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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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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3/4)
3.1운동과 오산학교의 영향
1924년 나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서 떠날 때는 한때 미술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습니다. 나는 거기 상당히 취미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정했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 주려 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겨울도 지나가고,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려 나섰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이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선생님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어느 날 우치무라 선생의 시를 소개해주시다가 그의 유명한 백치원에서의 일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이 펜실베이나 주 어느 백치원에 있었던 일이 있는데, 거기 아주 악질적인 백치인 대니라는 아이가 있어서 어느 일요일에 잘못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규칙으로 하면 마땅히 저녁 아니 주는 벌을 세워야 했으나 거룩한 날에 차마 할 수 없음을 생각해서 자기 밥을 대신 그에게 주고 자기는 굶었으므로 그것이 그 백치원의 전 학생을 감동시켰고 그 할 수 없던 대니로 하여금 해가 가도 아니 잊고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하게 했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그것을 듣고 감명깊어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살아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우치무라가 살아 있어 성경 강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나의 놀람, 또 기쁨! 물론 위대하다고만 들었지 그의 신앙 사상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다만 존경하는 선생님이 소개해주신고로 무조건 믿고 존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곧 김교신의 소개로 그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를 무교회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는 훗카이도 대학 출신으로 “얘들아 야심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입니다. 미국 앰허스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한 일이 있었고, 그의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됐는가’하는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일도 했으나 강직한 사무라이 기질에 자유독립의 정신이 강했던 그는 교회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 수 없어서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했는데,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 한다고 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인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아주 전통적인 신앙인 데 있습니다. 한때는 신문기자로 이름을 날린 일도 있고 천황의 칙어에 대해 경례를 정중히 하지 않았다 해서 국적으로 몰렸던 일도 있습니다. 저서도 퍽 많고 지금 일본의 정신적 지도층에는 그이 제가가 많고 우리나라에서도 표면으로 무교회라고 시비는 하면서도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은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갔던 날 그는 에레미야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애국심이 강한 그는 “이것이 참말 애국이다”하면서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지금도 그날의 인상을 잊지 못하며 계속해나가는 동안 오랜 번민이 해결되고 나는 아주 크리스천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치무라의 영향을 벗어나서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년 봄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할 만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나는 ‘요한복음’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고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날이 못되어 나는 역사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치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민족이요, 둘째는 신앙이요, 셋째는 과학입니다. 민족 없이는 나 없으니 나는 민족적 전통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내 신앙적 양심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나는 또 현대인으로서 실험을 토대로 하는 과학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나 민족 전통을 위해 과학적 진리를 구부리는 것은 비겁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사 생각 없이 진리 그 자체를 위해서 연구에 몰두한 과학자가 낡은 전통이나 교회 신조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일 지옥엘 가야 한다면 나는 그까짓 종교나 민족은 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세 가지 조전을 다 만족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역사 교육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가르쳐줄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고난의 메시아가 만일 영광의 메시아라면 고난의 역사가 영광의 역사 될 수는 어찌 없겠느냐?” 나는 십자가의 원리를 민족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십자가의 의미는 훨씬 더 깊어지고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건마다에서 전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얻어 교수를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나의 고난의 역사입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기조를 고난으로 잡고 그 견지에서 모든 사건을 해석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이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서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나오게 되려 할 때에 여섯이 의논하고 동인제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 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산 10년 동안 나는 대체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차차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여섯이 신앙 동지였을 때 우리는 다 교파적인 것을 싫어하며 무교회주의란 말도 잘 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 주장을 너무하여 하난의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쨌는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그러노라고 해도 밖으로부터 신앙교만이라 고답주의라 하는 평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차차 사람 수가 늘어감을 따라 그 중엔 우치무라를 존경하는 나머지 아주 숭배자가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 반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내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남이 그러는 꼴을 보아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 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땄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 해석의 참 맛을 조금 알고 어는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구 후부터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또 한편 독서의 범위를 넓혀가도록 힘썼습니다. 