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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나이팅게일의 기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참장교가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습니다. 그가 신자임을 안 간호사는 목사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그 장교는 한사코 거절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계시도록 제가 열심히 기도 드리죠."
이 말을 들은 장교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곧 피로와 싫증을 느껴 기도를 그만두게 될 거예요."
"아니,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 16년 동안 기도해 왔답니다."
"16 년간을?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임에 틀림없겠죠?"
"아닙니다. 그분은 제가 결코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독실한 백작 부인의 시녀였는데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백작 부인은 저의 어머니에게 방탕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답니다. 저도 그분을 위해 계속 기도했죠. 지난달 백작 부인에게서 온 편지에 의하면 그는 지금 군인이 되었다더군요."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교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 어머니의 이름이 아베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가 16 년 동안 기도했던 찰스 씨군요."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이 간호사로부터 간호를 받도록 이곳으로 자신을 보낸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세례를 받았고 얼마 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또한 큰 위안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은 자신의 처소이며, 스스로 지옥을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J. 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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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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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3. 인재는 키워서 써라 - 텃밭 경영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맙시다
흔히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고 말한다. 그럼 이윤추구의 목적은 무엇인가. 구성원들의 복지와 행복일 것이다. 기업은 직원들의 능력계발과 행복추구를 위해 존재한다. 이윤추구의 궁극적 목적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돈만 벌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 목적 없는 이윤추구는 결국 사장의 배만 불리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많은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지 않고 무조건 볶아대기만 한다. 앞뒤가 바뀐 것이다. 직원들을 위해 회사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직원들이 혹사당해야 하는 것이다. 매년 기업들의 종무식에는 매출실적이 주제가 되고, 시무식에서는 매출목표가 주제가 된다. 작년 총매출액이 얼마이고, 올해의 내외적 전망이 이러이러하니 올해 총매출은 이 정도까지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각 부서에 세세한 업무목표들이 할당된다. 나도 경영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세상에는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신의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삼국지의 제갈량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의 일이나 일의 성패를 결정하는 건 하늘의 일(모사는 인사요 성사는 천사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진인사 연후에 대천명(인사대천명)하라는 것이다. 성경의 잠언 16장 9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해도 이루는 건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하늘의 일마저 제 손으로 제어하려는 우를 범한다. 그렇게 건방을 떨어서야 될 일도 안 된다. 미래산업의 경우에는 1년 업무계획이란 것이 없다. 업무계획을 작성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진행된 적이 없고, 미리 계획한 것보다 상황에 따라 새로 입안하는 기획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당장 할 일이 있다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대로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없는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신의 성과이다. 기업도 겸손을 알아야 하고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재작년 시무식 때 나는 전 직원들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지금가지 저는 우리가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큰 떡을 만들어놓고 골고루 나눠먹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노선을 전면 수정하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마십시오."
직원들은 웅성거렸고, 간부들은 눈을 크게 떴다. 사장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나 싶어 긴장들 하는 눈치였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노력하십시오. 자기계발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직원들이 마지못해 일하는 회사는 망한다. 그런 회사의 직원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지만 사실은 시간을 때우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흥겹고 의욕적으로 일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나는 직원들에게 하루 일과를 스스로의 계획과 판단 속에서 시작하기를 권한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재미있는 이을 하라는 것이고,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미래산업에서는 총매출액의 1%를 교육비로 지출한다. 물론 앞으로도 직원교육비는 과감하게 지원될 예정이다. 미래산업은 복지회사를 추구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고급한 복지는 교육이다. 미래산업은 직원들을 위한 장학재단이 되고자한다. 영어를 배우고 싶다면 영어학원을 보내고 개인 직무교육을 원한다면 받게 해준다. 보다 고급지식을 원한다면 대학원이나 유학도 보내준다. 현재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은 8명이고, 이미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도 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회사의 철저한 지원아래 암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원도 있다. 95년 하반기에서 96년 전반기까지는 간부직원 73명에게 리더십교육을 시켰다. 한국 LMI(Leadership Management Inc.)에서 실시하는 DPL(Dynamics Personal Leadership) 즉, 개인리더십 교육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나의 태도는 어떻고, 능력과 인성은 어떻게 계발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과정이다. 3개월 코스로 1인당 200만 원이 들었다. 4기로 나누어 1년 동안 3억 2,000만 원을 들여 교육을 받게 했다.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배우자까지 함께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교육이 기업에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다 준 건 별로 없다. 그러나 각자의 인생설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계발하지 않는 직원은 기업의 입장에서도 쓸모가 없다.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직장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다. 그런 사원들이 많은 회사는 그들과 함께 늙어간다. 기업의 등급은 바로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품질수준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지 않고 무조건 볶아대기만 한다. 직원들을 위해 회사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직원들이 혹사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 재미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고,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도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노력하십시오. 자기계발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계발하지 않는 직원은 기업의 입장에서도 쓸모가 없다.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직장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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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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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최명희
혼불 1. 4. (2/4)
그런데도 한씨는 예나 다름없이 수굿한 모습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다 차남 병의를 낳았다.
