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겨레의 영원한 스승 - 이이
율곡 이이는 현실 정치가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였다. 자신이 배운 학문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가서 민생 안정과 제도 개혁을 위하여 전심으로 노력하였고 은퇴하여서는 후배 양성과 사회 교화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일찍이 신분 차별의 벽을 해소하려고 애썼으며 남을 공경하는 것을 내 몸 아끼는 것보다 더한 정성으로 대하였다. 처가에서 사준 집을 팔아 가난한 친척을 구휼하였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먼 촌수의 여동생이 어려울 때 녹봉을 헐어 도와주었으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복을 입고 슬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착한고 어진 성품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으며 감수성이 강하고 순정적인 경향도 있어 어머니 사임당과 외할머니 이씨에 대한 애정은 효성 이상의 것이었다. 이렇듯 극히 인간적인 그였지만 동, 서 파당 대립의 정치 현실에서는 양쪽 모두에게서 의심과 공격을 받는 불행을 당해야만 했다. 지공 무사한 그의 자세가 오해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모호하고 편파적인 것으로 비난받았으며, 일을 끊임없이 찾아서 끝까지 추진하는 그의 업무 수행 태도는 당시의 안일한 조정에서 공연히 없는 일을 만드는 위인으로 비판받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러한 세태 속에서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을 항상 한탄하였으며 정치 지도자들이 먼저 바로서야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성을 잘 먹인 후에 교육을 시켜야 다스림이 통하는 것이지 배를 주린 후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민생 치도의 철학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일찍이 외적의 침입을 예견하여 10만의 양병을 주장하는 혜안을 보였으나 이 또한 무사안일한 당시 조정의 부족한 인식에 밀려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후에 전 국토가 외적의 발 아래 짓밟히는 참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통분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가 강조한 유비무환의 자세는 비단 당시뿐만 아니라 조선 말에도 해당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초기 미중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했던 사실에 비추어서도 국가 지도자들이 항상 귀담아 두어야 할 내용이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솔선 수범하는 실천 철학자였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세상에 참된 도가 실행되기를 바랐던 민족의 스승이었다.
총명한 어린 시절
율곡 이이는 조선 11대 왕인 중종 31년(1536년) 강릉부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헌이고, 호는 한때 기거하였던 파주 지방의 지명을 따서 율곡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오죽헌이라고 불리는 외갓집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본가인 한성 수진방(현 수성동)으로 오기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태몽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쪽 마루 천장에 서리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고 얼마 후 그가 태어났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고, 그때의 산실을 지금에 와서도 몽룡실이라고 부른다. 이라는 이름은 율곡이 11살 때 아버지가 큰 병을 앓던 중 꿈을 꾸었는데 백발 노인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동국의 대유이니 이름을 구슬 옥변에 귀 이자를 붙여 짓도록 하라"고 현몽하여 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율곡의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 중랑상을 지낸 이돈수를 그 시조로 한다. 율곡의 집안은 조선조에 들어서도 계속 관직에 종사하던 명문가였으나 그의 아버지 이원수는 율곡 출생 당시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던 평범한 서생이었다. 율곡이 태어난 외가는 마당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대갓집으로서 세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건축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최응현대에 화서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주었는데, 이사온도 사위인 신명화에게 상속하였고, 신명화도 아들이 없자 맏사위인 권화에게 물려주었다. 권화대에 와서 아들인 권처균에게 상속하였고, 그에 의해 당호가 오늘날 전해지는 대로 오죽헌이라 명명되었다.
신명화가 율곡의 외조부이고 권화가 이모부이며 권처균이 이종 사촌이다. 외조부 신명화는 율곡의 양친이 결혼하던 해에 세상을 하직하여 그는 외조모 이씨의 사랑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율곡의 어머니 형제들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그 부모들은 총명한 둘째 딸 사임당을 특히 사랑했고, 이에 따라 율곡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던 어머니를 닮아 율곡도 이 외할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어 이조좌랑 시절에는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직하고 강릉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율곡의 총명함 또한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3살 때 외조모 이씨가 석류 열매를 보이며 "무엇 같으냐?"고 묻자 옛시를 인용하여 "부서진 빨간 구슬을 껍질이 싸고 있다"라고 대답하여 감탄케 하였다. 겨우 말할 나이에 이미 글까지 깨우쳤던 것이다. 4살 때는 사략의 첫 권을 배우면서 스승이 구두점을 잘못 붙인 것을 찾아낼 정도로 영특하였다. 7살 때는 이웃에 사는 인물을 평하는 진복창전을 지었는데, 그를 소인으로 치부하면서 장차 큰 화를 일으킬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과연 진복창은 을사사화 때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율곡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된 셈이니 어릴 때부터 그의 뛰어난 안목은 가히 놀랍다고 할 뿐이다. 8살 때는 파주의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훌륭하기 그지없었고 10살 때 지은 경포대부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작품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13살인 명종 3년(1548년)에는 소과인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린 나이에도 과거만을 위하여 학문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이 생각은 그의 일생에 걸친 신조이기도 하였다.