언젠가 우치무라 선생이 자기 제자들보고 “자네들은 밤낮 성서 성서 하지만 나처럼 이렇세 넓게 보지 않으면 안돼”하던 말이 늘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넓게 독서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해석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노라니 의문이 차차 생겼습니다. 전에는 문제 없는 것 같던 것들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그 하나는 자주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담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도덕 인간에게 대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의 대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전에 선생이 해주었던 말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거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체험보다는 감상의 도취인 것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과를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느니,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느니, 자기가 죽는다느니, 완전히 새로 났다느니, 하는 말을 지금도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거기 서로 분명치 않으면서도 서로 묻지 않기로 말없이 약속한 묵계가 있어 슬쩍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감정형으로 된 사람들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파고드는 사색형의 사람에겐 그것만으로 아니됩니다. 그러면 사색하는 것은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고 정죄합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신앙은 아무것도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린이의 것일 것입니다.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계에서는 행동하는 도덕 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두 미신에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대속이란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해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란 체험엘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벌써 역사적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조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이 없이 대신해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 곡 죄의 소멸은 없이 그저 기분으로만 감사하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속 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습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날의 진 빚을 물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 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죄를 아니 짓게 돼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서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서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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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구령 맞춰 하나 둘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황색, 붉은색, 밤색 피부의 아이들을 차례로 세웠으며 흑인 아이들을 제일 끝에 세웠습니다. 줄을 다 세워 놓고 보니 만족스럽지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을 맨 앞에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줄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다시 줄을 세우려고 아이들을 뒤섞어 놓았을 때 교장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기도 전에 교장선생님이 오시다니, 큰일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게 된 선생님은 아이들을 뒤죽박죽 있는 그대로 세웠습니다.
이윽고 교장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섰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백인 아이며, 흑인 아이들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다녀가신 후 선생님은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종전과 달리 선생님의 눈에 비친 아이들은 서로 다른 피부를 가진 아이들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사랑하는 여러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함께 어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신의 걸작품이다. (F. 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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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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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3. 인재는 키워서 써라 - 텃밭 경영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사실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표현은 우리 직원들에게 뿐만 아니라 요즘의 젊은이들을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 요즘의 신세대들은 그야말로 '제멋대로'다. 조직의 원리보다 개인의 욕망을 중요시한다. 흔히 하는 말로, 회식하자고 하면 애인 만나러 간다며 두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리는 세대다. 상사한테 눈 똑바로 뜨고 논리 따지는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들이 보자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참고만 살아왔던 자신의 직장생활을 떠올리며 본전생각에 시달릴 만도 하다. 나 역시 신세대들의 태도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따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따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똑 부러지는 태도는 좋지만 예의 없는 태도는 싫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어쩔 땐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건 나이 먹은 한 사람의 노인네로서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경영자라면 '사람의 꼴'을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경영자의 취향에 직원들이 맞춰서 스스로를 바꿔 나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이다. 경영자가 직원들의 취향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해주어야만 회사에 탈이 나지 않는다. 그것을 비굴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영자로서 좀 문제가 있다. 사장은 하나지만 직원은 여럿이다.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이 맞추게 되면 여러 사람의 다양한 재능들은 죽게 마련이다. 신세대들이 몰고 오는 새로운 공기는 참으로 신선하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과감히 버리자는 솔직함이 있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즉시 행동으로 보여준다. 불편한 환경이 끝끝내 바뀌지 않는다면 아예 환경을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환경이 자신의 취향대로 바뀌었을 때 그들은 열광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무섭게 몰두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빠르고 현명한 법이다. 기성세대들은 언제나 사람을 바꾸려고 안간힘이다. 혼내고 회유하다가 결국은 사람을 놓치거나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신세대들은 비교적 정확하다. 적당한 조건이 조성되어야만 움직인다. 어떤 면에서는 참 다루기 쉬운 세대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건을 마련해주지 않고 그저 붙잡아두기만 하면 몸만 남기고 머리는 도망간다.
