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 (2/3)
청정은 운천동으로 좌익장을 삼고 그 밖의 장수들에게도 각기 소임을 맡긴 후에 대포를 한 방 크게 쏘게 했다. 그러자 왜군이 분부히 흩어져 한 개의 진을 치니 팔만금사진이었다. 정출남이 이를 보자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하하하... 왜놈들도 제법 진법을 펼칠 줄 아누나."
이어 깃발을 흔들어 오행진을 치고 중군장 백여철로 하여금 진세를 지키게 했다. 정출남은 진세가 갖추어지자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 크게 외쳤다.
"적장은 들으라. 네 아무리 도리를 모른다 한들 하늘의 의로움을 모르고 분수에 맞지 않게 동방예의지국을 침범하였으니 그 죄를 논하면 백번 죽어도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 불행한 백성들만 죽이지 말고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아라. 우리 전하께서 나로 하여금 너의 왜적을 모조리 죽이라 명하옵기에 어명을 이행하려고 왔으니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아라."
그러자 적진에 한 장수가 말을 타고 내달으며 마주 호통쳤다.
"조선 장수 정출남은 들으라. 강보에 싸인 아이가 어른을 능멸하고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로구나. 나는 왜국의 선봉장 청룡이로다. 보잘 것 없는 내가 당돌하게 나서서 우리 대군을 희롱하니 네 목을 베어 분함을 풀린다." "이런 발칙한 놈!"
정출남은 크게 성이 나 말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이에 청룡도 달려들어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정출남의 장창이 적의 목을 노리고 찔러가고, 청룡왕과 범이 정출남의 머리를 노리고 번뜩이는데 과연 용과 범이 싸우는 듯 무시무시했다. 양편의 군사들은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질러 자기 편 장수를 응원하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두 장수는 이십 합을 겨루어도 승부를 재지 못했다. 무예 실력이 엇비슷한지라 두 마리의 범이 노루고기를 놓고 다투는 것같고, 청룡과 왕용이 여의주를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듯했다. 그러나 삼십 합이 막 넘는 순간,
"받아랏!"
정출남이 소리를 크게 외치며 오른손의 장창으로 적의 허리를 찌르고, 왼손으로 장검을 신속하게 뽑아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청룡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를 뽑으며 그대로 말 아래로 떨어졌다. 정출남은 청룡의 머리를 칼 끝에 꿰어 들고 크게 외쳤다.
"청정도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아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청정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죽은 청룡은 바로 그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청룡은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소리와 함께 말을 몰아 달려나왔다.
"네 이놈, 꼼짝하지 말라!"
정출남이 눈을 들어보니, 왜장 청정은 신장이 구 척이요, 몸에 푸른 갑옷을 입고, 왼손에 백여 근이 나가는 무거운 철주를 들었다. 또한 오른손에는 날이 시퍼런 장검을 들고 붉은 털이 온몸을 감싼 말을 타고 살같이 달려오는 데 보기에도 무시무시했다. 정출남은 청정의 모습을 한번 보자 정신이 아찔하여 자기도 모르게 말머리를 돌리어 본진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청정이 벽력같이 호통치며 뒤를 쫓았다.
"정출남은 도망치지 말고 내칼을 받아라. 네가 내 아우를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왜장 청정이 탄 말은 그 옛날 삼국시대의 관운장이 탔던 적토마와 같이 천하에 보기드문 명마였다. 해서 정출남은 미처 본진에 닿기도 전에 바싹 뒤따라 추격해온 청정이 휘두르는 칼날에 대항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목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 한칼에 조선 장수의 목을 날린 청정은 손을 들어 일제 공격의 신호를 내렸다. 순간, 왜적들은 짐승같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니 대장이 죽어 기가 팍 죽은 조선 군사들이 어찌 대항하겠는가. 삽시간에 삼만 대병은 왜적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 낙엽처럼 떨어지니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룰 정도였다. 특히 지옥의 악귀같이 날뛰는 청정의 칼에 맞아 죽은 조선 군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청정이 크게 승리하여 승전고를 높이 올리며 본진으로 돌아오니 수하 장수들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장군의 용맹은 그 옛날 초패왕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군은 사람이 아니오라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 분명합니다."
