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민중 해방과 구국 투쟁의 선봉장 전봉준(1854-1895, 42살, 처형).
전봉준은 나라 전체가 극도로 부패했던 시기에 태어나 고통받는 농민의 대변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외세의 침탈에도 강력히 맞서 싸우면서 구국의 선봉이 되었던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조선 말기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던 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를 주도한 인물 정도로 인실될 수도 있지만, 그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몇 손가락 안에 꼽아야 할 중요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야망이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동한 것이 나리라 그의 말 그대로 "아무런 죄가 없는 민중을 위하여 그 폐해를 없애려고' 봉기하였던 그때까지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중의 힘을 결집하여 장삼이사의 백성으로 하여금 역사의 주역이 되도록 지도해 낸 선각자였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시대에서 다수 일반 민중이 만들어가는 시대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고부군의 폐정이 조선 8도의 그것과 같다"고 갈파하였고 "일본의 조선 침투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다르다"라고 인식하여 반봉건과 항일 투쟁에 일찍이 앞장섰던 그의 넒은 시야와 뛰어난 식견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사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간은 2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가 남긴 파장은 시대의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켜 놓았으며, 그에 의해 제기된 민중운동의 흐름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주권자로서의 국민의 위치를 자각시켜 주고 있다. 당시 그 어떤 지도층보다도 더욱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던 인물, 남보다 조금 더 배웠기 때문에 사회와 민중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전봉준, 비록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이름은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남아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어린이들의 동요로 애창했던 노래가 그의 애절한 한을 잘 나타내 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농민의 대변자
전봉준은 조선 25대 왕인 철종 5년(1854년)에 전라도 태인군 상외면 동곡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명숙'이었고 키가 작고 단단하게 생겨서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의 부친 전장혁은 향교장의를 지낸 향리 출신이었는데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여 과도한 부의금을 거두어들이자 이를 거부하다가 매를 심하게 맞아 장독으로 죽었다. 전봉준으로서는 조병갑과 뿌리깊은 악연으로 얽히게 된 셈이다. 전봉준은 3두락 정도의 토지를 경작하여 근근이 살았으며 주로 농촌자제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생활하였다. 생활이 곤궁하면서도 선비를 자처하여 학문에 열중하였고 점치는 일에도 꽤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지관의 일도 했었고, 의원 노릇을 겸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는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각종 참설이 많이 유포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자신의 미래를 이러한 것들에 의지하여 살고 있었다. 원래 시대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미신이나 예언 따위에 휩쓸리고 무언가에 기대어 살기 십상인데 당시의 시대 상황도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고, 외세에 의하여 조선 땅이 각축의 대상이 되어가던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안식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봉준의 나이 10살 때 철종이 죽고 고종이 등극하여 대원군의 섭정으로 60년 안동 김씨 세도가 무너졌지만 이미 조선은 내부적으로 그 부패가 깊어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전봉준이 언제 동학에 입교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30살은 넘은 나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동학을 믿게 되는 동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적 고통이나 병을 면하려는 무속적 경향에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입교 동기는 그가 훗날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밝힌 것처럼 '수심경천'하여 '보국 안면'하자는 대의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학문을 익혀 일반 농민과는 확연히 달랐으며 이미 향촌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동학에 입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부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문의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꽤 식견이 높아서 재야의 지사쯤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위엄 있고 당차 보이는 외모에 성품은 도량이 크고 기개가 높았다. 스스로도 글을 배운 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였고, 힘없는 농민들의 대변자로서 몸을 사리지 않았는데, 갑오년 봉기 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수세절감을 요청하는 연명 진정에 앞장섰다가 구금되기도 하였다. 평소에도 그는 개인의 이해를 초월하여 농민 일반의 계층적 요구를 대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농민 봉기를 주도하면서 동학 접주로서 위치를 적극 활용하여 비동학 농민과 동학 농민을 결합시키고, 농민군에 동학 조직을 도입하여 규율과 단결성을 유지해 낸 조직가였다.
