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3편
9. 소박한 생활
나는 안락한 살림을 시작해 봤지만 그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성을 들여서 짐을 꾸며 놓았지만 마음이 거기에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살림을 시작하자마자 곧 나는 비용을 줄이기 시작했다. 세탁비가 많았고, 게다가 그 사람이 제 날짜를 꼭꼭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와이셔츠나 카라가 두세 다스를 가지고도 되지 않았다. 칼라는 날마다 갈아야 하고, 셔츠는 날마다는 아니라도 적어도 하루 걸러는 바꿔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중으로 비용을 쓰는 것인데, 그것이 내게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세탁기구를 장만하고는, 세탁에 관한 책을 사다가 그 방법을 공부하고 아내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물로 그 때문에 일은 늦었지만 호기심에 재미도 있었다. 내 손으로 맨 처음 빨았던 칼라는 평생 잊을 수 없다. 풀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했고, 다리미를 충분히 뜨겁게도 못했고, 또 탈까봐 무서워서 잘 누르지도 못했다. 그 결과 칼라가 빳빳은 했지만 지나치게 먹인 풀가루가 자꾸만 떨어졌다. 그 칼라를 하고 법정에 갔으니 동료 변호사들의 비웃음을 자청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이미 비웃음에는 끄떡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소, 이것은 내가 처음 빨아 본 칼라라서 풀이 떨어지지만 상관없어. 그리고 자네들을 웃긴 것만 해도 좋은 일 아닌가? 했더니, 한 친구가 아니 그곳엔 세탁소가 없더란 말인가? 했다.
세탁비가 엄청나거든. 칼라 하나 빠는 값이 거의 칼라 값과 맞먹는데, 언제까지나 그놈의 신세를 져야 하니, 차라리 내 물건을 내 손으로 빠는게 낫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친구로 하여금 자조의 미를 이해하도록 만들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내 딴에는 숙련 세탁공이 됐고, 내 빨래는 결코 세탁공이 빤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내 칼라는 남의 것에 못지 않게 빳빳했고 빛이 났다.
고카레가 남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는 마하데오 고빈드 라나데가 선사한 목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선물을 매우 소중히 간수하면서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 중 한 경우가 요하네스버그의 인도인들이 그를 환영하는 연회를 베풀었던 때다. 그 목도리가 구겨져 있어서 다리미질을 해야만 했다. 세탁소에 보내서 다려 오게 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내 기술로 해보겠다고 했더니, 고칼레는 말했다.
당신의 변호사 실력은 내가 믿지만 세탁공으로서의 실력은 못 믿겠소. 그것을 버려 놓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그게 내게 어떤 것인지 아시오? 그러고는 신이나서 그 선물의 유래를 이야기 했다. 그래도 나는 주장을 하고, 내 솜씨를 보장하여, 그의 허락을 얻어 다리미질을 해서, 그의 인정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온 세상이 다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걱정이 없었다. 세탁소에 의존하지 않고 살게 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나는 또 이발사에 의존하기를 집어치웠다. 영국에 가는 사람은 누구나 다 면도질 방법을 배우는데, 내가 알기로는 제 머리 깎기를 배운 사람은 없다. 나는 그것도 배워야 했다. 나는 프리토리아에서 영국인 이발사에게 간 일이 한번 있었다. 그는 업신여기는 태도로 내 머리 깎기를 거절했다. 나는 몹시 불쾌했으나, 곧 이발 기구 한 벌을사가지고 거우 앞에서 내 머리를 깎았다. 이럭저럭 앞머리는 깎을 수가 있었으나, 뒤는 잘 되지 않았다. 법정에 갔더니 친구들이 법정이 온통 떠나가도록 웃었다.
여보게 간디, 자네 머리는 어떻게 된거요? 쥐가 뜯어 먹은 것 아니오?
아니야, 백인 이발사가 내 까만 머리에 손을 대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잖아! 그래서 내 손으로 깎기로 했다네, 이렇게 흉하더라도.