청정이 듣고 크게 웃으며 스스로 뽐내었다.
"사내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만한 용맹이 없으면 어찌 만리 타국에 와서 나라를 빼앗으려 마음먹겠는가? 내 기필코 조선을 정복하여 왕위에 오를 것이니 그대들은 힘써 싸우라."
제장들은 청정의 용맹에 새삼스럽게 감복하여 충성을 다시금 맹세했다.
"소장들은 장군과 생사를 같이 하겠나이다."
청정이 즉시 군사들을 독촉하여 서울로 향하니 그 형세를 당할 군사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임금께서 정출남을 전장에 보내시고 십여 일 동안 소식을 몰라 크게 근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양주목사가 보낸 장계가 이르렀거늘 급히 펼쳐 보시었다. '포도대장 정출남은 충주에서 외적과 만나 싸운 끝에 왜장 청룡을 한칼에 베었나이다. 그러나 정출남 역시 왜군 총대장 청정의 칼에 죽었고, 거느린 십만 대병도 모조리 몰살당했나이다. 지금 왜적은 이긴 기세를 틈타 서울로 쳐들어 올라가오니 엎드려 비옵건데 전하께서는 급히 왜적을 막으소서.' 임금께서 장계를 보시고 크게 놀라시어 신하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였다.
"왜적의 형세가 이토록 위급하니 무슨 수로 종묘 사직을 보존하리오."
신하들도 믿고 믿었던 정출남 역시 허무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한편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임금과 신하들이 이렇게 정신이 없을 때 대궐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들어와 급히 아뢰었다.
"왜적이 벌써 한강을 넘었나이다." "무엇이!"
임금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용안이 변하시었다. 그러나 탄식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어영대장 최달령과 금위대장 백수문을 불러 영을 내리시었다.
"그대들은 성 중의 백성들이 놀라지 않게 단속하고 동서남북 사대문을 굳게 지키도록 하라."
그러나 군사가 얼마 없고 장수 또한 믿을 자가 없으니 어떻게 서울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신하들이 엎드려 저마다 아뢰었다.
"전화께옵서는 어서 피난하옵소서." "백성들을 두고 어찌 떠날 수 있단 말이오?" "전하, 지금 왜적이 세력이 강세하니 잠시 몸을 피했다가 후일을 기약함이 좋을 듯하옵니다."
신하들이 극력으로 주장하는 바람에 임금께서도 하는 수 없이 피난길을 떠나기로 정하였다. 하지만 남대문으로 나와 보니 갈 곳이 막막했다. 임금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탄식하자 한 신하가 나와 엎드려 아뢰었다.
"평안도는 아직 왜적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오니 전하께옵서는 바라옵건대 그리로 가시옵소서." "그렇게 하라."
이에 뭇신하들은 임금을 모시고 평안도로 떠났다. 한편, 왜군 청대장 청정은 조선 임금이 피난간 줄은 모르고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서울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조선 왕은 무엇하는가? 어서 나와 항복하라."
그 소리가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듯하여 성벽이 다 들썩였다. 그러니 성 중에 남아 있는 불쌍한 백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젠 다 죽었구나!" "잔인 무도한 왜적이 들어왔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백성들은 서로 붙들고 통곡을 하니 흡사 물이 끓는 듯했다.
"서울을 짓밟고 조선왕을 사로잡아라!"
청정이 군사들을 독촉하여 서울을 들이치려고 할 때 문득 남대문에서 오색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며 한 장수가 무수한 군사들을 이끌고 왜군 앞을 딱 가로막으며 우레 같은 음성으로 꾸짖는 것이 아닌가.
