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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66호
2020.5.08. (음 4.16)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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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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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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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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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자가 된다는 것은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는 일보다는 쉽다. - 빌 브래들리(美 상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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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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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발음
지난주 어느 날 저녁에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수 몇몇과 어울렸다. 학위 논문 심사를 마친 이들의 뒤풀이 자리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은 자리였다. 국어 선생들과 만난 자리에 국어 얘기가 빠질 리 없었다. 지난 호에 실린 ‘땅거미’를 읽은 소감을 물으니 전공에 따라 다양한 답이 돌아왔다. “‘땅거미’는 삭막한 도시 환경에 어울릴 정경이 아니니 언중의 일상 어휘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 고향에서는 ‘땅끔’이라 했던 걸 보면 표준어권의 현실 발음 [땅꺼미]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땅끔’, ‘땅끄미’의 ‘-끔(끄미)’은 ‘그믈다(까무러지다, 꺼지다)’에 어원을 둔 ‘그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 발음은 [땅꺼미]이다”…. 이처럼 여러 갈래로 오가던 ‘땅거미 논의’는 이내 한뜻으로 모여졌다. ‘현실 발음을 사전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 발음을 사전에 반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태조사와 연구가 여럿 나와 있기 때문이다. 2003년에 발표된 국립국어원의 ‘서울말 발음 실태 조사 결과’는 [땅꺼미]가 표준 발음인 [땅거미]보다 널리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국어원은 ‘사전의 발음 정보와 다른 경우가 많아 표준어를 재사정할 필요성이 드러났다’며 ‘발음 정보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2012년에 국립국어원이 시행한 ‘표준 발음법 영향 평가’ 연구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음화의 경우) 표준 발음법을 따랐을 때와 현실 발음대로 했을 때 괴리가 있으니 규범에서는 원칙만 제시한 뒤 사전에서 두 가지 발음 모두 인정’할 수 있으며 ‘맞춤법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복수 표준 발음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이다. 한마디로 복수 표준어처럼 복수 표준 발음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의 발음 정보는 박제가 아닌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간 쌓아온 연구·조사 결과가 올해 10월에 문을 열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우리말샘)에 담기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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救命胴衣
아시아나항공 214편의 사고 원인 등을 두고 여러 얘기가 나온다. 엉뚱한 괴담이설도 떠다닌다. ‘이번 사고는 7월7일에 일어났다. 한국인 승객은 77명이고 사고 비행기는 7년째 운항 중인 보잉 777이다. 항공편 숫자 214를 한 자씩 더하면 7이 되고 미국인 승객 61명을 더한 것, 중국과 일본 국적 승객 142명의 합도 1+4+2=7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세븐의 저주’이다. 사고가 일어난 샌프란시스코 기준(7월6일 오전)이 아닌 한국 시간(7월7일 새벽)으로 따진 것만 봐도 억지임을 알 수 있다. 견강부회라 하기에도 민망한 이야기는 숫자 놀음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한 방송은 ‘연장자에 대한 존경과 권위주의라는 한국의 문화 특성 탓에 한국 조종사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 모호한 내용을 보도했다. 한국의 존칭어 등이 조종사들끼리의 효율적이고 빠른 의사소통을 방해해 사고가 발생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ㅅ신문) 미국 작가 맬컴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밝힌 ‘한국어의 존대와 완곡 화법이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특정 국가의 (언어)문화를 사고 원인으로 몰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 사고의 이모저모를 접하면서 우리나라 ㄱ항공 좌석에서 본 안내문구가 떠올랐다. ‘着席中에는 安全帶를 매십시오’, ‘救命胴衣는 座席밑에 있습니다’. 20~30대 10명에게 병기된 영어를 지운 이 안내문을 보여주었다. 떠듬떠듬 한 자씩이라도 읽어 낸 이는 딱 한 명. 한자나 영어를 모르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읽기는커녕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던 이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니 큰 잘못이라도 한 양 고개 숙이며 수줍게 웃는다. 그들은 잘못한 게 없다. ‘앉아 계실 때는 안전벨트를 매십시오’, ‘구명복은 좌석 밑에 있습니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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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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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 기형도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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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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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 스펜서 존슨
2장 이야기 (2/4)
사라져버린 치즈
생쥐들은 사태를 지나치게 분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많고 복잡한 생각에 눌려 행동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이처럼 생쥐에게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두 간단했다. C창고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미로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스니프가 코를 높이 들어 킁킁 냄새를 맡은 후 스커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스커리는 미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스니프는 전력을 다해 스커리를 따라갔다. 그들은 신속하게 새 치즈를 찾아나섰다. 그날 밤, 느지막한 시간에 헴과 허는 뒤뚱거리며 C창고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치즈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았던 그들은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웬일이야. 치즈가 사라졌어."
헴이 고함쳤다.