"참으로 사람의 복이란 심성을 닮는구나."
"그렇게 어질고 무던하더니만, 아슬아슬 손 귀한 집에 떡두꺼비 금쪽같은 아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낳아 주다니. 이대로라면 셋을 못낳을까?"
"열이면 어때? 스물이면 마다하리. 이제 종갓댁 운세도 점차 피어나려나 보네. 십오륙 년을 두고 가라앉기만 하더니, 이제서야 조상의 음덕 양광이 비치려는가."
그러한 칭송들이 화사하였다. 종가는 단순히 큰집이라는, 대대로 맏이의 집안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중의 기쁨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제사 때에 첫 번으로 신위에게 술을 드리는 초헌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종손이 먼저 드린다. 제사에서의 위치도, 문중의 원로 어른인 문장은 좌중에 끼어서 있지만 종손은 맨 앞자리 한가운데 혼자 앉는다. 종회도,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에 있는 문장의 집에서가 아니라, 종손의 집안 종가에서 열게 되며, 종중의 모든 기록 문서는 반드시 종가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하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종회에서의 자리도, 종손이 문장보다 상좌에 앉는 것이다. 비록 종손이 이제 이십도 채 못된 홍안의 소년이라 할지라도, 백발의 수염을 늘이운 문장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종손은 종중의 기둥일세. 우리들은 가지야. 종손은 대대손손 바른 핏줄을 보전하여 우리 가문을 이어가야 하느니."
문장은 어린 종손에게 몇 번이고 이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장 또한 지극한 심정으로 받들고 존경하였다. 그는 종손을 소중하게 보호하여 지켜 주고, 또한 어른으로서 문중을 지도해 주는 크나큰 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가의 번성은 일문의 뿌리가 깊고도 탄탄하게 뻗어나가는 것과 같고, 문중의 창성은 일문의 줄기와 가지가 울창 무성하게 우거지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손을 귀하게 아껴 존중하고, 또한 문장을 받들어 존경하였으니, 그 두 사람의 존재야말로 문중의 다른 대소가에는 하나의 상징이었으며, 구심점이 되는 구체적인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장은 종손부 한씨의 부덕을 치하하였다. 그리고 종가가 번창하는 이 분명한 조짐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축하였다. 그것이 어디 비단 문장 한 사람에게만 그러하였으랴. 어느샌지 모르게 남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종가의 농토가 이제 겨우 삼백 몇 십 석밖에 남지 않은데다가, 해마다 불어나던 위답 위전 등의 종토마저도 위태위태하게 관리되고 있는 금석에, 비로소 한숨이 트인 셈이니 문중의 사람들도 덩달아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사에는 다마라고 하였던가. 어찌 그리 선인들이 남긴 말에는 틀림이 없는 것일까. 여러 사람에게 무던하였고, 본인 자신도 늘 마음을 평정하게 가지던 그 심덕으로 보나, 잔병 치레 한 번 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 그네는 병의를 출산한 지 두 달 만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산욕열이었다.
"세상이 고르지 못한가... 사람이 같은 일을 두 번씩 겪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것이 웬일일까요?"
"그러게나 말이야. 박복한 양반... 인제서야 겨우 마음 좀 돌려서 다숩게 지내려는가 싶었드니만 무슨 신수가 그렇게 사나우신고."
