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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93호
2020.6.7. (음 4.17. - 윤)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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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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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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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난 헛되어 산 것이 아니니라.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 줄 수 있다면, 한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기운을 잃은 한 마리의 개똥지빠귀를 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니라. -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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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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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갈비 - 갈비찜
한가위 즈음이 되면 단골로 등장하는 기사와 프로그램이 있다. ‘귀성길’, ‘차례상차림’, ‘제수용품 가격’, ‘선물세트’ 따위를 소재로 삼은 것들이다. 엊그제 뉴스는 여기에 새로운 시선을 더했다. ‘달라진 추석 풍속도’를 다룬 것이다. “‘추석’ 연관 검색어를 분석해보니 ‘차례’, ‘귀성’, ‘고향’보다 ‘여행’, ‘레저’의 빈도가 3배 높았고 ‘성형’도 빠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민속 명절’에서 ‘가을 휴가’로 바뀌어 가는 세태를 보도했다. 그래도 변함없는 게 ‘추석 선물’이다. 명절 선물에서 빠지지 않는 ‘갈비세트’는 구이용과 찜, 탕거리에 따라 ‘불갈비’와 ‘찜갈비’, ‘탕갈비로 구분해 판다. ‘갈비구이’와 ‘갈비찜’, ‘갈비탕’ 같은 음식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1984년 신문에 ‘불갈비는 고기량이 많고 찜갈비는 지방이 많으며 탕갈비는 뼈가 많다’(경향신문), ‘불갈비(킬로그램당 8천원), 국갈비(˝ 3천원)…’(동아일보)가 보인다. 재료로써 ‘○+갈비’는 오래전부터 쓰인 셈이다. 사전은 ‘찜’의 뜻과 쓰임을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찐 음식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제시한다. 사전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 갈비찜, 게찜, 계란찜, 북어찜, 생선찜, 닭찜, 아귀찜, 애저찜…. 이처럼 음식 이름은 ‘○+찜’의 형태이다. ‘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을 가리키는 ‘찜갈비’와 ‘찜닭’은 어떻게 봐야 할까.
‘찜갈비’의 고향은 대구의 ‘동인동 찜갈비 골목’이다. ‘동인동 찜갈비’는 갈비찜과 달리 ‘경상도 음식답게’ 맵다는 게 특징이다. 2002 월드컵 경기가 대구에서 열리면서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찜닭’의 본고장은 경북 안동 구시장의 ‘찜닭골목’이다. ‘안동찜닭’이 개발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 ‘통닭골목’으로 불린 곳이다. ‘(동인동)찜갈비’와 ‘(안동)찜닭’은 고유명사이다. 갈비찜과 닭찜의 한 종류인 ‘찜갈비’, ‘찜닭’을 일반화해 가리키는 것은 삼가야 한다.
……………………………………………………………………………………………………………… 영란은행
야트막한 언덕 위 시계탑 건물의 강의실. 학창시절에 전공과목을 듣던 곳이다. 영시를 강의하던 교수는 ‘애란’ 얘기를 할 때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예이츠를 배울 때였을 것이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읽을 때도 ‘애란’은 빠지지 않았고, <고도를 기다리며> 강독 시간에도 그러했다.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의 고향이 ‘애란’이기 때문이다. 영어 ‘아일랜드’, 게일어 ‘에이레’보다 한자 음역어 ‘애란’(愛蘭)이라 부르는 게 왠지 그 나라 정서에 어울리는 것 같았던 시절의 일이다.
불란서(프랑스), 이태리(이탈리아), 서반아(스페인), 희랍(그리스), 화란(네덜란드), 파란(폴란드), 서전(스웨덴), 오지리(오스트리아), 애급(이집트), 아라사(러시아), 토이기(터키) 따위는 널리 쓰인 한자 음역어이다. 앞 글자를 딴 ‘불’(佛, 프랑스), ‘화’(和, 네덜란드), ‘인니’(印尼, 인도네시아), ‘마’(馬, 말레이시아) 같은 표현도 신문에 자주 등장했다. 미국, 독일, 호주, 태국, 인도 그리고 영국은 여전히 음역어로 통하는 나라이다.