능력 있는 경영자라면 '내 멋대로 하는 신세대'를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내 멋대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어야 한다. 신세대들은 '내 멋대로' 해야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신세대인 것이다. 사람의 꼴을 잘못 보는 경영자를 직원들은 따르지 않는다. 잔소리 많고 불만 많은 사장은 피곤한 '어른'일 분 결코 '리더'가 되지 못한다. 경영평가단의 보고서는 내게 어떤 선택을 강요했다. 기업문화의 방만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방만함음 물론 그쪽 표현이고, 내 말투로는 '자율'과 '방임'이다. 어떻게 지지고 볶든지 간에 해보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었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는 성과들이 어지럽게나마 쌓여갈 것이고, 그런 것들이 언젠가는 '물건'을 만들어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상당한 기간을 관찰했으면서도 결국 경영평가단이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들이 퇴근한 후에도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불빛이다. 한 사람이 남아 있건 열 사람이 남아 있건 항상 누군가는 밤늦도록 남아서 연구에 몰두한다. 낮에만 우리를 관찰하는 평가단은 직원들의 흐트러진 옷차림과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며 경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세대들의 노는 방식이다. 아무도 간섭하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자기가 고용주인지 고용자인지도 곧잘 잊어버린다. 그저 재미있으니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연구소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온갖 장난감들이 있으니 집에 가기 싫은 것이다. 놀아도 돈을 주니 신나고 흥미로운 것이다. 경영평가단이 진단을 끝내고 우리와 함께 구조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연구팀 쪽은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다. 평가단측에서는 물론 강력히 반발했다.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물러설 순 없었다. 가장 문제가 많다는 바로 그 부분이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에너지 박스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직원들에게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관리직에 있는 놈들, 괜히 엔지니어들 무시하고 휘두르려 들면 알아서 해. 너희들은 후방지원부대야. 우리한테는 개발팀이 선봉이라구. 걔네들 요구하는 거 아예 트집 잡을 생각 말고 다 들어줘. 우리는 걔네들 심부름이나 해주면 겨우 밥값 하는 거야."
그러면 직원들은 그저 웃는다. 다소 과장되게 이야기했을 뿐, 미래인 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아주 우연히 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책이었는데 무엇보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네 멋대로'라는 표현을 즐겨 쓰게 된 경위가 그랬다는 이야기다.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빠르고 현명한 법이다.
기성세대들은 언제나 사람을 바꾸려고 안간힘이다. 혼내고 회유하다가 결국은 사람을 놓치거나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상당한 기간을 관찰했으면서도 결국 경영평가단이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들이 퇴근한 후에도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연구소의 불빛이다. "관리직에 있는 놈들, 괜히 엔지니어들 무시하고 휘두르려 들면 알아서 해. 너희들은 후방지원부대야. 우리한테는 개발팀이 선봉이라구. 걔네들 요구하는 거 아예 트집 잡을 생각 말고 다 들어줘. 우리는 걔네들 심부름이나 해주면 겨우 밥값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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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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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최명희
혼불 1. 3. (3/3)
강모는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왜 안 들어와? ... 들어와."
아마도 그네는 숙부 내외를 따라 큰댁으로 올라왔던 길인 듯싶었다. 그런데 오류골 숙부 내외와 강태는 사람들이 들어차 웃음 소리로 넘치는 큰방에서 보았지만, 강실이는 눈에 띄지 않았었다. 강모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어 서 버리자 강실이 쪽에서 주춤주춤 움직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혼행길은, 무사하... 셨어요?"
그 더듬거리는 말의 끄트머리 때문에, 강모는 순간 아찔하였다. 무사하... 셨어요? ... 셨어요... ? 마음이 서늘하게 식으며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렇게 강실이가 멀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강모의 탓이 아니라, 그네가 그만큼 멀찍이 비켜 버린 탓이었을까. 강모의 혼인으로 인하여 강실이의 말투가 바뀐 것이다. 그것은 그를 어른으로 대접하는 당연한 절차였건만, 얼마나 어색한 일이었던가. 무거운 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 같았었다. 그런데 그 강실이가 지금 그때처럼 머뭇거리며 함지박을 들고 저만큼 빗기어 서 있는 것이다.
"누구 왔냐?"
방안에서 기응의 소리가 들려오자, 그때서야 강모는, 저예요, 하고 걸음을 떼었다. 저녁 까치가 집을 찾아오고 있는지 허공에서 까작까작 소리가 울린다. 잔설을 스치는 바람 끝이 차다.