"도무지 요사할 사람 같지가 않든데. 그렇게 후덕하고 한가로운 부인의 성품 어디에 그런 단명을 타고났던가."
"누가 아니랍니까. 그래도 천만의 다행으로 아들을 둘이나 남기고 갔으니 불행 중에 다행한 일이올시다."
"다행이나마나, 이제야 핏덩어리. 짜박짜박 걷는 애기에다 젖 먹는 갓난 것 형제 일도 보통 일이 아니네."
"저 사람의 성품으로 삼취를 허겄는가. 재취도 그토록이나 안하려던 게 바로 엊그제 아니라고? 허나, 사람이 작배허지 않고 혼자서는 지낼 수 없는 법, 그 일만 해도 한 짐거리 근심이네."
"나이나 좀 지긋헙니까... 이제서야 막 서른 안팎에 두 번씩이나 그런 흉사를 당허다니요, 참. 인생 초장에."
"모친 한 분만이라도 생존하여 계시다면 정황이 이렇게나 적막 강산같지는 않을 것이네."
"사람 사는 집이란, 여자가 있어야 안팎으로 훈김이 어리는 법인데."
시부의 조항과 숙항의 어른들이 마주앉기만 하면 어두운 얼굴로 음성을 낮추어 염려하고 의논하는 것은 그 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시부는 초취 박씨를 잃었을 때보다 태연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조마조마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저 사람이 왜 저러까... ."
"아예 넋을 놓아 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모르겄네."
"심기가 허애서 금방이라도 쓰러질까 싶으드니마는 저렇게 침착한 것을 보니 외려 더 맘이 쓰이지 않는가."
한씨부인 시신에 염습을 하려고, 자단향을 물에 끊이고 있을 때, 그 향기가 무겁고 눅눅하게 집안을 누르는데, 시부는 눈을 지긋이 감고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죽은 한씨부인의 두발을 감기고 빗질을 한 뒤, 목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끝에 낙발 몇 오라기가 떨어졌다. 염습을 하던 부인은, 낙발을 한 오라기도 떨어뜨리지 않고 종이에 싸서 작은 명주 주머니에 담아 넣었다. 사람이 죽으면 머리카락에도 힘이 빠지는가, 낙발을 줍던 부인은 스러질 듯 잡히던 그 감촉을 훗날에도 이야기하였다. 낙발을 담은 명주 주머니는 각각 그 옆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세필로, 속에 들어 있는 것의 내용을 써 두었다.
그날 밤, 시부는 병풍 뒤에 홑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망처 한씨부인 곁에 홀로 앉아 밤을 세웠다. 그는,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홑이불을 벗기고, 이미 풀숱으로 코가 막혀 있고, 충이로 하얗게 귀가 막혀 있는 한씨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망실 한씨는 머리결도 보이지 않게 검은 헝겊으로 감아서 싸놓았는데, 골무만한 낙발 주머니가 그 옆에 있었다. ... 내 언제, 한 번이라도 이 머리를 생전에 다정하게 쓸어 준 일이 있었던가. 아침 저녁마다 참빗으로 물기를 발라서 빗어내리던 이 머릿결을, 지나가는 손길로라도 어루만져 본 기억이 그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 이제는... 머리를 빗을 일도 없으리라. 시부는, 망실의 낙발 주머니를 어루만져 보았다. 밤톨만한 주머니는 그러나 헐렁하였다. 그것이 또한 시부의 마음을 내려앉게 하였다. 그 손 옆에 힘없이 놓인 오낭, 손톱 발톱을 깎아 넣은 작은 주머니를 보는 순간, 시부는, 이 여인이, 박씨로 착각되었다. 가슴이 써늘하게 식어내리며 찬 기운이 한복판에 얼음처럼 섬뜩하게 끼쳐들었다. 시부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곡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렇게 나무토막처럼 우두커니 앉아서 밤을 새울 뿐이었다. 그리고는, 한씨부인 영위 앞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때,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진설된 찬수마다 일일이 젓가락을 대 주었다. 그런 모습은 침착하고 정성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문상을 받으면서도, 어린 두 아들 형제를 대하면서도, 집안의 남노여비를 거느리면서도,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난 사람같지 않게 조용하였다. 사람들은 일변 그의 불행이 근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러한 시부의 태도를 보고 마음이 놓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시부는 사실상 거의 반이나 넋을 잃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기었건만, 그는 속이 삭아 버려 텅 빈 고목처럼, 겉모습만 그렇게 의연한 척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나마 누가 밀기만 하면, 푸석 무너져 쓰러질 것 같았으나 상당한 날이 지나도록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저 얼핏 보기에는, 원래 말수가 적었던 사람이 그나마 줄어들어, 누구와 말을 나누지 않는다는 점만이 좀 달라진 것같이 보였다. 그것도 아직 나이 젊고, 거기다 남자이니, 당분간만 지나면 괜찮아지리라고 생각들을 하였다. 어찌 되었든, 덩그만 고가에는 노복과 계집종에 행랑것들을 제하면, 어린아이의 유모와 더불어, 위로는 시부가 단 한 사람의 어른이요, 아래로는 젖먹이 두 아들이 가족의 전부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참으로 난감한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위태위태한 일이로다."