"치즈가 없다고 치즈가!"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댔지만 허망한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 치즈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침내 그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선택
그들은 새로운 사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허는 치즈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머리만 흔들 따름이었다. 그 역시 C창고에 치즈가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충격으로 얼어붙어서 오랫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그는 그의 삶에 더 이상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자신했던 것이다. 헴이 계속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허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들 꼬마인간이 보인 행동은 볼썽사납고 비생산적인 반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만한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치즈를 찾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꼬마인간들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치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고, 영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허가 '치즈'에 걸고 있던 희망은 현재 자신의 삶, 즉 생활의 보장인 동시에 미래의 안정이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백향복길 옆에 아담한 통나무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고 싶은 꿈이었다. 헴의 경우엔 다른 사람들을 거느리는 중요한 인물이 되어 카망베르 언덕에 큰 집을 짓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의 행복이 한밤의 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카망베르(Camembert) : 표면에 흰 곰팡이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맛이 진하고 부드러운 치즈로 프랑스 치즈 중에서 최고 명품으로 손꼽힌다. -역주 두 꼬마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 봤지만,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치즈가 사라진 텅빈 창고를 여기저기 헤매며, 현실을 확인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두 마리의 생쥐 스니프와 스커리는 다가온 변화를 수용하고 주저없이 행동으로 옮겼지만, 헴과 허는 계속해서 헛기침만 해대며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그들은 부당한 사태에 대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불평만 해댔다. 허는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만일 내일도 치즈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허는 치즈를 통해 미래의 계획을 세웠었다.안락한 생활, 행복한 가정, 사랑스런 아내와 아이들. 그 모든 꿈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느 누구도 미리 귀띔해 주지 않았어. 이런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는 없어.'이제 두 사람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허는 지친 가슴을 쓸어내리며 벽에 한 문장을 적어두었다.
'치즈'가 소중할수록 그것을 꼭 붙잡아라.
다음날 두 꼬마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치즈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C창고로 향했다. 그러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치즈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망연자실한 채 굳어버린 동상처럼 움직임 없이 그곳에 서있었다. 허는 있는 힘을 다해 두 눈을 꼭 감고 손으로 귀를 막았다. 모든 것을 닫아버리고 싶었다. 그는 치즈의 재고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송두리째 없어졌다고 믿었다. 허는 상황을 분석했다. 그리고 거대한 사고체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의 두뇌를 이용해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마침내 허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스니프와 스커리는 어디에 있지? 혹,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헴이 비웃었다.
"그것들이 뭘 알겠어? 그것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단순히 반응하는 생쥐일 뿐이야. 우리는 꼬마인간이다. 그들과는 달라. 우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그리고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도 있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돼. 만일 일어난다 헤도 우리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아야 해."
"왜 우리가 보상을 받아야 하지?"
허가 물었다.
"우리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무슨 권리?"
"우리는 치즈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
"왜?"
"우리 때문에 치즈가 사라진 게 아니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치즈를 모조리 훔쳐간 거라구. 그러니 우리는 그에 따른 응분의 보상을 받아야 해."
"아니, 우리도 이제 새 치즈를 찾아나서야 해. 우리에겐 보상을 받을 자격도 권리도 없어. 치즈는 사라져버렸어. 더 이상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구." 허가 말했다.
"절대로 안 돼."
헴은 끝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반대했다.
"나는 이 문제를 근본까지 파헤칠 거야."
헴과 허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스니프와 스커리는 이미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들은 미로 깊숙히 들어가서 좁은 길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치즈가 있을 만한 창고를 찾아다녔다. 오직 새 치즈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이 그들을 인도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마침내 N치즈창고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어마어마하게 쌓인 치즈덩어리들이 그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들은 너무 좋아 비명을 질렀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마치 꿈결인 듯 창고 안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난생 처음 보는 온갖 종류의 치즈가 그들을 반겼다. 스니프와 스커리가 감격에 젖어있는 동안, 아직도 헴과 허는 C창고에서 사태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현실적인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배고픔의 강도는 더해갔고, 마음에 좌절과 분노가 생겨 사태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허는 이따금 스니프와 스커리가 새 치즈를 찾았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치즈를 찾아 힘들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찾아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때로 허는 스니프와 스커리가 새 치즈를 찾아내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갑자기 미로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신선한 치즈를 발견해 맛있게 먹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C창고에 대한 미련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자."
허가 소리쳤다.
"싫어."
헴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이곳이 좋아, 편해. 다른 곳은 몰라. 다른 곳은 위험해."
"그렇지 않아.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를 생각해 봐. 바로 미로를 통해서였다구.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난 이제 너무 늙었어. 길을 잃고 헤매는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아. 너는 어 때?"
그 말을 듣자 허의 마음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던 새 치즈에 대한 희망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매일 그들은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창고에 가서 한 조각의 치즈도 발견하지 못한 채 걱정과 좌절에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려고 노력했지만, 날이 갈수록 의기 소침해지고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리느라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다.
그들의 집은 더 이상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휴식처가 아니었다. 헴과 허는 여전히 C창고를 서성거리며 매일 치즈를 기다렸다. 헴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창고 안에는 없는 것 같아 . 치즈는 아마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벽 뒤에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다음날 헴과 허는 연장을 가져왔다. 헴이 끌을 벽에 대고 허가 망치로 내리쳐서 창고 벽에 구멍을 만들었다. 힘들고 지쳤지만,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남은 것은 벽에 뚫린 큰 구멍밖에 없었다. 허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린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조만간 누군가가 다시 치즈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을 거야."