"그래, 개학은 언제 허는고... ."
기응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의 허두를 그렇게 꺼낸다. 아까 참에 큰집에 들렀던 강태도 강모와 두 학년 차이로 전주고보에 다니고 있어서 학교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암만해도 객지란 내 집 같지 않은 법이라 고생 많이 될 것이다."
기응의 말 사이에 바람 소리가 섞인다. 강모는 그런 말들을 듣고 있지 않았다. 기응도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숙질은 서로 말이 끊긴 채 앉아만 있다. 말이 끊어진 사이로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그릇 씻는 소리가 달가락 달가락 들려온다. 그 소리는 강모의 마음에 음향을 울리며 얹힌다.
"낯 모르는 사람끼리 처음으로 만나서, 무슨 정이 그렇게 샘문같이 솟아난다냐. 사람의 정이란 나무 키우는 것 한가지라. 그저 성심껏 물주고 보살피고 맏어 두면, 어느새 잎사귀도 나고, 꽃도 피고, 언제 그렇게 됐는가 싶게 열매도 여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울안에 갖다가 심어 놓고 천대허면 못 크는 법이 아니냐... . 정도 그와 꼭 같으다. 이왕에 정해진 일,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것이고... . 내 맘 하나 먹는 것에 따라서 여자의 한평생이 죽고 사는 일이 달렸다면, 어쩌든지 내가 맘을 다숩게 먹어야지... 안 그러냐... . 사람 하나 잘못되는 것... 순간의 일이지."
한참만에야 입을 연 기응은 등판을 달겨 부싯돌을 그으며, 한 마디 한 마디씩 끊겨가며 천천히 말한다. 목소리에 등잔불의 그을음이 섞여든다.
"생각허면... 네가 여느 손자하고 어디 같은 손자냐. 그게 이렇다. 이름이 같다고 몫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지. 너는 이 집안의 대종손이란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청암할머니가 그 어떤 분이시냐. 비단 이씨 문중에서만 어른이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 남원 군내에서는 그 이름이 울리지 않은 데가 없으니, 일찍이 소년의 나이에 청상으로 홀로 되셔서 오늘날을 이루기까지 그 양반의 고초가 어떠했는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른의 의지는 누가 감히 흉내를 못내게 대단한 것이지. 그런 양반의 손자로서 너도 남달리 처신을 해야 할 것이다."
바깥에 잔바람이 지나가는가. 문풍지가 더르르 울리더니 등잔불이 흔들린다. 자박 자박 자박. 정지에서 헛간 쪽으로 가는 발자국 소리가 불꼬리를 밟는다. 강모는, 검은 그을음을 뱉으며 잦아드는 작은 불이파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강실이가 지나간 자리에서 일어난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이렇게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사무치게 느낀다.
"그러고오."
기응은 다시 말머리를 잡는다.
"할머님도 이제는 연만허시다. 어른이 몸소 생산은 못하셨지마는 아드님이라도 손이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 하나를 독자로 두었을 뿐이니 마음에 근심이 크실 게 아니냐. 네 위로 누이가 둘이 있었다고 하나, 작은누이는 그렇게 실없이 일찍 죽어 버리고, 큰누리 강련이만 해도 온전타 허기는 어려운 사람... . 집안 내력이 이러고 보니, 네가 아직 나이는 어리다만 어른 노릇을 해야 할 처지다. 그저 종가집이 흥해야 문중도 흥허는 법,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백 리라고 네 한 몸이 너 하나의 몸만은 아닌 것이다. 어쨌든지, 이번 일은 할머님 말씀대로 해라. 아, 그러고 할머님이나 네 아버님이나 모두 손자도 기달리시는데, 네가 그 소원을 풀어 드려야지, 안 그러냐?"
강모는 기응이 농담 삼아 덧붙인 끝의 말에, 속에서 불끈한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것이 결코 단순히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도 강모의 심사를 북돋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살갗을 거꾸로 거스르며 돋아나는 수치심이 소름처럼 끼치는 것은 모를 일이었다.
