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1. 위장군, 표기열전(衛將軍, 驃騎列傳)
변방의 요새를 지키고 하남(河南)을 넓혔으며 기련산의 적을 무찌르고 서역(西域)으로의 길을 열었으며 북방의 흉노를 압도했다. 그래서 제51에 <위장군, 표기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은 평양(平陽:山西省 臨汾縣) 출신이다. 부친의 이름은 정계(鄭季)인데 관리 시절에 평양후(平陽侯)의 집에서일하고 있다가 평양후의 비첩 위온과 밀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청(靑)이다. 청의 동복형으로는 위장자(衛長子)가 있으며 누나는 위자부(衛子夫)이다. 위자부는 평양공주(平陽公主:孝武帝누님, 平陽侯夫人)를 모시다가 효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청도 위씨 성을 사용하는 게 유리하겠다 싶어 위청이 된 것이다. 위청의 자는 중경(仲卿)이고 형인 위장자의 자는 장군(長君)이며 장자의 모친을 위부인(衛夫人), 장녀를 위유(衛孺), 차녀를 위소아(衛少兒), 삼녀가 즉 위자부이다. 훗날 자부의 남동생 보광(步廣)도 위씨 성을 가졌다.
위청은 평양후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다가 소년이 되어 부친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에게 양을 치게 했다. 그러나 부친의 정실 자식들은 모두 청을 노예로 취급해 아예 형제의 수효에도 넣지를 않았다. 그만큼 그는 구박을 받고 성장했다. 한때 청이 어떤 사람을 따라 감천궁(甘泉宮)의 감옥으로 갔는데 죄수 한 사람이 가만히 청을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귀인의 상(相)이다." "예에?" "벼슬은 후작에 봉해질 것이야." "관상을 보십니까?" "자중하여라." 죄수 주제에 남의 관상을 보아주니 청은 웃음이 나왔다. "남의 노예로 태어났으니 매질이나 당하지 않고 욕지거리나 먹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제 처지에 어떻게 후작에까지 봉해지겠습니까." "두고 보게나." 청이 자라자 평양후 집안의 기사(騎士)가 되었으며 평양공주를 모시게되었다. 건원(建元) 2년 봄이었다. 청의 누나 위자부가 효무제의 총애를 받아 궁중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당읍후(堂邑侯) 진오(陳午)의 부인이 된 대장공주(大長公主:효무제의 숙모)의 딸로서 자식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질투심이 많았다. 더구나 대장공주는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다는 사실을 딸인 왕후로부터 전해 듣고는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위자부의 소생이 태자가 되도록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누구부터 제거해야 일이 편해질 수 있을까." "그녀의 동생 위청입니다." "잡아들여라." 위청은 그때 건장궁(建章宮:上林苑 가운데에 있는 宮)에서 말단으로 일하고 있었다. 미미한 인물이라 위청은 대장공주의 무사들에게 속절없이 잡혀 끌려 갔다. "무어? 위청이 죽게 되었다고?" 친구인 기랑(騎郞:侍從武官) 공손오(公孫敖)가 그 소식을 들었다. "여인의 하찮은 질투 때문에 친구를 죽게 할 수는 없다. 가서 뺏어오자." 공손오는 장사들을 데리고 즉시 달려가서 위청을 빼앗아 왔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것이다. 위자부가 눈물로써 황제에게 간했다. "동생의 지위가 미미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위청에게 즉시 건장궁의 호위(護衛) 겸 시종장(侍從長)으로 임명했다. 뿐만 아니라 위청의 동복 형제들까지도 모조리 고귀한 지위에 올려, 단 며칠 동안 그들에게 내린 상사(賞賜)가 수천 금이나 되었다. "친정이 허약하면 내가 오래 버틸 수 없다." 위자부가 위청에게 말했다. 위청의 맏누님 위유는 태복(太僕:輿馬를 주관하는 大臣) 공손하(公孫賀)의 아내가 되었고, 둘째누님 위소아는 본래 진장(陳掌)과 사통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황제는 진장을 고위에 오르게 했다. 공손오는 위청 구조에 지대한 공이 있었으므로 더욱 더 존귀하게 되고, 위자부는 부인으로 올랐고, 위청은 태중대부(太中大夫:궁중고문관)가 되었다.