헴이 허를 달랬다. 허는 그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치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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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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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酸不 (주산불수)
酒(술 주) 酸(실 산) 不(아닐 불) (팔 수)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우상(外儲說右上)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송(宋)나라에 술을 만들어 파는 장씨(莊氏)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되를 속이지도 않고 손님에게도 매우 친절했으며, 술 빚는 솜씨 또한 훌륭했다. 뿐만 아니라 술집임을 알리는 깃발까지 높이 세워 두었다. 그러나 술이 팔리지 않아서 언제나 쉬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장씨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양천(楊 )이라는 유식한 노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노인의 답은 이러했다. 바로 당신 집의 개가 너무 사납기 때문이오. 장씨는 술장사와 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양천이라는 노인은 다시 설명하였다. 사나운 개가 술 사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 짖어대고, 특히 아이들이 술 심부름을 왔다가 놀라 달아나는 판인데, 누가 감히 술을 사러 오겠소? 그러니 술이 싫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오. 酒酸不 란 경영 방법이 좋지 않거나 일처리가 잘못 되었음 을 비유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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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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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군내 나는 김치 - 모난돌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집에서 50리 떨어진 중학교에 기차 통학을 하던 때의 일이다. 새벽 다섯 시면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내게 줄 밥을 다 지어 놓으시고, 곤해서 계속 자려는 나를 흔들어 깨우시곤 했다. 어느 봄날, 그날도 세수를 하고 밥상을 대했는데 며칠째 억지로 먹고 있는 군내 나는 김치가 또 올라와 있었다. 김치 국물에는 허연 거품이 부글부글 피어 있어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억지로나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금방 지은 밥으로 도시락을 싸면 밥맛이 없다며 뜨거운 김이 빠지길 기다리시더니 조금 뒤에 싸기 시작하셨다. 그때 도시락 반찬을 눈여겨보았더니 지금 먹고 있는 군내 나는 김치가 아닌가.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숟가락을 놓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왜 그러느냐는 어머니에게 기차 시간이 다되었다고 변명을 하고는 어머니가 그 도시락을 쌀 틈을 안 주려고 얼른 집을 나와 역을 향해 급히 걸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내가 반찬 투정하는 줄 아실 거야. 그리곤 조금 섭섭해 하시면서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내려놓으시겠지' 그날따라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500미터쯤 갔을 때였다. 갑자기 뒤쪽 멀리서 애절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도시락을 들고 비를 맞으시며 힘겹게 달려오고 계셨다.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아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반찬 때문에 화를 낸 못난 아들을 어머니는 배 곯리지 않으시려고 저렇게 뛰어오시다니! 나는 말없이 도시락을 받았다. 그리고 목이 아프도록 속으로 울면서 남은 길을 갔다.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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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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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 홍윤숙
천연의 성소 - 치명자산 성지
전주를 방문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부담 없이 가볍게 떠난 길은 날씨도 쾌청한 데다 고속도로 연변의 온 산마다 연녹두색으로 자욱하게 피어 있는 밤꽃 향기로 하여 한층 풋풋하고 향기로웠다. 마침 시우 김여정 여사와 동행이 되어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우선 전주 성바오로 서원에 계신 김 마리아 원장 수녀님을 만나 치명자산 순례를 이야기했더니 선뜻 안내해주시겠다며 앞장을 서시었다. 차에서 내려 15분쯤 걸어서 올라가는 산길은 결코 수월한 길이 아니었다. 처음 얼마간은 붉은 황톳길이 그래도 평평하더니 오를수록 차츰 길이 좁아지고 가파로워지면서 잔돌과 굵은 돌이 뒤섞인 울퉁불퉁한 돌길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특이한 천연 암석으로 된 좁고 험준한 바위 길이었다. 그것은 마치 깊이 숨겨진 비경을 찾아가는 듯한 신선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경관이었다. 마침내 치명자산 성지, 한국 순교사의 두 꽃봉오리 같은 동정 부부 유 요한과 이 누갈다 묘지 앞에 섰다. 순결을 맹세한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하고도 4년간 오누이처럼 동정을 지키며 오셉과 마리아처럼 순결하게 살다 마침내 순교한 것이 요한 23세, 누갈다 20세의 아직 꽃도 피지 않은 봉오리들이었다. 옥중에서 보낸 누갈다의 편지는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을 만큼 애절하였다. 새로 신축되는 대성당의 골조들이 산 아래 웅장하게 보였고,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치명자산은 바로 유 요한과 이 누갈다의 영원한 신앙과 사랑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온 전주 신도의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는 것을, 끊이지 않고 올라가는 순례객의 모습에서 알수 있었다. 그런 감회와 감동을 새기며 우리는 시내로 돌아왔고 전동 성당에 잠시 들른 자리에서 본당 사목회장이신 안득수(의학박사)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안 회장으로부터 바로 우리가 다녀온 그 인상적이던 성지로 가는 길이 교구의 계획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발 조성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잠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천연의 바위 길이 깍이고 다듬어져 계단이 된다면 순례자의 걸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자연의 원형이 지녔던 천연의 성소와도 같던 신성함이나 신비로움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중바위 성지의 특색은 바로 그 천연의 성소 같은 바위 길에 있는데 하는 생각으로 잠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그리스 아테네에서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도중에 있던, 바울로 성인이 그곳에서 기도하시고 전도하셨다는 바위 산이 생각났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발에 닳고 닳았는지 반들반들하게 유리처럼 닦인 바윗돌, 자칫하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를 만큼 위험한 바위와 바위들이 연결된 길이었건만 자연의 원형 그대로를 보존함으로써 2천 년 전 초대 교회 시절을 방불하게 떠올려주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때 바울로 성인이 그 바위 산 위에 서 계신 듯한 환상을 느껴볼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인공적으로 전연 개조되지 않은 자연의 원형이 바로 천지 창조의 한 순간을 연상할 수 있게 해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천연의 성소라는 경외감에 옷깃을 여민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치명자산 성지로 가는 바위 길도 바로 그 바울로 성인의 유적지를 방불케 하는 천연적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 순례객의 발길에 닳아 반들반들 길이 들고 윤이 나는 바윗돌의 매끄러운 감촉이 더한층 눈물겨움을 자아내게 하던 것이다.