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낭만적인 시인이자 격정적인 정치가 - 정철 (2/2)
가사문학의 진수를 펼치다
분을 참지 못하여 사직하고 성산에 은거하던 송강은 물러난 지 3년만인 선조 11년(1578년) 정월에 43살의 나이로 왕명에 의하여 재출사하여 장악원 정, 사간, 집의를 거쳐 4월에 직제학, 5월에는 승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동인이 완전히 다수파가 되어 있어서 그는 고군 분투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김효원과 허엽 등을 대신하여 동인의 영수로 떠오른 이발과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이러한 때에 서인 출신 지방관이었던 이수라는 자가 수뢰 혐의로 처벌을 받게 되자 이를 관대하게 처리해주려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동인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또다시 향리에 칩거하단 그에게 선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선조 13년(1580년) 정월의 일로 그의 나이 45살 때였다. 그의 호오가 분명하고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치열한 중안 정계에서는 분쟁에 시달렸지만 술과 풍류를 좋아하고 범속을 벗어난 자세로 인하여 지방관으로는 잘 어울리어 이때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더구나 이곳에서 그의 대표적인 가사 작품으로 꼽히는 관동별곡을 지어 문학사에 있어서 찬란한 이정표를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은 그가 한성을 떠나 원주 감영으로 도착하기까지의 경로와 그후에 관동을 유람하는 도정을 노래한 것으로, 전편 295행의 장가다. 또,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관청의 일방적 지시나 포고문을 대신하여 단가 형식의 훈민가를 지어 교화하려고 노력했다. 훈민가는 부모, 형제, 군신, 효도, 부부, 남녀, 자녀 교육, 이웃 사랑, 어른 공경, 우정, 원호 정신, 상호 협조, 근면 협동, 도덕성 고취, 도박과 소송의 금지, 경로 정신 등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를 16수의 단가로 노래한 것이다. 관리이자 예술가였던 그의 채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일면이다. 훈민가 중 유명한 대목으로 부모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노래를 감상해 보자.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날 같안 은덕을 어데다혀 갑사오리.
이렇게 시작한 지방 도백 생활은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를 거치면서 3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함경도에 부임한 지 3개월만에 선조는 그를 중앙으로 다시 불러서 예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그때 조정에는 율곡도 돌아와서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파쟁을 조정하려고 무한히 노력하였으나, 득세한 동인이 서인들을 지나치게 공격하고 나서자 서인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고 이조판서로 있던 병약한 율곡이 다음해 정월에 49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송강은 외로이 동인들과 싸워나가야만 했다. 율곡이 죽은 다음달에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선조가 특별히 그를 총애하여 자기가 타던 말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가 대궐에 출입할 때 이 말을 타고 다녀서 사람들은 그를 초마어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인들로 가득한 조정에서 왕의 신임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고, 오히려 질시와 견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선조 18년(1585년) 4월에 동인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조정에서 또다시 물러나왔다. 향리에 돌아온 그는 조용히 자연과 벗하면서 시작활동에 몰두하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사미인곡은 천상의 선녀가 하계에 쫓겨와 천상계에 있는 임에 대한 절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여성의 입장에서 노래한 연가로서 선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 중에 한 소절을 살펴보면 그의 섬세하고 연연한 감정의 세계를 짐작하게 된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점어 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대 노여없다.
평생에 원하요대 한대녜자 하얐더니
늙거야 무사 일로 외오 두고 그리는고.
사미인곡은 모두 63절 126구로 되어 있으며, 구성은 서사, 원사, 결사로 3분단되어 있다. 속미인곡은 두 여자의 대화체로 구성된 작품으로 전편격인 사미인곡이 한 여자의 독백체로 구성된 것과 대비되며 그 문학성에 있어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첫 구절을 보자.
저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한 저이고
천상 백옥경을 엇디하야 이별하고
해 다져 저믄날에 눌을 보라 가시는고.
속미인곡은 4,4조로 지어졌으며, 모두 49절 96구로 구성되어 있다. 송강 스스로 전후 미인곡으로 지칭하였던 두 가사 작품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이 지은 이소와 사미인을 본따서 지은 가사문학의 결정판으로 충신 연주지사로 인정받고 있다.