구도의 금강산행
16살 되던 해 여름에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하자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조운 업무를 담당하던 아버지가 관서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자 세상의 견문도 넓힐 겸해서 12살 손위인 맏형 선과 함께 따라갔는데, 그들이 돌아오는 도중에 사임당은 기다리지 못하고 4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사임당이 마지막 숨을 멈추던 그 시각에 율곡 일행은 서강 나루에 와 있었다 하니 지척에 있으면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그의 한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파주 선산에 어머니를 묻고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에도 율곡은 인생의 허무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과 사를 포함하여 인생의 모든 일이 부질없는 듯했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뜬구름 같은 삶의 의미를 찾을 길 없었던 젊은 율곡은 어느 날 봉은사에서 불교 서적을 읽다가 돈오의 구절에서 섬광 같은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돈오법은 참선을 통해 진리를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는 불교 사상으로 이것이 그 동안 고민해 왔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으로 느껴졌다. 사실 율곡은 그의 아버지가 불경을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자연히 불경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어렵다는 능엄경을 가장 좋아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데다가 어머니를 잃은 허무한 마음을 달래려고 절을 자주 찾았는데, 죽은 자의 영혼을 천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서 불교에 더욱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율곡은 19살이 되던 해 봄에 뜻을 세우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길에 매달려 보기로 작정하였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은 억불정책에 의하여 선비라도 한번 불교에 귀의하면 관직으로는 영영 길이 막혀 버리던 사회였다. 따라서 웬만한 결단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을 율곡은 실행하였던 셈이다. 주위의 놀라움과 만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명리에는 이미 관심이 없었던 율곡은 오로지 참된 진리를 찾아 끝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금강산의 마하연에 있는 참선 도장을 찾아간 그는 일체의 세속적인 관심을 끊고 진리 탐구에만 정진하였다. 사실 이 금강산행은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타고난 기를 잘 길러서 도리를 깨우치고 다만 우매하고 광망스럽게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공자께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여서 기를 기르기 위해 산수를 찾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기 위해 금강산행을 단행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로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한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털어 버리고 대자연의 웅혼한 기상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심정은 입산하면서 지은 동문을 나서면서 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찾았던 금강산이지만 불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판단되자 1년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산하였다. 불교에 회의를 가진 이유에 대해 율곡이 훗날 술회하기를 "돈오법에 이끌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불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가라는 문제에 집착하여 생각을 거듭해 보았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불교도 허망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불교에서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함은 무슨 까닭일까에 대하여도 침식을 잊고 깊이 사색해 보았지만 곧 별다른 기묘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마음이 함부로 달려나가는 것을 차단시킴으로써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여 극도로 허명한 경지를 만들고자 함에 그 까닭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일부러 문제를 제기한 화두라는 것에 가탁시켜 마음의 연마를 하게 하는데 사람들이 이런 방편을 쓰는 것임을 알게 되면 노력을 게을리하여 아무런 소득도 없겠으므로 일종의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불교를 버렸다"고 설명하였다.