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성지를 경건하게 조성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거룩한 일을 하기에 앞서 인간의 소망보다 먼저 하느님의 소망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가령 수십억을 들여 성전을 신축한다, 성지를 조성한다 하는 일이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그분의 뜻에 맞게 그분이 '보아서 좋아야'할 것이다. 당신이 만드신 태초의 창조물에 함부로 망치를 대 깨트리는 것을 좋아하실는지, 가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 번쩍이는 수십억짜리 호화 성전을 마땅하게 생각하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 기억에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도미네 붜바디스'성당의 퇴락하고 황폐하던 작은 공소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자리 자연스러운 곳에 계시리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로 치명자산 성지의 특색인 저 천연의 성소인 바위 길을 오르내리면서 전주의 신자들은 태초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경이로움을 되새기며, 그 길을 걷는 작은 고행을 통해서나마 예수님과 순교자들이 가신 길을 묵상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보는 눈과 듣는 귀
마르코복음 8장 18절을 보면 "여러분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까?"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생각하면 이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던져지는 준엄한 심문이 아닐까 싶다. 날마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공개되는 청문회장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을 그들 증인들에게 던져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으로 "어찌하여 당신네들 지나날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였느냐, 당신들의 잘못된 행적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의 눈, 역사의 눈, 신의 눈이 있음을 어찌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던가?"라고. 흔히 '격동하는 시대'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격동하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판단력을 그르치며 사물의 면목을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근시안적인 색안경으로 역사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모든 사물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척도에 맞추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맹목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뉘우치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 12,40 참조) 만일 청문회장의 저들 증인이 지난날 조금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졌더라면 그래서 온 국민이 희망이 무엇이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옳게 판단만 했더라면 그리고 역사의 수레 바퀴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했더라면 오늘 저같은 불행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남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능력이나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 보고 듣고자 하는 타인에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고자 하는 태도는 대화 또는 인간적 교섭의 시작이고 상호간의 이해와 사랑의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를 향해 '알아주지 않는다.' 불평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한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외면하고 '믿을 수 없다.'고 등을 돌린다. 사람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화합보다는 분열이 있고 단절을 외치고 소외를 느끼며 고독에 빠져 방황하고 괴로워한다. 이런 현상을 놓고 지식인들은 '과학이 발전했기 때문'이고 '사회가 복잡하기 때문'이며 '인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며 대화와 나눔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다. 마음 가짐,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 한 어떠한 대화도 나눔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일시적 속임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갖는 일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 그것은 깨달아 알고 뉘우치고 시정하는 정신을 말함이다. 바로 '배우고 생각하는'사제다. 삶이란 끝없이 일을 가는 나그네와도 같다. 길을 가는 나그네란 개인이건 인류건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결정지워진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앞을 향해 나가게끔 정해진 존재로 자신의 미래와 사회의 미래를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하면 미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과거의 경험과 업적이 뿌리가 되어 거기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삶이란 누구나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창조해가는 일이다. 만일 지나온 과거가 잘못되었으면 잘못되었을수록 솔직하고 용감하게 시인하고 뉘우치고 회심하여 바로 일어설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갈 새 길, 미래가 열릴 것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란 외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자신의 내부를 향한 준엄한 채찍인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벗겨놓고 직시하는 성찰과 비판의 눈이며 스스로 회심하여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의 질책을 듣는 귀다. 하여 참다운 의미의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다면 인간의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종잡을 데가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또한 위태롭다고 한 논어의 '배우고 생각함'이란 말도 바로 노는 눈과 듣는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한다면 주위의 올바른 견해나 진지한 이야기, 세상의 규범에 귀 기울이고 그 말들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보고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고 그들의 말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음미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일이다. 하여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줄이어야 한다. 실천이 없는 다시 말하여 행동하지 않는 눈과 귀는 죽은 눈과 귀다. 