영국의 정식 명칭은 ‘대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통틀어 이르는 ‘브리튼’과 아일랜드 섬 북쪽 일부 지역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유케이’(UK), ‘지비’(GB)로 줄여 표기하기도 한다. 영국(英國)은 ‘잉글랜드’의 음역어 ‘영란’(英蘭)에서 온 말이다. ‘뱅크 오브 잉글랜드’(BOE, Bank of England)를 ‘영란은행’으로 번역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에 즈음한 소식을 전하는 뉴스는 ‘BOE’를 ‘영란은행’, ‘영국은행’, ‘영국중앙은행’으로 달리 이른다. ‘한 은행, 다른 이름’? 하나로 정한다면 ‘영국(중앙)은행’이 어떨까 싶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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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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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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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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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씨알의 설움 (2/6)
야, 이 사람들아, 형상을 입어버려야 그 사람이 가슴속에 사는 줄을 모르나? 아버지마다 조상마다 왜 죽는 거냐? 잊으라고? 아니, 잊지 말라고 죽는것이다. 있음은 잊음이다. 사라짐은 삶이다. 쓰지 않는 글이 글이다. 사람에게 잊혀지지 않으려 이름에 애를 태우는 놈들, 바위마다 다락마다 현판 써붙이는 놈들, 비눗방울 같은 존재들이요, 부도수표로 속이는 협잡꾼들이다. 옛날 일 보니 길가에 비석 세운 놈들 거개는 도둑놈들이더라. 그러나 딴 소리는 그만하고, 종교가들은 자기네 욕하는 줄 알겠지만, 가엾을손 당신네는 오늘의 종교가가 아닙니다. 그대들은 오늘의 인생에 대해 종주권을 잃었습니다. 오늘의 종교가는 사실은 신문사, 잡지사, 영화관에 앉아 있다. 이제 인심을 지배하는 것은 신문 사설, 잡지 논설, 필름이다. 기성 종교가들은 벌써 부도수표를 너무 많이 써먹었기 때문에 여간 어리섞은 바보가 아니고는 받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교회가 이성과 과학에는 원수나 진듯 의식, 교리 한 곬으로 우겨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어지간히 장사가 되는 것은 소위 문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단순한 씨알들을 속여먹잔 부도수표, 빈 손자리, 흰손 자리라는 말이다. 문사, 학자치고 흰 손 아닌놈이 어디 있느냐? 창 밖에는 두드리다 채 못 두드린 콩이 비를 맞아 썩고 있고 여름 내내 집도 없이 길러온 병아리가 닥쳐오는 추위에 발발 떨고 있는데 그놈의 알은 쏙쏙 뽑아먹으면서 아직 계사도 못 짓고 쓰고 않은 집은 비만 오면 대야를 들여놓아야 하면서 이 글을 써야만 하는 나는 문사도 아니면서 글 팔아먹는 축에 드는 이 나는 뭐냐? 나야말로 15년전 일본 형사의 입을 통해 온 선고대로 인찌기(협잡) 종교지, 아, 내가 당초에 글을 왜 썼던가? 아니야 당초, 애당초에 글을 왜 배웠던가?
구두쇠의 말이 옳아. 글 사자는 놈 없다. 그는 농사꾼이니만큼 참이 눈에 속고, 글에 종이 되고, 글에 병이 들고, 글에 미친 놈들의 눈에는 글이 가장 잘 팔리는 듯 보였다. 그래 나도 글 길로 나가게 된거지. 하지만 글은 그른 거야. 글 길은 그른 길이다. 참 글이 왜 그른 것이리오마는 파는 글은 그른 글이다. 글은 본래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못하는 정신이다. 그러니 팔기를 어떻게 팔아? 신앙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처럼, 진. 선. 미를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가 다 협잡꾼이다.
글은 무늬다. 바탕이 먼저 있어서 그 바탕의 뜻을 더욱 두드러내기 위해 그 위에 이리저리 금을 그은 것이다. 긋는것이기 때문에 그 그어놓은 것이 금 혹은 그림이다. 그림이 글이 된다. 그러므로 글은 바탕이 있고서야 된다. 이른바 회사후소다. 그래 자공이 예후호이까 하고 알아차린 것이다. 예는 사람의 인격의 바탕에 무늬를 놓은 것이다. 무늬를 놓지 않아도 비단이지만 비단의 비단된 것이 무늬를 옳게 놓아서만 비로소 된다. 무늬없는 비단이라 하지만 그것은 무늬가 지나치게 잘못 놓여 바탕을 해치는데 반대하여 하는 말이지 본래는 무늬 도무지 없는 비단이란 있을 수 없다. 실결, 오리 세움, 씨 씀이 곧 무늬다. 문 없는 질은 없다. 예가 도무지 없는 인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바탕이 주인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길 잃은 뒤에 속알, 속알 놓친 뒤에 사랑, 사랑 잃은 뒤에 옳, 옳 얽힌 뒤에 낸감 그저 낸감은 알 속 알 밑의 얇한앓한이요어질어질의 머리로다( 유영모 선생님 옮김). 했다. 그럼 그렇다면 글은 ‘내’ 가 있고서야 되는 것이요,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다. 저마다 제 글을 쓰고 읽어야 한다.