(아들? 내가... 아들을?)
강모는 가슴이 손바닥만하게 좁아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빨을 물듯이 오그라들어 주먹이 되어 버린다.
"그만 가볼랍니다."
그 주먹이 목구멍을 치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모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왜 그새 가게? 저녁이나 먹고 가지. 이얘기도 아직 덜했는데."
"그냥 가지요 뭐?"
기응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럼 그래라."
그의 목소리가 무겁다. 강모는 등잔 불빛을 털고 일어선다.
"어른 말씀 듣는 게 도리다. 심정 상허지 말고... ."
"... ."
"아조 어둡기 전에 그럼 어서 올라가그라."
"예."
강모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컴컴한 마루로 나선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야기를 띤 밤바람이 싸르락 뺨에 닿는다.
"참, 너 인월아짐댁에 세배 갔었드냐?"
강모의 뒤를 따라 나온 기응이 잊었다는 듯이 묻는다.
"... 아니요."
강모가 마루 끝에 선 채 대답한다.
"잊어 버리지 말고 꼭 가서 뵙도록 해라. 적적하실 텐데."
"예."
"사람이 도리를 다 챙기고 살자면 끝도 한도 없는 것이다마는, 그래도 그런 것을 늘 영념해 두어야지."
"예."
"대답만 허지 말고."
강모는 이번에는 대답 대신 토방으로 내려선다. 밤 기운이 밴 신발이 차다. 그래서일까. 몸이 오스스 떨린다.
"왜, 갈라고? 저녁 다 해 놨구마는."
마당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오류골댁이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정지에서 나온다.
"올라가서 먹지요."
"아니 왜 그렇게 금방 일어나? 아무것도 안 먹고는."
"또 내려오께요."
"오기는 언제 또 올래? 말이 쉽지. 그래 너는 작은집이 무슨 몇 천리 길이라고 그렇게 한 번 오기가 어려우냐? 오며 가며 좀 들어오지... . 넘의 집같이 사립문 앞을 그냥 지내가아. 늘."
오류골댁은 아무래도 서운하고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만큼 강모는 모처럼 온 것이다.
"아, 들어가그라아. 내가 금방 저녁 채려 주마."
"괜찮어요."
"너야 괜찮겄지마는 내가 서운해서 안 그러냐... . 들어가그라, 응? 오래간만에 강실이랑도 놀고. 그럼 식혜라도 한 그릇 마시고 가럼."
"집에 가서 먹지요."
"차암, 너도... . 누가 큰집에 식혜가 없어서 그런다냐... ."
그래도 강모는 발끝만 내려다본다.
"기어이 갈래?"
오류골댁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묻는다.
"그럼, 저 올라갈랍니다."
"그래라. 정 네가 그러면 어쩌겄냐. 저녁 다 됐는데 밥이나 한 그릇 따숩게 먹고 가면 좋겄그만."
강모는 그런 오류골댁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사립문 쪽은 더욱 어두웠다. 초생달이 하늘 한 귀퉁이에 걸려 있으련만 어둠을 비추기에는 너무나 가냘픈 것일까. 찬 별빛만 몇 개 보인다.
"강실아."
오류골댁이 정지에 대고 딸을 부른다.
"오라버니 등 좀 잡아 줘라."
그 말 끝에 강실이는 소리도 없이 등롱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강실이 비추는 등불의 불빛 때문에 강모의 그림자가 사람보다 먼저 사립문을 나선다.
"... 가시지요."
강실이는 강모 곁으로 다가서서, 한참만에야 그렇게 말했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잦아드는 소리이다. 그네가 들고 서 있는 등롱의 창호지 안쪽에서 붉은 불꽃이 은은하게 비친다. 그것은 불빛인데도 젖어 보인다.
"... 길이 어두워서... 밤길이라... 발 밑에 잘 보고 가시어요."
강실이의 목소리가 귀에 젖는다. 어깨가 금방이라도 손 안에 잡힐 듯하다. 어쩌면 강실이는 없는 것인지도 몰라. 목소리만 나를 젖게 하고, 옷자락 빛깔만 나부끼면서, 강실이는 정말로는 없는 것인지도 몰라. 아아, 강실아,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 강모는 사립문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겨울밤의 별빛들은 영롱하게 부서지며 바람에 씻기우고 있었다.