그러기에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생각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실행했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여담이지만 웃지 못할 일은 5공화국의 비리를 캔다는 정의의 사도 같은 의원들이, 여야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세비 80프로를 인상한다는 문제에 한해서만은 일치단결로 합심이 되던 일을 어찌보아야 할는지, 초록은 동색 그게 그거구나 하는 실망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문득 지난 40년 민주화의 투사로 싸워왔다는 야당 인사들이 자리를 바꿔 집권당으로서 국정을 장악해왔다면 과연 그들은 오늘 저같은 청문회 석상 증인의 자리에 서지 않을 만큼 바르고 깨끗한 정치를 해냈을까. 어쩌면 5공의 비리와 대동소이한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념과 실행의 차이를 단적으로 느끼게 하는 문제라 하겠다. 각설하고 이런 격변하는 사회일수록 우리는 올바르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갖고 실천에 임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남의 이야기를 잘들을 줄 아는 태도 그것은 하나의 뛰어난 능력이다. 가령 상대방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은 소리라 해도 조용히 들어내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조바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잘못 속단하거나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듣는 일을 통해 깊은 이해력과 통찰력이 훈련되어 있고 비판력이 생기는 때문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우선 상대방의 신뢰감을 얻는다. 무슨 말이든 의논할 수 있다는 편안함과 무슨 일이든 맡길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현대는 PR 시대라 얼마만큼 나의 능력, 나의 자질을 남에게 알려주고 드러내 보여 인정받을 수 있을까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어디서나 열심히 자기를 선전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런 자기 선전의 피상적인 심리가 사물을 꿰뚫어보고 듣는 귀를 저해하며 참다운 의미의 배움과 사색의 길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진실로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은 설사 그것이 옳지 않은 말일지라도 그 말을 통해 배우게 된다. 즉 남의 얼굴에 묻은 때를 보고 내 얼굴을 씻듯이 남의 잘못을 거울삼아 나를 바르게 고치게 되는 것이다. 하여 5공의 비리가 컸기에 앞으로의 국정은 전철을 밟지 않고 과거를 거울삼아 내일을 설계할 것이라 믿어본다. 잘못을 치죄하고 규탄하고 밝혀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끝없이 그 일에 유착되어 청문회만을 거듭하는 일도 능사가 아니라 여겨진다. 새해엔 새 마음 새 뜻으로 묵은 얼룩을 하루빨리 지워버리고 참신한 혁신에 국정을 기울여주었으면 싶다. 죄는 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 날마다 죽은 짐승 난도질하는 식의 심문도 보기 싫고 증인들의 비겁한 도회술도 더는 보기 싫다. 인간의 벌거벗은 치부들이 칼날을 쥔 자나 칼자루를 쥔 측이나 똑같이 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슈바이처는 "나는 저항하기보다는 창조를 택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진실로 이 시대 이 시점에 서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말이 아닐까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고 한시바삐 재건하는 일이다. 여야가 서로 반대하기 위한 반대, 비생산적 논쟁으로 귀중한 국정을 그르쳐서는 안 될 일이다. 요컨대 진실로 보는 눈과 듣는 귀는 개인도 국가도 우선 자기 내부로 눈과 귀를 돌려 자기 안의 미운 얼굴 잘못된 소리를 보고 듣는 눈과 귀를 의미한다. 올바른 눈과 올바른 귀는 바로 자신을 비판하고 깨우치고 반성하며 회심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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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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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 - 조르주 장
제4장 필경에서 인쇄로
로마인은 그들의 문명과 함께 라틴어와 라틴 문자체계를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 5세기 뒤에 샤를마뉴 대제는 기독교가 로마 문명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그는 야만인들의 오랜 지배로 사라져 가던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되살리는 일에 착수했다. 여러 세기 동안 글을 쓸 줄 아는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은 라틴 문자를 사용했고, 기독교 세력이 팽창하면서 성경을 베끼는 일도 라틴 문자로 수행되었다. 842년 스트라스부르크 조약이 성립되면서 공식문서에 세속언어(자국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대 독일어와 고대 프랑스어로 작성된 이 조약은 샤를마뉴 대제의 두 손자 독두왕 샤를과 독일왕 루이스가 서로 동맹을 맺고 셋째 손자 로타르에게 대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대 프랑스어가 라틴어보다 더 빈번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거의 1000년 이상 필경기술은 수도사들이 독점해 왔다. 글을 쓸 줄 아는 세속인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샤를마뉴도 문맹이었다. 그가 왕실 문서에 결재를 할 때에는 필경사가 마련해 준 서명하는 자리에다 십자표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필경사와 달리 중세 유럽에서 필경사로 교육을 받은 수도사들은 창작가도 아니었고 권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글씨를 베꼈을 뿐 스스로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중세 필경사의 창조적인 측면은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은 서예의 대가였던 것이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 시대부터 그들은 필경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아름다운 글씨와 장식을 곁들인 정치한채식 필사본을 창조해 냈다. 이것이 최초의 책이 되었다. 성경을 필사하던 초기의 필경사들은 라틴어로 볼루멘이라고 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사용했다. 그러나 볼루멘은 결코 적당한 필기소재가 아니었다. 파피루스는 값이 비싼데다 질기지도 못하고 또 한 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수하기도 번거롭고 텍스트를 인용할 때 어느 부분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언급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양피지가 없었다면 채식기법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필기소재인 양피지의 출현은 필기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양피지는 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 처음 제작되었다. 양피지는 그리스어 pergamene에서 나왔는데 페르가몬에서 나온 가죽이라는 뜻이다. B.C.2세기에 이집트는 경쟁국가인 페르가몬에게 필경의 필수품인 파피루스를 공급하지 않으려는 정책을 썼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필경사들은 가죽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집트인도 아주 초창기에는 동물의 가죽을 사용했다. 양피지는 주로 양가죽, 송아지가죽, 염소가죽으로 만든다. 그외에 가젤, 영양, 타조 등의 가죽도 사용되었다. 양가죽과 소가죽은 다른 가죽과 달리 양면을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 벨룸지는 최고 품질의 양피지인데 아주 어린 송아지나 사산된 송아지의 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이 단어는 송아지를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에서 나왔다. 벨룸지의 주된 특징은 잉크나 페인트가 번지지 않아 원래의 색깔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아름다운 채식화를 그려 넣을 때는 주로 벨룸지를 이용했다.
