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임권이 언제인가 경연에 나아가 아뢰었다. "김안로가 조정에 있게 되자 소인으로서 일정한 주관이 없는 자들이 붕당을 만들어서 못된짓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전하께서 붕당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중종의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니 한 가지를 거론하여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격이다. 만일 임금이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바른 논의를 듣기 싫어한다면 누가 기꺼이 바른말을 발설하여 화의 함정으로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김안로가 나라를 그르칠 줄 미리 알고 걱정하였던 이언적
이언적(1491-1553)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복고, 호는 회재, 자계옹, 자옥산인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름은 이적이었는데, 중종이 언자를 더하도록 명하였다. 중종 8년(151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다. 사간이 되었을 때에 김안로는 유배된 상태에 있은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심언광이 이언적에게 물었다.
"김안로가 소인임을 어떻게 알았소?" "김안로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적에 본인이 마침 경주 훈도가 되었소. 그의 마음가짐과 하는 일을 꼼꼼히 관찰하니 정말 소인의 마음과 모습이었소.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오" 심언광이 화를 내며 조정에서 정식으로 표명하였다. "이 아무개가 조정에 있으면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 얼마 뒤 이언적이 마침내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안로는 조정으로 다시 돌아와 이언적이 자신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듣고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았다. 또 경주 사람으로서 김안로에게 뇌물을 주면서 벼슬을 구한 자가 있었는데, 김안로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이언적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라" 이언적의 친구로 경주에 살았던 진해현감 김세량이 꿈에 이언적을 보았는데, 그가 시를 지어 주었다.
신발을 평상 아래에다 던지고 떠나니 정기는 하늘과 통하네 그려 담담히 한 초가 속에 있다가 혼자 신선봉에서 노니도다
놀라 깨어 그의 아들에게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말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정말로 선생이 죽은 날이었다. 그의 아들 이전인이 귀양지에서 관을 가마에다 얹어 고향으로 모시고 오는데, 관 앞의 길가에 엎드려 있으므로 보는 이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마침 한겨울이라 얼음과 눈이 산에 가득하여 길이 막혔는데 나무꾼들이 흙을 져다가 길에 뿌려 주어 편안히 떠나게 하였다 한다. 시호는 문원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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