동인 제거의 선봉, 그리고 또다시 좌절
이렇게 4년 동안 향리에 칩거하며 저작에 몰두하던 송강이 54살 되던 해(1589년)7월에 그를 항상 이해해 주고 감싸주던 사암 박순의 부음을 듣고는 절해고도에 완전히 홀로 남겨진 심정이 되었다. 옛 동료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 다음달에 맏아들 기명이 세상을 떠나는 참담한 변을 당했다. 그 해는 송강에게 있어서 불행하였던 한 해였다. 그런데, 가족 묘지가 있는 고양의 신원에서 장남의 장례를 치르면서 머무르고 있던 그에게 정여립 반란 음모사건이 발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경하여 선조를 배알하고 자신이 치옥을 담당할 추관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이에 선조는 그에게 우의정을 제수하고 정여립 사건의 취조관으로 임명했다. 원래 정여립은 율곡과 우계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서인들과 가까웠었는데,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예조좌랑이던 정여립이 이조정랑으로 추천되자 그의 과격한 성품을 들어 반대했었다. 그 후 율곡이 죽고 홍문관 수찬에 오른 정여립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꿔 율곡과 서인들을 공격하고 나왔다. 이렇게 정여립이 전날의 스승과 동료들을 공격한 것은 율곡에 대한 서운함도 작용했지만, 당시 조정이 동인들의 세상이 되자 동인 쪽에 붙어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일종의 변신책이었다. 그러나 선조가 정여립의 이러한 변절을 좋지 않게 생각하자 부득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면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주위의 의심을 샀다. 결국, 정여립은 반란 음모 혐의로 잡히자 자살하였고, 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은 동인들은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
특히 송강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인사가 죽거나 처벌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정여립의 거주지였던 전라도 출신들의 피해가 많았다. 송강은 이 사건의 치죄 과정에서 악착 같고 잔혹한 일면을 드러내서 일찍이 그의 과격하고 치열한 점은 알려져 있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적 기질과 대비되어 의아한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여립 사건을 발단으로 동인이 일거에 몰락한 것이 기축옥사의 전말이었다. 정여립 사건 처리의 공로로 송강은 이듬해(1590년) 정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후 조정은 서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영의정은 이산해였고, 우의정은 류성룡으로서 두 사람은 모두 동인이었지만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인 조정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다음해(1591년)에 건저(세자책봉 관련 건)문제가 대두되어 선조의 뜻을 거슬른 서인이 또다시 실각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 후사가 없어서 후궁의 소생 중에서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 그때 공빈 김씨 소생 임해군이 장남이었으며, 광해군이 둘째였다. 서열상으로는 당연히 임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자질이 없다 하여 나머지 왕자 중에서 선발하기 위한 논란이 있었다. 선조는 인빈 김씨 소생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중신들은 송강을 필두로 논의한 결과, 둘째 왕자 광해군을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선조의 심중을 눈치채고 있던 영의정 이산해가 이 기회에 송강과 서인을 밀어내기 위해 논의 장소에서는 모른 척 동의하고는 실제로 왕과 함께 세자를 결정하는 자리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송강은 왕의 뜻과 반하여 중신들이 논의하여 결정한 그대로 광해군을 추천했다. 완전히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버린 것이다.
선조는 자신의 심중과 다른 견해를 고집하는 송강에게 크게 역정을 냈고, 이에 대간에서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그에게서 피해를 입고 은인 자중하던 동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하고 나오자, 선조는 그를 파직시키고 명천으로 유배시켰다. 송강이 꺾여나가자 서인들도 모조리 파면되거나 처벌되었고, 조정은 다시 동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송강도 동인들의 빗발치는 송토에 의해 강계로 배소를 옮겨 위리 안치되는 가중 처벌을 받았다. 그에 대한 처벌 논의 과정에서 동인은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또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이산해는 북인의 대표였고 류성룡은 남인의 수장이었다.
