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1003호
2020.6.22. (음 5.2. - 윤) / 발송인:
|
|
|
nowmaster@nate.com
|
※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글나눔 → 오늘의 어록
|
|
|
성공은 수만 번의 실패를 감싸준다. ― 조지 버나드 쇼
|
|
|
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 의원입니다’
“존칭 보조어간을 남발해 ‘사물 존대’하는 것 못지않게 거슬리는 표현이 있다. 자신을 높이는 ‘뻔뻔한 화법’이다. 사기업 직원은 물론이고 공무원, 국회의원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적어도 ‘민의를 대변’한다는 의원들에게는 쓴소리 한마디 해 주고 싶다.” 지난 2주에 걸쳐 선어말어미 ‘-시-’의 오남용을 짚은 뒤 받은 독자 의견이다.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거나 방송에 출연해 자신을 소개할 때 “안녕하십니까, ○○○ 의원입니다” 하는 게 마뜩잖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우리 언어예절에 비추어 따지면 독자의 말처럼 ‘뻔뻔한 사람’이란 핀잔 받을 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직함을 이름 앞에 넣어 말하면 높이는 것이 아니지만 직함을 이름 뒤에 넣어 말하면 높이는 것이 우리 전통 예절’이다.(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 ‘(국회)의원 ○○○입니다’, ‘총무부장 ○○○입니다’ 하는 게 바른 표현이고 자신을 ‘○○○ 의원입니다’, ‘○○○ 총무부장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야릇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국어원이 펴낸 <표준언어예절>에서도 “이름을 앞에 두고 뒤에 직함을 붙여 ‘○○○ 부장입니다’라고 하면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되도록 쓰지 않는 것이 좋다” 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뜻을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에둘러 밝힌 것이다.
직함은 ‘벼슬이나 직책, 직무 따위의 이름’이다. 사장, 부장, 시장, 장관, 도지사, 감독, 아나운서 등처럼 국회의원도 직함의 하나이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란다’는 덕담과 ‘○○○ 올림’이란 끝인사가 생뚱맞아 보였다. 편지 목록에 뜬 제목이 ‘○○○ 의원입니다’였고, 첫인사도 ‘○○당 ○○수석부의장 ○○○ 의원입니다’인 탓이다. 인사할 때는 ‘(○○당) 국회의원 ○○○입니다’, 정당과 직위를 밝힌 뒤라면 ‘○○당 ○○수석부의장 ○○○입니다’ 하는 게 옳다.
………………………………………………………………………………………………………………
‘영업시운전’
김포공항에서 잠실종합운동장까지 38분 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3월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2단계 구간이 개통되면 가능한 일이다. 연장 운행을 앞두고 지난 주말부터 배차 간격이 달라졌다. 역 곳곳에 붙어 있는 ‘9호선 2단계구간 개통을 위한 영업시운전 안내문’을 보니 얼른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눈에 띈다. ‘영업시운전’이 첫눈엔 ‘영업-시(時) 운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내 ‘영업 시운전’이라 생각했지만 미심쩍은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영업 시 운전’일까 ‘영업 시운전’일까.
운영 회사 고객지원센터에 물으니 ‘영업(을 위한) 시운전’이란다. 애초에 띄어쓰기를 제대로 했으면 엉뚱한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많다.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괜한 오해를 부르고, 생뚱한 뜻이 떠오르는 문장 몇 개를 꼽으면 이렇다. 누나가자꾸만져요(-자꾸 만져요/자꾸만 져요), 무지개같은사람(무지 개같은-/무지개 같은-), 비상용차(비상용-차/비-상용차(商用車)), 서울시장애인복지관(-시장 애인-/-장애인 복지관)….