그 대답을 듣고도 친구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발사가 내 머리 깎기를 거절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그가 검둥이의 머리를 깎았다가는 곧 손님을 다 잃어버린다. 우리는 우리 이발사가 불가촉민의 머리를 깎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그 대가를 남아프리카에서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받았는데 이것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이라는 확신 때문에 나는 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자조와 소박한 생활에 대한 열정을 종국적으로 나타낸 극단적인 모습은 적당한 곳에서 이야기 하겠다. 씨가 뿌려진 지는 오래다. 그 씨가 뿌리가 내리고, 꽃이피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물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물이 적당한 때에 주어졌다.
10. 보어전쟁
1897년부터 1899년 사이에 있었던 다른 여러가지 경험은 생략하고 곧장 보어전쟁 얘기로 들어가야겠다.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내 개인적인 동정심은 완전히 보어인에게 갔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런 경우에 아직 내 개인적인 확신을 강조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에 대한 나의 내부의 갈등에 관하여서는 남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샤타그라하의 역사 에서 상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흥미를 가진 분들은 그 책을 보기 바란다. 영국 통치에 대한 나의 충성심이 나로 하여금 그 전쟁에서 영국 편을 들게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할것이다. 내가 영국의 한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주장한다면, 영제국을 방어하는 일에 참가하는 것 역시 내 의무라고 나는 느꼈다. 나는 그 당시 인도가 완전한 해방을 얻으려면 오직 영제국 안에서, 또 영제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동지를 모아서, 환자 수송병 의용대를 지원하여 겨우 허가를 얻었다. 보통 영국 사람들은, 인도인은 아주 비겁하여 목전의 이기적인 것만 알 뿐, 그 이상 목숨을 걸고 일할 줄은 모르는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영국 친구들은 내 계획을 안된다고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드 의사만은 진심으로 그것을 지지해서 우리에게 환자 수송작업의 훈련을 시켜 주었고 우리는 의료대 종군 자격을 얻게 되었다. 로턴 씨와 고인이 된 에스콤 씨가 그 안을 열성으로 지지해 주어서 우리는 마침내 일선종군을 신청했다. 정부는 우리의 지원에 대해 감사는 했으나 우리의 종군은 당장은 필요 없다고 하였다. 그 거절에 대해 나는 그저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았다. 부드 의사의 소개로 나는 나탈의 주교를 찾아갔다. 우리 의용대 내에는 그리스도 교인들이 많았다. 주교는 나의 제의를 아주 반가워하면서 우리의 종군이 받아들여지도록 도와 줄 것을 약속해 주었다. 전세도 우리를 도와 주었다. 보어인들은 예기했던 이상으로 억세고 결단력 있고 용감함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종군은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 부대는 약 40명의 지휘자 밑에 1천1백 명의 장정들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 3백 명쯤은 자유 인도인이고 그 나머지는 계약노동자들이었다. 부드 의사도 우리와 같이 있었다. 부대는 잘 해나갔다. 우리가 있는 곳은 전투선 밖이었고, 또 적십자의 보호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위급할 때는 전투선 안에서 활동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전투선 밖에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원해서 그런게 아니고 수뇌부들이 우리가 전투선 내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온 콥의 격퇴 이후 전세는 달라져서, 불러 장군은 메시지를 보내서 말하기를, 우리가 반드기 모험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할 수 있어서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날라다 준다면 정부는 감사히 알겠다고 했다. 우리는 지체할 것 없었다. 그래서 스피온 콥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전투선 내에서 버어졌다. 그때 우리는 매일 들것에다 부상병을 들고 20내지 25마일 행군을 해야 했다. 그 부상병 중에는 우드게이트 장군 같은 이도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영광이었다. 부대는 6주간 복무 후 해산되었다. 스피온 콥과 발크란즈의 패전 이후 영군 총사령관은 총진군으로 레이디스미드 및 그밖의 장소를 탈환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영국과 인도에서 증원부대가 오는 것을 기다려 서서히 진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의 일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으나 그 당시 많은 칭찬을 받았고, 인도인의 위신은 올라갔다. 신문들은 우리는 제국의 아들이로다 라는 후렴구가 붙은 칭찬의 노래를 실었다. 불러 장군은 자기가 위급했을 때에 우리 부대가 한 일을 칭찬했고, 지휘관들은 훈장까지 탔다. 인도인 단체도 조직이 좀 더 개선되었고, 나는 계약노동자들과 좀더 가까이 접촉하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크게 각성이 일어나, 힌두 교도나 이슬람 교도나 그리스도 교인이나 타밀인이나, 구자라트인이나, 신디인이나 다같은 인도인이요, 다같은 조국의 자녀라는 감정이 그들 속에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이제 인도인의 억울함은 시정이 되고야 말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 당시 백인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진 것같이 보였다. 전쟁중에 맺어진 백인과의 관계는 참 아름다웠다. 우리는 수천 명의 영국 군인과 접촉했는데, 그들은 우리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고, 우리가 전선에서 그들에게 봉사한 데 대해 감사를했다.