결국, 어른 중의 노인 한 분이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근심은, 훗날, 그대로 들어맞고 말았다.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
청암부인이 사무치게 뼈에 새겼던 그 말은, 어찌 보면 사실 인력을 다하지 않았던 시부에 대한 명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디... ."
옹구네가 목에 걸었던 무명 수건 자락으로 이마를 훔치며 평순네를 향하여 말소리를 낮춘다. 평순네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이제 해는 어느덕 중천으로 떠오르고, 들판에 엎드린 사람들의 낯빛도 발갛게 대추같이 익어간다. 평순네의 이마에도 땀이 번질거린다. 옹구네나 평순네는 모두 매안의 아랫몰 물 건너, 한식경이나 벗어난 골짜기 거멍굴에 살고 있는 아낙네들로, 놉이라 할 것도 없이 궂은일, 잔일 마다 않고 문중에서 허드렛일이 있을 때면 으레 맡아 하였다. 굳이 무슨 몫을 구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따로 정해진 새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하는 대로 부스러기를 얻어먹었다. 오랜 세월 전부터 오늘날까지, 고목의 언저리에 저절로 버섯이 돋아나듯, 반촌의 그늘에서 그들은 살아왔다. 아마 거멍굴이라는 이름도, 남루한 그들의 마을 복판에 검은 덩치로 커다랗게 우그리고 앉은 '근심바우'에서 생겨났다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옷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밤낮없이 흙밭에서 뒹굴고, 험한 잡일에 시구의 연명을 걸고 있자니, 손톱발톱을 깎지 않아도 자랄 틈이 없는데, 의복인들 제때에 빨아 입고 지어 입을 수 있으며 간수할 수 있었을까. 그저 몸 꿰고 나가면 석 달 열흘이 지나도 철이 바뀌기 전에는 누더기가 다 되도록 갈아입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어떻게 흰 무명옷으로 떨쳐입을 수 있으리요. 거멍물 들인 다섯새 무명 치마폭을 무릎까지 드러나 보이기 예사였다.
때깔나게 발등에 찰랑거리는 치마란 상상도 할 수 없았다. 그런데 치맛자락 여미는 태도 법도가 있어, 거멍굴의 아낙들은 모두 상것, 천민이라 오른쪽으로 자락을 둘러 입었다. 그것이 법이었다. 왼자락 치마를 입을 수 있는 것은 반가의 부인들뿐이었다. '거들치마'말고는 '두루치'가 있는데, 이것도 폭이 좁고 길이도 짧아 낡아빠진 고쟁이가 드러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치마라고 해야 정강이나 덮는 둥 마는 둥이었다.
"새벽 질삼 질기는 년, 사발옷만 입고 간다."
는 민요가 생길 만한 것이다.
"죽고 살고 엎어져서 논 매고 밭 매도 이년의 목구녁에는 보리죽어 닥상이고, 손톱 발톱 다 모지라지게 베를 짜도, 내 평생에 얻어입은 것은 요 사발만헌 두루치 한 쪼각이여."