민란 형태의 1차 봉기
조병갑은 1892년에 고부 군수로 부임하자마자 동진강 상류에 있던 멀쩡한 만석보의 개수 비용에 충당한다고 과중한 수세를 거두어서는 사복을 채우는 데 유용하여 원성을 샀다. 또, 황폐한 진전을 면세의 약속으로 경작시키고는 강제로 징세하기도 하고 태인 군수를 지냈던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만든다고 강제 모금까지 하는 철면피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것도 모자라서 경제적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군민에게는 갖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방면을 조건으로 수탈하였고, 대동미 징발도 규정을 초과하여 거두어서 착복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되자 고부 농민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군청으로 몰려가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일종의 단체 민원을 낸 셈인데 조병갑은 이들의 요청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몰려온 사람들을 아예 구금해 버렸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연명 진정에 전봉준이 앞장섰다. 이러한 합법적인 소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탐학의 정도가 더욱 극심해지자 고부군 농민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갑오년(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새벽에 기어코 봉기하고 말았다. 이날 전봉준은 장익서, 김도삼과 태인의 동지 최경선 등과 함께 10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서 고부 군청을 습격하였다. 먼저 창고의 세곡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는 무기를 탈취하여 말목장터에 집결한 뒤 악정의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조병갑은 겨우 탈출하여 엿새 후에 전라 감영으로 들어가 폭동이 일어났다고 고변하고는 진압을 요청하였으나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우선 조정에 민란 발생을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소환한 후 용안 현감 박원명을 후임으로 발령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농민들을 진무시키도록 조치하였다.
신임 군수 박원명은 광주 사람으로 농민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노력하자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태가 원만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1차 봉기가 단순히 고부만의 폐정을 철폐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때부터 전국적인 대규모 봉기를 목표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즉 당시 고부군 일대에 돌려진 사발통문에 의하면 벌써 한성까지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모자를 알지 못하도록 둥근 사발 모양으로 빙 둘러 적은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빌붙어 농민을 침탈한 아전들을 징치할 것.
4. 전주성을 함락하고 한성으로 진격할 것.
전봉준은 이때부터 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의도를 가졌으나 다른 지역의 동조 의사가 미미하자 부득이 해산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가 상황을 다시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농민과 동학교도에게 모두 전가시키며 주모자를 체포한다고 다시 한번 고부군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봉준은 악폐의 근본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본격적인 무력 항쟁의 길로 나섰다. 애초에 고부읍만의 자연 발생적인 민란이 대규모 조직적인 농민 전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전봉준은 우선 근처의 동학 접주들에게 보국안민을 위해 일제 궐기하자는 통문을 띄웠고, 이에 각지에서 수천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가 호응하여 전봉준이 진을 치고 있는 고부군 백산면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백산에는 관곡을 저장해두는 창고가 있어 양곡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고, 지형적으로도 주변은 모두 평원인데 비해 유독 백산만이 높은 지역이었으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군사 활동에 유리하였다. 전봉준은 백산에 창의소를 두고 모여든 농민을 군사 조직으로 편성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백산에 모인 인원은 약 1만 3000여 명이었는데 그들은 일반 농민과 동학교도가 대다수였지만 수령의 횡포에 불만이 많았던 각읍의 소리와 경향 각지의 범법 망명자들도 일부 있었다. 때는 고종 32년(1894년) 5월 4일 이었다.
혁명군 성격의 2차 봉기
전봉준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격문을 지어서 농민 궐기의 당위성을 널리 선포하였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 수탈당한 농민을 위하여 싸우는 정의의 봉기군으로서 다음과 같은 행동 강령을 제시하였다.
1.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치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3. 일본 오랑캐를 내쫓아 성도를 밝힐 것.
4. 한성까지 진격하여 권귀를 진멸할 것.