‘영업시운전’의 뜻을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한 까닭은 띄어쓰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관련 업계에서 통하는 이 용어의 뜻은 ‘손님을 태우지 않는 것만 빼면 운행 구간, 배차 간격을 비롯한 모든 운영 방법을 정식 개통 이후와 똑같이 하는 시운전’이다. ‘시운전’은 차량 점검을 위한 뜻이 강하다. ‘기차, 배, 자동차, 기계 따위를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였을 때에 실제로 사용하기 전에 시험 삼아 하는 운전’이 ‘시운전’이고 ‘정해진 길을 따라 차량 따위를 운전하여 다님’은 ‘운행’이다.(표준국어대사전) ‘포항케이티엑스(KTX)열차 시험 운행…’(ㄱ신문), ‘… 승객만 태우지 않을 뿐 실제 승객이 탔다는 가정하에 시험 운행이 이뤄진다’(ㄱ일보)에서처럼 ‘영업시운전’은 ‘시험운행’이라 해야 제 뜻에 더 맞는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
|
|
시나눔 → 우리나라 詩
|
|
|
자작극 - 송현경
질겅질겅한 당신은
내 입 속에서 부푼다
반투명의 속살이 볼록 드러나며
당신의 얼굴이 다가오는 순간,
모든 것이 빠져나가기 직전처럼 당신은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터져버릴 자세를 하고 있다
그러다 한껏 늘어지는 극처럼
맛이 간다
그래서였다
내가 당신을 뱉은 건
하필이면 그곳이 휴지통이었을 뿐
바람 맞은 약속 때문은 아니었다
눈은 계속 오고
내 입속은 희어져서 한결 고독해진다
당신은 어디선가
홀로 시간을 견디리라
얼마간 질겅했던 기억이
당신을 혀로 애무했던 시간들을 훑고 지나가리라
휴지통도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머리를 자르러 온
미용실에서 우리는 서로 손님이다
자작극밖에 안 되는 입 속에서의
스캔들
|
|
|
독서실 → 수필
|
|
|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편지가 온 것을 보고야 놀랐습니다. 교통이 회복된 다음에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살아났으면 됐지, 것까지 없지 않아, 어서 가을 학기 시작되어 시험 준비해서 명년에는 틀림없이 입학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며칠 만에였든지 오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어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문구가 도무지 평소의 아버지 말씀 같지 않은 아주 열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석헌아, 하고 쓸어안을 터이니” 어서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나서 스물셋이 되도록 아버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한번도 들은 기억이 없고, 안기거나 업히거나 해본 기억도 없습니다. 위에서 대범이란 말을 했습니다마는 아버지야말로 유교식의 군자였습니다. 생긴 모습이나 말씨나 태도나 누구든지 보는 사람은 다 “아주 인자하신 분”이라고 했지만 말에나 행동에나 감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군자는 포손이요 불포자라고 하지만 아버지야말로 정말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제 “석헌아!” 하며 부르시는 것입니다. 죄 받을 말로 “이거 정말 아버지가 쓰셨을까?" 혼자 마음속에 물으며 몇 번을 다시 읽고 다시 읽었습니다.
생각 끝에 “아마 외삼촌님이 대필하신지도 모른다” 했습니다. 그이는 글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여남은 살 됐을 때 권학문을 지어주신 분은 그분입니다. 이제 그 글을 다 잊었으나 마지막의 한 구절은 기억합니다.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서제지탄을 면치 못하리라”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나머지 그더러 대신 쓰라 하신 것 아닐까 했습니다. 그러나 글씨는 아무리 봐도 틀림없는 아버지 글씨였습니다. 후에 집에 갔을 때 직접은 할 수 없고 동생께 했는지 누님께 했는지 나는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사랑이 지극하신 줄 모른 것 아니지만 평소에 말에는 아니 나타내시는데 그렇게까지 애절하게 하셨을까, 겉과 속의 차이가 너무 심한 데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동경지방의 땅이 쪽 갈라지고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나온 걸로 알았다고 했습니다만 나야말로 정말 도덕주의의 지각 이 터지고 혼이 지심에서 폭발돼 나오는 인애의 불길에 내 몸이 타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알고도 몰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몇번 몇번 부르시는 것을 들으면서도 감정에 못 이겨 달려가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차서일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래도 아버지가 나를 믿어주시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몰랐어도 아버지는 나를 알고 계셨습니다.
조선놈 사냥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서와는 반대의 것을 경험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인정있고 맑은 사람들, 아침마다 만나며 “오하요 고자이마스" “이이 오 뎅기데스네” 하는 사람들, “길은 길동무가 있어야, 세상은 인정이 있어야”라는 사람들, 말마다 “기리 닌존"광이라는 사람들, 그 사람들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 얽메었던 일본도, 깎아들었던 대창, 그 증오에 타는 눈들, 그 거품을 문 이빨들. 어디서 그것이 나왔을까? 몇 달 동안은 거리를 나가 다녀도 기운을 펴고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하숙을 얻기도 어려웠습니다. 셋방 있다는 광고 쪽지를 보고 찾아가서 “댁에 방 있습니까?" 하면 “네 있습니다” 해놓고도 한참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는 다시 “없습니다” 해버리고는 들어갑니다. 조선 사람이란 말입니다. 시월이 돼서, 다른 데는 아직 아니되지만, 화재가 나지 않았던 와세다에서는 고등예비학교가 개강이 된다고 해서, 어서 빨리 할 생각으로 그 부근으로 하숙을 옮겼습니다.