그것은 항상 옹구네가 내뱉는 한숨에 섞여 터져 나오는 넋두리였다. 그렇게 구차한 의복에다, 몇 백 년을 두고 상민들에게는, 값비싼 주옥과 보패를 지니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복색에 있어서도 황, 자, 홍색을 금하였으니, 옷고름짝 반토막 고운 빛이 없어 거멍굴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거멍굴에도 오색이 찬란한 날이 있었다. 이날만은, 아무도 아무것도 이들의 차림새를 간섭하지 않았으니, 형편만 허락한다면 마음껏 꾸미고 입고 온갖 치장을 다 해도 좋았다. 문무 백관 벼슬아치가 입는 사모관대와 신분 높은 부녀자의 예장인 화관, 족두리, 원삼으로 얼마든지 치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혼례가 있는 날이다. 나라에서도, 혼례만은 인륜의 대사라서 특별히 은사를 내리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겐들 대례청의 청, 홍이 휘황하게 느껴지지 않으리오만, 이 거멍굴 사람들에게 찍혀 있는 그 찬란한 빛깔은 일생에 한 번이어서 유독 선명하고, 선명한 만큼 소중하였다. 그것은 옹구네도 마찬가지다. 그네는 언제라도 그날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주욱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에 코를 팽 풀어 가면서. 옹구네의 콧방울이 벌름한다.
"새서방님은 아직도 재양을 안 가셌담서?"
"그러셌다대... ."
새서방님이란 강모를 이르는 말이다. 평순네는 지나가는 말로 대꾸를 한다. 옹구네의 목소리가 더욱 은근해진다. 혼인하고 돌아온 신랑이 처음으로 처가에 다니러 가는 것이 재행인데, 강모가 그 일을 미루고 있다는 소문이 그네를 근지럽힌다.
"어쩔라고 그런디야?"
"그 속을 누가 알겄능가잉?"
"핀지도 안허겟스까?"
"아, 핀지 허실 양반이 그러고 지겟스까잉, 여그서 거그가 먼 천릿질이라고."
갑자기 평순네가 한 다리를 들며 손바닥으로 철썩 내려친다.
"아이구, 이 호랭이 물어갈 노무 거마리."
핏방울이 맺히는 다리에 진흙을 발라 문지르며 그네는 논바닥에 침을 탁, 뱉는다.
"거마리만 없어도 농사짓기 일도 아니지 머. 참, 근디 요새 율촌샌님도 벨라 심기가 안 좋으싱갑대."
옹구네는 옮겨진 못줄을 따라, 뒤로 한 발 물러나며 말한다.
"그 어른은 머 어지 오늘 그러시간디?"
"그렇게 말이여. 왜 대실로 상각 갔다 오세 갖꼬는 더 무서진 것맹이데. 원래는 그러시기는 허지마는."
"저번에 봉숭 돌릴 때 봉게는 신부댁이서 채리기는 아조 딱 부러지게 때깔내서 걸판지게 채렛능갑드만."
옹구네는, 신부집에서, 신랑상과 상객상에 고였던 음식을 하인 노복들이 끝도 없이 이고 지고 줄을 서서 마을로 들어오던 때를 떠올린다. 입이 벌어지게 긴 행렬이었던 것이다.
"아앗따아... 겁나데에, 참말로오. 그날 대실서 온 음석들 보고 안 놀랜 사램이 있었이까아? 지체 있는 지안은 달르데잉."
대실에서부터 매안으로 이고 지고 온 그 혼례의 큰상물림 음식들은 봉숭 돌린다고 하여 온 마을에 돌려졌었다. 대소가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깍듯하게 한 상씩 보냈으며, 아랫몰 타성바지들에게까지도 인심스럽게 돌아갔다. 호제, 머슴들은 심부름에 땀이 났다.
"대실은 곡성서도 더 한챔이나 내리가는 전라남도 어리다등만, 어뜨케 갖고 왔간디 이렇게 식도 안했이까아?"
"긍게 말이여, 어직도 음석이 따숩그만 그리여."
"아앗따아 그러고, 무신 음석이 그렇게 한 줄로 줄줄이, 정그정서부텀 원뜸 꼭대기까지 허옇게 서서 들고 가겄게 많당가이."
"그렇게 다 부자고 양반이고 안 그렇게비여?"
"겁나데에. 우리 펭생에 자석들허고 꼬약꼬약 배야지가 터지게 먹고 먹다가 죽어도 그만큼은 다 못 먹지 싶으데."