시련의 순간에 부딪칠 때 인간성은 어떻게 최고로 발휘되게 되느냐 하는 아름다운 회상의 하나를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버트 경의 아들 로버트 중위가 치명상을 받은 곳인 치블리 진지를 향해 행군을 하고 있을 때의일이었다. 우리 의무대는 그의 몸을 전장에서 운반해 오는 영예를 가졌다. 우리가 행진하던 그날은 무더운 날이었다. 모두가 목이 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목을 축일 수 있는 작은 시내를 만났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마셔야 하느냐? 우리는 영국 병정들이 먼저 마신 후에 마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먼저 마시지 않고 우리더러 먼저 마시라고 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서로 사양하는 아름다운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11. 위생개량과 기근구제
나는 언제나 아무 쓰임새 없이 남아 있는 정치단체의 일원으로 만족하는 일은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단체의 약점을 감춘다든지, 그 잘못은 바로잡지 않고 권리만을 주장한다든지 하는 일은 싫었다. 그러므로 나탈에 와 살게 된 이래 나는 줄곧 인도인 단체에 대해 퍼붓는 비난을 씻어 보려고 노력해 왔다. 비난은 어느 것도 사실 아닌 것이 없었다. 그 중 흔히 듣는 비난은, 인도인은 습성이 게을러서 집과 그 주위를 깨끗이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체의 중요한 사람들은 이미 각기 자기네 집을 깨끗이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집을 모조리 검사하는 것은 더반 시에 흑사병이 발생하게 됐다는 보도를 들은 후였다. 이것은 시의 원로들과 의논하여 찬성을 얻은 후에야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협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협력하여 일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무도 쉬워지고, 동시에 우리의 어려움도 경감되었다. 언제나 전염병이 발생만 하면 행정관들은 신경질적이 되고, 따라서 많은 사람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지나친 수단과 행동을 감행해 왔다. 우리 단체가 자발적으로 위생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쾌한 압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쓰라린 경험을 했었다. 단체의 권리를 주장할 때는 그 힘을 빌리기가 쉬우나, 단체의 의무를 다하도록 할 때는 그 힘을 빌리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어떤 데서는 모욕도 받았고, 어떤 데서는 묵살을 당하기도 했다. 민중들에게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란 아주 힘드는 일이요, 그 일을 위해 돈을 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잘 알게 된것은, 민중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하게 하려면 무한한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을 하자고 애쓰는 것은 개혁자지 사회가 아니다. 개혁자는 사회에 대해서 반대와 증오와 목숨까지라도 빼앗은 박해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개혁자가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것을 사회가 퇴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 운동의 결과 인도인 사회는 자기네 집이나 주위를 깨끗이 할 필요를 다소나마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당국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하는 일은 불만을 터뜨리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 있는게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자기 정화를 역설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인도 거류민들에게 조국에 대한 의무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일이었다. 인도는 가난한 나라다. 거류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남아프리카에 왔다. 그렇기 때문에 동포가 재난에 빠진 때는 그 수입의 일부를 그들을 돕기 위해 내놔야 한다. 그 일을 그들은 1897년과 1899년의 무서운 기근 때에 했다. 기근구제를 위해 그들은 상당한 기부를 했고, 1897년보다 1899년에는 더 많이 했다. 우리는 영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했는데, 그들도 이 기금 모집에 잘 협력해 주었다. 또 계약노동자들까지도 그 수입의 일부를 기부해 주었다. 이 기근 동안에 발기된 조직은 그 후에도 존속하고 있었고, 다 아는 바와 같이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들은 조국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상당한 기부금을 보내곤 하였다. 그와 같이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의 봉사는 언제나 내게 진리의 새로운 의미를 밝혀 주곤 했다. 진리는 큰 나무와 같아서 잘 가꾸면 가꿀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해준다. 진리의 광산은 깊이 팔수록 그 속에 묻혀 있는 보석을 더 많이 캐낼 수 있다. 그 보석은 갈수록 늘어가는 가지가지의 봉사의 길이다.