"나 갈라네."
한 걸음을 떼며 목에서 밀어내듯 강모는 말했다.
"조심해서."
"응."
대답 소리가 목에 잠긴 채 갈라진다. 사립문간에 강실이를 남겨 두고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에, 뒤에서 비춰 주는 등롱의 불빛이 걸려 긴 그림자를 만들어 준다.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들어가아."
하고 강모가 손을 들어 보인다. 강모의 눈에는 등롱의 불빛만 어둠 속에서 주황으로 번지고 있을 뿐, 강실이의 모습은 어둠에 먹히어 보이지 않았다. 컴컴하게 솟아 있는 솟을대문에까지 와서 돌아보았을 때도 등롱은 그렇게 아슴하게 비치고 있었다. 강모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강실이를 향하여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지금 강실이도 나한테 이렇게 손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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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2. 부분을 넘어서
<그대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 속에 있다. 부분에 집착하여 전체가 되는 걸 막지말라>
예수가 군중 앞에서 얘길 하고 있는데 누가 말하기를,
<예수, 당신 어머니께서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소. 당신을 보고 싶다 하시오>
예수 말하기를,
<내 어머니는 아니 계시니라>
예수가 어릴 적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큰 날이어서 예수의 가족은 사원엘 가야했는데 예수가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모는 아들을 찾아 보았다. 온갖 근심걱정 끝에 저녁 무렵에서야 겨우 그들은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예수가 노학자들과 함께 앉아서 애길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달려가 말했다.
<예수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어머니 아버지가 온종일 네 걱정을 얼마나 했다구>
예수가 말했다.
<제 걱정일랑 마십시오. 전 아버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요셉이 말했다.
<내가 네 아버지 아니냐... 여기서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더냐? 내가 아버지 아니냐!>
예수가 말했다.
<제 아버지는 하늘 나라에 계십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가 아니예요>
아이는 어머니의 몸을 떠나야 한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야 한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떠나야 한다. 아이가 정신적으로 태어날 때, 과거를 완전히 깨고 벗어날 때 비로소 처음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 스스로 있게 된다. 아이는 어머니 아버지 가족의 일부였다가 이제 전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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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새는 나무가지를 골라서 앉는다 - 공자
"새는 나무가지를 골라서 앉을 수 있으나, 나무가지가 새를 택하여 앉게 할 수는 없다...."
공자는 자신을 '새'에, 나라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자신이 앉을 '나무'를 찾지 못한 것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나라가 망하고 노나라로 피난하였다. 이름은 흘이고, 자는 숙량인 아버지와 성이 안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공자는 태어났다. 흘은 원래 70세가 넘도록 아들이 없어 친구가 자신의 딸을 흘에게 시집보내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공자이다. 공자는 어린 시절부터 장난을 할 때도 늘 예식에 쓰이는 그릇을 차려놓거나, 예절을 행할 때 필요로 하는 행동이나 말씨를 흉내내곤 했다.
성인이 된 공자는 노나라 귀족인 계손씨 집안의 일을 다스리는 가신이 되었다. 그때 그는 창고의 곡식을 들이고 내는 일을 맡았는데, 재고량이 언제나 고르게 유지되어 넘치거나 모자라는 법이 없었다. 또 목축의 일을 맡았을 때는 가축의 번식과 성장이 눈에 띄게 번성하였다. 그후 공자는 예절에 관한 학문을 익혔으며, 많은 제자들을 계속하여 길러냈다.
노나라 정공 때 공자는 중도라는 도시의 시장이 되었다. 그가 정사를 잘 베풀자, 불과 1년만에 사방의 모든 도시에서 그의 정사를 본받았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그는 곧 나라의 행정을 관장하는 벼슬인 사공이 되었으며, 다시 나라의 법을 관장하는 대사구로 승진하였다. 어느 날 노나라 정공은 제나라 경공과 협곡이라는 곳에서 회견을 갖게 되었다. 이 회견은 명분상 두 나라가 서로 화친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나, 그 뒤에 숨은 속셈은 제나라에서 노나라 왕 정공을 사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략을 눈치챈 공자가 정공에게 말하였다.