"조선 나라 종묘 사직이 오백 연도 넉넉하거늘 너, 청정은 하늘의 운수를 모르고 불쌍한 백성만 죽여 천하를 소란스럽게 하느뇨? 어서 썩 물러가라. 나는 촉한의 관운장이니라."
청정이 크게 놀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한 대장이 적토마를 타고 세 가락의 수염을 가슴까지 내리우고 봉의 눈을 부릅뜨고 달려오는데 손에는 청룡과 월도가 햇빛에 번쩍이는 것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했다.
"틀림없는 관운장이구나!"
청정은 여지껏 오만하던 기세가 자기도 모르게 수그러들고 오금이 저려 말머리를 돌리고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이에 서울에 남은 백성들은 왜적의 손에 의해 하나도 해를 입지 않으니 모두가 관운장의 덕택이었다. 이때 평안도 평강땅에 한 이인이 있었으니 이름을 김덕령이라 했다. 나이는 불과 열 다섯 살이나 힘은 능히 천 근의 바위를 들고 앉아서 한 주발의 밥을 먹는 천하 장사였다. 또한 일찍이 둔갑술을 배웠던 바 그 재주가 삼국시대의 제갈량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절이 태평하여 재주를 감추고 집에서 농사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늙으신 부친이 세상을 떠나 모친과 함께 정성껏 삼년상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만 뜻밖에도 왜적이 강토를 침략하여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모친앞에 나아가 여쭈었다.
"소자가 듣자오니 왜적이 나라를 침범했다 하나이다." "그 소문은 이 어미도 이미 듣고 있다." "바라옵건대, 어머니께서는 소자의 소망을 허락하옵소서. 부친상을 당한 때이지만 상복을 벗어 불사르고 출전하여 왜적을 무찔러 나라의 근심을 덜게 허락해 주옵소서. 왜적을 쳐없애 시절이 다시 태평해지면 소자의 이름이 청사에 올라 부모님께 영화를 드리옵고 또한 벼슬길에도 오를 듯하오니 부디 소자의 희망을 들어주소서." 그러자 모친이 크게 놀라며 매섭게 꾸짖었다. "우리집의 사내란 너 하나뿐이다. 조상의 무덤에 향을 피워 받들어야 마땅하거늘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그 옛날 명나라 호왕이 둔갑술에 정통하여 소대성(군담소설의 주인공)을 유인해 장운동에다 불을 질렀으나 소대성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고 기운이 태산이라도 뽑을 듯한 초패왕도 오강(초패왕 항우가 유방에게 쫓겨 자살한 곳)을 못건너서 죽었다. 그런데 네가 무슨 재주로 수십만 왜적을 물리칠 수 있겠느냐? 속절없이 전장터의 백골이 될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고 농사일에나 힘을 쓰도록 하라." 덕령이 모친의 엄한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물러나 탄식만 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가까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해서 한밤중에 모친 모르게 상복을 벗어 상문에 걸고 불효를 사죄했다. "어머님, 소자는 어머님의 영을 어기고 왜적을 막으러 가겠나이다. 부디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절하고 나서 즉시 둔갑술을 써서 왜진 속으로 들어갔다. 청정이 수하 장수들과 평안도를 칠 의논을 하다가 문득 앞에 나타난 덕령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청정은 급히 수문장을 불러 호령했다. "우리 진문이 얼마나 허술하길래 조선 사람을 함부로 들어오게 하는가?" 수문장은 벌벌 떨며 아뢰었다. "소.... 소장은 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몰랐습니다." 청정이 크게 분노하여 군사들에게 호령했다. "활과 총으로 쏘아 잡으라!"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활과 총을 비오듯이 쏘아댔다. 