12. 인도로 돌아오다.
군무에서 벗어나자 이제 내 할 일은 남아프리카에 있지 않고 인도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남아프리카에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다가 돈벌이가 나의 주되는 일이 될까 봐서 한 생각이었다. 고국에 있는 친구들도 어서 돌아오라고 했고, 나도 본국에서 봉사할 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일은 물론 칸 씨와 만수클랄 나자르 씨 등이 있으니 될 것이고, 그래서 나는 동료들에게 놓아 달라고 요청했다. 쉽게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많은 토론 끝에 조건을 붙여서 들어주기로 되었다. 조건이란, 거류민단에서 1년 이내에 내가 필요하다면 즉시로 남아프리카로 다시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됐지만, 그 민단에 대한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 말을 받아 들이게 했다.
하느님은 사랑의 무명실로
나를 얽어매 주셨으니
나는 그의 사로잡힌 종이다.
라고 미라바이는 노래했지만, 내게도 거류민단의 사랑의 무명실은 끊어 버리기에는 너무도 강했다. 씨알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인데, 여기 있는 친구들의 소리도 내게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이 참된 것이었다. 그들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나는 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그 당시 나는 다만 나탈에 있는 사람들과만 가깝게 지냈다. 그들은 내게 사랑의 감로를 퍼부었다. 송별회를 여기저기서 베풀어 주었고, 값진 선물들을 주었다. 1899년에 내가 인도로 돌아갈 때도 선물을 받았지만, 이번 송별은 정말 굉장했다. 선물 속에는 물론 금.은붙이도 있었지만, 아주 비싼 다이아몬드 제품까지 있었다. 내가 이 모든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런 걸 받으면서, 내가 어떻게 단체를 위해 보수없이 봉사했다고 나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나의 소송의뢰인들로부터 받은 약간의 선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전히 단체를 위한 봉사 때문에 받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의 소송의뢰인과 협동자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소송의뢰인들도 내 공공사업을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선물 중 하나는 값이 50기니에 해당하는 금목걸이였는데, 그것은 내 아내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조차도 나의 공공사업 때문에 준 것이므로 다른 선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엄청난 선물들을 받은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몹시 불안한 생각에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으나, 별 해결책이 없었다. 이런 값비싼 선물을 내버리기는 정말 어려웠고, 그렇다고 가지고 있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설혹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어찌할까? 아내는 어떻게 하나? 그들은 이날까지 봉사 생활에 훈련이 되어 왔고, 봉사라는 것 자체가 곧 보수라고 알아왔다.