긁어 부스럼
글이 긁는다는 말과 뿌리가 같은지도 모른다. 긁으면 그 난 자리가 글, 그림 아닐까? 그러나 말 뿌리야 길거나 말거나 글은 긁음이다. 가려운 데를 긁는 것이 시요, 그림이요, 음악이다. 가려운 데를 잘 긁으면 시원하다. 글을 읽어서 쾌감을 느낌은 마음의 가려움을 잘 긁어주기 때문이다. 왜 가려운가? 피가 잘 돌지 못하고 버러지가 물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글을 요구하는 것은 생명의 기운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머리 같은 놈들한테 피를 빨림을 당하고 있기 때눔이다. 그때는 좋은 글로써 새 피를 돌리도록 해야 한다. 시와 그림과 음악 없는 종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 예술은 눌린 자의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긁은 것은 제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참 시는 내 시뿐이요, 참 기도는 내가 하는 기도뿐이다. 아무리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종을 시켜 긁어도 내가 스스로 긁는것만은 못 할 것이다. 기성 종교를 믿고 남의 작품을 읽는 것은 종을 시켜 긁어 달라는 일이다. 그는 호사는 했을는지 몰라도 시원함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일생을 남더러 대신 긁어달라다가, 대신 울고 대신 노하고 대신 욕해 달라다가, 그리하여 인생의 참 맛을 모르고 가는 병신이 얼마나 많은가?
격화소양이라, 신 위를 긁는다는 말이 있다. 긁으려거든 옷을 활짝 벗어버리고 긁어야지, 옷 위를 긁적여서 무엇 하나? 제가 글을 지어도 참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단 말이다. 요새 글 쓰는 사람들 보면 어찌 그리 신은 것인 많은가? 양말 신고, 구두신고, 덧구두 신고 그 위를 긁는 것 같은 글뿐이다. 그러면 시원하긴 고사하고 더 가려워. 예배당 절간에 아니 가려는 것이 웬 까닭인지 몰라? 신문 잡지 보다가 내팽개치는 것이 무슨 때문인지 몰라? 그것들이 다 삯으로 긁어 긁어 모이꾼이요, 그나마 신을 신고 긁적이기 때문에 민중이 더구나 그 젊은 마음의 성급에 화가 나서 그러는것이다. 이 씨알의 가려운 데, 말 못할 속의 가려운 데를 시원히 긁어 노래가 나오게 할 예술가 평론가는 아니 오려나? 신을 좀 벗으려무나. 발이 소중해 그러지. 설 자리가 아까워 내놓고는 못 긁지. 이 못생긴 협잡군들아, 이제 이 늙은 소같이 참는 민중이 견디다 못해 화를 내는 날에는 너의 그까짓 구두가 뭔 줄 아느냐? “신을 벗어라. 네 선 자리가 거룩하니라! ” 네 선 자리, 소설을 쓰는, 작곡을 하는 네 선 자리가 어딘 줄 아느냐? 하나님의 발가락, 곧 민중이 앉았는 곳이야! 민중과 한 가지 발벗고 나서지 않는 학자, 문사 다 절도요 강도다.
긁으라니 또 지나쳐 긁어도 못쓴다. 지나쳐 긁는 것은 제 발이 아니기 때문에 씨알의 마음을 못 가졌지 때문에 무턱대고 막 긁어서 그리 되는 것이다. 소위 대중소설 쓴다는 놈들 정말 씨알은 되지도 못하고, 어느 때나 기회만 있으면 특권계급의 앞잡이 하려는 소가지를 두어두고 씨알의 가난한 주머니를 엿보려 하기 때문에 정말 문제가 어디 있는지 생각지도 않고 된 소리 못된 소리를 써내니 가려움은 멎는 점도 있으나 긁어 부스럼이 되었다.도리어 아니한 것보다 화다. 지금 이 민중은 부스러미 천지다. 그 젊은이 들은 다 놈들에게 긁혀 온통 옴쟁이가 된 존재다. 문사의 죄가 얼마나 한지 알겠나? 붓이 날카롭다 하지만 날카로운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긁어주는 것이니 물론 날카로워야 하지만, 우선 먼저 가려운 데를 긁어주잔 정성이 있어야지 직업적인 심리로 긁는 것만을 일삼으니, 긁을 데, 아니 긁을 데 상처가 나고 아니 나고를 생각지 않고 한다.그러니 부스러미가 될 것 아닌가? 우리가 이 처지를 당하고도 민중을 참으로 울리는 예술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잘하면 우리 자신만 아니라 온 세계라도 울릴 만한 사건이야 있지 않나?