그러나 김덕령의 몸은 홀연히 사라져 헛되이 허공에 대고 쏘아대는 판이었다. 총과 화살이 그친 후 김덕령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 청정을 향해 크게 꾸짖었다. "나는 평안도 평강땅에 사는 조선 백성 김덕령이다. 네가 천운을 모르고 외람된 생각을 품어 평화스런 조선땅에 쳐들어왔으니 그 죄가 크도다. 너는 조선에 사람이 없는 줄 아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 재주를 보라. 내일 오시(오전 열 한 시부터 열 두 시까지)에 너희 군사 머리에 백지 한 장씩을 붙일 것이니 그리 알고 기다려라." 말이 끝나자마자 김덕령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청정이 크게 놀라 뭇장수들을 불러 놓고 엄히 분부했다. "내일 총과 활을 많이 준비하였다가 오시가 되거든 일시에 쏘아라. 보이는 것이면 모조리 죽여라." 청정이 명령을 내렸지만 마음이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을 밝혔다. 이튿날 오시가 되자 왜군의 진중에 오색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났다. 오색 구름이 점점 짙어져 이윽고 눈 앞에 다섯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왜군이 크게 놀라 눈을 뜨지 못하고 우왕 좌왕할 때 구름 속에서 김더령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곤 청정을 가리키며 크게 꾸짖었다. "왜적은 나의 재주를 보라." 호통과 함께 미리 준비한 백지를 허공에 휙 던졌다. 그러자 보라! 던져진 백지가 수십만 명 왜적의 이마에 똑같이 붙으니 그 모습은 꼭 목화송이가 활짝 핀 것 같았다. 청정이 보고 크게 놀라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나도 일찍이 도술을 팔 년 동안이나 공부하였으나 저런 재주는 처음 보았도다. 저런 사람이 조선 군사의 선봉장이 되면 우리 군사는 크게 패하리라." 그러자 김덕령이 왜군 이마에 붙은 백지를 일시에 걷어 치우고 청정으로 보고 말했다. "나는 지금 부친상을 당해 살해를 할 수 없어 재주만 보여주는 것이니 너는 빨리 돌아가거라. 만일거역할 시는너희들을 한 칼로 무찌를 것이니 어서 목숨을 보존하여 급히 돌아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덕령의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청정은 간담이 서늘하여 부대를 이끌고 급히 그곳을 떠났다.
이때 선조대왕께서 영의정 정현덕 이하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을 떠나셨다. 그러나 평양 성충이 이미 왜장 소서에 의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수 없이 한적한 토곡고을에 유하였다. "그 누가 나서서 왜적을 무찌른단 말인가?" 선조대왕께서는 자나 깨나 근심이 되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임금께서 뜰을 거느리고 계시는데 산에서 한 아이가 나무를 해내려오는데 그 지게가 거의 집채 만했다. "이 시골에 저런 장사가 있을 줄은 몰랐도다." 임금께서는 속으로 크게 기뻐하시며 그 아이에게 다가가 보았다. 아이응 열 여섯 살 정도인데 기골이 장대하고 눈에 정기가 내비치는 것이 과연 인물다왔다. 임금께서 아이를 보고 은근히 말씀하셨다. "네 기상을 보니 재주가 미간에 나타나 있도다.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우는 것이 네 마음에 어떠한가?" 아이가 듣고 속으로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양반은 누군데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매우 점잖은 어른이라 공손히 아뢰었다. "제가 재주는 없사오나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나가 싸우려고 했나이다."