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투신자살한 작가들 - 버지니아 울프 / 굴원 / 셀리 / 태재치
우즈강에 몸을 던지 - 버지니아 울프 3월이라지만 아직은 춥고 쌀쌀한 영국의 봄날, 1941년 3월 28일. 버지니아 울프는 모자와 지팡이를 나란히 우즈강 언덕에 남겨놓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고서 찬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살아나오지 못했다.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기도 했지만 자살은 번번이 실패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머니가 터지도록 돌멩이를 넣었던 것이다. 59세를 살다 간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저명한 작가였고 어머니도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우수한 머리와 문학적 재질을 물려받은 버지니아 울프.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옥스퍼드나 캠프리지 등의 명문대학교에 여성 입학이 금지된 것에 충격을 받아 후일 여권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몇 차례의 자살을 기도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 고 말하듯 13세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충격과 연이은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사촌이던 조지에게 당한 성적 충격이 그를 정신질환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성적 불감증이 된 그녀와 원만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남편 레오나드는 울프의 영혼을 따뜻이 감싸 주고 후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남김 울프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다시 정신이 이상해져감을 느낍니다. 또 한번, 그 참혹했던 시절을 반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마 회복이 안될 거예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신 분입니다. 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생략).
울프의 익사체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나서였다. 그녀의 남편 레오나드는 시체를 거두어 화장한 뒤, 멍크스하우스 정원밖에 있는 커다란 느릅나무 밑에 그녀의 재를 묻었다. 그리고 묘비명에는 울프의 소설 <파도>의 마지막 구절을 새겨 넣었다.
너에게 대항하여 굽히지 않고 단호히 나 자신을 내던지리라. 죽음이여!
자의식이 선택한, 실로 단호한 죽음이었다. 때로는 심하게 덮치는 우울증과 정신발작의 광기를 억누르고 그녀는 저항운동가로, 여권운동가로, 훌륭한 작가로 59년을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멱라강에 투신한 - 굴원
초나라 굴원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의 절이 탄생되었으니 단오절이 바로 굴원이 죽은 날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똑같은 나이 59세에 굴원도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5월 5일이었다. 그는 초나라 왕족으로서, 견문이 넓고 치란에 밝아 26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벼슬이 높았다. 굴원은 회왕으 명으로 헌령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 되기도 전에 상관대부가 이것을 빼앗으려 하자 굴원은 거절하고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상관대부의 참소를 입고 끝내는 회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파직되었고 왕은 점차 그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진, 제, 초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굴원은 친제공진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마침 굴원이 쫓겨나게 된 것을 안 진나라 임금이 장의를 시켜 제나라와 국교를 끊도록 만들어놓고 초나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까지 기습해 왔다. 속은 것을 안 회왕이 잘못을 뉘우치고 철저한 친제파이던 굴원을 다시 불러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는 다시 중용이 되어 초나라의 삼려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회왕은 진의 계략에 빠져 친진파들의 참언으로 충간하던 굴원을 내쫓고 만다. 결국 회왕은 어리석은 아들 자란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회왕의 장자, 경양왕이 그의 뒤를 잇고 아우 자란이 영윤이 되었다. 굴원은 자란을 미워하다 비록 방축되었지만 초나라를 걱정하고 회왕을 그리워하며 다시 조정에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그의 직언을 꺼리던 경양왕은 진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자, 그를 강남으로 방축해 버렸다. 수 년간 울분으로 비분 강개하다가 <어부사>를 쓰고 경양왕 14년(기원전 285), 굴원은 59세를 일기로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그가 주은 5월 5일에는 쭝즈(종자)라는 떡을 만들어 먹고 뱃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비통한 굴원의 죽음에 그를 애도하는 초나라 사람들이 죽통에 쌀을 담아 강물에 던지는 것은 교룡에게 그걸 먹고 굴원의 시체를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단오날을 시인절로 정하여 갖가지 문학행사를 하면서 굴원의 시정신을 문학적 지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회사> 돌을 품에 안다 라는 시 끝 구절에
세상 혼탁하여 날 알아 주는 이 없고 사람의 마음 일깨울 수 없어라. 죽음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애석히 여기고 싶지 않아라. 분명 세상 군자들에 고하노니 나는 그대들 본보기 되리라.