그런데 왜 못할까? 재주가 없어서는 아니지. 그것은 여러 가지로 증명이 된다. 붓을 날커롭게 가는 일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부족은 혼에 있다. 시는 상상력이 많아야 한다고 하더구나 상상력이 무엇이냐?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동정심이지. 동정심이 무어야. 심페티지. 같이 아파하는 거지. 하나 됨, 우주정신의 바탈대로인 씨알의 마음으로 하나됨이 없이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겠는가? 모는 것마다 사이다 병에 물 넣어 흔드는 소리 같은 거지. 어디 폭포소리 같은, 시냇물 소리 같은, 회오리 바람의 오장육부를 뒤흔드는 소리 같은 소리가 있더냐?
삼국시대의 비극은 공연히 있었다더냐? 고려시대의 부끄러움은 그저 있었다더냐? 이조 500년의 끔찍은 엇없이 있었다더냐? 야, 다른 건 다 그만두자. 6. 25의 그 피와 불과 연기와 아우성의 큰 막은 도대체 무엇하자고 누구 보라고 한 것이라더냐? 그것이 어디서 누구의 주연으로 된 것을 생각하면 알 것 아니냐? 그것 지내고 나서, 껌 씹고 춤추고 극장을 세우는 것만 일로 아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 한 사람도 참 한 사람의 울음꾼도 없더냐? 부모가 죽으면 종 연놈을 시켜 대신 울리던 양반의 새끼들이 되어 이번에도 대신 울리려느냐? 붓이 무딘 것 아니야, 혼이 무뎠지, 혼이 마비됐지. 왜? 이 정치 한답시고 글 한답시고 민중에 붙어먹는 거머리들아, 너희에게 너무 피를 빨려 빈혈이 됐고 너무 눌려 숨이 막힌거야! 제발 좀 가만 두어라, 얼마 동안 기다리고 가만 두어 제 혼을 찾게 하라, 그럼 무슨 소리가 나와도 나올 것이다. 지금 이 소리들은 제 정신 없이 하는 제 소리 아닌 뜬 소리다. 시시한 글, 글 아닌 끌어냄, 부스러미 같은 문학을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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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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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下之盟(성하지맹)
城(성 성) 下(아래 하) 之(-의 지) 盟(맹세할 맹)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2년조의 이야기. 춘추시기, 초(楚)나라 군대가 교(絞)나라를 침공하여 교나라 도읍의 남대문에 이르렀다. 교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는 몇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장군 굴하(屈瑕)는 무왕(武王)에게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이튿날, 초나라는 수십명의 병사들을 나뭇꾼으로 변장시켜 성곽 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하는 척하게 하였다. 교나라의 군인들은 그들을 즉시 잡아와, 득의만만해 하였다. 이튿날, 초나라의 같은 작전에 속아 넘어간 교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잡으러 성문을 열고 나오자, 미리 매복해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교나라 도성을 포위하며, 총공격을 해들어왔다. 교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도성 아래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고 초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城下之盟 이란 압력에 의한 굴욕적인 조약이나 협약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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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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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잊을 수 없는 중국인 가정 - 이경희
그 가족과의 사진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실패한 몇 개의 필름 속에 들어 있는 모양이다. 미국 여행중 방문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하와이의 한 가정.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파티에서 정말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그 집 부부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사실 낯선 여행에서의 초대란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데서 이상하게도 같은 민족을 만난 것 같은 친근함이 들어 초대에 응했다.
"저 분은 언제나 말이 적습니다. 그러나 속은 무척 다정하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별말 없이 자기 방으로 가버린 남편을 보면서 상냥한 부인이 내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그 남편의 뒷모습만으론 결코 부인의 설명대로 다정하게 느끼기는 어려웠으나, 말 없는 남자의 본심은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공과 계통의 연구소에서 일한다는 그 남자는 재미 중국인 2세였다. 부인은 대만에서 이곳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그와 결혼해 그대로 눌러앉게 된 미모의 어학도였다. 아직 아이가 없는 이 부부는 모두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 부인의 유일한 즐거움은 남편이 운전해 바래다 주는 직장과 집 사이의 드라이브 코스, 그리고 먼 곳에서 찾아오는 손님의 대접 같은 것이었다. 애들이 없어서인지 무척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 가정에서 한 동양 여인의 생활상을 나름대로 평가하며 앉아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부인은 서랍에서 아주 귀중한 보물이라도 만지듯 예쁜 봉투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봉투 안에는 비행기 표가 들어 있었다.