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물으셨다. "장하도다. 네 성명이 무엇인고?" "저는 성은 김이요, 이름은 고원이라 하나이다." 임금께서는 김고원에게 편지 한 장을 써주시며 이르셨다. "너는 이 편지를 갖고 관아에 들어가 부윤(오늘날의 시장)한성록에게 주라." 김고원은 편지를 받고 즉시 관아로 달려가 편지를 바쳤다. 무심코 편지를 받아든 부윤 한성록은 그만 대경 실색해 버렸다. 천만 뜻밖에도 임금께서 보내신 편지가 아닌가. 해서 김고원을 재촉하여 한들음에 토곡성 중으로 들어가 임금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소신이 전하의 납시옴을 모르고 있었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한 줄 아뢰오." 김고원은 그제서야 임금의 정체를 알고 놀라 같이 엎드려 죄를 빌었다. 임금께서는 두 사람더러 일어나라 하시며 처연한 안색으로 탄식하셨다. "나라의 운명이 불행하여 왜적이 쳐들어와서 마구 날뛰니 종묘사직을 어찌 보존하리오. 평양이 이미 왜장 소서에게 떨어졌다고 하니 짐은 이곳에서 유하는도다." 한성록이 통곡하며 아뢰었다. "소신은 나라의 변란을 듣고도 나아가 왜적을 무찌르지 못하였으니 그 죄 백 번 죽어도 마땅하나이다. 엎드려 비옵건대 전하께서 소신에게 나아가 싸우도록 하옵소서. 죽기로써 왜적을 무찌르겠나이다."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어 영을 내렸다. "그대는 흩어진 군사를 모아 왜적을 막으라. 그리고 김고원은 선봉장애 서라." 이에 한성록은 각처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왜적을 치러 나아갔다. 이때 조선의 삼백 육십 주는 거의 왜놈에게 함락되 남은 것은 겨우 육십 주밖에 안되었다.그 중에서 함경도 천북군사가 온전하게 남았으나 길이 막혀 올 수가 없었고, 황해도 군사는 뿔뿔히 흩어져, 있으나 마나였다. 그리고 경기도 군사는 도성을 지키느라고 급급한지라 쓸 만한 군사는 평안도 군사 겨우 일만명이었다. 그러나 군사가 있다한들 용맹한 장수가 없으니 어이하랴. 임금께서는 땅이 꺼지도록 탄식만 하셨다. "군사도 부족하거니와 장수도 없으니 어찌 왜적을 막으리오. 현명한 재상 최일령이라도 짐의 곁에 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임금께서는 한 때의 잘못으로 최일령을 귀양보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한편 귀양갔던 최일령은 왜적의 세력이 강대한 것을 보자 적소인 동래에서 깊이 생각했다. "이제 왜적이 강토를 유린하도 있으니 어찌 적소에서 허송 세월하랴. 전하께 나아가 이 늙은 목숨을 나라에 바치자." 해서 즉시 길을 나서서 서울로 떠났다. 가는 도중에 왜적에게 잡힐까 염려되어 낮이면 산에 숨고, 밤이면 길을 재촉했다. 길을 떠난 지 십여 일 만에 서울에 도착해 보니 임금께서는 이미 피난을 떠나신 뒤였다. 서울 장안은 늙은이와 아녀자만 남은 것이 이미 죽어있는 서울이었다. 최일령은 임금께옵서 평안도로 피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최일령은 드디어 토곡에 닿아 임금을 뵈옵고 땅에 엎드려 울면서 아뢰었다. "전하, 이 어인 변고이나이까? 신 최일령은 감히 왕명을 거역하고 적소를 떠나 전하를 뵈오니 그 죄 죽어 마땅하나이다." 임금께서 어진 재상을 다시 만나자 손을 잡고 일으키며 말씀하셨다. "짐이 경의 말을 진작 들었으면 이런 변고를 당하지 않을 것인데 짐이 밝지 못하여 오히려 경을 귀양보냈도다. 경은 옛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이렇듯 짐을 찾아오니 진정 충신이로다." "소신은 용안을 한번 뵈옵고 죽을 작정이었나이다." "자, 우리 옛일을 생각지 말고 어서 나라를 위해 왜적을 막을 계책을 생각하기로 하오. 지금 군사가 약간 있으되 장수가 없으니 경이 한 사람 천거하라." 최일령이 엎드려 아뢰었다. "평안도에 김응서라는 사람이 있는데 힘은 삼천 근을 들고 재주와 용맹은 삼국시대의 조쟈룡을 능가한다고 하나이다. 전하께옵서는 급히 사람을 보내시어 김응서를 불러와 왜적을 막게 하소서." 임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즉시 사신을 보냈다.