이러한 기치를 높이 들고 백산을 나온 농민군이 고부는 물론 금구, 부안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호남 일대는 완전히 격량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전주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전주 영병이 진압을 위해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부로 다시 회군하여 도교산에 진을 쳤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법성포를 비롯한 인근 각지의 향리들에게 통문을 보내 누적된 민폐를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실제 군산포와 법성포에서는 일부 농민군의 공격으로 조운 업무가 마비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세미를 중앙으로 운반하는 전운 사업은 일본인이 기선을 동원하여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에 세미를 운송하던 조군들과 기존 선상들까지 완전히 그 기반을 잃고 있었다. 결국 전운사업은 전운사 소속 일부 특권층과 일본 상인의 배만 부르게 할 뿐, 지역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부당한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렇듯 호남 일대가 농민 봉기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조정에서는 민원의 대상이 된 안핵사 이용태, 균전관 김창석, 전운사 조필영을 파면시키고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하고 임명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은 자체 진압을 위해 5월 11일에 전라감영 소속 관군과 농민 봉기로 장사에 지장을 받아 불만이 많았던 보부상 연합군 1600여 명을 동원하여 농민군 토벌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들을 고부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황토현이라는 고개로 유인하여 격파시켜 버렸다. 이 전투에서 전라감영 토벌군은 780여 명이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참패를 당했었다. 그 동안 가급적 무력 충돌을 피하던 농민군은 이 첫 전투에서의 승리로 기세가 올라서 당일로 정읍을 장악하고 이튿날 홍덕, 고창을 석권한 후 5월 13일에는 무장까지 쳐들어갔다. 무장은 손화중 포의 근거지로 특히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한 곳이었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구금되어 있던 40여 명의 동학교도를 구출한 후 병력을 고산봉에 주둔시키고는 다시 한번 창의의 취지를 선포하였다. 그 후 17일에 영광, 20일에 함평과 무안, 22일에는 나주까지 진입해 들어가서 동학군은 기의한 지 한 달만에 전 호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인솔하였던 장위영 군 800여 명은 인천에서 배편으로 군산까지 이동한 후 닷새만인 5월 11일에야 전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산에서 전주까지 이동하는 사이에 탈주자가 속출하여 전주성에 도착했을 때는 병력이 47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에 따라 홍계훈은 진압 작전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부랴부랴 증원군 파병을 요청하여 장위영 병력과 강화 수비 병력을 추가 지원받기로 하였다. 전주성에서 한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홍계훈은 증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서 농민군의 추격에 나섰는데 5월 25일에 함풍현감 권풍식으로부터 남하하던 농민군이 다시 북상하여 장성 방면으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어절 수 없이 장성 방향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결국 농민군과 진압군은 장성군 황룡촌 계곡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진압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홍계훈은 정부군 주력을 이끌고 영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5월 27일에 증원군이 법성포를 통하여 합류하였으나 장성에 진출한 선봉대가 대패한 소식을 듣고 다시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연이은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전주를 향하여 질풍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5월 31일에 별 저항 없이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농민군이 계속되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군보다 지역의 지형에 종통하여 이를 잘 활용하였고, 각 지역 민중에게서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농민군은 전주성에 입성한 다음날, 황룡촌 전투에서 패배한 정부군도 농민군의 뒤를 쫓아 전주에 도착하여 성 주변의 고지인 완산에 진을 치고 전주성 안으로 포격을 퍼부어댔다. 이로 인해 성내의 큰 화재가 발생하게 되었고 부득불 농민군은 정부군의 진지를 탈취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돌격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공격은 정부군의 집중 사격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하였다. 당시의 진지 탈환을 위한 공격 과정에서 봉기 직후부터 많은 전투마다 앞장섰던 김순명과 동장자라 불리던 소년 영웅 이복용(당시 14살)이 죽었다.
전봉준이 전주에 입성하면서 전략상 유리한 고지인 완산을 점령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전주가 조선 왕가의 본관지로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완산을 봉산으로 신성시하여 벌채까지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백성으로서 나라의 신성지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만 군사 전술상으로는 커다란 오류를 저지른 것이었다. 오히려 조정의 명을 받은 진압군은 농민군이 기피한 완산을 거리낌없이 점령하여 전략상 유리한 위치를 장악할 수 있었다. 정부군도 농민군의 공격을 유리한 지형과 우수한 화력으로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성을 직접 공격할 여력은 없었다. 결국 정부군과 농민군은 한동안 대치 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이러한 상태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민씨 일파가 득세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홍계훈의 '외병차용'안을 채택하여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일본도 동시에 군대를 조선에 진주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민씨 일파가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외국군을 개입시킨 것이다. 전봉준은 자신들의 봉기가 외적의 침략 야욕에 이용되는 현실을 보고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민씨 일파가 내부적 모순을 시정하려고는 하지 않고 외국군을 끌어들여서라도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반민족적 자세에 이를 갈았지만 외국군을 국내에서 철병시켜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 때문에 정부군과 타협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군의 입장에서도 사태를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자진 해산을 유도하였다.