음식은 그러고도 얼마만큼이 남았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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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4. 분노
<분노가 일 때 그걸 엉뚱한데 풀거나 억제하지 말라. 분노란 긍정적인 쪽으로 바꿔쓸 수 있는 아름다운 현상이다>
학승이 스승을 찾아 말하기를,
<스승님, 제겐 참 처치곤란한 못된 성질이 하나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요?>
스승이 말하기를,
<거 재미있는 소릴세. 어디 한번 뵈다오>
학승이 말하기를,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뵈드릴 수가 없군요>
스승이 말하기를,
<그럼 그게 있을 때 와서 뵈다오>
학승이 다시 말하기를,
<그게 생겨나 있게 되더라도 아마 못 뵈어 드릴 겁니다. 아주 뜻밖에 생겨났다가는 제가 달려오기도 전에 금새 없어져 버릴테니까요>
스승이 다시 말하기를,
<그런 거라면 그대의 것이 아니잖은가. 정말 그대 것이라면 언제라도 내게 뵈줄 수 있어야지. 그건 그대가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게 아니야. 밖에서 주워온 거지. 한즉, 그놈이 또 생겨나거들랑 멀찌감치 달아날 때까지 지팡이로 네 머리통을 막 쳐라 쳐>
앞으로 화가 나거던 한 일곱 바퀴쯤 집 주위를 뺑뺑 돈 다음 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그게 어디로 가는가 보라. 분노는 일종의 심적 구도다... 그러므로 그걸 억제한다거나 억누른다거나 남한테 토해내지 말라. 좀 달래버거나, 아니면 베개같은 것을 집어 던지거나, 막 쳐보라. 긴장이 풀릴 때까지. 분노는 일어나는 것. 분노는 아름다운 것. 구름과 구름이 부딪쳐 일어나는 번개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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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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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세 치의 혀로 다섯 나라를 움직인다 - 자공
자공은 한 번 순행하여 다섯 나라에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였다. 즉 노나라를 존속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그리고 원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
자공은 공자보다 31세 어린 제자다. 그는 말재주가 뛰어났는데, 그래서 항상 공자로부터 '말을 경계하라'는 꾸중을 듣곤 하였다. 제나라의 대부 전상이 난을 일으키려 하나 고, 국, 포, 안 씨 사성의 대부들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전상은 강력한 군사를 놀리기가 아까워 아예 노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공자는 이 소문을 듣고 제자들을 불러 말하였다.
"노나라는 우리 부모의 나라며,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처럼 나라가 위태할 때 너희들은 어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자가 없는가?"
그러자 용맹스런 자로가 나서기를 청하였다.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장과 자석이 나섰으나 공자는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공이 나서자 공자는 흔쾌히 허락하였다. 자공은 곧 길을 떠나 제나라로 가서 전상을 만났다.
"지금 노나라를 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노나라는 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어째서 그렇단 말이오?"
전상이 물었다.
"대체로 노나라의 성은 두께가 얇고 높이가 낮습니다. 못은 좁고 얕습니다. 군주는 어리석으며, 대신들은 거짓말을 잘합니다. 또한 백성들은 전쟁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런 나라와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오나라를 치느니만 못합니다. 대체로 오나라는 성의 두께가 두껍고 높이가 하늘을 찌릅니다. 못은 넓고 깊습니다. 무기와 장비는 튼튼하고, 모두가 최신의 것입니다. 군사들은 정선되어 있으며 식량은 풍족합니다. 또한 현명한 대부를 시켜 성을 다스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치기 쉽습니다."
자공의 말에 전상은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들어보니 대체로 그대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쉽다고 하고, 그대가 쉽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오. 지금 그대는 나를 놀리고 있는 게 아니오?"
