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30년 묵은 옥사를 처결하고도 애통해 한 황인검
황인검(1711~1765)의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경득이다. 영조 23년(174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소시에 절에서 글을 읽을 적에 어떤 중이 성의를 다해 심부름하여 시종 게을리하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면 쌀을 빌어다가 밥을 지어 올렸다. 황인검이 뒤에 귀하게 되어서는 전혀 서로 찾아보지 못하였다. 뒤에 경상감사가 되어 열읍을 순시하다가 노상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 매우 반가워서 그와 함께 감영으로 돌아와 밤마다 같이 자며 매우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 하루는 황인검이 중에게 일렀다.
"내가 어려서 너의 신세를 크게 진 바 있으므로 네가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으로 돌아오면 살림을 넉넉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출세 길을 터 주겠다." 중이 이를 고맙게 여기며 말하였다. "소승은 본래 속인으로 우연히 산골짜기 속에 새로 만들어 놓은 무덤 앞의 소복한 미인을 보고 홀연히 음탕한 마음이 생겨 겁탈하다가 그만 죽게 하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의 죄를 속바치려 맹세하고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공의 후한 뜻 때문에 본래 먹은 마음을 다시 바꿀 수 있겠습니까."
황인검이 마침 도내 살인사건의 의안을 보니 이 옥사가 있어 거의 30년이 되어도 원범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던 터다. 그래서 그 연월일을 물어보니 그대로 맞았다.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너와 정의가 비록 절친하나 공법은 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을 잡아다가 처형하고, 장수를 후히 주고 무덤에 가서 비통해 하였다. 조선조 선비들이 공과 사를 분별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거지와 어사를 분별할 줄 아는 어린 기생에게 감동된 이광덕
이광덕(1690~1748)의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관양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다. 북관(함경도)에 어사로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사의 신분을 숨기고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각 고을 수령의 잘잘못과 각 지방마다 풍속의 순함과 그렇지 못한 점,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형편 등을 두루 탐지하고, 마침내 해질녘에 하인과 함께 함흥 땅에 이르러 어사의 신분을 드러내려고 하는 터에 성내에 주민들이 분주히 오가며 부르짖었다.
"수의사또가 장차 당도하게 되었다."
이광덕이 의아하게 여겨 말하였다.
"열읍을 두루 다녔으되 아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 이처럼 소문이 파다하니 필시 종자가 누설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성밖으로 도로 나와 종자에게 따져 물었으나 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수일이 지난 뒤에 다시 성내에 들어가서 비로소 출도하여 공무를 판결하고, 또 군의 아전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온 것을 알았느냐?" 아전이 말하였다. "온 성안이 자자하여 말의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이광덕이 그 말의 출처를 따져 묻자, 아전이 집에 물러와서 자세히 탐문 하였더니, 7살 먹은 어린 기생 가련이 맨 먼저 주창한 것이었다. 아전이 들어가 그 사유를 고하니 이광덕이 가련을 불러 앞에 가까이 오게 하고 물었다.
"포대에 싸인 아직 어린아이가 어떻게 내가 오는 것을 알았느냐?" 가련이 말하였다. "소녀의 집이 거리 머리에 있습니다. 전일 창문을 열고 엿보니, 거지 두 사람이 길가에 나란히 앉았는데, 한 사람은 옷과 신이 해어지기는 하였으나 두 손이 매우 희고 고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얼고 굶주린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살결이 윤택하고 희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기던 즈음에, 그 사람이 옷을 벗어 이를 잡아다 곧 도로 입으려 할 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옷을 추스려 입히고 예를 지킴이 매우 공손하여 신분의 존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수의사또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이를 알렸는데 , 잠시 사이에 이런 사실이 전해져서 온 성안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광덕이 그의 영특함을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랑을 지극히 하고 돌아 올 적에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 기생도 이광덕의 문장에 감복하여 그 시를 몸에 간직하고 자기 일신을 의탁하려는 뜻을 두었다. 시집 갈 나이가 되자 한결같이 절개를 지키며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광덕은 이미 그를 잊어 버렸다. 그 뒤에 이광덕이 어떤 사건으로 벌을 받게 되어 관북지방에 유배되어 함흥에 우거 하였는데, 그 기생이 와서 뵙고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모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광덕도 그 성의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에 여색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생활한 지 4~5년이 되어도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적이 없었다. 기생도 그의 인격에 마음으로 감복되어 이광덕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가도록 하였으되 한사코 듣지 않았다. 가련이 또한 제 갈공명의 출사표를 즐겨 외어서 달이 밝은 밤마다 이광덕을 위해 한번 외면 맑은 소리가 마치 학의 울음과도 같았다. 이광덕은 그 출사표 외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어서 절구시 한 수를 읊었다.
