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민족 의학의 선구자 - 허준
허준은 의성이라고까지 추앙되는 인물이며 신분적 불리함을 딛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도전적 인간상의 전형이다. 그는 유교적 가치관이 전부이던 시대에 태어나 크게 대우받지도 못하는 길로 자신의 인생을 몰입시켰지만, 그곳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탁마하여 시대적 가치를 뛰어넘는 평가를 이끌어낸 위대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의원으로서 그의 뛰어난 점은 복양과 치료보다도 정신수양과 섭생에 의술의 본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치료 의학보다는 예방 의학을 우선시했다는 점이 그의 의학 사상에 있어서 큰 특징이다. 그것은 동의보감을 비롯한 그의 모든 저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관념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도 대단히 선각자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의술을 기술이 아닌 인술로 파악하여 인본주의자로서 의원의 길을 걸어간 그는 항상 가난한 백성의 입장에서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환경에 의한 영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항상 조선의 실정을 감안한 방안을 채택하였고, 우리 민족 체질의 특성에 치료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항상 힘없는 백성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가지고 있어 일반 백성들이 의원들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도 기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도록 하는 대중용 의학 서적 편찬에 주력했다. 각종 의서들을 개정하고 증보하여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들도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고,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으로 달려가 치료에 임하면서 임상 경험을 쌓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의술의 목표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호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배운 학문으로 그 어떤 정치가보다 더 치도의 근본을 실천해간 큰 인물이었으며, 전란을 전후해서 어수선하고 흔들리던 당시 왕조 정권을 한쪽에서 굳건히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그의 독보적 가치는 중국 의술의 아류로 취급되던 조선 의학의 체계를 정립시킨 데에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운 환경을 뚫고 자신의 길을 열어나간 개척정신과 좌절의 순간에도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그토록 긴 기간을 오로지 하여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인간승리의 모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얼 출신 명의 탄생
허준은 조선 13대 왕인 명종 원년(1546년)에 용천 부사를 역임한 허론의 서자로서 경기도 양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손씨는 지방 현령의 딸로 아버지의 소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운명적으로 입신양명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있었으며, 그것은 훗날 그가 의술을 철학의 경지에 끌어올려 집대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그는 배다른 형제로 형인 옥과 동생 징이 있었다. 형은 한미한 직책에 그쳤지만 동생은 내외직의 꽤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서 전남지역에서 보내면서 서얼 출신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여 중인 계층이 진출하고 있던 의원을 인생의 길로 선택하였다. 의술 공부에 전념하던 그는 젊어서 이미 지역 사회에서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치료해주면서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집안의 후원과 어느덧 명성을 얻은 실력으로 10대에 벌써 지방에서 약재를 검사하여 중앙으로 상납하는 심약이라는 종9품 관직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의원으로서의 출세에는 아버지의 본부인 영광 김씨의 도움이 컸다. 큰어머니 김씨쪽으로 그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김시흡이 그의 자질을 인정하여 미암 유희춘에게 소개해주었고, 미암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계속 후원을 해주었다. 허준이 미암을 처음 만난 시기는 미암이 긴 유배에서 풀려난 선조 원년(1568년)의 일로 그의 나이 23살 때였다. 