[양피지]
책의 탄생
양피지를 만들려면 먼저 날가죽을 석회수에 담가 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가죽을 꺼내어 박박 문지르면서 남아 있는 살과 털을 모두 제거한다. 그리고 나서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기름을 빨아들이기 위해 석회가루를 뿌리고, 석쇠 위에다 널어서 말린다. 이렇게 바싹 말린 뒤 다시 무두질을 하는데, 이과정이 완벽해야만 날가죽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완전히 없앨 수가 있다. 필경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칼이나 속돌로 양피지 표면의 흠집이나 거칠한 부분을 제거하여 결이 고르고 반질반질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양피지에 잉크가 잘 먹히고 번지지 않는다. 양피지는 두 가지로 뚜렷한 장점을 지닌다. 첫째, 깃촉펜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이것은 잘 부러지기 쉬운 갈대붓보다는 훨씬 글을 쓰기가 좋았다. 둘째, 로마의 코덱스(권자본과 다르게 여러 장을 책처럼 접어 놓은 책자본:역주)같이 한데 묶을 수가 있었다. 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코덱스는 특별히 접혀 함께 묶인 여러 장의 페이지로 되어 있었다.
9세기 또는 10세기부터 각 사원과 수도원은 필사실을 갖추고 있었다. 원고를 필사하고 장식하고 장정하는 필사실은 주로 도서관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며, 주로 독립된 방으로 설치되어 온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수도원에서 불을 때는 유일한 방이었다). 그러나 수도회에 따라서는 조그만 방을 여러개 설치해 놓기도 했고, 가난한 수도원에서는 필사실이 회랑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필경사들은 저마다 좌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필경사는 써야 할 글씨의 스타일에 따라 각각 다른 거위깃펜을 사용했다. 깃펜은 주기적으로 손질해야 했고 자주 잉크를 채워 넣어야 했다. 필경사는 하루 네 페이지(양피지 2저판 기준) 정도 쓸 수 있었다. 한페이지는 가로 25~30cm 세로 35~50cm 였다. 필사작업의 근본은 완벽한 조직과 엄격한 분업이었다. 필사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은 기도시간에만 중단되었다. 똑같은 필사본에서 철자오류와 그림기술의 차이가 나는 것은 필경사들이 구술을 받아 적었거나 동일한 책을 나누어 작업했기 때문이다. 필사작업에는 종종 수녀들도 참가했는데 중세에는 남녀가 같이 기거하는 수도원도 많이 있었다. 수련수사, 도제, 초심자들은 줄 긋는 일부터 했다. 그러면 필경사들은 그 줄을 따라 글을 써 나갔다. 이런 밑줄이 지워지지 않은 원고들도 많이 남아 있다. 초심자들은 비교적 간단한 일부터 시작했는데 필사실에는 그런 잡일이 많았다. 원고의 필사는 수도원의 주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늘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도원의 필경사는 예술가가 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걸작이 되었다.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가 주문하는 명예로운 일거리는 가장 재능 있는 필경사들의 몫이었다. 이들 이름 없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만 믿고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제일 덕목인 겸손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수도사들은 허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필사본에다 자랑스럽게 이름을 적어넣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혹은 그 수도사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자랑할 때 수도원은 그에게 필사작업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그 수도사가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과 수도회를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면 다시 작업을 허락했다.