하루는 지나가노라니 길가에서 팽이 싸움을 하며 노는 아이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상자위에다가 돛뙈기 조각을 움폭하게 깔아놓고는 무쇠로 만든 팽이를 그 위에서 둘이서 서로 돌려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맞부딪쳐 한 놈이 다른 한 놈을 몰아서 상자 밖으로 떨어뜨리면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 하나가 제가 돌린 팽이가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요리조리 돌아다니기만 하니까 그걸 보고 하는 소리가 “요 자식 월 해, 조선놈 사냥질 하고 있는 거냐?” 하지 않습니까?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코흘리개들이 조선 사람이 뭔지 알겠습니까? 얼마나 했으면 철모르는 애들까지 저렇게 됐을까? 조선 사람의 신세를 다시 한번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길가는 사람들을 보니 저것도 사람 죽인 놈 같고 이것도 사람 죽인 놈 같았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하겠다니, 머리가 아찔했습니다.
내가 당했던 것은 약과입니다. 어떤 목격자가 전하는 말을 들으면 한 사람이 그 칼과 창을 든 사냥꾼에 쫓겨 도망을 하는데, 그 부르짖는 소리가 응 소리라 할까, 앙 소리라 할까? 짐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허방지방 달아나는데 그것을 뭇 놈이 추격을 하더랍니다. 가다가 하는 수 없이 기진해서 무슨 구멍엔가 틈엔가로 들어가니 그것을 여렷이 따라가 창과 칼로 그저 찌르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집 이층에 방을 얻어가지고 있었는데 그 주인이란 자가 어디 밖에서 조선놈 모두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들어와서 제 집에 있는 놈도 죽여야 한다고 도끼를 들고 층계로 올라오더랍니다. 그것을 그래도 그 사람의 늙은 어머니가 있어서 “제 집에 있던 사람을 어디 그러는 법이 있느냐”고 한사코 말려서 겨우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무식해서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 귀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와세다고등예비학교는 와세다대학에 부속으로 있는 고등학교의 선생들이 나와서 강의를 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선생들은 일본에서는 최고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보십시오. 하루는 한문 시간인데 그 선생은 나이도 상당히 들어 그때 인상으로 오십줄이나 된 것으로 보였는데, 지진 때의 무슨 얘기를 해가다가 “나두 조선놈 사냥했어요.” 아주 당당한 태도로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 결코 험악해 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점잖은 학자지요, 또 학생 중에 한국 사람들이 있는 것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아무리 시험준비 강습소라 하더라도 젊은 학생들을 보고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도, 꺼리는 기색도 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듣고 앉아서 세상이 세상 같지 않았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뭇매에 맞아 죽더라도 한 마디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수백 명 일본 학생 중에서도 아무도 항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항의는커녕 그저 하하 웃고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하고 듣고 있었습니다.
후에 안정이 된 다음 우리 유학생회에서 조사단을 조직해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그때 학생들은 방학이라고 본국으로 많이 돌아가고 남아 있던 사람이 많지 않던 관계도 있지만 도심지에 있던 학생은 죽은 것이 적고 주로 심천, 본소하는 공장지대와 시외 지역에 살던 노동자가 많이 학살됐는데, 불 놓느니 우물에 약 치느니는 전연 없는 거짓말이고, 한편으로 풍설을 돌리고는 보호한답시고, 모두 유치장 창고 같은 데 수용해 놓고는 집단적으로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린애, 남자, 여자 할 것 없었고, 임신이 돼 만삭된 여자를 태아째 찔러죽였다는 것까지 있었습니다. 평소의 일본 사람을 보고 이해가 아니 가는 일입니다. 땅이 흔들린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흔들린 인간성이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도 지진으로 인해 터져 올라온 불길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내가 아버지에게서 본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불길입니다. 그때 일본 민중은 미쳤었습니다. 민중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은 없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보며 들으며 참 섭섭했습니다. “야, 이게 일본이냐? 이렇게 열고 좁은 사람들이냐?” 그때 젊은 마음에도 미워한다기보다도 업신여기고 싶었습니다.