폐정 개혁 추진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화약 조건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1. 전운사, 균전사 혁파.
2. 탐관오리 처벌 및 축출.
3. 역전은 봄, 가을에 호당 1냥씩 배정
4. 미곡 밀수 엄금.
5. 수령은 관할지역 토지 매입 금지.
6. 보부상 작폐 혁파.
7. 국사를 농단하고 매관매직 하는 간신 축출.
8. 어염세, 보세, 궁방전 폐지.
9. 연호세, 환곡 재징수 금지.
10. 규정에 맞는 전세 납부.
이에 따라 6월 10일 순변사 이원회, 초토사 홍계훈의 입회하에 전봉준과 전라 신임감사 김학진 사이에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농민군은 순창, 남원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전주화약의 결과 전라도 53주에는 농민 자치기관으로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우도를 관할하고,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라좌도를 지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주, 남원, 운봉에서는 집강소 설치를 완강히 거부하여 이 3군에 대하여는 무력으로 응징한 후 결국 도내 모든 군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전봉준이 무력으로 응징하기 위해 나주에는 최경선 부대, 남원에 김개남 부대, 운봉에는 김봉득 부대를 보냈다. 이렇게 2차 봉기 이후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 대표가 지방 행정 자치에 참여한 것은 비록 전라도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였지만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집강소에 서기, 성찰, 집사, 동몽 등의 직책을 두고 관청의 형태를 갖추어서 지방 행정을 관할하게 되자 기존의 관리들은 별 도리 없이 명맥만 유지하였다.
전봉준은 자신은 전라감사의 요청으로 전주감영 안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집강소를 통괄하고 원활한 행정의 실행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12개조의 요강을 마련하였다.
1. 동학교도와 관리들은 원한 관계를 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도 징치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징습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6. 7반 천인의 대우도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서 평양립을 벗게 해줄 것.
7. 청춘 과부의 개가는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모두 없앨 것.
9. 관리 채용에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외적과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 모두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이렇게 농민군과 관청이 협조하여 유래없는 민, 관 합동 행정을 시행해 나가자 봉기는 성공하고 사태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의 정서는 조선 내부의 정치 변화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1876년 개항 이후 근 20년 동안 조선에 대하여 경제적 침투를 자행하여 이즈음에 와서는 완전히 독점적인 이익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 곡물을 싸게 사서 일본으로 반출하면서 큰 이득을 얻자 일본 상인들에 의한 미곡 유출이 심해졌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의 곡물 가격은 자연히 폭등하였고 다른 생필품의 가격도 동반하여 앙등하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 상인들의 곡물 수매 방법은 생산물의 시장에서 자유 거래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을 이용하여 산지에서 입도선매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영세한 조선 농민의 피해를 가중시켰으며, 특히 곡창지역인 전라도 일대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러한 때에 고부는 왜상들이 각지에서 미곡을 수집하여 반출시키는 중간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부는 선박 운영을 위한 부당한 세금 부담까지 가중되었고, 일반 농민으로서는 이러한 각종 잡세의 부담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였는데 조병갑의 탐학까지 가세하였으니 견디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부에서의 민란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된 것은 전운사 조영필과 균전사 김창식의 부정과 수탈에도 원인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운 사업은 세미를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로서 전운사는 이 업무를 총괄하는 기구의 책임자였다. 