장식 작업은 채식화가와 세밀화가의 영역이었다. 이들은 정말 재능 있는 예술가였는데, 각 단락과 장절의 두문자에다 도금문자를 써 넣었을 뿐만 아니라 꽃, 사람, 전원풍경 따위 생동하는 세밀화를 함께 그려 넣어 책의 품위를 높여 주었다. 그들은 그림의 전체 윤곽을 먼저 첨필로 그리고 거위깃펜과 잉크를 이용해 마무리 했다. 필요할 때는 컴퍼스, 자, 직각자 등이 사용되었다. 색깔 있는 윤곽선은 펜으로 그렸고 마지막으로 빈 곳을 메워 넣을 때만 가는 붓을 사용했다. 수도원은 특정 공정을 잘 해내는 기술자를 수도원 안에서 구할 수 없을 때는 실력 있는 세속 예술가를 초빙하기도 했다. 수도원은 또한 제본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이들은 가죽 책표지와 책의 걸쇠(장금장치)를 만들곤 했다. 샤를마뉴 대제의 등극 전까지만 해도 필경사들은 서체를 마음대로 골라 쓸 수가 있었다.
처음에 수도사들은 로마 시대에 쓰이던 모든 서체를 이용했다. '언셜'이라는 필기체 대문자와 보다 작고 둥근 '세미언셜' 서체를 사용했다. 그리고 기념비에 글자를 샛길 때 쓰는 '대문자'도 사용했다. 때로는 종교적 기념비에 문자를 샛길 경우 널리 이용되던 '러스틱' 이라는 투박한 대문자도 사용했다.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에 언셜체는 비명 글씨와는 다르게 펜으로 쓰인 둥근 서체를 가리켰다. 768년에 샤를마뉴 대제의 치세가 시작되자 세미언셜 서체에서 영향을 받은 '카롤링'이라는 획기적인 서체가 등장했다. 선명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이 서체는 여러 세기에 걸쳐 중세 서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샤를마뉴 시대에는 정확한 원고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이전에 필사된 원고에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많은 오류가 나타나 있었다. 수도사들의 홀이나 무식으로 이 같은 원고상의 오류가 계속되어 어떤 때는 문장 전체의 뜻이 달라지는 수도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가장 권위 있는 원전에 의거하여 온갖 정성을 쏟아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런 잘못을 고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표준화된 카롤링 필사본에는(권위 있는 원전에 의거)라는 표시가 찍혀졌는데 이는 원전의 완벽한 전사를 보장했다.
필사작업이 세속화되자 새로운 예술가 계급이 생겼다. 12세기 말에 이르면 교육분야에 대한 교회의 독점적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수도사와 함께 일했던 세속 필경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길드나 직인 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 진출한 상공업 계층인 부르주아를 위해 공식문서를 작성해 주었고 또 직접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책의 출간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책제작이라고 해야 귀족의 경우에는 호화장정본, 성직자의 경우에는 예배서나 신학서가 전부였다. 여기에 새로운 분야의 출판이 추가되었다. 철학, 논리학, 수학, 천문학 분야의 저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단테같은 작가는 자국어로 글을 썼다. 이제 라틴어는 모르지만 자국어는 읽을 줄 아는 일반대중들이 자국어로 쓰인 책들을 사서 읽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중산층이 문학과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 수요에 맞추기 위해 필경 작업소의 숫자가 늘어났고 다양한 책이 제작되었다. 이제 온갖 종류의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리책, 교육책, 의학책, 천문학책, 심지어 소설까지 나왔다. 특히 (롤랑의 노래)와 같은 궁중 연애담은 아주 인기가 있었다. 독자들의 마음에 드는 필경 작업소를 찾아가 자기가 원하는 서체와 삽화를 지정하면서 책 제작을 주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주문은 독자와 필경작업소 사이에서 중개인 노릇을 하는 책 공급 업자가 대행해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12,13 세기에 대학 주변에 길드와 협동조합이 많이 생겼다. 책을 찾는 부유한 상인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학생들도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했다. 대학들이 많이 설립되면서 권위 있는 교재를 베껴야 하는 일거리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 필경사들은 많은 일거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부유한 학생만이 전문 필경사를 찾아갈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공인된 서점에서 사본을 빌려 와서 그들 스스로 베껴야 했다. 일거리가 폭주하면서 필경사는 점점 더 전문화하여 자신들의 권리와 동료들의 기술적 비법을 보호해 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또한 도제 제도도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필경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수도회 소속 초심 필경사와 마찬가지로 밑줄을 긋고 물감 재료를 빻는 등 아주 하찮은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도제 기간은 최소한 7년이었고 그중 7년째 되는 해에 가서야 비로소 조금씩 자신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완성도나 작품은 수석 필경사와 그 동료들이 심사했다. 만약 작품이 조합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정되면 그 도제에게는 독립된 필경사 호칭이 주어지고 자신의 필경 작업소를 설립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단 스승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작업소를 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원고의 오류를 수정하다가 제멋대로 추가 사항이 들어가기도 했다. 책 제작사 연구가인 존 드레퓌스에 따르면 도제에게 부과된 규율은 아주 엄격했다고 한다. 필경을 배우는 도제는 손을 잘 유지하기 위해 과음, 과식을 삼가야 함은 물론 여성과의 빈번한 성 접촉이나 과중한 노동도 피해야 했다. 필경사는 모든 서체를 익혀야 했고 또 어떠한 원고라도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재다능 한 필경사라고 해도 실수가 없을 수는 없었다. 필경 작업 소에는 교열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여백에다 적절한 교정 부호를 사용하여 교정해야 할 곳을 표시해 주었다. 실수가 사소한 것이라면 칼로 긁어 내고 깨끗해진 표면 위에 다시 쓰면 되었다. 단어 하나가 그대로 빠져서 삽입해 넣을 수 없다면 여백에다 그 단어를 쓰고 손가락을 그려 넣어 단어가 들어갈 정확한 자리를 지시했다. 아예 한줄이나 한 단락이 빠졌을 때는 페이지의 맨 밑에 그것을 써 넣었다. 그러면 삽화가 그 부분에 테두리를 친 다음 사람이 거기서부터 빠진 부분까지 걸어 올라가는 그림을 함께 그려 넣었다. 책제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필경사 협동조합이 높은 작업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에 어떤 필사본은 정말 위대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필경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보잘것없었고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수입이 따를 뿐이었다. 그래서 가장 재주 있는 필경사나 삽화가는 일상생활의 물질적 어려움을 고민하지 않고 작업에만 전념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기도 했다.