"이 회견은 마땅히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좌사마와 우사마를 거느리고 가셔야 합니다."
정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곧 군사를 관장하는 장관인 사마를 좌우에 거느리고 회견 장소로 갔다. 물론 공자도 따라갔다.
"오늘은 두 나라가 친교를 맺는 좋은 날이니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나라 관원이 먼저 이렇게 말한 뒤 악사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런데 악사들은 손에 깃발과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두드리는 북소리도 매우 시끄러웠다. 공자는 벌떡 일어서서 말하였다.
"이 자리는 두 나라가 친교를 맺는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저런 저속한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됩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제나라의 경공은 곧 음악을 멈추게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제나라 악사들이 북을 울리며 회견장을 시끄럽게 만들었으나, 그때마다 공자가 일어나 제지시키는 발언을 하였다. 이때 제나라가 무기를 든 악사들을 대동한 것은 시끄러운 음악으로 좌중을 혼란스럽게 한 후, 불시에 덤벼들어 노나라 정공을 포박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안 공자는 말로 악사들의 천박한 음악을 제지하여, 제나라 경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악사들을 물리치게 만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단호한 말과 태도로 제나라 경공을 설득하여 노나라에서 탈취해간 영토를 돌려받았다. 공자의 이러한 소문이 알려지자, 초나라의 소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초청하였다. 이에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은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만약 공자가 초나라에 가서 등용된다면 초나라는 더욱 강성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작은 나라들은 더욱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니 공자가 초나라로 가는 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진나라와 채나라는 군사를 풀어 공자 일행이 초나라로 가는 길목을 막았다. 평원에서 진나라와 채나라의 군사들에게 포위된 공자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들소도 아니요, 범도 아니면서 저 넓은 벌판에서 방황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이 바로 그런 신세로다. 내가 평생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 고난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그때 제자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도리는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큰것입니다. 너무 커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들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닥친 것이니, 저들의 우매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니 어찌 근심이 되지 않겠는가?"
공자가 다시 한탄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인 안회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근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소인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받아들여지지 않는데에서 참다운 학덕을 겸비하고, 지고한 인격을 지닌 군자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 일행이 벌판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곧 군사를 보내어 진나라와 채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리고 공자 일행을 무사히 초나라로 안내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두루 돌면서 도와 덕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를 두려워하여 어떤 왕들도 그를 높이 등용치 않았으므로, 그는 자신의 뜻을 크게 펼칠 수가 없었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 때 경인 공문자가 장차 태숙을 치고자 하여 좋은 계략이 없는가 물은 적이 있었다. 공자는 단 한마디로 모른다고 잘랐다. 그로 인하여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새는 나무가지를 골라서 앉을 수 있으나, 나무가지가 새를 택하여 앉게 할 수는 없다...."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새'에, 나라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결국 그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나, 평생 자신이 앉을 '나무'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이런 말도 하였다.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도 이 세상에서 먹혀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외치기도 하였다.
"아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그후 공자는 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시 3천여 편을 305편으로 정리하여 "시경"을 완성하였으며, 또한 "서경"을 정리하여 옛 성인들이 남긴 시, 서, 예, 악을 비로소 바르게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공자는 만년에 이르러 주역을 익혔으며, 노나라 역사의 기록을 바탕으로하여 "춘추"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공자가 병들었을 때, 자공이 문병을 갔다. 그때 마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자공아, 어찌 이토록 늦게 왔느냐. 태산은 무너지는가, 양주는 꺾이는가, 철인은 시드는가..."
공자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듯 자공에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7일 후에 공자는 죽었다. 그때 나이 73세였다. 공자의 제자는 모두 3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하며, 그 중에서 특히 육예에 통달한 제자만 72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남긴 많은 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저술로 "논어"가 있다.
지위 : 직접 권좌에 앉지 않더라도 자신을 숭앙하는 이들이 많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공자는 안주할 나라를 찾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여러 나라의 통치철학으로 추앙됐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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