"근심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강한 자를 치고, 근심이 자기밖에 있는 사람은 약한 자를 친다고 합니다. 지금 제나라는 근심이 나라 안에 있습니다. 상공께서는 제나라 군주로부터 세 번이나 봉을 받으려 하였으나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께서 힘이 약한 노나라를 쳐서 제나라의 땅을 넓히면, 군주를 교만하게 만들뿐입니다. 싸움에 승리하여도 견제하는 대신들이 많아 논공행상에서 상공께서는 큰 이득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노나라를 치는 것은 오나라를 치는 것만 못합니다. 강한 오나라를 쳐서 이기지 못하면 백성들은 나라 밖에서 죽게 되고, 대신들은 나라 안에서 그 지위를 잃는 자가 많게 됩니다. 그러면 상공께서는 적이 될만한 대신들이 적어지는 데 반하여, 군주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즉 군주는 믿을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고립됩니다. 이런 시기에 이르면 제나라를 제어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직 상공뿐입니다. 자연히 군주는 상공께 매달리게 되지요."
자공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였다. 전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좋은 생각이나 벌써 군사를 노나라로 충동시켰소. 만일 도중에 진로를 오나라로 바꾸면, 대신들이 나를 의심하게 될 것이오."
"상공께서는 아무 염려 마십시오. 일단 노나라 국경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저는 곧 오나라로 가서 노나라를 구원하여 제나라를 치도록 만들겠습니다. 이때 상공께서는 노나라 대신 오나라 군대를 맞서 싸우십시오."
전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자공은 곧 제나라를 떠나 오나라 왕에게 가서 말했다.
"흔히 왕자는 남의 나라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패자는 적을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대국인 제나라가 소국인 노나라를 쳐서 오나라와 그 강함을 다투려 합니다. 이것은 오나라에게 실로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소국인 노나라를 구제하는 것은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되며, 제나라를 치는 것은 상대의 강한 기를 꺾고 오나라의 강함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명분은 멸망하려는 노나라를 존속시키고, 실리는 강한 제나라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니, 오나라로서는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나라를 치십시오."
오나라 왕 부차가 말했다.
"좋은 계략이오. 그러나 과인이 일찍이 월나라를 친 일이 있는데, 지금 월나라 왕 구천은 지난 날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자신을 괴롭혀 가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소. 그러니 우리 오나라로선 먼저 월나라를 친 뒤에 제나라를 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소."
"그렇지 않습니다. 월나라는 노나라보다 강하지 못하며, 오나라의 강함은 제나라보다 우세합니다. 대왕께서 지금 제나라를 버려두고 월나라를 친다면, 그러는 동안에 제나라는 노나라를 평정하여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강자를 버려두고 약자를 치는 것은 결코 용자라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용기 있는 사람은 어려운 것을 회피하지 않으며, 어진 사람은 곤궁한 자를 궁지에 빠뜨리지 않으며, 지혜있는 자는 때를 잃지 않고, 왕자는 남의 나라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월나라를 존속시켜 제후들에게 대왕의 인의를 보여주고, 노나라를 구원하고 제나라를 쳐서 그 위엄을 진나라에 과시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제후들은 반드시 오나라로 달려와 조회에 임할 것이고, 자연히 대왕의 패업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월나라가 마음에 걸린다면, 제가 동쪽으로 가서 월나라 왕에게 군대를 동원토록 하여 제나라를 치기 위해 출정하는 오나라 군대에 종군할 수 있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월나라의 성을 비우게 하는 것이고, 명분은 제후를 종군시켜 제나라를 치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자공의 말에 오나라 왕은 미소를 지었다.
"월나라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소."
자공은 자신이 곧 월나라 왕 구천을 설득시키겠다고 오나라 왕과 굳게 약속하였다. 자공이 월나라로 들어서자, 왕 구천이 교외까지 직접 나와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곳은 오랑캐 나라와 근접해 있는 오지입니다. 선생께서는 어찌 이런 오지까지 찾아주셨습니까?"
월나라 왕은 자공을 자신의 마차에 태워 궁궐까지 안내하였다. 궁궐에 들어간 자공이 월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제가 오나라 왕에게 노나라를 구원하고 제나라를 치라고 설득하였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월나라를 정복한 후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월나라는 크게 위태롭게 됩니다. 대체로 보복할 뜻이 없으면서 남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것은 졸렬한 처사이고, 보복할 뜻이 있는데 남으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할 때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소문이 나는 것은 위험천만이니, 이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자공의 말이 백 번 옳다고 생각한 월나라 왕은 두 번 머리를 숙여 절한 뒤 물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회계산에서 오나라 왕 부차에게 당한 치욕이 가슴에 맺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분통함이 골수에 사무치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니, 부디 부차를 죽이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자공이 말하였다.