한 줄기 온천
지각이 터지면 불도 나오지만 또 온천도 솟습니다. 불은 태우고 죽이지만 온천은 살리고 낫게 합니다. 일본에는 화산이 많은 대신 온천도 많습니다. 일본의 성격은 두 가지가 다 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지진으로 인해 조선놈 사냥 같은 끔찍한 일도 있었지만, 또 온천 같은 인정 미담도 많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중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유학생 감독부에서 생긴 일입니다. 유학생 감독부란 것은 그전 대한제국 시절에 일본에 가 있던 우리나라 대사관 자리입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대사는 없어졌고 합병 후 그 자리에 유학생 감독부라는 기관을 두고 동경에 가 있는 우리나라 학생을 돌보고 감독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 기숙사가 있었습니다. 150명 가량 수용한다는 젓이었습니다. 총독부에서 관할하는 것이지만 성의있게 지도한다는 것보다는 무슨 위험한일이나 하지 않나 감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숙사의 설비 같은 것도 신통치 못하고 따라서 가려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나도 한두 차례 가봤을 뿐입니다마는 한 백 명 내외 되는 사람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지진 나던 날은 얼마나 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몇 십 명은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조선인 학살이란, 이제는 세 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정부로부터 명령이 있어서 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다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서도 청년단, 재향군인 하는 사람들이 기숙사에 달려들어 모두 학살해 버리고 끌어냈더랍니다. 그 옆에 변호사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 이름을 기억 못해 아깝습니다마는, 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가서 인도 상 그럴 수 없으니 하지 말라고 막으려 했답니다. 법률가로서의 당연한 직책입니다. 그러나 그 단원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는 위로부터 시퍼렇게 명령을 받고 실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법률가는 법의 정신을 지켜 그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느냐 꾸짖었지만 이쪽은 도저히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는 하는 수 없이 그러면 내가 당국에 가서 알아볼 터이니 알아봐서 정말 그렇다면 나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마음대로 해도 좋으나 제발 그 때까지 참아줄 수 없느냐고 간청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 죽이려던 사람들도 승낙을 하고 변호사가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변호사는 변호사니만큼 어디까지나 법치국가의 양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 그것은 알 수 없고, 또 얼마 후에 돌아왔는지는 모르나, 하여간 아무런 시원한 대답도 못 얻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래도 그냥 몇 십 명을 죽게 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관 사람들을 보고 양심에 호소해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위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죄없는 사람을 죽일 수야 없지 않느냐, 한데 모아놓고 감시를 해서 반항하는 기색이 있거든 죽여라, 그렇지 않고 온순한 태도거든 살려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설명 간청을 했습니다. 아마 성의로 했을 것입니다. 그래 그들도 양심이 있는지라 그 말에 동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을 모두 끌어내어 마당 한가운데 앉혀놓고 칼을 뽑아 들고 슬슬 돌아가며 밤새 감시를 했습니다. 시험하자는 것이니까 이따금은 칼등으로 등허리를 치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더랍니다. 학생들은 내막이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만 있으면 그 전원이 학살을 당하는 판입니다. 그런 줄 전혀 몰랐지만 밤새도록 그 아슬아슬한 운명 아래서 다행히 한 사람도 반항을 한 사람은 없어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참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더 좋은지도 모릅니다. 좋으나마나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 아름다운 일은 늘 그런 것입니다. 그 근본 사실이 그런 대로 선한 그 일을 어느 개인에게 잘못 돌리지 말고 당연히 받을 일본 마음 전체에 옳게 돌리기 위해 그렇게 된 일입니다.
|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竹頭木屑(죽두목설)
竹(대 죽) 頭(머리 두) 木(나무 목) 屑(가루 설)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의 이야기. 진(晉)나라 초, 파양이라는 곳에 도간(陶侃)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그는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오히려 검소했다. 도간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까닭에 어려운 환경에서 홀어머니에 의해 자랐다. 때문에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절약하였다. 그가 배를 만드는 일을 관리하던 때, 이 과정에서 많은 대나무 뿌리와 나무 부스러기 등이 버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이것들은 전부 모아 기록해 놓도록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어느 해, 새해 모임이 있었던 날, 많은 눈이 내린 후 날씨가 풀리자, 길은 온통 진흙탕이 되었다. 도간은 즉시 나무 가루을 꺼내 길위에 뿌렸다. 그는 후에도 많은 폐품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급한 곳에 사용하였다.
