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나무를 실은 남의 소를 타고 가서 급제한 윤필병
윤필병(1730~1810)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이중, 호는 무호당이다. 진사로 포천에 살면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마침 이웃집에서 나무를 팔러 서울로 떠나는 자가 있기에 윤 진사가 나무를 실은 길마 위에 앉아 새벽녘에 동대문 밖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때가 너무 일러서 성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주막에 들어가 잠시 쉬려고 하는데, 주막의 주인이 나와서 맞이하며 물었다.
"생원님께서 지금 과거 보러 가는 길이며 성은 윤씨입니까?" 윤필병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주인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뭇짐을 실은 소를 끌고 오는데 나뭇짐 위에 오색이 영롱한 한 괴물이 앉아 이 길을 따라와서 우리 주막으로 들어오기에, 그 나뭇짐 위에 실은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 소를 끌고 온 사람이 말하기를, '이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것이 송아지가 아니고 용같이 생겼으므로 서울의 장터에 내다 팔려고 하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깨기는 하였습니다만 마음속으로 너무나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생원께서 이미 이 길을 따라 오셨고, 또 짐을 실은 소의 길마 위에 앉으셨고, 성씨 또한 윤씨라고 하셨는데, 일찍이 들은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윤씨를 가리켜 소라고 하며 용은 바로 과거에 급제할 징조라고 하였으니, 과거 급제를 하례할 만합니다."
윤 진사가 웃으며 그가 함부로 장난한다고 나무랐는데, 그 길로 가서 정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뒤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처자가 정절을 지킨 김하재
김하재(?~?)의 본관은 광주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정조 8년(1784)에 임금을 향하여 직접 흉악 무도한 욕설을 적은 쪽지를 승지에게 건네준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후처는 어느 집안의 딸인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처음 흑산도엣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형을 집행할 때 의금부의 하인이 형장인 백사장으로 끌고 가려 하자 그 여인이 준엄한 말로 항거하였다.
"비록 죄인의 신세가 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당당한 사대부 집안의 출신인데, 어찌 너희에게 끌려 가겠느냐. 내 손이 잘릴지언정 종들의 손에 잡힐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목에다 밧줄을 걸어 조용히 사형을 당하자, 흑산도 사람들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진도에서 종이 되어 옥사 곁에 살면서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스러운 말은 입에 담지 아니하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끓어 앉으며,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공손하고 조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남에게 요구하지를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아껴주며 가련하게 여겼다. 관비를 아내로 맞아 아들 하나를 얻어서는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자세히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이 비록 이 지경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어찌 도리가 아닌 일을 행하여 조상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누이가 어린 나이에 나주의 관비로 배속되었다가 장성하여 신분이 미천한 상인의 아내가 되었는데, 집안 살림이 조금 여유가 있었기에 새 옷 한 벌을 지어 오라비인 그에게 보내어 도우려 하니, 그가 그 옷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불에 태워 버리고 다시는 아는 체하지 말고 살라며 경계하였다. 김하재가 비록 미치광이처럼 한때 본성을 잃고 흉칙한 짓을 하여 스스로 이런 흉화를 불러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이어왔기 때문에 그의 처자들이 정절을 지킴이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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