원광(元光) 5년이었다.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상곡군(上谷郡)에서 출격하고, 태복 공손하는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운중군에서 출격하고, 태중대부 공손오는 기장군(騎將軍)이 되어 대군(代郡)에서 출격하고, 위위(衛尉:禁衛隊長) 이광(李廣)은 효기장군(驍騎將軍)이 되어 안문군에서 출격했는데 각 군단은 1만 기로 편성되었다. 이때의 싸움에서 위청은 용성까지 진출해 수백의 적을 참수하고 많은 포로를 얻었다. 기장군 공손오는 7천 기를 잃었다. 위위 이광은 사로잡혔다가 돌아왔다. 패전장군 두 사람은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공손하는 아무 군공이 없었다. 원삭(元朔) 원년(元年) 봄에 위부인이 남아를 분만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 해 가을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안문군에서 3만 기로 출격해 흉노 수천 명을 참수하고 또는 포로를 얻어 왔다. 그 이듬해 흉노가 요서군으로 침입해 태수를 살해하고 어양군 백성 2천여 명을 잡아갔으며, 장군 한안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한의 반격이 취해졌다. 장군 이식(李息)을 시켜 대군에서 출격케 하고, 거기장군 위청을 시켜 운중군에서 출격해 서쪽 고궐(高闕)로 진격하여 드디어 하남 일대를 공략한 뒤 농서군(농西郡)에 도달했다. 참수한 적과 포로가 수천 명, 가축 또한 수십만 마리를 얻었다. 백양왕(白羊王), 누번왕(樓煩王)을 패주시키고 드디어 하남 땅에다 삭방군(朔方郡)을 두었다. 돌아오자 황제는 위청에게 3천8백 호를 봉해 장평후(長平侯)로 삼았다. 위청의 부하인 교위 소건(蘇建)도 군공이 커서 1천1백 호의 봉을 받고 평릉후(平陵侯)가 되었으며, 그를 시켜 삭방성을 축조케 했다. 위청의 부하 교위 장차공(張次公)도 군공이 있어 봉을 받아 안두후(岸頭侯)가 되었다. 효무제는 이때 이런 조칙을 내렸다.
-흉노는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며 장정들을 혹사하고 늙은이를 학대하며 또한 도적행위를 일삼아 여러 오랑캐들을 속이고 모략을 꾸며 그들 병력으로 자주 변경을 침해한다. 그래서 장수를 파견해 그들의 죄를 쳤다. <시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지 않던가. 험윤을 쳐서 여기 태원(太原)에 이르렀네. [<詩經> {小雅} '六月篇'] 수레 소리 쿵쾅쿵쾅 저 삭방(朔方)에도 성을 쌓네. [<詩經> {小雅} '出車篇'] 지금 거기장군 위청이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고궐에 이르러 수급과 포로를 얻은 것이 2천3백 리, 전차, 치중(輜重), 가축 또한 모조리 노획했다. 위청은 이미 열후로 봉을 받았지만 드디어 서쪽으로 하남 일대를 평정하고 유계(楡谿:楡林山의 계곡)의 옛 요새를 탐색한 뒤 재령(梓嶺:섬서성)을 넘어 북하(北河:九原 印의 황하)에 다리를 놓고 포니(蒲泥:地名, 所在不明)를 치고 부리(符離:만주 요녕성 옛 豊州城 북서쪽)를 격파해 적의 정예병을 베고 복병, 정찰병을 잡은 것이 3천71명, 또 포로를 심문해 많은 적을 사로잡고, 1백만 두 이상의 소와 말, 양을 몰아오며 우리 병사에게 손실도 입힘이 없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래서 위청에게 3천 호를 더 봉한다.
