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서북인 출신으로 최초로 충청 병사가 된 전백록
전백록(?~?)은 온성의 토병이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흰 사슴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백록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벼슬길에 올라 옴은 그대로 주고 뜻이 다른 글자로 고쳐 백록이라 하였다. 전백록이 경흥부사로 있을 적에 경성을 지나다가 당시에 북평사(정 6품 무관직.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임) 이동언(1662~1708)을 만났다. 이동언은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북평사로 온 사람이며 사헌부에 있을 적에 직간으로 이름을 얻은 때였다. 이 때 전백록도 북방 호걸이란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를 만난 이동언은 단도직입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이곳 북평사로 부임한 이후로 나의 시책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부사에게 듣고 싶소. 들은 것이 있으면 숨김없이 말해 주시오." "이 북쪽지방이 비록 한양에서 멀다고는 하지만 공이 사헌부에 있을 때 보여준 기탄 없는 비판으로 떨친 명성을 못 들을 리 있겠소?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공이 부임한 뒤로부터 날마다 기악을 잡히고 별로 하는 일이 없으니 처음에 떨치던 병마절도사의 위신이 이제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 풍류와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마들기 쉬운 것이오. 공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니 특별히 조심하여 자중하시오. 만약 앞으로 풍류와 여색을 멀리할 자신이 없거든 다시는 전처럼 남의 잘못을 비판하지 마시오. 비웃음을 살 뿐이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비수 같은 날카로운 비판에 이동언은 할말을 잊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옷깃을 여미고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나중에 조정에 돌아온 이동언은 전백록의 당당한 위풍과 과감한 성격 등을 조정에 널리 알리고 그를 크게 등용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전백록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북인도 지방 감사에 써야 한다는 논의만 있을 뿐 아직은 시행되지 않았는데 전백록이 처음으로 충청수사에 발탁되었다.
늦게 글을 배워 출세한 무인 전종영
전종영(?~?)의 본관은 강계다. 무예가 뛰어나 창주진첨사가 되었으나 본시 글을 배운 적이 없어 무식하였다. 첨사로 부임한 뒤에 감영(감사의 집무처)과 병영(병영절도사가 있는 곳)에 올리는 보고서를 쓸 수 없어 늘 아쉬운 소리를 하며 군관의 손을 빌려 작성하는 실정이다. 이런 연유로 후에 전종영은 크게 발분하여 글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향리에서 사략 초권을 빌려다 두고 글을 잘 나는 졸병 한 사람을 불러 선생으로 삼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글줄 곁에 그 글자의 뜻과 음을 모두 언문으로 써 놓고 부지런히 외고 썼다. 그는 배운 것은 반드시 다 왼 뒤에야 새로 배웠는데 워낙 열심으로 글을 읽은 덕분에 얼마 안 가서 사략 초권을 떼고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사략 전질을 다 뗐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엔 통감을 읽기 시작하여 전질을 다 읽었다. 기간은 불과 1년 남짓하지만 워낙 억척스레 글을 읽고 나니 이제 상부에 보고하는 공문은 더이상 남의 손을 빌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전종영의 이 결심과 끈기는 그가 평소에 불안해 하고 있던 부족한 점을 거뜬히 해결한 셈이다. 이 때 도암 이재가 어사로서 강계를 순시하기에 앞서 먼저 공문을 보내어 전종영을 미리 대기하게 하였는데 막상 와서 그를 접견해 본 이재는 그 풍채와 기상과 언변을 보고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전종영은 어사가 준 지필묵으로 그 지방의 문제점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그 대책도 조목조목 열거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였더니 어사 이재가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뒤이어 조정으로부텨 숨은 문무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어사 이재는 문인에 유생 황순승을 추천하고, 무인에는 서슴없이 전종영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전종영은 일약 벽동군수로 발탁되고 계속 승차하였다. 한 인간의 결심과 끈질긴 노력이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대를 이어 학업을 연마하여 훌륭한 선비가 된 윤거형
윤거형(?~?)의 호는 송파거사다. 만호(종4품 무관직)로서 영변에 살면서 더이상 높은 벼슬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글읽기를 좋아하고 행동을 바로 하여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칭송을 받고 있었다. 당대에 학문과 인품이 높았던 도암 이재가 암행어사로서 그곳을 순회할 적에 인연이 없어 상면하지 못한 것을 일생의 한으로 여겼다. 윤거형의 아들 윤제세도 아버지를 닮아 학업을 이었다. 윤제세에게 참봉 벼슬이 내려졌지만 이를 받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던 중 도암 이재의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의 원을 아들이 풀어 준 셈이다. 윤제세의 호는 취암이며, 아버지와 함께 평안도 일대에서 선비 중의 선비라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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