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권력의 줄다리기 - 클레오파트라 / 명성황후 민비
독사에게 맡긴 육체 - 클레오파트라 고대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던 포토레미 오레테스의 둘째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딸과 아들의 2인 정치를 유언하였고, 당시 궁정 풍습에 따라 오누이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의 음모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추방당하여 그곳의 여왕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포토레미의 군대와 대결하여 장기전에 들어갔고, 로마를 대표한 카이사르가 이를 중재하러 왔다.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힌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앉힌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건만, 여왕의 포로가 된 채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 카이사르는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과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하여금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달라는 법률통과 요청서를 원로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그를 배척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싸시리온과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온다. 카이사르가 죽은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심한 세력다툼을 하게 되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나라 이집트를 손에 넣어보려는 야심을 갖고 클레오파트라를 타르소스로 불러낸다. 기쁜 마음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달려간 여왕에게도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의 힘을 빌어 불안한 이집트 왕위를 지켜보겠다는 야심이었다. 아름다운 용모, 뛰어난 말솜씨에 매혹된 안토니우스 역시 그녀의 포로가 되어 즐거운 나날만을 보낸다. 그들 둘 사이에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들에게 시리아와 알메니아, 메디아와 팔시안스 왕국 등을 지배하게 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로마땅을 이집트 사람에게 맡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로마에 있는 부인(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는 이혼한 상태였다. 옥타비아누스가 드디어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에 반역자로 고발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전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의 북쪽 바다인 악티움에서 로마군과 맞섰으나 이집트 군대는 싸워보지도 않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대패였다. 사기 충천한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해오자 궁지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독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미리 만들어 놓았던 자신의 무덤 속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약 기운이 전신에 퍼져 죽어가는 안토니우스는 이 무덤의 창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덤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도 거절하고 약도 거절한 채. 그러나 그녀가 죽으면 아들도 몰살시키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협박에 잠시 죽음을 단념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전리품으로 로마에 끌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다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종들에게 독사가 든 상자를 가져오게 한다. 여왕은 눈을 지긋이 감고 상자의 뚜껑 밑으로 팔을 집어 넣었다. 혈관 속에 독이 퍼지자 여왕은 그대로 엎어졌다. 기원전 30년 8월 그믐날이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39세의 나이였다. 안토니우스는 유언장에 내가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의 곁에 묻어 달라 고 미리 써두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두 토막난 시신 민비는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어린 나이에(8세) 부모를 잃고 일찍이 혈혈단신이 되었다. 외척 세도정치에 질린 흥선대원군은 민씨의 배경이 미흡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아 그녀를 왕비로 간택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의 비 명성황후이다. 열두 살이던 아들 명복을 왕위에 등극시키고,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은 섭정의 대권을 휘두른다. 여러 가지의 개혁정책으로 사회는 점차 제모습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의 박해 등 그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에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왕비 민씨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 대원군을 축출하는 작업을 추진한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민비가 교묘히 이끌어 내며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을 폐쇄해 버렸다. 대원군은 양주에 물러앉아 정계복귀의 꿈과 증오심을 함께 키운다. 이때부터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와의 정적 관계는 팽팽한 권력의 줄다리기로 치닿는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민비는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한다. 이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위 정척사파와 대원군의 세력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재빨리 궁중을 탈출한 민비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면서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가 버렸다. 그 후 민비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김옥균의 3일 천하)을 장악했지만 청국군의 도움으로 민비는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동학교도 등 농민의 봉기로 정국이 어수선하던 무렵,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야심을 간파한 민비는 친러시아 정책을 쓰면서 일본에 노골적으로 대항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는 대원군에게 민비 암살에 대한 밀서를 보낸다. 대원군은 반대하지 않았다. 민비를 진작부터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측은 대원군을 다시 섭정으로 옹립하고 향후 3년이 지나면 대원군의 손자인 준용을 군주로 삼겠다는 약조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미우라가 잡은 거사 날짜는 1895년 8월 21일이었다. 그날 새벽 3시, 일본 군대와 다른 구경꾼들까지 합세한 폭도들은 대원군을 옹립하고 대궐로 쳐들어갔다. 밤중에 급습을 당한 군졸들은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죽어갔다. 폭도들은 고종 임금과 민비가 자고 있는 건청궁으로 몰려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맞선 궁내대신 이경직은 결국 일본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민비는 사태의 위급함을 보고받고 즉시 복장부터 갈아입었다. 평범한 궁녀의 차림을 하고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민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폭도들 앞에 누군가 이 분이 중전마마예요 라고 소리쳤다. 그 여자는 궁중 출입이 잦은 일본 여자였다. 폭도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민비에게로 달려들었다. 총탄이 튀고 칼날이 번쩍였다. 총탄이 날아 심장을 꿰뚫고 칼이 번쩍이며 몸둥이를 동강내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 국모로서 또 한때는 조선의 전권을 쥐고 호령하던 중전의 어체였다. 그년의 옷을 벗겨라. 누군가 소리치자 중전은 알몸이 되었다(일설에 의하면 고종의 육체를 사로잡은 요부라하여 민비의 하문에 칼날을 꽂아 차마 볼 수 없도록 찢어놓았다고 함). 일본인드은 죽은 민비의 시신을 이불에 둘둘 말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버렸다. 이 만행을 우리는 을미사변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4세에 죽은 민비는 24년이 지나서야 겨우 남편인 고종의 곁에 묻힐 수 있었다.
클로오파트라와 민비는 39세와 44세의 한창 나이로 비명에 갔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외부의 세력을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동생과 대결한 클레오파트라, 시아버지와 맞선 며느리 민비는 집안 싸움에 외부의 세력을 개입시켜 결국은 대세를 그르치고만 권력지향적인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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