 혁명 전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만이 있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라는 것을 간과하였고, 행동하고 싶어도 규학하고 인도해 줄 세력이 없었다. 그 동안 포섭했던 동지들도 불만만 있었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앞장설 수 있는 인물보다는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았다. 말하자면 민중의 역량은 혁명에 동조할 만큼 아직 성숙되지 못했고, 이를 만들어 낼 명분이나 세력도 약했던 것이다. 홍경래는 자기가 본 세계에서 스스로 판단한 암시에 빠져 최후까지도 혁명의 성공을 믿었다. 또, 그는 자기 휘하 병력의 실상에 대해서도 보다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애초에 자발적 참여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광산이나 염전 노동자였던 사람도 많았고, 대부분의 주력이 용병들이었다. 또한 기병 이후 점령한 지역에서 관군의 동조세력을 한번도 얻지 못했다는 것도 큰 약점이 되었다. 어차피 점진적 형태의 혁명 전개라면 점령 지역마다 자기 편으로 세력을 계속 편입시켜 군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만들고 저지 세력의 기반은 무너뜨려야 했는데도 실상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당시의 기존 질서가 관군 지도부의 누구도 등을 돌리지 않을 만큼 건강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정주성에 웅거한 뒤에야 부자나 힘있는 자들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통한 농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의 실천 공약을 공포하여 이때부터는 지역 주민과 농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즈음에는 혁명군의 인적 구성도 자연히 용병 위주에서 자발적 참여자로 완전히 탈바꿈했고, 군사들의 자세도 기병 당시보다 더욱 강고한 모습으로 변모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홍경래의 농민 대책 발표로 혁명의 명분이 더욱 강화된 까닭도 있었지만, 관군이 진압을 위해 정주성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하면서 농민들의 반감을 극도로 자극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순조 12년(1812년) 1월 3일에 정주성을 처음 포위할 당시만 해도 관군은 단숨에 정주성을 함락할 기세였으나, 성안의 이러한 사정 변화로 인한 결사 항전 자세 때문에 여러 차례 공격에도 피해만 클 분 별 성과가 없었다. 성 안의 농성군은 변변한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농민들이 태반이었고 그 수도 2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관군의 수는 그의 4배인 8000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초기에는 쉽게 생각하고 공격했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홍경래 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군량과 장비를 빼앗기는 사례마저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진압군 지휘관을 박기풍에서 유효원으로 교체하여 정주성 함락을 서둘렀다. 그러나 성안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계속되는 공성은 모두 실패하면서 세월은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결국 관군은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봉쇄 작전으로 장기전을 도모하였다. 또한 자발적으로 해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며 항복을 종용했으나, 성 안에서는 노약자나 부녀자만 두 차례 내보낼 뿐 전병력이 초근목피로 생활하면서도 투항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농성군이 항복할 기미가 없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관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그동안 다른 방법으로 성을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예 성광의 일부를 폭파시키키로 하였다. 농성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녹은 땅을 파들어가 4월 19일에 성 밑에 화약을 1800근을 뭍고는 북장대를 폭파시켜 버린 것이다. 천지가 진동하는 폭발로 성은 무너지고 성 안은 관군이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선두에 서서 독전하던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김사용도 전사하였으며 우군칙, 이희저 등 나머지 수뇌부와 성안의 모든 병력은 관군에 의해 몰사당하고 말았다. 1811년 12월 18일에 다복동에서 기병하여 이듬해 4월 19일에 이렇게 정주성이 함락됨으로써 근 다섯 달 동안 평안도 지역을 휩쓸며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홍경래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홍경래의 난은 초기 보름 정도 평안도 내의 각 지역을 혁명군이 장악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4개월 반 동안의 정주성 농성 기간이 전부였다. 하지만 불과 30살을 갓 넘은 청년이 10년을 준비하여 경천 동지할 일대 사건을 이끌었으므로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홍경래는 실행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런 정치,경제적 기반도 없는 평민으로서 몸을 일으켜 자기의 웅지를 실천한 것이니 비록 실패는 하였어도 한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 형태에서 홍경래의 군은 자신들이야 혁명군으로 자임하였지만 처음에는 일종의 반란군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주성 농성 이후로는 완전히 자발적인 민락 형태로 변모되었고, 그 후 수많은 민란 발생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한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에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홍경래는 자신의 거사를 통해 채 불러 모으지 못했던 기층 민중의 역량을 그가 죽은 다음에 결집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모순된 사회 구조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마음껏 펼칠 수 없게 되자, 좌절하거나 포기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세계를 개척해 내려고 한 치열한 도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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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6. 찾고, 구하고, 묻다
<심상치 않은 상태에 있구나! 어느 순간 참으로 사랑하고, 기뻐 웃고, 살아 있게될지도 모르네. 뜻밖에 신을 발견할지도 모르네>
시인 타고르의 아름다운 한 이야기.
나는 수많은 생에서 신을 찾았다. 마침내 나는 신을 보았는데... 아득히 먼 곳에 신이 있어서... 나는 신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 가면 신은 또 그만큼 더 멀어져 갔다. 얼마나 그랬을까. 마침내 나는 한 문 앞에 이르렀다. 그 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신이 사는 집"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전율되어 중심이 흔들리고 떨렸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돌연 빛이 번쩍하고 터졌다. 아 그때 나는 보았다. 만약에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신이 문을 열어 준다면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것인가? 그러면 분명 모든 게 다 끝장 난다. 나의 여행, 순례, 모험, 철학, 시. 아모든 게 다 끝장 난다! 그건 자살일 것이다! 나는 재빨리 신발을 벗어 들었다. 계단을 도로 내려갈 때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그리곤 다리야 나 살려라 하며 내닫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수없이 긴 세월을 달리고 또 달리곤 하였다.