"오나라 왕 부차는 사람 됨됨이가 모질고 사나워서 군신들이 견디지 못하며, 나라는 잦은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하였으며, 사졸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의욕을 잃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왕을 원망하고 있으며, 대신들의 마음은 그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대왕께서는 진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오나라를 돕고, 귀한 뇌물을 바쳐 왕 부차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오나라 왕은 기필코 월나라보다 먼저 제나라를 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군사를 일으켜 원수의 나라를 돕게 하고, 원수인 부차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란 말입니까?"
"네, 그래야만 오나라왕은 월나라가 자기네 나라를 칠 생각이 없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나라가 강한 제나라에 패할 경우, 대왕께는 비로소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오나라가 제나라와 싸워서 이기면 오만해져 그 기세를 몰아 진나라를 칠 것이니, 제가 이제 진나라 왕을 뵙고 오나라를 치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나라는 제나라와 싸워 군대가 약화되고, 진나라가 쳐들어오니 안팎으로 피곤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대왕께서 피폐해진 오나라를 공격하면, 반드시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월나라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자공은 진나라로 가기 전에 우선 오나라로 다시 가서 왕부차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대왕의 말씀을 전하였더니, 월나라 왕 구천은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날 회계산에서 대왕이 자신을 풀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느끼고 있으며, 감히 음모는 생각할 수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자공의 말을 듣고 오나라 왕은 적이 안심하였다. 그로부터 5일 뒤 자공은 다시 월나라로 가서 대부 종으로 하여금 오나라 왕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게 했다.
"동해의 역신 구천의 신하인 소신 종은 감히 대왕께 문안드립니다. 지금 가만히 들으니 대왕께서는 장차 대의로 군사를 일으켜 강국을 공략하고 약국을 구원하신다 합니다. 포악한 제나라를 제압하고 주왕실을 편안케 하시겠다니, 우리 월나라에서는 자청하여 사종 3천 명을 동원하고 대왕께서 친히 무기를 들고 선두에 서겠다 하십니다."
월나라 대부 종은 자공이 시킨 대로 이렇게 말하고는 갑옷 20벌과 창, 명검 등을 오나라 왕에게 선물로 바쳤다. 오나라왕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자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우리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는데 월나라에서 군사 3천을 보내겠다고 했소. 월나라 왕 구천이 친히 종군하겠다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남의 나라를 텅비게 하고, 남의 나라 왕으로 하여금 종군케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그 예물과 원군만 받아들이되, 월나라 왕의 종군만은 사양토록 하십시오."
오나라 왕은 자공의 말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오나라 왕은 9군의 군사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였다. 자공은 바쁘게 진나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진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모름지기 미리 계략을 꾸며 놓지 않으면 만약의 사태에 대처할 수 없으며, 군비를 갖춰놓지 않으면 적에게 승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오나라가 지면, 그 기회를 노려 반드시 월나라가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점령할 것입니다. 만약 오나라가 제나라를 이긴다면, 오나라는 그 기세를 몰아 진나라를 공격해올 것입니다. 진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두 가지의 결과가 다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소. 우리는 오나라가 이겨도 져도 불만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군비를 정돈하고 사졸들을 쉬게 하여 만약의 전투에 대비토록 하십시오."
진나라 왕은 자공의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자공은 기나긴 순행을 마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선생님! 일을 무사히 끝냈습니다."
"수고했다. 네가 세치의 혀로 노나라를 구했구나."
공자가 말하였다. 한편 군사를 일으킨 오나라는 애릉에서 제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그리고 나서 자공의 말대로 곧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는 자공의 계략을 받아들여 완벽한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오나라 군대를 격파시켰다. 월나라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에 패하고 돌아온 오나라 군대는 다시 월나라 군대를 맞았는데, 세 번 도전하여 세 번 다 월나라에 패하였다. 이때 오나라 왕 부차는 자결을 하였으며, 그후 3년만에 월나라는 패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자공은 한 번 순행하여 다섯 나라에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였다. 즉 노나라를 존속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그리고 월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
이이제이 : 자신의 능력이 모자랄 때에도 승리의 방법은 있다.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면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세력과 적대와 견제의 관계에 놓인 또다른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관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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