이때 김응서는 왜적이 평안도를 휩쓰는 것을 보고도 왕명이 없어서 탄식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사신이 와서 왕명을 전했다. (김응서는 사신을 따라 즉시 짐을 위해 오라.) 김응서는 엎드려 왕명을 받고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천리마를 달려 토곡으로 달려갔다. 임금께서는 엎드려 절하는 김응서를 보니 눈은 봉의 눈이요, 신장은 팔 척, 그리고 황금 투구에 순금 갑옷을 입은 것이 보기에도 위맹스러웠다. 또한 왼손에는 구십 근짜리 장창을 들고 오른손에는 팔십 근짜리 철구를 들었으니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임금께서 한번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어 최일령에게 하문하셨다.
"과연 천하 명장이로다. 그러나 좋은 장수가 있으되 군사가 부족하니 어찌하리오?" "왜적이 세력이 너무 강하여 우리 조선 군사로는 당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김응서가 제아무리 용맹하고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왜적을 당하기는 어렵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중국의 군대를 청하소서." "경의 말이 옳도다."
임금께서는 최일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에 구원병을 청하러갈 사신을 찾으셨다.
"누가 중국에 가서 구원병을 청해 올까?" 그러자 병조판서 유성룡이 엎드려 아뢰었다. "신이 청병 사신으로 가겠나이다."
임금께서 유성룡이 나서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시며 즉시 사신으로 임명해 중국 명나라로 보냈다. 어전 회의가 끝나자 최일령이 은밀히 김응서를 불러서 말했다.
"왜장 소서가 평양 기생 월천을 첩으로 삼고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낸다고 하오. 만약에 월천과 약속을 하면 소서를 죽이는 것쯤은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쉬울 것이오. 그러나 연광정 사방에는 방울이 있어 침입자가 있으면 저절로 소리가 난다 하니 좀체로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응서가 엄숙히 대답했다. "방울 소리는 둔갑술로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우선 기생 월천과 약속할 묘책을 가르쳐 주소서." 최일령이 즉시 묘책을 가르쳐 주었다. "그대는 당태 한 근과 독한 술 백여 병을 가지고 성벽을 넘어 가라. 당태로 능히 방울 소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연광정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가 있으리라. 시간이 자시쯤 되면 월천이 밖으로 나올 것이니 그대는 이때를 틈타 약속을 단단히 하라. 소서에게 술을 먹인 후에 장군이 조심하여 소서를 죽이라.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소서를 베는 즉시 연광정 아래에 엎드리라. 그러면 소서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소장이 힘써 왜적을 죽이고 오겠습니다." 응서는 쾌히 대답하고 즉시 당태 한 근과 독한 술 백여 병을 가지고 평양으로 말을 달렸다. 응서가 탄 말은 천리마라 평양까지의 거리 팔십 리를 진시 초에 떠나 유시 때 당도했다. 이에 말을 성 밖에 매어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니까 이윽고 초경이 되었다. (이때다!) 응서는 속으로 외치고 높은 성벽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런 다음 주문을 외워 신장을 불러 당태를 주며 분부했다.