나는 지금 신이 있는 곳을 알면서도 여전히 신을 찾고 있다. 신이 있는 곳을 피해다니면서 신을 찾고 있다. 신이 없는 곳으로만. 아 나는 신의 집을 피해 다녀야한다... 날 죽일 테니까. 나는 아주 잘 안다. 어쩌다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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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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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부자로 얽매이느니 빈자로 자유롭게 살겠다<노중련>
-"주나라 포초는 혼탁한 세상이 싫어 벼슬도 하지 않고 굶주리다가 나무를 안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포용하면서 살지 않고 성급하게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본심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으로 기발한 책략가이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싫어하였으며, 차라리 높은 절의를 지키며 살기를 원하였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한단을 포위하였을 때, 위나라 안희왕은 장군 진비를 시켜 조나라를 구원케 하려고 군사를 출병시켰으나, 진나라 군사가 두려워 국경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안희왕은 장군 신원연을 시켜 몰래 한단으로 들어가 평원군을 통해 조나라 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하였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친 것은 한단을 삼키려는 게 아닙니다. 조나라에서 진나라 소왕에게 사자를 보내 제라 칭하기만 하면 곧 군사를 거두어 물러갈 것입니다."
평원군은 당시 조나라에 머물고 있는 노중련을 청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고 물었다.
"어떻습니까? 우리 조나라가 진나라 소왕에게 제라고 칭해야 하겠습니까?"
"그 신원연이란 자는 어디 있습니까?"
"객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리로 불러오십시오."
노중련의 말에 평원군은 곧 사람을 시켜 위나라에서 온 신원연을 불러들였다. 평원군이 두 사람을 소개하기도 전에, 신원연이 대뜸 입을 열어 말하였다.
"제가 듣기로 노중련 선생은 제나라의 고귀한 선비라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위나라 사신으로 온 것은 선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 노중련은 반쯤 돌아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가 이미 노중련 선생께 진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을 드렸으니 어쩌겠습니까?"
평원군이 말하였다.
"이곳 승상댁을 찾는 사람들은 다 무언가를 밟고 오는데, 노중련 선생은 제가 보기에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머물고 계십니까?"
신원연이 노중련을 향해 말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옛날 주나라의 포초는 혼탁한 세상이 싫어 벼슬도 하지 않고 굶주리다가 나무를 안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포용하면서 살지 않고 성급하게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포초의 본심을 사람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저버리고 적의 목을 베어오는 것을 가장 큰 공적으로 여기며, 백성들을 함부로 노예처럼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진나라의 왕을 제로 칭하여 잘못된 정치를 천하에 펴게 한다면, 저는 동해에 몸을 던져 죽을 것입니다. 진나라 소왕의 백성이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지요. 만약 진나라가 제를 칭하게 될 경우, 제후들에 대한 요구는 주왕실보다 훨씬 심할 것입니다."
신원연이 노중련을 노려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하인들이 하는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열사람의 하인이 한 사람의 주인을 모십니다. 그것은 주인보다 힘이 없고 지혜가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인이 두렵기 때문에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장군은 양나라 사람으로 위나라에 와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양나라나 위나라는 진나라의 하인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진나라 왕으로 하여금 양나라나 위나라 왕을 가마솥에 삶거나 소금에 절이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노중련의 말에 신원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건 너무 지나친 말씀입니다."
그러나 노중련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옛날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옛날 구후와 악후, 그리고 주나라 문왕은 은나라 주왕을 섬겼습니다. 구후는 예쁜 딸을 주왕에게 바쳤는데, 주왕은 그 딸이 못났다고 하여 구후를 죽여 소금에 절였습니다. 악후가 그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주왕은 악후를 죽여 포를 떴습니다. 문왕은 그 말을 듣고 '아아!'하고 다만 크게 탄식하였을 뿐인데, 주왕은 문왕을 백일 동안 창고 속에 가두었습니다."
그제서야 신원연은 노중련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를 고쳐 앉으며 노중련에게 절을 하고 말하였다.
"이제 저는 이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진나라 왕을 제로 칭하자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한단을 포위하고 있던 진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위나라 공자인 무기, 즉 신릉군이 진비의 군사를 탈취하여 조나라를 구원하러오자, 진나라 군사는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였다. 평원군은 조나라 왕에게 노중련을 천거하여 벼슬을 내리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중련은 단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제나라로 돌아간 노중련은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런데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요성을 빼앗았다. 연나라 조정에서는 어떤 자가 요성을 점령한 장군을 참소하였고, 따라서 그 장군은 주살될 것이 두려워 연나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요성만 굳게 지켰다.
제나라 장군 전단이 1년 이상 요성을 공격했으나, 연나라 장군이 굳게 성을 지키고 있어서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다. 이때 노중련이 편지를 써서 화살에 묶어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연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 설득당하여, 사흘 동안 고심하였다. 편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연나라로 돌아가도 죽을 것이고, 제나라에 항복해도 죽을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연나라 장군은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남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죽는 것이 낫겠다."
연나라 장군은 자결하였다. 제나라 장군 전단은 곧 장군이 죽어 혼란에 빠진 요성을 공격하여 힘 안 들이고 탈취하였다. 제나라 왕은 노중련의 공훈을 높이 사서 벼슬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노중련은 바닷가로 도망을 가서 숨어살았다.
"내가 부귀하여 남에게 굽히기보다는, 차라리 빈천하여 세상을 가볍게 여기며 자유롭게 살리라."
노중련이 바닷가로 도망가면서 한 말이었다.
선택 : 버리면 가볍고 가지면 무거워지는 것이 재물과 권력이다. 따라서 정신적 자유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버리는 것'을 택하고, 물질적 풍요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가지는 것'을 택한다. 어느 것이 자기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인지는 선택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여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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