쓸 만한 물건들이 자주 버려지고, 아파트 내부 개조를 위해 멀쩡한 시설물을 떼어 버리는 일이 잦다. 싫증이 났거나 구식이 아니면 싸구려이기 때문이란다. 정말 배 부른(?) 소리다.
竹頭木屑 이란 못 쓰게 된 것들을 모아 후에 다시 활용함을 비유한 말이다.
……………………………………………………………………………………………………………
|
|
|
글나눔 → 삶 속의 글
|
|
|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불행과 행복 - 조연희
작년 8월의 일이다. 친구의 남편이 경부 고속도로의 버스 전복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처음 신문 발표에는 사망자 명단에 낄 만큼 중상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나는 친구 몇몇과 함께 꽃을 사 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8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다리에 기운이 빠질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했다. 눈이 퉁퉁 붓도록 통곡을 하고 있거나 실신 상태에 빠져 있을 친구를 무슨 재주로 위로해 줘야 하는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걱정은 병실 문을 여는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친구는 함박꽃 같은 웃음을 보이며 기운차게 달려나오는 게 아닌가.
"어머! 너희들 와줘서 고맙다. 아직은 의식 불명이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거나 같아서 난 너무 기뻐. 생명을 건졌다는 그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야."
친구의 음성은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온몸이 시커멓게 탄 채, 두 팔다리가 절단되어 누워 있는 환자의 뒤에서 난 흘러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조차 없었다. 똑같은 불행을 당했어도 그 불행을 한탄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큰 불행이 아님에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절망의 고비를 즐겁게 넘길 수 있는 친구의 그 지혜는 내게 큰 교훈이 되었다.
(진명여고 교사)
|
|
|
글나눔 → 추천글
|
|
|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용기있는 사람들의 승리
프랑스 북쪽의 칼레라는 조그만 도시에는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조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청동조각에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영국 왕이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쳐들어왔습니다. 영국왕은 조그만 칼레 시를 우습게 보고 단숨에 함락시킬 생각으로 성을 공격했으나 칼레의 시민들은 한마음이 되어 용감하게 적과 싸웠습니다. 영국 왕은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자 작전을 바꾸어 먹을 것이 떨어져 항복할 때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영국군이 몇 달째 성을 포위하고 있자 성 안의 사람들은 지치고 식량도 바닥나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한톨도 없게 되자 칼레의 시민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결국 칼레의 시민 대표 한 사람이 영국군 진지로 가서 항복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왕은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좋다. 너희들은 모두 살려 주겠다. 그러나 그 대신 시민들 중에서 대표로 여섯 명을 뽑아 처형하겠다. 내일 아침 여섯 명은 성문 앞으로 나오라."
이 말을 전해 들은 칼레 시민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때 생피에르가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용기를 얻고 서로 죽음 앞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두 사람이 나서는 바람에 일곱 명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서 목숨을 건질 한 사람들 정하자고 했으나 생피에르는 반대했습니다.
"제비를 뽑는 순간 '내가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의 용기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이 빠지기로 합시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다 모였으나 생피에르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생피에르의 집으로 가보았는데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자원한 대표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생피에르의 죽음을 본 대표 여섯 명은 영국 왕 앞에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떳떳한 얼굴을 보고 놀란 영국 왕이 이유를 묻자 그들은 생피에르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영국 왕은 큰 감동을 받고 그들을 모두 칼레성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생피에르의 값진 죽음이 나머지 여섯 사람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
|
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
|
|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안 주면 키우겠다
우리의 반도체 제조장비는 선진국들에 비해 많이 뒤쳐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나와 미래산업은 '핸들러'로부터 장비국산화의 첫걸음을 떼었다. 아직 그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또 도전해볼 작정이다. 테스터기술을 얻기 위한 우리의 부질없는 노력들은 다시 나의 승부근성을 자극했다. '나도 더 이상 구걸하지는 않겠다. 내 손으로 꼭 키워내고 말겠다.' 이후 테스텍은 장비개발의 방향을 약간 수정했다. 미래산업을 사렸던 경구 한마디, '눈높이를 낮추고' 볼일이었다. 기술적 난이도가 한 단계 낮은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번인 테스터'는 고온, 고전압 등 가혹한 조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IC를 검사한 후, 취약한 제품을 사전에 가려내는 데 쓰이는 검사장비를 말한다. 우리는 그쪽 방면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미국의 모테이라는 회사와 기술협력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우리의 소자검사에 관한 기술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들의 번인 테스터에 대한 설계기술이 필요했다.