"이거 비행기 표예요."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타이베이로 가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저이가 어머니날 선물로 제 어머니를 위해 저에게 사준 거랍니다."
그녀는 감격으로 거의 울상이 되면서 그 표의 사연을 내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기가 항상 타이베이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남편이 그곳의 왕복표를 이렇게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 월급으로는 굉장한 금액입니다. 저이는 자신이 즐기는 일체의 것을 끊고 절약해 이것을 마련해 주었어요. 그리고는 제가 어머니를 초청하는 것처럼 하라고, 딸이 초청하는 게 어머니날의 선물로 더욱 뜻있지 않겠냐고 말했어요."
나말고도 벌써 몇 사람에게 했을 그 자랑스러움. 그녀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별로 말이 없는 남편과 부인과의 관계... 그러나 그들의 조용한 대화며 정중한 태도는 내게 아무 설명 없이 그 가정의 따스한 분위기와 향기를 말해 주었다.
(서울전문직업여성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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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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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 장 피에르 모르
망원경이 가져온 영광
그는 안경 제조인들이 만든 것처럼 코안경의 렌즈를 이용한 망원경으로는 기대할 게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높은 배율과 선명한 상을 얻기 위해서는 특수 렌즈가 필요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두 개의 렌즈란, 하나는 약한 볼록 렌즈여야 했고 다른 하나는 강한 오목렌즈여야 했다. 안경 제조인들이 만든 렌즈는 이와 반대로 강한 볼록렌즈와 약한 오목 렌즈의 조합이었다. 갈릴레오는 직접 렌즈를 깎고 갈았다. 다행히 베네치아는 유럽 렌즈 세공의 수도였으므로(베네치아의 겨울은 온 유럽에서 유명했다)필요한 재료와 물품을 구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사물이 흐릿하거나 이지러지지 않게 보이면서 여섯 배의 배율을 얻을 수 있는(다시 말해 대상이 여섯 배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망원경을 곧 제작했다. 이를 다른 것과 비교해 본다면 현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쌍안경은 일곱 재의 배율을 제공하며, 안경 제조인들의 장난감 망원경은 두세배의 배율을 제공하고 흐릿하며 이지러진 상이 맺히곤 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결과에 용기를 얻어 다시 작업에 착수하여 8월 초에 상이 전혀 이지러지지 않고 아홉 배의 배율을 제공하는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성공이었다. 갈릴레오의 시도를 풍문으로 전해 들은 공화국 정부가 그에게 망원경의 실연을 요청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8월 21일 베네치아의 종탑 위에서 동료들이 지정한 원로의원들을 모시고 실연을 해보이기로 즉시 수락했다.
밤이면 만나는 경이의 세계
약속된 날, 원로의원들은 약 100m에 달하는 종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을 불평없이 기어올랐다. 고된 일이었지만, 그들은 계단을 오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현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마술이었다. 진실로 경탄스러웠다. 파두아 성당은 종탑에서 32km가 떨어져 있었는데 망원경을 통하여서는 불과 3.5km의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망원경은 종탑에서 2.5km떨어져 있는 무라노를 사람들까지 보이는 거리인 300m 거리로 앞당겨놓았다. 원로의원들의 열광은 당연한 일이었다. 곧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망원경을 기증했다. 원로원은 이 새로운 기구를 군사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에 매우 감탄하여 그에게 대단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종신직을 보장해 주었고 월급도 두 배로 올려주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계획의 첫째 부분을 이루었다. 망원경은 넉 달 만에 그에게 명예를 가져다 주었으며, 부분적이나마 재정적 어려움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제는 계획의 둘째 부분이 남아 있다.
