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오늘 이렇게 제가 틈틈이 기회를 엿보다가 쉬는 날 마음을 먹고 펜을 든 것은 도저히 저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간직하고 살기엔 너무도 가슴 시린 추억이 있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망한 중소기업에 잘 다니고 있던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무하고나 싸우지도 않고 누구와 섞여 있어도 눈에 띄거나 구별되진 않는 한마디로 말해서 몹시 내성적이지만 그래도 할일 다하는 착실한 직원이었지요. 이런 저의 취미는 바둑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밤새도록 TV의 바둑해설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디오 바둑 테이프를 빌려다 보곤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샌님이니 목사님이니 하고 놀렸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걱정을 하시는 건 제 부모님들이셨습니다. 나이 30이 다 되도록 데이트는 커녕 집에 전화오는 여자 하나 없이 밤낮 바둑만 보고 어쩌다가 맞선을 보게 해도 나가서 퇴짜나 맞고 오질 않나 하니, 특히 어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그래 제 부모님들은 저 때문에 곧잘 다투기까지도 하셨답니다.
"아이고, 재가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내가 그래도 재를 가졌을 땐 태몽으로 용꿈을 꿨는데, 어찌 저리도 숫기가 없는 것이 꼭 미꾸라지 같냐."
하시는 어머니께 아버지께선 되레 어머니를 나무라시며 말하시는 겁니다.
"꿈도 그리 못꾸나. 꿈을 꿀라카면 최소한 호랑이 꿈을 꿔야지. 우리 어머이가 나 볼 때 꾸신 꿈 말이다."
이렇듯 저를 사이에 두고 이유 아닌 이유로 속타하시던 부모님은 결국 제게 태권도를 강요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체육시간에 결코 즐겨워서 공을 찬 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더러 누구하고 싸우다가도 큰소리만 치면 움츠러드는 성격이기에 태권도는 꿈에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니는 태권도를 배워야 한다. 안 그라모 니 성격에 평생 여자 만나기는 틀렸다."
어머니는 마치 태권도만 배우면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듯이 저를 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다 큰 어른이 하얀띠를 매고(태권도는 흰띠부터 시작 노란띠 파랑띠 빨강띠 빨강반 검정반띠로 승격함) 태극 폼새를 배우자니 진땀 나고 창피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장엔 정말로 무서운 사범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말 한마디에 저는 가끔씩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습니다.
"자, 뒷발차기 실시! 이야 압"
그 기합소리는 우렁차고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자 사범님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비극의 드라마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제가 성격이 나약하고 숫기가 없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저만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호되게 연습을 시키는 거였습니다.
"앞차기가 그게 뭡니까? 자 앞차기 50회 실시!"
그러나 그녀는 그것도 모자라서 저를 앞으로 따로 불러내어서 앞차기를 해보라, 돌려차기를 해보라, 또 자세가 안 좋으니 토끼뜀을 뛴 다음에 해보라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졸지에 군대에 다시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고, 한 달쯤 지나자 드디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도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녀는 우리집에 전화를 하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왜 운동하러 안 나오냐? 언제 다시 할 거냐? 하고 묻더니, 저녁은 무얼 먹었느냐? 회사는 어디 근처냐? 하고 자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까지 묻는 겁니다. 저는 또다른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바둑 좀 볼라치면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
"여보세요?" 그러면 바로 "예! 저예요, 왜 오늘도 안 나왔어요? 내일은 나올 거죠? 지금 뭐하세요? 오늘 석현씨 회사 근처 갔었어요. 다음에 다시 가면 전화할께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었지 뭐예요."
하며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다 떨었습니다. 저는 본래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화가 계속되자 견딜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가 "석현씨, 내일 시간 있죠? 제가 져녁때 회사 근처에서 전화할게요. 또 저번때처럼 싫다고 하시면 안돼요." 했을 때 저는 알았다고 하고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굳은 마음을 먹고 그녀 앞에 나갔습니다. 그녀는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제 손을 잡아 끌더니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습니다.그러더니 자신의 지프차에다 저를 태우고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악을 쓰며 묻자 그녀는 무서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더니 가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러다가 인신매매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왈칵 겁이 났고, 제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그녀가 귀신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40여 분 달려서 그녀가 차를 세운 것은 인천의 월미도였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무슨 결심을 한 듯 그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석현씨! 석현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저는 놀라서 되물었죠.
"아니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니 참 저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니까요?"
저는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렇다면 태권도장에서 제가 제 마음을 표현한 것도 모르셨어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마음을 표현해요."
그녀의 말에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엔 그녀에게 기합받고 맞고 벌 선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석현씨가 마음에 들어요. 석현씨처럼 순수하고 착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이제부터 저랑 데이트하지 않으실래요?"
그녀는 약간은 수줍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제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지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지영씨랑 사귀어요. 참 내."
그러나 바로 그때 엄청나고도 가공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욧!"하고 째지는 음성과 함께 "방금 제 말을 무시한다는 뜻인가요? 저는 자존심 상하고는 못살아요." 하며 그녀는 갑자기 태권도 대련 자세를 취하는 겁니다.
"자, 어서 저에게 사과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사귈 거예요, 말 거예요. 석현씨가 만일 저를 이긴다면 제가 다시는 전화 안할게요. 하지만 석현씨가 진다면 제 뜻대로 할 거예요."
그러며 그녀는 준비도 안된 제 앞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위에는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그들은 슬슬 우리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이제 그만 갑시..."
아니 그런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앞차기가 저의 턱에 정면으로 일격을 가했습니다. 저는 "억!" 하면서 턱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 그녀는 옆차기로 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강타했습니다. 이종환, 최유라씨! 여자에게 맞는 남자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때 저는 맞은 데가 아프고 쑤셔서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하늘의 갈매기도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저는 그만 하자고 손짓하면서 차 있는 데로 어기적어기적 가려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돌려차기로 무자비하게 저의 여린 가슴을 짓이겼습니다. 저는 월미도 앞바다를 보면서 큰 대자로 길게 누워버렸고, 제 귀에는 이런 말들이 들려오더군요.
"어머, 여기 영화찍는다."
"와! 정말 실감나네."
"그런데 카메라는 어디 있어?"
"야, 요즘에는 몰래 카메라 있잖아"
"뭐? 그럼 우리도 나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웃어"
그때 그녀가 저에게 와서 손을 뻗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자, 차로 가요. 이 길 좀 터주세요."
그녀는 저를 차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턱이 아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가슴이 뻐근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그녀는 집까지 태워다주면서 "사과 받은 것으로 할게요. 그럼 내일 만나요."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저를 보고 집에선 난리가 났지만 저는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께 어떻게 사실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인천 앞바다에서 여자에게 개 맞듯이 맞았다고. 저는 분노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잡자리에 들었고, 그날 사나이 가슴엔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종환,최유라씨! 사람의 마음은 왜 그렇게 간사한 걸까요?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가 조금씩 좋아지는 겁니다. 한 번 만나니 좋아지고, 두 번 만나니 정이 들어서 지금은 이렇게 같은 베개를 베고 잠을 잔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2년 전의 그 일만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서 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툭 털어놓고 싶어 못쓰는 글이나마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할말 다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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