조급증을 버리니 자존심도 살아났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핵심기술을 전수 받겠다는 허황한 바람은 깨끗이 포기했다. 다만 '우리가 주는 만큼 너희도 달라'는 태도로 당당히 맞섰다. 기술협력계약은 하였지만, 핵심기술을 기술도 입선으로부터 넘겨받을 수는 없었다. 모테이 역시 핵심기술에 관해서는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중요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도 공개해주지 않았다. 더 이상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모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엔지니어들은 늦도록 회로를 분석하고 그 회로에 알맞은 소프트웨어를 작성했다. 구동해보고 그 결과를 분석해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버전업하기를 반복하였다. 모테이에서는 우리의 무서운 집념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했다. 그렇다고 따질 계제도 아니었으니 내심 초조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당시에는 모두가 벤처기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또한 반도체 산업이 아직도 호황기 끝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작하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유능한 엔지니어를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번인 테스터와 테스터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한 회사였기 때문에, 그 취지와 도전정신에 공감한 인재들이 하나 둘씩 우리를 찾아왔다. 세상에는 아직도 꿈과 낭만에 인생을 거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다른 무엇보다 '결코 포기지 않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우리는 결국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모테이보다 빠른 성공이었다. 기술 후진국이라는 열패감을 극복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우리는 모테이측에 거꾸로 훈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감격적인 주객전도의 상황이었다.
테스텍을 창업하고 테스터 개발에 주력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작년에 테스텍은 완전히 미래산업으로부터 독립했다. 코스닥에 등록하려고 주식 플레이도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벤처기업이 만들어졌다. 개발 쪽에서도 다행히 소정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테스텍이 개발한 '번인 테스터'는 벌써 판매를 시작했다. 수십 가지 테스트 항목 중에서 기본적이 항목만을 제한적으로 검사하는 기계이지만, 이미 걸음마는 시작한 셈이고 결코 늦춰지거나 중단되지 않을 싸움이익에 여전히 미래는 낙관적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사람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래산업과 함께 하는 동안 몸으로 확인 할 수 있었던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테스텍에서 키워지고 있는 엔지니어들은 언젠가 테라다인과 어드밴테스트에 버금가는 훌륭한 반도체 테스터를 개발해낼 것이다. 나는 그들을 믿는다. 미래산업을 살렸던 경구 한마디, '눈높이를 낮추고' 볼일이었다. 기술적 난이도가 한 단계 낮은 '번인 테스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사람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래산업과 함께 하는 동안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
|
독서실 → 수필
|
|
|
인연 - 피천득
이사
무슨 생각이었는지 사지 못할 집을 복덕방에 물어보고 가회동 골목길을 도로나왔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비원으로 옮겼다. 비 내리는 고궁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나는 우연히 돈 삼백환을 내고 값이 있다면 몇백억이 될 그 넓은 정원을 혼자 즐길 수 있었다. 흐뭇한 소유감까지 가져보려 하다가 문득 깨닫고 우연히 비 맞는 연잎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가난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다. 다행히 삼십여 년 간 실직을 한 일이 없고 욕심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술 담배에는 돈을 아니 쓰고 반찬 가게에 외상을 지지 않고 월급을 미리 당겨 쓰지도 않고 월부라든가 계라는 것을 아직 하지 않아 돈에 쪼들리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 식, 주 셋 중에서 주택 때문에 가난을 느끼는 때가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주님의 말씀과 같이 달팽이도 제 집이 있고 누에도 제 집을 만들어 드는데, 나에게는 내 집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남산에서 만호 장안을 내려다보고, "집, 집, 집 사면에 집, 그러나 우리를 위한 집은 한 채도 없구나." 이런 한탄을 한 일이 있다. 한때는 옛날 서생들의 기숙사였던 성균관 동재에 방을 빌어 살림살이를 한 일도 있다. 그리로 이사간 첫날 밤에는 꿈에 유생들이 몰려와서 나가라고 야단을 치지나 않을까 하고 퍽 걱정을 하였다. 어느 해는 일년에 여섯 번 이사를 한 해도 있었다. 해가 아니 들어서, 물 길어 먹기가 어려워서, 옆집이 구공탄 공장이어서, 가까이 제재 공장이 생겨서, 그리고 두 번은 집주인이 내놔 달래서 그렇게 되었다. 칠 년 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 둘 있는 영단 주택으로 이사를 올 때, 그때 기쁨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아이들은 "이것이 인제 우리 집이지" 하고 좋아라고 뛰었다.