그는 파두아로 돌아가 서둘러 두 번째 망원경을 완성시켰다. 이 망원경은 9배가 아니라 20배로 대상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갈릴레오가 이것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무라노의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여러 날 동안 밤만 되면 갈릴레오는 하늘에서 그가 원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경이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섬을 발견하거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해변에 첫 발자국을 남기거나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미지의 계곡, 호수, 산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경이로운 관찰을 수일 밤 계속하여 발견한 것은 섬이나 산이 아니라, 그 이전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세계, 새로운 우주였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갈릴레오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직시 전세계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1610년 3월, 각국의 지식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로 쓰인 소책자가 '별들의 소식'이라는 멋진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
갈릴레오가 새 망원경을 처음으로 겨냥한 천체는 달이었다. 그의 경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의 공식 천문학에서는 달은 수정처럼 매끈한 윤이 나는 구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망원경을 달에 맡춘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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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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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모두 시계를 갖고 있다
제6장 생물 시계의 다양한 주기
대자연의 사계 - 식물
최근 들어서는 비닐 하우스가 농업에 많이 응용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상점에 가서, 철이 지났거나 아직 제철 되지 않은 꽃과 야채, 과일이 지천으로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값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겨울에도 딸기와 토마토를 먹을 수 있고, 꽃병에 장미꽃을 한아름 꽂아 놓을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제철이 아닌 농작물을 키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비닐 하우스에서 온도를 조절하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비닐 하우스를 이용해서 온도를 조절할 수 없다면 제철이 아닌 농작물을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철이 아닌 농작물을 먹고 볼 수 있는 이유에는 비닐 하우스의 이용 말고도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인공적인 조명을 농업에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비닐 하우스에 검은 천 같은 것을 씌워 놓았거나 전구를 밝혀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검은 천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고 전구는 인공적으로 햇빛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제부터 인공적인 조명을 주는 것이 어째서 제철이 아닌 농작물을 키울 때 중요한 요소가 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여러분은 누구라도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로 시작되는 노래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봄이 오면 온산을 붉게 물들이면서 진달래가 피고, 노란 개나리가 피고, 복사꽃, 살구꽃이 앞을 다투며 피어난다. 이렇게 나무에서 피는 꽃 뿐만 아니라 작은 풀들도 꽃을 피워낸다. 제비꽃, 민들레, 봄맞이꽃, 냉이꽃 등등. 여름이 가까워 오면 또 다른 꽃들이 대지를 수놓는다. 빨간 양귀비며, 아카시아, 자주빛 꽃창포, 그리고 매발톱꽃, 장미 등등. 코스모스가 가을이 온 것을 알리면 소설에도 등장하는 메밀꽃이 피고, 들국화가 산자락을 누빈다. 하지만 가을을 치장하는 꽃 중에서 가장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국화이다. 겨울에 피는 꽃은 그리 많지 않다. 바닷가에 동백이 피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끝날 즈음 매화가 핀다. 산에 들에, 그리고 집의 안뜰에 피어나는 꽃만큼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를 잘 가르쳐 주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계절을 알고 꽃을 피우는 것일까? 그 대답은 곤충에서처럼 역시 광주성 시계이다. 식물의 몸 속에도 광주성 시계가 들어 있어서 여러 가지 행동을 명령하는 것이다. 광주성 시계가 내리는 명령은 꽃을 피우라든지, 겨울을 나기 위해 겨울눈을 만들거나 알뿌리(구근)을 만들라는 것 등이다. 또 씨앗을 틔우라는 명령도 있다. 광주성 시계는 이렇게 무슨 일을 시작하라는 명령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그만두라는 명령도 내린다. 거의 모든 생물이 매년 항상 똑같은 계절에 발생을 하며 생장하고 생식하는 등의 중요한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광주성 시계의 작용 때문이다. 광주성 시계란 어떤 것일까? 시계처럼 지금이 어느 때라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꿀벌이나 찌르레기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 나침반의 기능을 하는 것일까? 그것도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광주성 시계란 시간의 경과를 재는 시계이다. 시간의 경과를 재서 계절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광주성 시계는 어떤 방법으로 시간의 경과를 알아내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자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광주성 시계가 모래 시계와 같은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고 본다. 또 다른 학자는 광주성 시계가 서커디언 시계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뷔닝이라는 과학자는 1936년에 이미 선구적인 가설을 내놓았다.
"생물은 내적 요인에서 나오는 리듬을 갖고 있어서, 나날의 활동 리듬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생물은 이 리듬을 이용해서 시간도 재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식물은 시간의 흐름을 아는 시계 같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이용해서 하루가 가는 것을 알고, 꽃이 피는 시간 등을 조절하고 있다."