이것이 그가 죽고자 한 뜻이었다. 이 시를 절필로, 그는 불의에 굽히지 않는 본보기가 되려고 스스로 죽는다고 했다. 다 같은 익사이지만 각기 처해진 입장과 심경은 모두 이렇게 달랐다. 특히 굴원의 문학은 망국을 슬퍼하는 여말의 목은, 야은, 포은 등 우국충정한 신하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동병상련의 감회를 그들은 시로써 나눈 것이리라.
폭풍우가 데려간 - 셀리
셀리는 이백이나 굴원, 태재치나 울프처럼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사고사였다. 친구와 보트를 타고 스페치아만을 항해하는데 폭풍우가 덮쳐 순식간에 그를 데려간 것이었다. 그때의 나이 29세였다. 그도 버지니아 울프처럼 영국의 명뭔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티모디 셀리는 국회의원이었고 셀리도 준남작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엉뚱하고 반항적이며 자유분방한 기질을 나타내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교실에서 접시에 담은 알코올에 불을 붙여 파아란 불꽃을 보며 그는 주문을 외운다. 공기와 물과 불의 악마들이여! 내가 너희들을 불러내노라. 선생이나 학생들은 미치광이 셀리라 불렀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친구와 <무신론의 필요성>이란 책을 출간하여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다. 19세 때였다. 집에서 배척을 받고 가출한 그는 여관집 딸 헤리어트와 아일랜드로 도망을 갔다. 그들은 2년 뒤에 애기를 안고 돌아왔다. 셀리는 급진주의자인 윌리엄 고드원을 만나 곧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그의 딸 메리와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남녀가 이번에는 스위스로 도망을 쳤다. 그 소식을 안 헤리어트는 자살을 해 버렸다. 급진주의자다운 빠른 템포로 셀리는 여러 가지의 일을 저질렀다. 장인의 소송에 의해 그는 1818년 이탈리아로 쫓겨간 후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궁핍과 가정적인 불행 속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셀리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 바이런, 키츠 등과 어울렸다. 키츠는 이태리를 여행하다 3개월만에 로마에서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셀리는 추모시 아도네스 를 썼다. 그런데 우연인가 키츠가 누워 있는 로마교외의 묘지에 셀리도 와서 묻히게 된다. 불과 4개월 뒤였다. 키츠는 26세, 셀리는 29세였다. 셀리의 시체가 지중해의 해변가로 떠올랐을 때, 바이런이 다리를 절며 단숨에 달려왔다. 둘은 평소에도 통하는 데가 있었으며 공통점이 많았다. 바이런은 남쪽 해안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셀리의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지폈다. 셀리는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이탈리아의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바이런마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 격전지인 미서롱지에서 열병으로 죽자 그도 한 줌의 재가 되고 만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로마와 그리스에 와서 객사하였다. 셀리가 죽기 전에 쓴 서풍에 부치는 노래 는 언필칭 그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무덤 속의 송장들처럼 차가운 곳에 누워 있게 하는 오! 너 서풍!