미암은 명종 2년(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윤원형 일파에게 탄압을 받고 긴 유배 생활을 하다가 선조가 즉위하자 21년의 긴 유배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 후 미암은 선조대에 전라감사, 홍문관 제학, 대사헌의 요직을 역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미암의 지원이 허준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암은 선조 2년(1569년)에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추천하여 내의원으로 임명되게 해주었다. 궁중의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가 되면서 허준은 일생일대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의원이자 내의원 의관이던 어의 양예수를 만난 것이다. 흔히들 허준의 스승은 유의태로 알고 있지만 그는 허준보다 후대에 활약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꾸며낸 것에 불과하고 실제 스승은 내의원 수석의관 양예수였다. 당대 최고의 의원인 양예수를 만난 허준은 의술의 정수를 전수받아 의원으로서 더욱 실력을 쌓아갔다. 양예수가 지은 의림촬요가 훗날 동의보감을 저술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허준에게 있어서 양예수의 존재가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허준은 선조 4년(1571년)에 종4품인 내의첨정에 올랐다가 선조8년(1575년)에 의과에 정식으로 합격하고 왕의 시의로 선발되었다. 갓 30살의 나이에 의원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굳히고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는 과거 급제 후 왕실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우면서 녹비(사슴 가죽)와 숙마(나라에 속한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등의 상을 여러 차례 받음으로써 점점 그 실력을 확고하게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고 왕의 특지로 여러 차례 품계를 올려 받았다. 그는 왕실 전담 의원으로 근무하면서 의학을 꾸준히 연구하여 선조14년(1581년)에 찬도방론 맥 결집성을 4권 4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중국6조 시대 때 고양생이 지은 찬도맥결의 미흡한 부분을 교정하고 난해한 곳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낸 것이다. 찬도맥결은 중국 중세 이전에 명성이 높았던 의원들인 희범, 결고, 통진자 등의 맥론을 집대성한 책으로 그때까지 의학도의 필독서였으며, 의과 시험의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내용이 워낙 해석하기 어려워서 의원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교정이 필요했다.
허준이 지은 교정본에는 기본적인 진맥 방법과 병세에 따른 진맥법이 항목별로 상세하고도 쉽게 기술되어 있어 의학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로부터 내의원 내에서도 그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고 선조 23년(1590년)에는 광해군이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일을 치료하고 낫게 해주어서 그 공로로 정3품 대우의 가자(품계를 올려 받는 것)를 받았다. 광해군이 천연두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그가 구활하게 된 것인데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허준이 가자된 다음 조정에서는 서얼 출신이자 기술 관료인 그에게 정3품 당상관 대우는 부당하다는 이유로 품계 환수 여론이 빗발쳤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고속 출세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그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한 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서 마지막으로 믿었던 신립마저 탄금대에서 무너지자 선조와 조정은 개성을 향하여 몽진 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때 허준도 피난가는 어가를 따라 시의로서 그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피난길에서 잠시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건강을 돌보아 준 공으로 선조가 대궐로 귀환하자 곧 다시 품계를 올려 받았다. 그런데, 한성으로 돌아오면서 목격한 조국의 산하는 전란으로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부상당한 사람들과 전란 끝에 의례히 찾아오는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고 이들을 치료할 방도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허준은 선조의 명을 빌려 모든 병을 치료하는 방안을 수록한 의학서를 편찬하기로 계획하고 선조 29년(1596년)에 그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노쇠한 양예수는 은퇴하여 그가 내의원 수석의관이 되었으며 동반(문관) 직책을 재수받을 정도로 최고 대우를 받고있었다.