문화적 변화의 흐름에 따라 고딕 서체는 휴머니스트 서체로 대치되었다. 원고의 내용이 바뀌면 사용되는 글자꼴도 바뀌었다. 필경사들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고딕 서체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화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고딕 서체는 카롤링 서체보다 갸름하여 동일한 양피지에다 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깃펜의 끝을 비스듬히 잘라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서적대 위에 수직으로 놓인 양피지에다 글을 써 넣으려면 깃펜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들어야 했다. 이러한 붓 잡는 법은 네모나고 중간이 끊어진 고딕 서체를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이때는 고딕 양식이 서서히 출현하고 있던 시대였음이 고려되어야 한다. 고딕 건축의 대표적 특징인 중심이 교차하는 천장과 뽀족한 아치는 고딕 서체의 형태와 유사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러나 14, 15세기에 들어와 고딕 서체를 완전히 배격하는 전혀 새로운 서체가 이탈리아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동그랗고 넓적한 서체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휴머니스트 서체라 했다. 그리고 이 서체가 널리 이용되던 때 유럽 문명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활자를 이용하는 활판 인쇄의 발명이었다.
요한 구텐베르크의 동료들은 그의 인쇄술이 출판에 미칠 엄청난 영향을 헤아리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11세기 이후부터 활자를 사용했다. 압착기도 구텐베르크 이전에 수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이것은 포도즙을 짜내거나, 펄프를 압축해 종이의 면을 고르게 하거나, 직물 위에다 무늬를 찍어 넣거나 할 때 사용되었다. 15세기 초엽 목판에 새겨진 원고가 종이 위에 인쇄되었고, 그런 다음 성인 이나 성서 속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과 조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목판 위에 종이를 놓고 손으로 문질러서 하는 아주 원시적인 것이었다. 1440년 마인츠에 사는 요한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기계화된 인쇄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친구인 페터 쇠퍼는 납과 안티몬의 합금을 이용해 크기가 서로 다른 글자를 주조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기계 인쇄술은 현대인이 볼 때에는 엄청난 혁명이었지만 당시에는 필경의 연장으로 인식되었다. 인쇄없자의 목적은 필경사와 겨루어 그들이 내놓는 호화로운 책자와 똑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쇄면에 많은 여백을 남겨 나중에 채식사가 장식을 하도록 꾀했다. 인쇄업자들은 이처럼 손으로 쓴 필사본과 외관상 아주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 내려 애를 썼다. 이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대단히 화려한 대문자를 포함해 다양한 글자체와 부호들이 만들어졌다. 인쇄업자들은 심지어 깃펜으로 쓴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글자와 글자를 이어붙이기까지 했다. 책제작사 연구가인 존 드레퓌스는 이렇게 썼다. "처음 인쇄된 책은 손으로 쓴 책과 맞먹을 정도로 가능한 한 외관이나 내용이 훌륭해야 했다. 1450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의 화려함은 당시 손으로 제작된 성경의 아름다운 글씨와 장식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인쇄가 곧 필경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산적해 있는 기술적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종이가 도입되면서 더디고 힘겹던 필사작업이 한결 쉽고 빨라졌다. 구텐베르크는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된 종이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인이 언제 종이를 발명했는지 정확한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아마도 서기 2세기경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여러 가지 소재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마침내 재생된 넝마 조각에서 자주 얻어지는 아마포가 가장 품질이 좋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먼저 물에 담근 다음 잘 씻어 짓이기면 펄프가 나오는데 여기에다 물과 전분을 적당히 첨가하면 바로 종이가 생산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제지기술을 최고의 비밀로 숨겨 왔지만, 8세기경 사라센 제국과 겨룬 탈라스 싸움에서 사라센병에게 붙잡힌 중국 포로들은 마지못해 그 비밀을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제지기술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스페인과 시칠리아로 전파되었다. 13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주요 지역에는 제지공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한두 가지 개선된 사항을 빼놓고 종이를 만드는 법은 중국인이 처음 사용한 방법과 같았다. 종이 보급 이후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가 아니라 타이포그래피(활자의 크기, 활자들 사이의 균형과 배열 등을 다루는 기술:역주), 인돼, 그리고 출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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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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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우주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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