조영필은 이 직위를 악용하여 규정된 선가미 이외에 부족분 발생을 충당한다는 명분으로 과도하게 추가 징수하여 백성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또, 균전사 김창식은 왕실이 출자하여 개간한 농지를 관리 수조하는 책임자로서 황무지나 폐경지를 신규 개간하면 3년간 면세하게 되어 있는 규정을 무시하고 새금을 부과하여 포탈하였으며, 심지어 무경작지에까지 징세하는 횡포를 자행하였다. 결국 최대 곡창지역인 전라도 일대는 조선 내부의 봉건적 모순이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는 데다 일본 상인의 곡물 매점 과정에서 피해가 겹쳐 그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동안 조선에서 독점적 이익을 얻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학 농민 봉기로 인하여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이 잠식당할 것을 우려하였다.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에 군사적 침투를 노리고 있던 차에 자기들에게 배타적이던 민씨 정권이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청국을 끌어들이자 천진 조약을 빙자하여 자신들도 조선에 군함을 파견하고 병력도 경쟁적으로 증파하였다. 급기야 일본은 청과 협조하여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하면서 군대의 주둔을 기정사실화 하려고 했으나, 청군은 "조선에 내란이 끝났으니 공동 철병하자"고 주장하여 양군간에 긴장이 높아졌다. 일본은 동학 농민군 봉기를 빌미로 군사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심지어는 농민군을 선동하여 소요 발생을 더욱 획책하려는 음모도 몇 차례 진행시켰다. 일본은 조선의 내란을 부채질하여 청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조선에서의 세력을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일본공사 오토리는 1894년 7월 23일에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한 후 고종을 위협하여 허울좋게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는 대원군을 꼭두각시와 같은 섭정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이틀 뒤인 7월 25일에 아산만에 정박 중이던 청국 군함에 불시에 포격을 가하여 마침내 청을 전쟁을 돌발시켰다. 또, '군국기무처'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조선 내정을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후 일본 공사 주도하에 조선의 모든 제도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개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9월 15일의 평양 회전을 고비로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청군이 물러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외세 구축을 통한 보국 안민을 궐기의 주요 목적으로 삼았던 전봉준은 이러한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다. 또 이제는 나라의 상태가 폐정 개혁이라는 내부 문제에만 집착할 단계를 넘어서 그 존망이 걱정되는 위급한 지경이라고 판단하였다. 부당한 외세의 속박을 몰아내지 않고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전봉준은 항일 구국의 차원에서 다시 궐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10월 10일에 농민군 재궐기에 대한 회의가 삼례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남접 지도자들은 일제 봉기를 주장하였고, 동학의 상층 간부들인 북접 지도자들은 신중론을 제기하였으나 결국 무장 재봉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번에는 전주에서 공주를 거쳐 한성까지 공격하는 구체적인 진격항로까지 계획하였다. 이 결과에 대해 최시영을 비롯한 북접 지도부는 불만을 갖고 남접을 사문난적이라고 배척하고 나왔으나 북접 근거지인 충청도에서도 관군이 무고한 농민과 동학교도를 살육하고 탄압하자 어절 수 없이 봉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결국 농민군의 항일 무장 봉기는 전봉준 등 남접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추진 결정되었고, 최시형 등 동학 상층 지도부인 북접은 관군의 찬압과 남접과의 연대 투쟁을 요구하는 하부 조직의 압력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외세의 침탈에 대하여 국가 상층부는 수수방관하였지만 힘없고 수탈받던 민중은 힘을 모아 쓰러져가는 나라를 건져내려고 일어섰던 것이 갑오년말의 농민군 3차 봉기였다.