"그대는 이것으로 방울 소리를 막으라." 그러자 신장이 공손히 절하며 당태를 받아들고 방울을 모두 막았다. 이에 응서는 마음놓고 연광정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때 왜장 소서는 등촉을 환히 밝히고 월천을 데리고 노래하며 노는데 가히 안하 무인격이었다. 응서는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뛰어들어 한칼에 목을 베고 싶었지만 소서의 무서운 검술을 익히 소문들었는지라 꾹 참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과연 자시쯤 되어서 월천이 소피를 보러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응서는 즉시 그녀를 가로막았다. "아... 뉘시온지..." 월천이 크게 놀라자 응서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일렀다. "쉬잇! 너를 해치러 온 사람은 아니니 나와 함께 저리로 가서 얘기 좀 하자. 나는 전하의 명령을 받고 온 김응서이니라." 김응서의 용맹은 일찍부터 평안도에 알려졌으니 월천이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월천이 묵묵히 으슥한 곳까지 따라오자 응서는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월천아, 너는 비록 기생이기는 하나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조선의 국토를 먹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왜놈을 섬겨 부부의 예를 취할 수 있느냐? 나는 왕명을 받잡고 소서를 죽이러 왔다. 네 뜻은 어떤가?" 월천이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천한 계집은 비록 소서의 첩이 되었으나 마음만은 항상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나이다. 이제 장군 같은 영웅을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천한 계집은 장군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사오니 왜장을 죽일 계책을 가르쳐 주옵소서." "장하도다." 응서는 크게 기뻐하여 가지고 온 독한 술병을 내어 주고는 월천의 귀에 입을 대고 계교를일러주었다. 이어 소서의 거동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그러자 월천이 낱낱이 아뢰었다. "소서는 잠이 반쯤 들면 한 눈만 뜨옵고, 깊은 잠에 떨어지면 두 눈을 다 뜨나이다." "알았도다. 그럼 너는 어서 들어가 내가 시키는 대로 거행하라." 이에 월천이 굳게 맹세하고 연광정으로 들어갔다. 소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 물었다. "어찌 이렇게 늦으냐?" 월천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녀의 오래비가 있사온데 지금 장군님을 뵈러 왔나이다. 부디 만나보소서." 애첩의 청이니 소서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너의 오래비라면 나하고는 처남 매부가 된다. 지금 어디 있느냐?" "문 밖에 있나이다." "어서 들라 하라." 소서가 독촉하자 월천은 즉시 문을 열고 응서더러 들어오라고 했다. 응서가 들어와서 절을 하고 있으니 소서가 응서의 용맹한 기상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실로 영웅의 기상을 지니고 있도다. 그대가 만약 나를 도와 조선 군사들을 모두 항복 받으면 나는 우리 총대장 청정의 일등공신이 되고 그대 또한 영화를 누릴 것이로다. 청정의 조선왕이 되고 우리 두사람이 크게 공을 세우면 후세에 이름을 빛낼 것이로다. 그대가 나를 도우는 것이 어떠한가?" 응서가 거짓으로 항송한 듯이 대답했다. "장군이 저를 수하로 써 주신다면 목숨을 각오하고 힘써 돕겠나이다." 월천이 옆에 있다가 계획대로 아양을 떨었다. "소녀의 오래비가 장군님을 위하여 술과 안주를 준비해 왔으니 잡수십시오." 소서가 크게 기뻐하여 칭찬했다. "너의 오래비가 이 매부를 위해 술을 가지고 왔다니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어서 술상을보아 오너라." 월천이 즉시 술상을 준비하여 소서에게 술을 권하는데 갖은 아양을 떨며 쉴 새 없이 잔을 채웠다. 그 독한 술을 거의 열 병이나 마시자 제아무리 소서가 술을 즐긴다 해도 취한 나머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응서가 월천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속삭였다. "왜적이 혹시 눈치채지 못했느냐?" 월천이 귀를 기울려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나이다. 어서 처치하옵소서." 이에 응서가 삼 척 장검을 뽑아들고 살며시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들은 바대로 소서는 두눈을 부릅뜨고 자고 있는데 코고는 소리가 마치 우레같았다. 응서가 칼을 겨누고 가까이 가자 소서의 명검 명천검이 벽에 걸려 있다가 웅웅 울어댔다. 그러나 칼 임자가 깊이 잠들어 있으니 그 누가 알랴. 이때 방문 밖에서 월천이 급히 소리쳤다. "입으로 침을 세 번 밷고 달려들어 치소서." 