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고 중종반정을 도모한 성희안
성희안(1461-151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우옹, 호는 인재이다. 판관이었던 아버지 성찬이 덕천군 이후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희안을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희안을 낳을 무렵 꿈에 신인이 와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짚고 다녀 너의 집안을 번창하게 하라"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태어난 성희안은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종 16년(1485) 21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2년 뒤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면서 동생 희옹과 같이 산 속에서 마를 캐어 아침, 저녁의 제물로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피곤해서 동생과 함께 바위 위에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므로 깜짝 놀라 깨어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안이 즉시 손을 휘두르며 돌을 던져 호랑이를 쫓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효성에 감동되어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종이 그를 불러다 위로하고 새매를 내려 주었다.
"너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를 특별히 내려 주니 사냥하는 도구로 삼으라"
희안이 임금의 은총을 받으면 항상 골수에 새겨 두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기로 다짐하였다. 연산군이 양화도의 망원정에서 놀이할 때에 희안이 이조 참판으로 그 행차에 수행하였다. 연산군이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령하자 희안이 이렇게 지었다.
성상의 마음은 원래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의 경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자신을 은근히 비난하며 풍자하는 내용이라고 하여 몹시 화를 내며 그의 벼슬을 파면하고 기용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음탕하고 포악함이 날로 더 심해져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희안이 매우 분개하며 어지러운 정국을 안정시켜 질서가 있는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뜻이 있기는 하였지만,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박원종이 무사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와 같이 도모하고 싶었으나 만에 하나 뜻이 같은 사이가 아니면 어쩌나 하고 그에게 말을 꺼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우연히도 같은 동리에 사는 신윤무란 사람이 박원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알았다. 희안이 그 사람을 시켜 은밀한 뜻을 시험하게 하였더니 박원종이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울분을 쌓아온 지 오래이다"
희안이 그제야 밤낮으로 원종의 집에 가서 통곡하며 말했다.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된 꼴을 어찌 보기만 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은 마침내 반정할 결심을 하였다. 이조 판서인 유순정이 당시에 인망이 있었고 그도 반정 거사에 참여할 뜻이 있음을 알고서 연산군 12년 9월 2일에 충성심으로 분기한 인사들이 앞장서서 임금을 폐위시켜 연산군으로 삼고, 지성대군을 추대하였다. 그가 곧 조선조 11대 임금 중종이다. 그 뒤 국가를 안정시킨 1등 공신으로 공훈명부에 기록되고 창산부원군에 봉하여졌다. 박원종, 유순정 등과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시킨 뒤에 서로 번갈아 가며 임금을 보필하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반정삼대신이다. 중종이 삼대신을 대우하기를 보통 신하들과 다르게 하여 조정에서 물러 나갈 경우는 그들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문을 나간 뒤에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데, 삼대신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성희안이 노쇠하고 병이 들어 조정에서 물러나올 때에 매우 느린 걸음으로 문에 이르자 중종이 말하였다.
"정승은 성상께서 기립하여 계심을 모르십니까? 걸음걸이가 어찌 그리도 느립니까?"
성희안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늙은 것이 죽을 곳을 몰랐습니다. 옛날 한나라 때 곽씨 일족이 죽음을 당한 화가 곽광이 선제를 모시고 수레를 탄 시점에서 싹텄으니, 신하로서 임금이 두려워하는 위엄을 지니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한 자는 없었습니다"
중종 2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53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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