항일 구국 투쟁의 3차 봉기
전봉준은 먼저 전주 대도소를 교통 요충지인 삼례로 옮기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구국을 위한 재봉기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전봉준의 호소에 따라 당시 충청, 전라 양도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수는 10만에서 20만 가량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공주로 진격하여 전투에 참여한 인원은 전봉준이 인솔한 호남 농민군 주력 1만여 명에다 각지 지원부대까지 합치면 2만여 명이 약간 웃돌았다. 이에 대하여 공주에 포진하고 있던 정부군 병력은 미나미 소좌가 인솔하는 일본군 제19대대 1000여 명과 충청감사 휘하 관군 3500여 명의 연합부대가 주력이었다. 여기에다가 각 지방 병영에서 지원군이 꽤 합류하여 1만 명 정도의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타는 전의나 인원수 면에서는 농민군이 우위에 있었으나 훈련 정도와 군사 장비에 있어서는 정부군에 비해 열세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농민군은 남북접 연합을 위해 한 달이나 허비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농민군이 공격하려 한 공주성에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가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11월 중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 농민군은 공주 남쪽 경천점으로 육박해 들어갔고 목천 세성산으로 북접 김복용 부대가 집결하였으며, 효포 쪽으로는 북접의 옥천포 부대가 공격하기로 하였다. 일응 공주를 향하여 삼면에서 공격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공주는 주병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강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지형상 웅거하여 전투하기 용이한 지역이었다. 전봉준은 공주로 진격하기 전에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격문을 보내 구국을 위한 궐기에 동참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농민군의 이번 궐기는 항일 구국 항쟁의 차원이지 정부와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여 불필요한 관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오히려 동조를 얻기 위함이었다.
한편 농민군 재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에서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순무사로 임명하여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일본 공사 이노우에는 더 이상 조선 침략을 위한 이용 가치가 없으며 그 시점에서는 오히려 장해가 되고 있는 동학교도를 이 기회에 완전히 소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본국으로 추가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진압 부대로 조선에 도착한 일본군 제 19대대는 즉시 3대로 나누어 공주 방면으로 진입하여 북상하는 동학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1대는 한성에서 강원도로 우회하여 충천도로 들어갔고, 2대는 한성에서 직선거리로 남하하였으며, 3대는 인천에서 해로를 통해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충청감사 박제순은 남하하여 온 일본군과 합세하여 이인, 효포, 봉황상, 우금치 등에 진을 치고 북상하는 동학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공주 전투의 첫 회전은 목천 세성산에서 11월 18일에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충청도 일대에서 살육을 자행했던 죽산부사 이두횡의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가 농민군을 기습하여 북접 김복용 부대가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봉준이 인솔하는 호남 농민군 주력부대는 19일 1차 공격을 개시하여 공주 전초기지였던 이인에서 서산 군수 성하영의 관군과 일본군 합동부대를 격퇴하고 웅치에까지 진격하였다. 그 반면 또 하나의 북접 농민군인 옥천포 부대는 안성 군수 홍운섭의 관군이 방어하고 있던 효포를 11월 22일에 공격하였으나, 효포 동쪽 대교에서 후방 기습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렇게 1차 회전에서 농민군은 전봉준 지휘의 호남 주력부대 이외에는 모두 참패하였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도 22일 웅치에서 성하영의 관군과 일본군 및 경리청 대관 구상조 부대의 삼면 협공을 받아 격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내지 못하고 다시 경천점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농민군의 1차 공주 공격은 일본군의 근대화된 화력과 정부군의 지형을 이용한 포위, 기습 공격에 밀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차 공격에 실패한 후 농민군은 반격에 나서려는 진압군과 전투를 계속하면서 진영을 정비하고 부대 재편성에 힘썼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해안 상륙을 통한 후방 기습을 저지하기 위해 남아 있던 김개남 부대까지 투입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농민군은 12월 4일에 2차 공주 공격에 나섰다. 2차 공격은 이인, 판치의 전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농민군의 총공세로 정부군은 최후 방어선인 우금치까지 후퇴하여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과 합류하였다. 이 고지를 중심으로 쌍방간에 6, 7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였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결국 패퇴하여 고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정부군과 일본군의 급추격을 받아 은진 황화대에서도 또한번의 격전을 벌렸지만 또다시 패전하여 금구의 원평과 태인의 석현점까지 밀려가고 말았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농민군의 공주 공격전에서 정부군의 추격전으로 바뀌고 있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12원 21일에 태인의 삼산에서 최후의 결사전을 전개했으나, 이곳에서도 패퇴함으로써 농민군의 조직적 투쟁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후로는 진압군의 일방적인 살육만이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양상은 다음해 1월말까지 계속되었다.
