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큰 뱀이 배 위에 서려 있었던 김종수
김종수(1723~1799)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정부, 호는 진솔 또는 몽촌이다. 영조 26년(175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4년(176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조 13년(1789)에 정승에 임명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충이고,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떤 사건으로 남쪽 지방에 귀양 가서 그 고을 이방의 집에 우거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마루에서 낮잠을 자는데 큰 뱀 한 마리가 그의 배 위에 서려 있었으나 김종수는 그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침 그 고을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열세 살 된 이방의 아들이 점심을 먹고 관아로 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큰 개구리 10여 마리를 잡아다 뱀 앞에 던지자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김종수의 배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김종수가 그 사실을 알고 그 아이를 몹시 기특하게 여기고,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올 적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같이 왔다. 그가 평안 감사로 있다가 가시 조종으로 돌아오게 되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대동강에서 전성하는 뜻으로 기생에게 춤과 노래를 크게 벌이게 하였다. 김종수도 흥겨워 담뱃대로 뱃전을 두드리며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우는데 잘못하여 담뱃대가 그만 강물 속으로 떨어지자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평안 감사로 있은 지 2년 동안에 이 담뱃대도 평안 감영의 물건이었는데, 지금 대동강의 신이 내가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강물에 떨어뜨리게 한 것이오."
그의 청렴 결백함과 풍류가 이와 같았다.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비난한 갈처사를 의로운 친구로 사귄 김유근
김유근(1785~1840)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경선, 호는 황산이다. 순조 10년 (18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직언하기를 좋아하여 그 때문에 여러 차례 영남의 바닷가로 귀양 갔었다. 임금이 그의 그런 경력을 생각하여 다시 불러다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에게는 도의로 사귄 친구가 남산 아래 살고 있었는데, 갈처사라고 불렀으며,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무렵에 갈처사가 김유근이 외출한 틈을 타 시 한 수를 써서 벽에다 걸어두었는데 그 시는 이러 하였다.
눈서리를 견뎌낼 대쪽 같은 지조 서릿바람 겪은 꽃처럼 우아한 모습 고요한 물에서 무한한 바다의 이치를 알게 되는 법 어찌하여 다시 풍파를 일으키려 하오
성명을 밝히지 아니하고 떠나버렸다. 김유근이 돌아와서 그 시를 보고 말하였다.
"이 시는 틀림없이 갈처사가 내가 이조 판서가 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그를 찾게 하였지만 이미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난 뒤였다.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어도 복이 많았던 윤명렬
윤명렬(1762~1832)의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언국, 호는 석유이다. 얼굴이 지독하게 못생겼다. 정조 13년(1789) 삼일제에 장원급제하였으므로 임금이 그에게 전시에 곧장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상신 채제공이 윤명렬의 제술(시나 글을 지음)은 고상한 품위가 없고 또 얼굴조차 못생겨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하자 임금이 그 주청대로 윤허하였다. 그것은 지난번 채제공의 종질이 상신 윤시동의 주청 때문에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는 오해가 있던 터에 윤명렬이 윤시동의 가까운 친족으로 잘못 알고 이런 주청이 있게 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임금이 말하였다.
"윤 아무개의 아비 면동은 글을 잘 못한다는 비난은 이상스럽다."
마침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한 것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언젠가 윤명렬이 여러 재상의 자제들과 나란히 앉아 점쟁이에게 운명을 점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 점쟁이가 윤명렬을 보고 말하였다.
"이 분은 아주 가난하고 궁색한 형상이니 함께 논의할 필요조차 없소."
그 말을 들은 윤명렬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 이튿날이 되자 전날 상을 봐주었던 점쟁이가 윤명렬을 찾아와서 말하였다.
"당신은 매우 존귀하게 될 상이며, 특히 등허리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게 될 상이오. 내가 이 세 꾸러미의 돈을 당신에게 건네주겠는데, 한 꾸러미는 곧장 술과 안주를 마련할 비용으로 주는 것이며 두 꾸러미는 당신이 몹시 가난하니 지금 당장 땔감과 양식을 사는 데 쓰시오. 그리고 뒷날 틀림없이 존귀하게 될 터이니 20년 뒤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3천 냥짜리 물표를 만들어 나에게 주시오."
윤명렬이 흔쾌히 그 제의를 허락하였다. 뒤에 청나라에서 조선의 노론, 소론에 대한 곡해가 생겨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윤명렬이 사명을 받들고 연경에 가서 잘 수습하고 돌아오자 그 공로가 인정되어 강원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전에 그의 상을 봐준 점쟁이가 그때서야 찾아와서 물표를 내놓으며 돌려주기를 청하므로 서슴없이 즉각 물표에 적힌 대로 내주었다. 윤명렬의 부인은 학주 김홍욱의 후손이며 역시 못생겼다. 네 나들을 두었는데 윤치승은 판관이고, 윤치응은 목사이며, 윤치의, 윤치영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한 집안이 크게 드러났다.
윤명렬이 일찍이 그의 부인에게 장난 삼아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부인의 그런 얼굴로 시집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나의 이 얼굴로도 부인이 아니었다면 장가 들 수 없었을 것이오."
시호는 충헌이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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