응서가 듣고 침을 세 번 뱉고 달려들어 소서의 목을 치니 검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구레나룻 투성이인 목이 떨어졌다. 응서는 미리 주의 받은 대로 즉시 칼을 내던지고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그러자 문득 머리가 없는 소서가 벌떡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명천검을 집어 번개같이 휘두르는 것이었다. 순간, 연광정의 대들보가 칼에 맞아 뚝 부러지더니 소서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에 응서가 겨우 안심하고 소서의 목을 칼 끝에 꿰었다. 그리곤 월천을 옆구리에 끼고 나는 듯이 성벽을 넘어 말을 매어 놓은 곳으로 갔다. "왜장의 목을 벤 것은 오로지 너의 공로로다. 전하께서 이를 아시면 후히 상을 내릴 것이니 너는 나하고 같이 가자." 응서가 말하자 월천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땅에 무릎을 꿇고 애걸히 소리쳤다. "장군님, 천한 계집은 시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첩이 되었나이다.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원수와 부부의 관계를 가졌으니 천한계집이 무슨 낯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이제 원수도 죽고 없으니 저의 원한도 사라졌나이다. 장군님은 부디 저의 목도 함께 베어 주소서." "그게 무슨 말이냐? 안될 말이로다." 응서가 듣고 크게 놀라 거듭 만류했지만 월천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장군님, 왜적이 저희 대장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급히 추격해올 것입니다. 장군님의 말이 비록 천하에 보기 드문 명마라 할지라도 천한 계집까지 함께 타면 걸음이 더뎌 붙잡힐 것입니다." 응서가 다시 좋은 말로 회유하려고 하자 월천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응서의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앗! 월천아, 이 무슨 짓이냐?" 응서가 놀라 부축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월천의 가슴에서는 피가 샘솟듯이 흐르며 안색 또한 창백하게 변했다. 응서가 가슴이 아파 눈물을 뚝뚝 떨구자 월천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미천한 계집은 이제 여한이 없으니 구천에 가서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나이다. 장군께서는 부디 공을 세워 나라를 평온케 하소서." 말을 마치자 월천은 고개를 푹 떨구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월천아, 네가 비록 미천한 출신의 여자이기는 하나 대장부보다 몇배 더 의기롭도다." 응서는 싸늘하게 식은 월천의 몸을 안고 대성통곡하다가 마지못해 머리를 베어 가지고 말을 달려 토곡으로 달려갔다. 응서가 임금 앞에 엎드려 소서의 머리를 드린 후에 또 월천의 머리를 올리며 전후의 사정을 상세히 아뢰니 임금께서 한편으로 기뻐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게 여기셨다. "아... 월천이 비록 미천한 여인이기는 하나 오직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왜적 소서를 죽이고 또 저도 죽었으니 만고에 빛날 열녀로다." 이에 소서의 목을 개돼지의 먹이로 내던지게 하고, 월천의 목은 무덤을 잘 써 후히 장사지내 주었다.
한편. 유성룡은 중국으로 원병을 얻으러 사신의 자격으로 떠났다. 거의 한달 만에 명나라 황제를 뵈옵고 예를 차렸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는 의아스런 어조로 물었다. "조선에 무슨 일이 있기로 짐의 나라에 들어왔느뇨?" 유성룡이 엎드려 아뢰었다. "황제 폐하께 아뢰나이다. 소신의 나라 조선국에 갑자기 섬나라 왜적이 쳐들어와 종묘 사직이 풍전 등화같이 위태하나이다. 지금 서울까지 왜적이 침범하여 소신의 국왕은 평안도 토곡성 안으로 피난하였나이다. 왜적의 형세가 갈수록 강하기에 소신의 국왕이 황제폐하께 여쭈라고 해서 소신이 대국으로 들어왔나이다." 하고는, 조선 임금이 보내는 글월을 올렸다. 명나라 황제가 글월을 보고 크게 놀라 신하들을 불러 하문했다. "지금 조선 국왕이 왜적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위태롭다고 구원병을 청하였도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말해보라." 그러자 좌승상 유필이 엎드려 아뢰었다. "조선이 위급하다 하니 구원병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나 지금 때가 한창 농사철이라 군사를 보내는 것은 시기가 아닌 줄로 아뢰나이다." 이에 명나라 황제는 구원병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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