함경도의 여자 협객 흰머리 가득한데 나를 위해 전후출사표 낭랑하게 외누나 낭송 소리 삼고초려 그 대목에 이르면 축출된 신 맑은 눈물 마냥 줄줄 흐르네
하루는 이광덕이 석방되어 돌아올 적에 비로소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광덕은 그에게 타일렀다.
"내가 갈길은 정해진 날짜가 있으니 비록 너와 같이 가고 싶으나 죄를 사면받아 돌아가는 사람이 뒷수레에 기생을 싣고 가는 것은 하지 못할 바이다. 집에 돌아간 뒤에 반드시 불러오게 할 것이니, 한스럽게 여기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
그 기생은 기쁨이 눈썹에 나타나서 개연히 허락하였다. 이광덕은 돌아온 지 몇 달이 못 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생은 부음을 듣고 통곡한 뒤 자결하여 죽으니, 집안 사람들이 길 옆에 장사 지냈다. 뒤에 영성군 박문수가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그의 무덤 있는 길을 지나다가 그 얘기를 들어서 알고 비석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썼다.
"함관여협 가련지비"
체통과 예법을 잃은 감사를 탄핵한 김굉
김굉(?~?)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대서, 호는 독관재다. 영조 9년(1773)에 진사가 되고, 11년(17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필선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고 과감히 말하므로 사람들이 철공이라 불렀다. 송순면이 평안감사로 조정을 하직하고 서문 밖에 나가니, 이때 전별하는 자들이 있어 술상을 한판 요란하게 벌였다. 김굉이 마침 그 술자리에 있으면서 같이 술을 마셨다. 술상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순명이 말하였다.
"우리 고모의 집이 근처에 있으므로 잠시 뵙고 오겠으니, 제공들은 조금 쉬며 잠시 기다려 주는 것이 좋겠소."
이어 문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돌아와서 곧바로 떠나려 하니, 자리에 있던 손들이 모두 작별하였다. 그러자 김굉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공은 떠나갈 것 없이 모름지기 여기서 조금 지체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송순명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굉은 대답하였다.
"공은 주인으로서 좌석의 손님들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이 문을 나섰으니 손과 주인의 예를 크게 잃었고, 음식을 하인에게 내어주고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려 하니 하인이 어느 겨를에 나머지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체통과 예법을 크게 읽소 아랫사람의 사정에 통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방백의 책임을 받아 열읍의 수령을 통솔하겠소. 내가 바야흐로 돌아가서 탄핵하겠소."
이어서 일어나 나가니 송순명은 농담으로 여기고 길을 떠났다. 김굉이 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신이 신임 평안감사의 사석에서 한두 가지의 일을 목도한 바 있는데, 그는 체통과 예법을 크게 잃었고 아랫사람의 사정에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방백의 소임에 둘 수 없으니 고쳐 임명하소서."
주상이 그대로 시행하도록 비답을 내렸다. 송순명은 겨우 고양에 이르러서 체직을 당하였다. 조선왕조 시대에 관직에 대한 올바른 경계가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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