우리 집에는 값나가는 장식품이라고는 없었다. 우리는 성실하게 검소한 생활을 하여 왔다. 그런데 어떻게 금시계를 차며, 금시계줄을 늘이며, 다이아반지를 낄 수 있을까? 더구나 보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극복하자고 사람들을 권면해 온 판인데, 그렇다면, 선물로 들어온 보물들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것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결정을 내렸다. 문서를 작성하여 그 보물들을 맡기기로 하고, 파르시 루스톰지와 그 외의 몇 사람을 그 보관인으로 지명했다. 이튿날 아침 아내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의논한 다음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다. 아내를 납득시키기가 약간 어려울 것은 알고 있었고, 아이들은 별로 문제없을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후원을 받기로 작정했다. 아이들은 내 제안에 찬성했다. 우리는 그런 값비싼 물건이 필요없으니 그것을 민단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필요해진다면 쉽게 살 수 있지 않아요? 하고 그들은 말했다. 나는 기뻤다. 그래서 나는, 그럼 너희들이 어머니께 그러자고 해보면 어떠냐, 그래보련? 했다. 하고 말고요, 그게 우리가 할 일인데요. 어머니는 그런 장식품이 필요 없으실 게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을 위해 놓아두고 싶어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것을 원치 않는데 어머님인들 무엇 때문에 내놓지 않으려고 하시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그렇지 않았다.
당신은 그런 것이 필요 없을지 모르고, 아이들도 또 필요 없을지 몰라요. 아내는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 말에 넘어가서 아이들은 당신 장단에 춤을 출겁니다. 내가 그런 것을 하고 다니면 당신이 가만두지 않을 것도 압니다. 그러나 며느리들은 어떻게 해요? 그들은 아무래도 그런 것이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내일 무슨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 그렇게 정성으로 보내준 선물을 나는 세상 없어도 못 내놔요. 이렇게 해서 논쟁의 격류는 끝이 없었고, 나중엔 눈물까지 나오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래도 끄떡없었다. 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부드러운 말로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결혼하려면 아직은 일러요. 조혼해서는 안돼. 저희들 생각은 저희 자신들이 할거요. 그리고 우리 애들을 위해서, 며느리라는 것들이 노리개를 좋아하는 것들이어서는 안되지. 또 설사 우리가 그들에게 장식품을 사줄 필요가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있지 않소? 사달라고 하구료.
사 달라고 하라구요? 이만하면 나도 당신이 어떤 위인인지 알아요. 당신은 내 장식품을 다 빼앗아 버렸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두게 하질 않았지요. 생각해 보셔요, 당신이 며느리들에게 장식품을 사준다! 아이들을 오늘부터라도 수도승을 만들려 하는 당신이! 안돼요, 그 장식품들은 돌려 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보세요, 내 목걸인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러세요?
그렇지만, 나는 가만 있지 않았다.
그 목걸이를 당신에게 주었지만, 당신이 수고했다 해서 준 거요. 내가 수고했다 해서 준 거요? 그렇긴 해요. 그러나 당신이 한 봉사는 또한 내가 한 거나 마찬가지죠. 나는 당신을 위해 밤낮으로 뼈가 빠지도록 일했어요. 그것은 봉사가 아니에요? 당신은 온갖 잡동사니 일을 다 내게 떠맡겨서 나로 하여금 쓰라린 눈물을 짜게 했어요. 그래서 나는 노예처럼 일을 했어요. 그것은 모두 가시같이 찌르는 말이었고, 그 중 더러는 내 가슴을 깊이 울렸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그 장식품들을 돌려주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아내에게서 승낙을 얻어 1896년과 1901년에 받았던 선물들을 다 돌려 보냈다. 신탁증서가 준비되고 그것들을 은행에 예치시켜, 내 뜻이나 관리인의 뜻에 따라 민단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이따금 공공 목적으로 자금이 필요할 때면, 위탁금을 찾아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어떻게 해서든 필요한 금액을 만들어내고, 그 위탁금만은 다치지 않고 둘 수가 있었다. 그 기금은 아직도 그래도 있어서, 필요한 때는활용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적립되고 있다. 나는 그 조치를 지금까지 한번도 후회한 일이 없고 해가 감에 따라 아내도 그것이 현명한 일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유혹에 젖어 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공공 사업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값진 선물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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