그 이듬해 흉노가 대군으로 침입해 태수 공우(共友)를 살해하고 안문군으로도 침입해 백성 1천여 명을 잡아갔다. 흉노는 그 이듬해에도 다시 대군, 정양군, 상군으로 침입해 백성 수천 인을 살해 혹은 납치해 갔다. 그 이듬해인 즉 원삭 5년 봄에 한에서는 거기장군 위청에게 3만 기를 주어 고궐에서 출격케 했다. 위위 소건을 유격장군으로 삼고, 좌내사(左內史:수도권 동부대신) 이저(李沮)를 강노장군(彊弩將軍)으로 삼고, 태복 공손하를 기장군으로, 대국(代國)재상 이채(李蔡)를 경거장군으로 삼아 모두 거기장군의 지휘 아래 일제히 삭방군에서 진발(進發)케 했다. 또 대행(大行:특파大使) 이식과 안두후 장차공을 장군으로 삼아 우북평에서 진발케 하여 흉노 대공략에 들어갔다. 흉노의 우현왕은 위청 등의 군단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한군이 설마 여기까지야 쳐들어 오겠는가 생각하고 술에 취해 있었다. 한밤중에 우현왕은 한군에게 포위되었다. "뭐야? 한군이 여기까지 쳐들어 왔다고!" 혼비백산한 우현왕은 야음을 틈타 용맹스런 병사 수백 명과 애첩 하나만을 데리고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해 북방으로 달아났다. 한의 경기교위(輕騎校尉) 곽성(郭成) 등이 수백 리나 뒤쫓았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우현왕 배속군의 소왕(小王) 10여 명과 남여 1만5천 명, 가축 수백 만 마리를 획득해 요새로 돌아왔다.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사자에게 대장군의 인수(印綏)를 진중으로까지 들려보내 장군 위청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시켰다. 여러 장수들은 군사를 인솔한 채 대장군의 지휘 밑에 있게 되었고, 위청은 대장군의 칭호를 달고 수도로 개선했다. 황제가 위청에게 말했다. "대장군 위청은 자신이 거느린 군사로 대승을 거두어 흉노왕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소. 위청에게 6천 호를 증봉하는 동시에 아들 강(伉)은 의춘후(宜春侯)에, 아들 불의(不疑)는 음안후(陰安侯)에, 아들 등(登)은 발간후(發干侯)에 봉하겠소." 위청은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폐하. 신이 다행히도 대장으로 임명돼 오로지 폐하의 신령하심에 힘입어 한군이 대승한 것일 뿐입니다. 더구나 여러 교위들이 역전분투한 덕택이라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신에게 기왕에 증봉해 주셨거늘 강보(襁褓)에 싸여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한 일도 없는 자식에게까지 땅을 갈라 봉하시는 바는 지나친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졸들에게 힘껏 싸우라고 권장하는 본뜻이 아니옵니다. 삼가 세 아들에게 내리시는 봉은 거두어 주십시오." "어디 짐인들 여러 교위들의 공훈을 잊었겠소. 물론 이제부터 행상(行賞)을 하려 하오." 황제는 어사대부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호군도위 공손오는 세 차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공격해 언제나 군을 호위하고 교위를 거느려 흉노의 왕을 포로로 잡았다. 1천5백 호를 공손오에게 봉하여 합기후(合騎侯)로 삼는다. 도위 한열(韓說)은 대장군을 따라 유혼(몽고의 항하 북서안)에서 출격해 흉노 우현왕 본영으로 박두하고 대장군의 지휘 밑에서 흉노왕을 사로잡았다. 1천3백 호를 한열에게 봉하여 용액후로 삼는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흉노왕을 잡았다. 1천3백 호를 공손하에게 봉하여 남교후(남포후라고도 함)로 삼는다. 경거장군 이채는 재차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왕을 잡았다. 1천6백 호를 봉하여 낙안후(樂安侯)로 삼는다. 교위 이삭(李朔), 교위 조불우(趙不虞), 교위 공손융노(公孫戎奴)는 각각 세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서 흉노왕을 잡았다. 각 1천3백 호씩을 봉하여 각각 섭지후, 수성후(隨成侯), 종평후(從平侯)로 삼는다. 장군 이저와 이식, 교위 두여의(豆如意)에게도 군공이 있으므로 작위는 관내후(關內侯)를 주고 각각 식읍으로 3백 호를 내린다.
그 해 가을 흉노가 대군(代郡)으로 침입해 도위 주영(朱英)을 살해했다. 그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이 정양(定襄)에서 출격할 때 합기후 공손오는 중장군(中將軍), 태복 공손하는 좌장군, 흡후(翕侯) 조신(趙信)은 전장군, 위위 소건은 우장군, 낭중령 이광이 후장군, 좌내사 이저는 강노장군이 되어 모두 대장군에게 소속되었다. 그때 출전에서 적의 수급 수천을 베고 귀환했다. 한 달 남짓 휴식한 후 다시 정양에서 출격해 참수 혹은 포로 1만여를 얻었다. 그러나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의 합친 군대 3천여 기가 선우의 군대와 단독으로 만난 것이다. 하루 종일 교전한 끝에 한군은 거의 전멸하기에 이르렀는데, 본래 흉노인이었던 전장군 조신은 한에 귀순해 흡후가 된 자였다. 그가 위급하게 된 상황에서 흉노는 그를 투항하도록 권유했다. 조신은 드디어 패잔병 8백 명 가량을 이끌고 흉노에 투항해 갔다. 우장군 소건은 군사를 완전히 잃고 단신으로 도망해 대장군한테로 돌아왔다. 대장군은 군정(軍正:軍法務官) 굉, 장사(長史:참모장) 안(安), 의랑(議郞:고문관) 주패(周覇) 등에게 소건의 죄를 자문해 보았다. 주패가 대답했다. "대장군께선 출정한 이래로 아직까지 비장(裨將:副將)의 목을 벤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소건은 제 군사를 버리고 왔으니 그의 목을 베어 장군의 권위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자 굉과 안이 반대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 '적은 병력으로 굳게 지켜도 끝내 큰 군사에게 사로잡힌다[<孫子> '謀攻篇']'고 돼 있습니다. 