전봉준은 태인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입암산성에 잠시 피신했다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순창의 피로리라는 산골까지 숨어들었으나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지방민 한신현 등에게 붙잡혀서 일본군에게 인계되었다. 곳곳에서 체포된 농민군 지도자와 함께 전봉준도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형식상의 재판 끝에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고, 전봉준은 42살의 나이에 오로지 구국안민을 위해 바쳤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단심을 누가 알 것인가!" 하면서 자기의 피를 종로거리에 뿌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축멸왜이를 통해 조국을 구하려던 동학 농민군은 오히려 그들이 몰아내려던 일본군에 의하여 섬멸되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말끝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내세우던 일본은 진정한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조선민중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조선 강탈의 야욕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 갑오 농민 전쟁의 결말이었다. 갑오년 농민 봉기의 좌절 이후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었고 조선은 결국 치욕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동학 농민 투쟁이 조선 말기 역사 전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탐학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스스로의 힘을 모아 봉기하고 더 나아가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항일 투쟁까지 전개한 것이 갑오 농민 전쟁의 실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의 자립 중흥을 위하여 봉기한 최초의 민중 투쟁은 이렇듯 외적이 무력에 의하여 좌초되고 말았다. 전봉준은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의연한 자세를 지켜서 교도관리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고 재판에 참여하여 간섭하려던 일본 영사를 통렬하게 공박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끈 갑오 농민 항쟁은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지만 이후 반일 의병 운동의 지주가 되었으며, 19세기 아시아 민족 투쟁사를 대표하는 사건이자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최초의 대중적 농민 항쟁으로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동학의 내용과 농민 봉기와의 관련성
이제 마지막으로 동학 사상의 본질과 전봉준을 통한 농민 봉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동학의 성격에 대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의 명칭은 그 당시 천주교를 의미하였던 서학에 대립하는 표현으로서 경상도 지방의 몰락 양반 출신인 최제우에 의하여 1860년 4월에 창시되었다. 동학의 기본 이념의 골자는 인간 평등 사상에 기초한 '인내천'이다. 또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섭리와 통한다는 '천인일여'의 정신으로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의 본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동학의 목적이며 그것이 실현된 세상이 지상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동학은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현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천인일여를 통한 무위이화'가 동학의 목표였다. 따라서 이러한 동학의 평등 사상은 일반 백성에게는 고무적인 내용이지만 특권 지배층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내부적 악폐의 근절을 통한 '보국안민'을 동학 창시의 동기라고 주장하면서 조선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유학적 정치원리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고까지 강변하였으므로 더욱 사회 문제가 되었다. 양명학마저도 사문난적으로 이단시하던 당시의 유교적 풍토로 볼 때 동학은 묵인할 수 없는 사학이었으며, 결국 1대 교주 최제우는 난정의 죄로 처형되고, 그 후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외적을 구축하고 현실의 고통스러운 질곡을 벗어나는 방법을으로 동학이 제시한 것은 극히 비과학적인 음양 사상과 무속적인 것들이었다. 즉, 동학은 양이고 서학은 음이므로 13자의 주문을 항상 암송하면 양으로 음을 제압할 수 있고, 당시의 상황이 '이재궁궁'한 시기이기 때문에 궁자를 종이에 써서 태우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한 비합리적이고 환상적인 방책이 질곡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동학이 당시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종교적 형태로 등장하였지만 농민 봉기와 무력 투쟁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직접적 요인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전봉준이 갑오년에 주도한 일단의 봉기가 동학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투쟁을 주도한 전봉준 등의 인물이 동학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동학이 관련되었던 것이지 동학이 직접적 작용으로 발화된 사태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동학의 상층 지도부는 무력 투쟁을 반대하다가 정부의 무차별적인 탄압과 하부 조직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갔었다. 그러므로 전봉준의 갑오년 농민 무력 항쟁을 동학의 시각에 고착시켜 동학난이다 동학혁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 봉기 초기에는 대다수가 동학교도가 아닌 일반 농민이었던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농민 전쟁으로 전환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조직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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