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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복(天福)을 아는가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큰 복이란 '일생을 걸 만한 일을 알아보고, 그 일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란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천복을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꽤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천복인 연극과의 만남은 대학교 시절 이루어졌다. 서울로 유학 온 열아홉 살짜리 시골 아가씨는 최루탄 자욱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자보에 쓰인 글귀는 험했고, 거리 풍경은 낯설었으며, 서울말은 깍쟁이처럼 들렸다. 인간을 공부하러 들어간 교육심리학과에서는 심리 대신 교육학만 가르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학교를 자퇴할 것인가 견딜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 모험심보다는 게으른 천성에 기대어 견디기로 결정했고, 놀 궁리나 하자며 덜컥 연극반에 가입했다. 연극에 남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동아리 가입 기간이 끝난 뒤에도 신입 회원을 받는 곳이 연극반뿐이어서 그리 된 것이니, 결국 어물거리는 게으름에 기대 천복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천복이 그렇게 손쉽게 수중에 떨어질까.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희곡작가가 되리라 결심한 순간부터 인생은 쌀쌀맞아졌다. 신춘문예를 비롯해 등단할 수 있는 모든 지면에 응모했으나 낙방만 따라다녔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감이 없어지다가 심사위원의 안목 없음에 화가 나기도 하고, 한 번만 더 떨어지면 포기하리라 독이 잔뜩 올랐다.
그렇게 떨어지길 일고여덟 번, 신춘문예에 당선된 누군가의 작품을 읽던 어느 겨울이었다. 창밖엔 눈보라가 거셌다. 나는 문득 창밖을 보다가 눈보라가 그치면 세상은 또 얼마나 맑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해졌고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천복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비로소 그 순간 나의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작가라는 이미지에 덧씌워진 허영심이나 자신에 대한 치기 어린 자존심 대신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만 남은 그 순간 말이다.
그해 가을에 나는 작가로 등단했다. 한편으론 믿을 수 없었으나 한편으론 예정된 운명의 길에 들어선 듯 담담했다.
김명화 님 | 희곡작가
- 「행복한동행」 2008년 1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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