그때는 아직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일시 휴전 상태였으며 왜군 또한 여전히 남해안 일대에 진을 치고 있어서 국내 정세는 아직도 상당히 불안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구휼과 치료가 시급하자 우선 내의원 안에 새 의서를 찍어내기 위한 편찬국을 두고 허준을 비롯하여 정작,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 내로라 하는 의관들이 모두 모여 공동 연구에 들어갔다. 그렇게 한창 연구가 진행되는 도중에 정유재란(1597년)이 발생하여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공동 연구는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전쟁의 양상은 중부지방에서 전선이 형성된 후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가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조선에서의 철병을 유언으로 남기자 왜군들은 일제히 철수하였고, 이에 따라 7년에 걸친 왜란은 겨우 종식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내의원도 다시 정비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중단되었던 의학서 편찬을 계속하라는 명을 내려 그때부터 단독으로 이 작업을 떠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500여 권의 모든 의학서를 참조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나갔다. 연구에 몰두하던 그가 55살 되던 선조 33년(1600년)에는 스승인 양예수가 죽게 되어, 그때부터 그는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의원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외롭고 어려운 의서 편찬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현업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선조34년(1601년)부터 전국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허준은 연구 작업을 잠시 접어두고 병들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구호 일선에 분연히 나아가 의원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했다. 당시에 전염병이 워낙 극성을 부려서 왕실 치료를 전담하는 내의원 의관들도 손놓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백성들의 진료에도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일반 백성들이 의원의 도움을 못 받더라도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도록 세조 때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던 구급방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2권 2책의 언해구급방으로 편찬하여 내놓았다. 또 세조 때의 의학자 임원준이 저술한 천연두 치료에 관한 책인 창진집을 개편하고 역시 우리말로 번역하여 언해두창집요를 편찬해낸 것도 그 해의 일이다. 허준은 이 책을 알기 쉽게 고쳐 쓰기도 했지만 자신이 직접 치료하면서 효과가 좋았던 진료 방법을 덧붙여 기술하여 천연두 퇴치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러한 공로로 선조 37년(1604년)에는 충근정량 호성 3등 공신이 되었다가, 그 2년 후에는 양평군이라는 작위와 함께 보국숭록대부로 봉해져서 관리로서 최고위직 대우를 받게 되었다.
동의보감 완성
의원으로서 그와 같은 대접을 받은 사람은 그 이전에도 일찍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물론 없었다. 특수 기술직으로 그다지 우대받지 못하던 의원으로서 이토록 파격적인 대접을 받게 되자 자연히 조정 내에서 질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결국 대간의 빗발치는 반대로 그 직위가 취소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는 허준은 그 와중에도 의학 연구에 꾸준히 몰두하여 선조 41년(1608년)에는 노중례의 태산요록을 우리말로 옮기고 수정하여 언해태산집요라는 출산과 아기 양육법에 관한 해설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원으로서 승승장구하던 허준에게 그 해 2월에 엄청난 위기의 시간이 다가왔다. 선조가 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허준은 왕의 주치의로서 치료에 잘못이 있다 하여 집중적인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위하던 왕이 죽으면 그의 건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하여 규례적으로 어의의 죄를 논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의례적인 절차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로 인해 어의가 처벌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허준은 그 동안 선조의 비호를 받아서 중서의 신분으로 공경대부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았다는 죄 아닌 죄로 인해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당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왕의 치료에 소홀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삭탈 관직된 후 유배되고 말았다. 그는 이런 좌절을 겪으면서 유배지에서도 새로운 의학서 집필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 후 조정 중신들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다음해 4월에는 위리 안치되는 가중 처벌까지 받게 되어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그 해 11월에 광해군에 의하여 사면되어 귀양에서 풀리고 다시 내의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자 시절 그에 의해 위중한 병을 치료받았던 광해군이 특사로 그를 풀어주고 어의로 다시 불렀던 것이다. 귀양에서 풀린 그는 그 동안 연구했던 새 의서 저술을 마무리지어서 선조의 명에 의해 새로운 의학서를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15년만인 광해군 2년(1610년) 8월에 25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책을 완성해 내놓을 수 있었다. 이에 광해군은 포고문을 내려 그 공을 치하하고 상으로 태복마를 하사하였다. 이 책은 출판 준비에만 3년이 걸려서 실제로 간행된 것은 광해군 5년(1613년) 11월이었다. 허준으로서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혼자 힘으로 고군 분투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낸 것이다. 끈질긴 집착력과 사명감으로 그 기나긴 세월을 한 길을 향해 매진한 결과였다.
집필을 마쳤을 때 그의 나이도 어언 65살로 당시로서는 꽤 고령이 되어 있었다. 동의보감은 그 후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간되었다. 중국에서 출판될 때 그 서문에서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전 세계가 함께 공유하여야 한다"고까지 극찬하였고, 일본에서도 의가의 비급으로 소중히 떠받들어졌다.