식물은 꽃이 피는 주기에 따라서 단일 식물과 장일 식물로 나누어진다. 단일 식물이란 하루 중 해의 길이가 어느 정도 이하로 짧아지면 꽃이 피도록 되어 있는 식물을 말한다. 따라서 단일 식물은 여름과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많다. 담배나 코스모스, 메밀, 국화, 나팔꽃 등이 단일 식물이다. 장일 식물은 단일 식물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좋다. 다시 말해서 해가 길어질 때 꽃이 피는 식물인 것이다. 따라서 장일 식물에는 봄과 초여름에 꽃을 피우는 것이 많다. 무, 배추, 보리, 밀, 파, 시금치, 양배추, 붓꽃 등이 장일 식물인 것이다. 단일 식물이나 장일 식물이나 모두 제각기 갖고 있는 생물 시계를 이용해서 해의 길이를 재고 있다. 그런 방법으로 언제쯤 성장하는 시기를 마감하고 꽃을 피울 시기로 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생물 시계는 이런 방법으로 대자연의 사계를 갖가지 꽃으로 수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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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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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수첩 속에 감춘 눈물
직원들이 '제멋대로' 뛰어 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물론 말못할 고통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회사가 성공했을 때에는 직원들 모두에게 그 성과를 돌리고, 회사가 실패했을 때에는 오직 홀로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게 바로 사장이다. 그래서 모든 사장은 외롭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라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고 모든 이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한 해였다. '무인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겠다는 일념으로 엔지니어들은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직원들이 하는 일에는 일절 참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당시 개발팀장이었던 백정규에게 일임했고,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이 걱정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일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가급적이면 밖에서 봐야 할 일들을 주로 내가 맡았다.
엔지니어들은 야전침대까지 갖다 놓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부분적인 성과들은 있었지만 아직 성패는 불투명했다. 조카 곗돈까지 끌어다가 연구비로 쏟아 부었다. 더 이상 끌어다댈 돈도 없었다. 집도 날아갈 판이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그림 몇 점도 모조리 팔아치운 상태였다. 3년째였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다. 지금껏 사업을 하면서 월급날을 어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건 직원과 사장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었다. 직원들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했다. 불신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면 회사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월급을 주지 못한다면 회사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옳았다.
당시 내 수첩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은행 관련, 사채 관련 이자만으로 하루에 대여섯 건씩 돌아왔다. 어음은 또 어음대로 쳐들어왔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나의 신용등급은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매일 아침 화장실 변기에 앉아 수첩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며 기가 막히고 눈앞이 깜깜했다. 없는 집안에 제사 자주 돌아온다더니,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월급날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월급날 아침이면 특히 막막했다. 어디서든 돈을 끌어와야 했다. 어느 날엔 가는 아침부터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더니 모두들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동창이고 친척이고 모두 나를 꺼리는 눈치였다. 이해는 하지만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어찌 해서 겨우 액수를 맞춰놓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는 빚독촉도 무서웠지만,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직원들에게 웃는 낯을 보여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직원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어도 회사 사정이 엉망이라는 걸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나타나면 항상 직원들은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게 못 견디게 싫었다. 아무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일에만 최선을 다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직원들 앞에서 나는 항상 웃으면서 격려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던 것이다. 직원들을 보는 순간 곧바로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로 경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바쁜 일이 있어 못 들어갈 것 같으니, 은행에서 봉급 찾아오는 대로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서 나는 차를 주차장 구석으로 몰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대로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도 싶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였다. 꼬박 여섯 시간을 차안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실컷 울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지갑을 보니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슈퍼마켓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입사한 지 아직 한 달이 안된 어린 경리는 책상에 엎드려서 울고 있었다. 직원들은 일손을 놓고 침통하게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 개발팀장이었던 백정규를 불러 세웠더니 그제서야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월급을 찾아오다가, 은행 앞에서 날치기를 당했답니다."
머리를 뭔가로 된통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날 아침 돈을 꿔주겠다면서 전화기에 대로 면박을 주던 고향 친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딱 한 번만 더 속아주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자식아.' 그러나 나는 경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대수롭지 않은 척 웃어주었다.
"괜찮아, 임마.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경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안됐지만 월급은 내일들 받아가."
나는 들고 있던 빵봉지를 내려놓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더 있다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게 될는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북 영도에서 경리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못난 제 자식을 믿어주시고 오히려 위로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변상을 해드려도 죄스러울 판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인 걸요. 각박한 세상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의 심정으로는 사실 경리에게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경리가 아니더라도 아무나 붙잡고 원망하고 통곡하고 싶었다. 그렇게 인사까지 받고 나니 나는 더없이 부끄러워졌다. 바로 며칠 전에 백정규 부사장과 아침 미팅을 하던 중에 잠시 그 시절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사장님은 연극배우가 체질에 맞습니다."