자살할 수밖에 업슨 사람 - 태재치
태재치에 대해 쓰려고 그의 이름을 뇌어보니 37년 전, 예전 그대로의 그리운 정감이 솟아난다. 내가 대학 초년새이던 1960년 무렵, 전후문제 작품집이 쏟아져나오고 일본의 작가 하라다 야스꼬의 <만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등 일본소설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태재치의 <사양>에 매료되어 있었다. 특히 시인이던 신동문씨의 문장은 너무도 아름다워 숨막히는 순간의 절망의 미를 그대로 우리에게 옮겨 주었다. 1964년으로 기억되는 가을, 무교동의 어느 대폿집에서 우연히 다자이(태재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고은씨가 나를 신동문씨에게 소개해 주었다. 다자이를 몇 번이나 읽었습니까? 그의 첫 마디였다. 그리고 이어령씨와 동창인 그의 아내 진여사는 다섯 번인가를 읽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다자이의 혼이 씌인 듯 우에하라 선생의 키로칭 을 흉내내며 실컷 떠들고 웃고 마셨다. 함께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신의 몫을 저마다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삶이 힘들고 괴로웠던 때였으니까. 힘에 닿지도 않는 실력이나, 욕심으로 나는 다자이의 소설을 모두 일어본으로 구했다. 특히 그의 유서나 다름없는 <사양>이나 <인간실격>은 마치 죽은 동생의 일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도 나는 소중히 지니고 있다.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든 다 옮겨올 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뭉크의 그림같이 유혼이 되어 떠다니던 때의 모습. 몰락한 전후 고아 가즈꼬(사양의 여주인공)처럼 나도 그때 허허벌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오지의 유서를 그때 읽고 또 읽었다. <인간실격>의 요오조오나 <사양>의 나오지는 바로 태재치 자신의 모습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내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여서 때로는 거울을 보는 듯한 전율마저 느끼며 그 유서르 거듭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누님. 안되겠어요. 먼저 가요.(생략)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태양 속에서는 살기 어렵습니다. 살아가기에는 어딘지 한 군데 모자라는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큰 노력이었습니다.(생략) 강한 세력에 밀려서 지지 않으려고 마약을 쓰며 미치광이가 되어가지고 저항했습니다.(생략) 나는 집을 잊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머님의 착하심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님에게 냉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저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생략) 누님. 믿어 주십시오. 나는 놀기만 하였지만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쾌락의 임포텐츠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오직 귀족이라는 자신의 헛도깨비에서 이탈하고 싶어서 놀고 미치고, 거칠어진 것입니다.(생략) 누님. 나에게는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입니다.(생략) 어젯밤의 술도 말짱히 깨었습니다. 나는 맨정신으로 죽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안녕하십시오. 누님. 나는 귀족입니다.
다자이 오사무(태재치), 그는 일본 본토 북쪽 끝에 있는 아오모리껭에서 출생하였다. 동경대 불문과에 다녔으며, 집안은 귀족의 명문가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대단한 부자였다. 1909년에 태어나서 1948년에 죽었으니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였다. 그는 41세의 나이로 자살을 했는데 정말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그가 문단에 나온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암담과 혼돈의 시대였다. 형식적으로는 틀의 개혁을 시도하고 내면적으로는 현실부정의 반속정신을 표방했지만 그가 지닌 주체의 연약성과 그의 시도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사회정세로 말미암아 그의 의도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패배는 창작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까지 뿌리채 뒤흔들어 놓았다. 말하자면 인간에 실격한 셈이었다. 순수한 그에게 문학과 인생이란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일종의 자학적인 도전, 그러한 그의 행위는 마치 불나방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학이 생활에 옮겨와 그는 마약에 손을 대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정사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벽이 창작에서는 야릇한 결과를 빚어냈다. 퇴폐적인 미를 형성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몰락한 귀족의 고귀한 패배의 미를 탐구한 <사양>, 자존보다도 비굴, 진실보다도 허구를 통해서 오히려 실존과 진실을 탐구한 <인간실격>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전후 일본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긴자의 여급과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혼자만 살아 남았고, 두 번째는 초대라는 여자와 수상온천에서의 자살미수. 세 번째는 산기부영과 손을 잡고 옥천상수에서 뛰어내렸다. 세 번째 가서야 그는 정말로 죽을 수 있었다. 태재치의 정사는 마음 아프다든지 슬프다고 말하기보다는 더 한층 견딜 수 없이 암연한 생각을 문학에 종사하는 우리들에게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생전의 그의 소설이 나타내고 있던 세계의 해명을 몸으로써 증명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정사, 그 자체가 태재치가 원했던 최후의 무도이었던 것만 같다. 이러한 감개를 실감한 사람은 나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를 좋아하던 촌송정효의 소감이다. 태재는 아꾸다가와(개천)가 생애의 끝판에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라고 말한 사람은 복전이란 작가였다. 10여 년 전, 태재에 관해 메모해 두었던 공책은 이랬다. 태재치와 개천 = 자살 직전 둘다 신경쇠약, 태재치 정신병원 입원 태재치와 보드레르 = 마약, 광기, 자살기도. 태재치와 김소월 = 아편, 자살실행. 그리고 41세, 폐결핵, 마약, 정신병원, 객혈. 태어나서 미안해요. 어디선가 그의 길다랗고 하얀 얼굴이 나타나 히죽이 웃으며, 이 말을 거네올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