불교를 신앙으로 삼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생각될 여지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보다는 율곡 자신이 근본적으로 유학자이지 불가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진정한 불교 진리의 탐구를 위해 더 노력해 보려고 하지 않고 1년 만에 하산한 것은 애초부터 율곡의 사고 체계의 저류에 흐르는 기본 정신과 불교 사상은 맞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아무리 율곡이 천재라고 하더라도 진리를 깨우치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은 부족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율곡은 불교에 대한 회의가 들자 다시금 유교 서적을 복습하여 "그 깊이의 참됨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이 또한 이때에야 비로소 깨달은 바라기보다는 그의 내면적 구조 자체가 이미 유학자일 수밖에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율곡으로서는 젊은 날 방황의 시기에 불교의 길로 잠깐 외도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율곡의 성품에 대한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나중에 성현의 경지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결단성이 빠른 반면 천재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자기 확신에 기인한 경박함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출발
그가 하산하자 우선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산사에 있을 때 과연 석가의 제자를 자처하여 머리를 깎고 중 행색을 하였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시로서는 삭발을 하였다면 이미 선비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치부하여 배척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구도 수행 시절 동안 머리를 전혀 깎지 않고 지냈음이 하산 즉시 만난 많은 인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한때 불교에 탐닉했던 그의 태도는 오랫동안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공격거리로 활용되었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율곡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갈 구체적인 방안으로 자경문을 지었는데 일종의 좌우명이었던 자경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뜻을 크게 가지자.
2. 마음을 안정시키자.
3. 혼자 있는 것을 삼가자.
4. 언제나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
5. 일에 닥쳐서는 성의를 다하여야 한다.
6. 옳지 않은 일은 절대 금하자.
7. 자세를 항상 바르게 하자.
8. 방심하거나 서두르지 말자.
자경문의 전체적 내용은 성현을 목표로 뜻을 크게 세운다는 것이 근본이었다. 그는 사람이 인생을 설계하는 데 무엇보다도 입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실로 이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사상이 두드러진 특색이었다. 40살에 지은 성학집요의 제일 앞머리에 입지장이 있고, 42살 때 지은 격몽요결의 첫머리에도 입지장을 두었으며, 47살에 지은 학교모범에서도 16조의 규범 첫 조에서 입지를 강조했다. 율곡은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뜻을 세우는 방편에 대해서는 "참되면 뜻이 저절로 서는 법이고 그 뜻을 항상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뜻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산 후 강릉 외가에서 새로이 학문에 정진한 지 1년이 되던 명종 11년(1556년) 21살의 나이로 한성시에서 장원한 후 그 이듬해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큰딸과 결혼하였다. 이 노씨 부인은 건강하지 못해 율곡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끝내 소생이 없었다. 노씨 부인은 현숙한 품성의 여인으로서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도 대가족을 소리 없이 이끌어갔다. 그녀는 율곡보다 8년을 더 살았지만 천명을 다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때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피난도 가지 않고 파주 선산에서 평생을 존경하던 남편 율곡의 신주를 끌어안고 버티다가 왜군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율곡은 결혼한 이듬해에 그 동안 머물고 있던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예안의 계당에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퇴계 이황을 방문하였다. 58살의 노대가와 23살의 홍안 청년이 2박 3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처음 만났으나 이 만남으로 두 천재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서신 왕래를 통해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고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율곡은 멀리서나마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어 슬퍼했다고 한다.
율곡은 그 해 겨울에 한성 별시문과에 참가하여 천도책이라는 글로써 장원 급제하였다. 이 글은 음양이라는 기의 작용으로 천지 조화를 설명한 것으로 율곡의 자연 철학에 대한 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율곡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자기들은 시험 문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여러 날을 고심했건만 이 젊은이는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글을 지었다면서 실로 천재의 출현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율곡이 47살 때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을 때 명사 황홍헌과 왕경민 등의 일행은 율곡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예를 다하였다.
25살 때에는 지야서화를 지어 또 한번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면서 학문에 계속 정진하였고, 26살 되던 해 5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형제 모두가 함께 파주 선산인 자운산에서 3년간의 시묘살이를 하며 보냈다. 상복을 벗은 이듬해인 명종 19년 7월과 8월에 29살이 된 율곡은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율곡이 전후 9차례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하여 당시 장안에서는 구도 장원공이라며 칭송이 대단했다. 그러나 비교적 늦은 나이로 과거에 최종 합격한 셈인데 이는 금강산 구도행각을 전후하여 방황의 시간이 있었던 데다가 부모의 죽음으로 6,7년의 공백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관직 생활
29살에 승문원 권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율곡은 호조와 예조의 좌랑을 거쳐 30살에는 언관인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사간원에 근무하면서 이듬해 5월에 윤원형과 요승보우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간원진시사소를 왕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31살에 관리 임용을 주관하는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선조 원년(1568년)에 33살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 전해에는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의 생전에 총애를 받던 하성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보위를 이어받아 16살의 소년왕으로 선조가 등극했다. 그 해 4월에는 장인 노경린이 맏사위인 율곡에게 뒤처리를 의탁하고 죽자 처가 재산을 저서와 남녀의 구별 없이 동등하게 분배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진취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 그 해에 명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는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영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았다.