비운의 말년
가시 울타리 안에서 꼼짝 못하고 구금생활을 하던 송강에게 석방될 수 있는 기회가 묘한 곳에서 찾아왔다. 유배된 이듬해(1592년) 4월에 대규모 왜군이 쳐들어와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왜군이 부산포에 쳐들어온 지 불과 20일만에 한성이 점령되고 선조는 황급히 피난길에 나섰다. 개성에 도착한 선조는 백성을 불러 모아 위로의 말을 전하고 건의를 받아 보았다. 이 자리에서 여러 건의 끝에 이산해를 처벌하고 송강을 석방하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는 선조의 잘못된 정치와 처사를 나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결국 선조는 그의 석방을 명하고 영의정 이산해를 파면시킬 수밖에 없었다. 왜란은 엄청난 피해를 야기한 국가적 재앙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재기의 기회였던 셈이다. 그는 강계에서 풀려 나와 곧바로 북행하여 왕가가 있던 평양에서 선조 일행과 만나 의주까지 몽진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 해 9월에는 채찰사로 임명되어 전황을 살피기 위해 목숨을 건 남행을 하게 되었는데 왜군과 마주칠 위험이 있는 육로를 피하여 뱃길로 황해를 따라 남하하였다. 그는 강화도에 도착하여 적정을 살피던 중에 중부 이남은 완전히 왜군에게 장악된 것을 알고 남행을 포기하고 다시 의주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에는 명나라가 원군을 참전시켜준 것을 감사하는 사은사로 퍄견되었다가 11월에 돌아왔는데 또다시 그를모함하는 탄핵이 생기자 당쟁의 집요함에 몸서리를 치며 사직하고 강화 송정촌에 칩거해 버렸다. 탄핵의 내용인즉, 송강이 명나라에 가서 "왜병이 물러갔으니 구원병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국가 존립과 관련된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정적을 탄압하려는 치졸한 정치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화에 머물던 만년의 송강은 호구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어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빈곤에 허덕이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선조 26년(1593년) 12월 중순에 파란 많았던 생애를 58살로 마쳤다.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난 지 불과 한 달만에 울분과 생활고 속에서 신음하다가 속절없이 죽고 만 것이다.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그였지만 정적들의 공격은 끝이 없었다. 이듬해 6월에 관직을 박탈당했고, 그 2년 후에는 정인홍 등의 모함을 받아 부관참시까지 당할 뻔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원년에 원은 풀렸고, 인조 원년에 둘째 아들 종명과 김장생의 상소로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는 문정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렸졌다. 그의 유해는 현종 6년(1665년) 3월에 가족 묘지인 고양의 신원에서 충북 지장산으로 옮겨 모셔졌다.
술과 송강의 관계
송강과 술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만큼 유명하다. 그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언제나 술병을 끼고 살았고, 폭음하는 일도 많았다. 말년에 얻은 병 또한 술로 인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을 때 이미 황달 증세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폭음으로 인해 간이 많이 상하였던 것이다. 그의 지나친 음주 습관은 정적들에게 공격의 호재가 되었으며, 이를 보다 못한 율곡이 그에게 "술을 줄이고 말을 삼가라"는 충고까지 할 정도였다. 술에 취하면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남을 매도하는 술버릇 때문에 더욱 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조도 술로 인해 공격당하는 그를 안타깝게 생각해서 한번은 은잔을 하사하면서 "앞으로는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특별히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잔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잔의 안쪽을 두들겨서 사발만하게 넓힌 다음 술을 부어 마셨다고 한다. 말년에는 건강 때문에 술을 끊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술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술에 탐닉하며 살았다.
겉으로는 과격하고 직선적이며 성격이 급한 그였지만, 내면으로는 낭만적이고 나약한 면이 있어 더럽고 아니꼬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술로 해소하려고 한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허무와 밀착하여 애잔하기까지 한 삶은 술 권하는 시로서 유명한 장진주사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곳걱거 산 놓고 무진 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해 거적 덮어 주리혀 매여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 데나, 어웃개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곧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불 제 뉘 한 잔 먹자할고.
하물며 무덤 위에 잰납이 바람불 제 뉘우친들 어떠리.
이 시에는 현실의 울적한 심사를 술에 의지하여 풀어 보려고 한 일면과 함께 예술가적 기질에 의하여 호탕하게 풍류를 즐기려는 측면도 엿보인다. 그의 이런 면은 성산별곡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엇그제 빚은 술이 어도록 익었나니,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로니,
마암에 맺힌 시름 저그나 하리 나다.
거문고 시욹언저 풍입송이야 고야
손인 동 주인인 동 다니저 바려세라.
그가 술을 얼마나 즐겼는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단가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잘 알려진 시 한 수를 또 감상해 보자.
재 너머 성 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소탈한 그의 정취가 잘 표현되어 있고 멋스러움과 홍이 약동하듯 그려져 있어서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정경을 보는 듯하다. 술에 대한 그의 자세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향락주의나 현실도피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응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연을 배경으로 풍류를 즐기는 것은 당시 선비들의 전통적인 멋이었으며, 그의 시 세계를 깊이 관찰해 보면 모두 그의 생사관이 아우러져 녹아있는 일종의 명상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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