같이 웃고 말았지만, 내게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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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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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가구
도연명의 허실유여한이라는 시구는 선미는 있을지 모르나 아늑한 감이 적다. 물 떠먹는 표주박 하나만 가지고 사는 디오게네스는 아무리 고답한 철학을 탐구한다 하더라도 명상하는 미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가구와 더불어 산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골동품이 아니라도 예전 것들이다. 퇴계와 율곡 같은 분이 쓰던 유래 있는 문갑이 아니라도, 어느 조촐한 선비의 손때가 묻은 대나무로 짜서 옷칠한 문갑이다.
먹글씨를 아니 쓰더라도 예전 벼루와 연적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 세전지물, 우리네 살림에는 이런 것들이 드물다. 증조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 이런 것이 없는 까닭은 가난한 탓도 있고 전란을 겪은 탓도 있고 한 군데 뿌리를 박고 살지 못하는 탓도 있다. 그리고 오래 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잘못에도 있다. 유서 깊은 화류장롱이나 귀목 반다지를 고물상에 팔아버리고 베니아로 만든 '단스'나 금고 같은 '캐비닛'을 사들이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교체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서양 사람들은 오래 된 가구나 그릇을 끔찍이 사랑하며 곧잘 남에게 자랑한다. 많은 설명이 따르기도 한다. 파이프 불에 탄 자국이 있는 마호가니 책상, 할아버지가 글래스턴과 같이 유명했던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더 길어진다. 자동차 같은 것을 해마다 바꾸는 미국 가정에서도 '팔라'에는 할머니가 편물을 짜며 끄덕거리고 앉아 있던 '로커'가 놓여 있다. 흑단, 백단, 자단의 오래된 가구들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 안정감을 주며 유구한 생활을 상징한다. 사람은 가도 가구는 남아 있다.
화려하여서가 맛이 아니다. 오래 가고 정이 들면 된다. 쓸수록 길이 들고 길이 들어 윤이 나는 그런 그릇들이 그립다. 운봉칠기, 나주소반, 청도 운문산 옹달솥,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 두면 뚜껑에 밥물이 맺히는 안성맞춤 놋주발, 이런 것들조차 없는 집이 많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네 살림살이는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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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12. 수용성
<해답 구하기를 딱 멈춰 보라.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라. 풀고, 기다리고, 좋은 때를 가져보라>
한 철학자가 선승을 찾아와서 붓다와 명상과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헐떡이면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선승이 말하기를,
<객이 몹시 지쳐 보이는구려. 이 높은 산을 올라 먼 길을 오셨으니 우선 차나 한 잔 하시게>
철학자는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의 마음은 온갖 의문들로 들끓었다. 이윽고 주전자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고 차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승은 말하기를,
<기다리시게. 그리 서둘지 마시게. 혹시 아는가? 차 한 잔 마시노라면 객의 의문들이 싹 풀릴지>
순간 철학자는 자신이 완전히 헛걸음한 게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미친 거 아냐? 차 한잔 마신다고 붓다에 대한 내 의문이 어떻게 풀릴 수 있단 말야?' 그러나 그는 너무 지쳐 있으니 차나 한 잔 받아 마시고 산을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생각했다. 이윽고 선승이 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기울였다. 찻잔이 가득차고 넘치는데도 선승은 계속 붓는 거였다. 잔 받침대까지 가득 찼다. 한 방울만 더 따르면 마룻바닥으로 넘쳐 흐를 지경이었다. 철학자가 외쳤다.
<그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잔이 넘치고 받침대까지 넘치는게 안 보이십니까?>
선승이 말하기를,
<아항, 객의 모양이 꼭 이렇지. 객의 마음이 꼭 이렇게 의문들로 그득해서 내가 뭘 말해 줘도 들어갈 틈이 없지. 도리어 내가 한 마디라도 해주면 객의 의문들은 넘쳐 흘러 물바다를 이룰 게야. 이 오두막이 객의 의문들로 가득 찰 테지. 돌아가시게. 객의 잔을 싹 비워 가지고 다시 오시게. 우선 객의 속 안에 조금이라도 빈 틈을 내시게>
이 선승은 그래도 봐줘 가며 하느니, 나한테 오면 어림도 없다. 난 빈 잔도 허락지 않는다. 잔 자체를 박살 내버릴 것이다. 아무리 비워도 잔은 다시 차기 마련이니까. 그대가 아예 있질 않아야 만이 차를 따를 수 있다. 그렇다. 그대가 아예 있질 않으면 차를 따를 필요조차 없다. 아예 있지를 말라. 그러면 모든 존재가 온갖 차원, 온 방향에서 그대의 없음으로 부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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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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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파크 안에 있는 스토 호수에서 포착한 틈새빛살.
Crepuscular rays, taken at Stow Lake in Golden Gate Park, San Francisco.]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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