이 시기에 정치의 나아갈 바를 논한 동호문답을 지어 왕에게 봉헌하였지만 조정의 개혁 의지가 부족함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에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직을 하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35살에 다시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았으나 그 해 10월에 건강이 나빠져서 다시 사직하고 처가인 해주에서 한동안 요양하다가 이듬해 1월에 파주 율곡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제대로 되는 것 없는 관직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껴서 그 심정을 서신으로 퇴계와 친구들에게 토로한 적도 있었다. 해주에서 칩거하던 해 12월에는 퇴계의 부음을 접하고 거처하던 내실에 위를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바친 후에 자신은 소대를 걸치고 외실에서 거처하며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기도 했었다. 자대의 경향이 강해서 여간해서 남을 대단하게 보지 않던 율곡이었지만 퇴계에게만은 유일하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6살 때인 선조 4년(1571년) 6월에는 청주 목사로 임명되어 첫 외직에 나가자, 여기에서 서원향약을 만들어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나빠지자 청주 목사 자리도 10여 개월만에 사직하고 율곡리에 돌아와 요양하던 37,38살 어간에도 계속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다가 38살 7월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이때도 세 차례에 걸쳐 사양하였으나 선조가 끝내 윤허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관직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관직에 복귀하고 2개월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월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라는 시무와 임금으로서 취할 태도를 밝히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이나 선조는 개혁에 대한 논의만 분분한 채 구체적인 조치느 한번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우유부반함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율곡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업무가 번잡한 승정원 근무가 힘들어지자 한직에 나가기를 원하여 무임소인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가 병조참지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한직에 놔두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해 3월에 대사간이라는 중책을 다시 맡겼으나 임명된 다음달에 병으로 사임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직하고도 몇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자 선조는 율곡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외직이라도 관직에 그를 붙잡아 두려고 하였다. 결국 사직한 지 6개월만인 그 해 10월에 방백의 지위로 관직에 다시 나갔으나 병약한 몸으로 지방관의 격무를 견디지 못하여 채 6개월도 임기를 못 채우고 다음해 3월에 또다시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파주로 돌아와 쉬고 있던 율곡에게 다시 부제학을 제수하여 중앙 정계로 들어가서 근무하던 중, 그 해(선조 8년) 9월에는 2년 전부터 집필하였던 성학집요를 탈고하여 왕에게 올렸다. 이 책은 군왕의 도를 체계적으로 상술한 것으로서 후에 경연의 교본으로 쓰였고 성리학에 바판적이던 실학자들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된 서책으로써 율곡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동, 서 붕당의 조짐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율곡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평소 심의겸과 친분이 깊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정철과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김효원의 동인 계열에서는 그를 서인으로 지목하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양쪽을 화해시켜 조정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나라의 장래를 안정시키려는 일념뿐이었는데 서인 쪽에서도 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자기들 편을 들어주지 않는 율곡을 야속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동, 서 파당의 대립에 대한 율곡의 자세는 양시양비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세상일에 양쪽 다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며 율곡의 시비는 정확하게 가리지 않고 무조건 원만하게만 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율곡은 백이숙제의 고사를 들어 해명하면서 "양쪽이 모두 선비들이니 화해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지 어느 한쪽만이 맞다 한다면 그 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정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율곡은 다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하였고 변덕스러운 선조가 율곡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자 마침내 은퇴를 결심하고 41살 되는 해(선조 9년) 2월에 파주로 돌아갔다. 당시 25살이 되었던 청년왕 선조는 자존자대하는 의식이 강하여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총명하기는 하였지만 민생의 정치보다는 제왕의 위신을 높이려고만 하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강직하고 뜻이 높은 장년층보다 나이 많고 원만한 사람들을 좋아하였다. 왕의 이 같은 자세는 유달리 뜻이 높고 자기 주장이 강한 율곡과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율곡은 마침내 그 해 10월에 사직을 하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해주 석담에 청계당을 비롯하여 새 터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선대의 유적이 있는 파주 율곡리에서 해주로 생활 터전을 옮기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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