말년에도 질병 퇴치를 위하여 매진
그는 동의보감을 완성한 후에도 새로운 병이 발견되면 몸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기위한 처방을 연구하여 책으로 펴냈다. 광해군 4년(1612년) 12월에는 온역이라고 했던 발진티푸스가 함경, 강원 양도에서 유행하다가 점점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중종 때부터 전해져 오던 벽온방을 참작하여 신찬 벽온방을 찬집하였다. 이 책은 발진티푸스의 원인 및 예방과 치료법을 기술한 것으로 1613년 2월에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 당독역으로 불렸던 성홍열이 전국에서 유행하자 벽역신방이라는 치료서를 엮어내기도 했다. 이 책에는 병의 기원과 증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치료법과 약방문에 이르기까지 치료에 임하기도 쉽고 효험이 큰 방법들이 간결하고도 요령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의학 연구 및 저술과 병든 백성의 구호에 진력하던 허준은 광해군 7년(1615년) 11월에 70살을 일기로 조용히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은 다음에 광해군은 그의 공적을 기려 그의 생전에는 중신들의 반발로 취소하였던 양평군의 관작을 추증하여 주었다. 그는 조선뿐만 아니라 동양의학계 전체에 지워질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겼고, 중국에서도 그를 가리켜 동국 의성이라고 추앙하였으며 그의 책을 대량으로 발간하여서 질병의 치료에 길잡이로 사용했다. 또한 오늘날에도 동의보감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어 세계적인 의서로 그 의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의보감의 내요와 가치
동의보감은 의학서에 대한 허준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임상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실용적인 의서이다. 각종 질병에 따른 처방을 상세히 기술한 것은 물론 반드시 단방 치료 방법을 열거하였고, 약만으로 효과가 없을 경우에 쓰는 침구법도 덧붙여서 완벽한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약재에 있어서도 중국산과 국산을 구분하여 국산 약재는 산지, 지방별 명칭, 채취 계절과 제약 방법을 기술해서 약재를 구하기 쉽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처방의 출전을 밝혀두어 질병에 대한 고금의 치료 방법을 계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으며 속방까지 기술해 두었다. 특히 잡병편에서는 증세를 중심으로 각종 질병을 알아낼 수 있도록 배열하여 임상 경험이 부족한 의원도 이 책을 기초로 하여 환자를 보면 쉽게 진맥을 할 수 있었다. 처방약의 용량도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표준치를 만들어 적의 가감하여 조제하도록 하였고 복용 방법까지 명시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의학 사상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정, 기, 신의 종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내장기의 생리적 기능 변조 가능성과 그 직접적 병증을 다루어서 400년 전에 이미 현대 의학에 가까운 의술이 모색되었다는 측면에서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렇게 그는 고금의 각종 의서를 통달하여 다기한 치료 방안을 취사 선택한 후 실제 임상 경험을 거쳐서 치료에 효과가 있는 정수만을 뽑아 내느라고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의보감 전편에 흐르는 이념적 바탕은 도교적 공리 정신과 실용주의적 사상으로서 이에 따라 이 책은 정확성과 함께 실제적 활용가능성이 무엇보다도 중요시 되어 있다. 또한 한의학을 총 집성하여 토대로 삼았지만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는 민족 의학으로 정립시켰기 때문에 한방이 아니라 한방의학의 결정판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히 의술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수록되었다고 할 정도로 상세하고도 정확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이와 같은 명저가 다시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동양의학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의보감의 구성은 목차편 2권, 내과인 내경편 4권, 외과인 외형편 4권, 유행병, 급성병, 부인과, 소아과 등을 합친 잡병편 11권, 약재와 약물에 관한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 등 5강목으로 나뉘어서 총 25권으로 발간되었다. 이 방대한 의학 서적의 진정한 가치는 한국적 의학의 우수성과 민족적 재능의 뛰어남을 과시한 대역사라는 점에 있다. 또한 기술로서의 의술이 아니라 인술로서 의학을 대하였던 한 인간의 고귀한 인간존중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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