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세양
소세양(1486-1562)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언겸, 호는 양곡이며 도사 소자파의 아들이다. 중종 4년(150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갔다. 정언으로 임금을 알현하고 모시면서 현덕왕후의 위호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청하였는데, 말씨가 의분에 차 있으므로 즉시 중종의 윤허를 받기도 하였다.
신광한, 정사룡과는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으며, 이행이 소세양을 가장 칭찬하고 마음을 터놓았다. 그가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다.
"소세양은 당연히 대제학이 되어야 할 인재인데 하위직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정대부에서 자헌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행이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세양이 부모를 봉양하려고 청원하여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이행이 또 아뢰었다.
"문장이 뛰어난 인재를 외직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이 즉시 다시 불러들이도록 명하였다. 벼슬은 판중 추부사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필법은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맑고 한가한 복을 누린 지 20년에 이르르니, 근세에 글 잘하는 사람 치고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이로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소세양이 우찬성이었을 때에 동료였던 상진은 오히려 벼슬이 소세양보다 낮았었다. 그러다가 상징이 정승으로 임명됨에 이르러 학을 그린 두루마리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써 주기를 요청하자 소세양이 한 편의 절구를 써 주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에 강가는 어둠이 깔리고 붉게 시든 여귀꽃은 양쪽 언덕을 음산하게 하네 부질없이 가을 바람을 향하여 옛 짝을 불러보건만 정처 없는 구름과 물 만겹으로 깊숙이 흘러간 줄 모르는구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