우리집에는 쏘니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가 있었는데, 제 집을 끔찍이나 사랑하였다. 레이션 상자 속에 내 헌 자켓을 깐 것이 그의 집인데, 쏘니는 주둥이로 그 카펫을 정돈하느라고 매일 장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 삐죽한 턱주가리를 마분지 담벽에다 올려놓고 우리들 사는 것을 구경하고 때로는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의 집 앞은 남이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마치 궁성을 지키는 파수병같이 나는 이 개 못지않게 집을 위하였다. 칠 년 동안에 아이들이 자라고 책이 늘었고, 왜 버리지 못하는지 모를 너저분한 물건들도 많아졌다. 집이 좁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넛집 라디오가 소란하고 골목 여인네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내 방이 갖고 싶어졌다. 나는 이사를 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 매매가 없다는 요즈음 우리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섰다. 나는 집값이 떨어졌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준다는 금세에 덜컥 계약을 하였다. 그리고는 집을 보러 나섰다. 교통 좋은 곳은 엄두도 못 내고 이끝에서 저끝으로 변두리마다 돌아다녀보았다. 팔려고 내놓은 집은 많아도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만 다 못한 것들이었다. 매일 지쳐서 돌아오면 이 집같이 좋은 집은 없었다. 꽃 심을 뜰이 좀 있고 방이 너덧되는 집 이것이 내가 원하는 집이다. 언제든지 내 돈은 집값의 반이나 삼분의 일밖에 아니 된다.
나는 잠을 못 자게 되었다. 집 보러 다니느라고 몸이 피곤한데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칠 년 만에 새삼스럽게 가난을 느꼈다. 불안과 초조로 두 주일을 보내다가 집 내놀 기일이 다가오자 마침내 집값의 절반을 십오 년 간에 걸쳐 은행에 부어간다는 그리고 버스가 십오 분에 한 번씩 다니는 곳에 있는 주택 하나를 계약하게 되었다. 십오 년! 내 방, 좋은 말로 서재의 대가로 십오 년 간 부어갈 부채와 교통을 위한 무수한 시간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저 이 집에 그냥 살고, 비 오는 날이면 비원이나 찾아갈 것을 공연히 이사를 한다고 나는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이삿짐을 상상하면 더욱 가난을 느끼게 된다.
|
|
글나눔 → 추천글
|
|
|
|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22. 청순함
<가슴은 바위와도 얘기할 수 있으니... 절대 사랑만이 그 신비를 알리. 가슴으로부터 미쳐라>
앗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정말 정신병원에 수용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나무들과 풀꽃들과 얘기한다. 편도나무에게, "자매여, 안녕!" 하고 말한다. 그가 여기에 있었다면 필경 붙잡혀 갔을 것이다. 편도나무에게, "자매여, 신의 찬가를 불러주리" 했을 태니까. 뿐만 아니라 그는 편도나무의 노래를 듣는다. 아 미쳐버렸구나, 가엾은 프란체스코여! 그는 강과 물고기들과도 얘기한다. 물고기들이 자신의 말에 대답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 그는 돌들과 바위들과도 얘기한다. 미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겠는가?
그는 미쳤다. 그대는 성 프란체스코처럼 미치고 싶지 않은가? 편도나무의 노래를 들을 줄 알고, 나무와 풀꽃들을 형제 자매로 느낄 줄 알며, 바위와 얘기할 줄 알고, 만물의 어디에나 신이 깃들어 있음을 볼 줄 아는... 지고한 사랑의 가슴이어야 하느니, 절대 사랑만이 그 신비를 풀어주리. 아 미쳐라. 가슴으로부터 미쳐라.
|
|
|
|
사진 / 그림
|
|
|
|
|
[미국, 오리건 주, 로그강]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