이번에 소건은 수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선우 병력과 하루 종일 분전하다가 그의 사졸은 비록 전멸했지만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자진해서 귀환했는데도 그를 벤다는 것은 이후로는 귀환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그를 베어서는 안 됩니다." 대장군 위청은 곰곰 생각한 뒤에 말했다. "나는 운좋게도 천자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장군에 등용되었다. 불초한 사람이 군의 요직을 맡아 황공해 하고 있다. 그러니 위엄이 서지 않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패는 내 직책의 권위를 위해 그를 참하라 하나 내 뜻과는 사뭇 다르다. 내 직책이 부장들의 목을 벨 수는 있지만 내가 폐하의 은총을 받으면 받을수록 국경 밖에서 더욱 내 마음대로 사형을 내리고 싶지 않다. 상세히 보고하여 천자께 책임을 돌리면 천자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게 아닌가. 이렇게 함으로써 신하된 자로 감히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을 보여드리게 되는 것이니 그것 또한 옳지 않은가." 군관들이 모두 좋아해서 대답했다. "그것이 좋겠습니다." 위청은 소건을 죄수로 만들어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낸 뒤 요새로 철수해 전투를 종식시켰다.
이 해에 대장군 위청의 누님 아들 곽거병이 효무제의 총애를 받아 18세의 나이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란한 곽거병은 두 차례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다. 대장군은 조칙을 받고 곽거병에게 병사를 나누어 주어 표요교위(剽姚校尉)로 삼았다. 그랬더니 곽거병은 날래고 용감한 8백 기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적을 목베고 또 포로로 잡아왔다. 황제는 기뻤다. 그래서 이런 조칙을 내렸다.
-표요교위 곽거병은 참수, 포로가 2천28명이며 그 중 흉노의 상국(相國)과 당호(當戶:흉노의 高官名)도 포함되었고 선우의 할아버지뻘[大父行]인 적약후 산(産)도 목베었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비(羅姑比)도 사로잡았다. 그 군공이 전군에서 으뜸이다. 곽거병에게 1천6백 호를 봉하여 관군후(冠軍侯)로 삼는다. 또 상곡군 태수 학현은 네 차례 대장군을 따라나가 2천여 명을 참수, 포로로 했다. 그에게 1천1백 호를 봉하여 중리후(衆利侯)로 삼는다.
그러나 그 해에는 대장군 위청의 군공이 적은 해였다. 두 장군의 군사를 잃은데다 조신까지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증봉이 없었다. 소건은 압송되어 왔으나 황제는 그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용서했으며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대장군이 돌아오자 황제는 1천 금을 내렸다. 즈음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은 왕부인(王夫人)이었다. 영승이라는 사람이 위청에게 귀띔했다. "장군께서는 그다지 큰 공로도 없이 1만 호의 식읍을 차지한데다 세 아들들마저 후작이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위황후가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왕부인께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족은 부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이번에 다시 1천 금을 하사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하사받은 돈으로 왕부인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해 주심이?" 그 말을 들은 위청이 무릎을 쳤다. "옳거니!" 위청은 5백 금으로 왕부인 모친의 장수를 축원했다. 황제가 그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위청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다. 위청은 사실대로 말했다. 황제는 영승을 불러 동해군(東海郡) 도위(都尉)로 삼았다. 장건(張騫)은 일찍이 대하(大夏:박트리아)로 사신갔다가 흉노에게 억류되어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대장군을 따라 원정갔다가 당시의 경험을 살려 군대를 좋은 물과 초원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다녔기 때문에 군사들은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그 공을 인정하여 박망후(博望侯)에 봉했다. 관군후 곽거병이 후작이 된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원수(元狩) 2년 봄, 그는 표기장군이 되었다. 그가 1만 기를 이끌고 농서에서 출격해 큰 군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황제는 말했다. "표기장군은 병사를 이끌고 오려산(감숙성 蘭州市 북동쪽)을 넘어 속복부족을 치고 호노강(狐奴江)을 건너 오왕국(五王國)을 거쳐 겁먹고 떠는 병사들을 버려둔 채 엿새 동안 선우의 아들을 잡기만을 바라며 돌아다니면서 싸웠다. 연지산(焉支山)을 지나 천 리를 더 진진해 단병접전으로 싸워 절란왕(折蘭王)을 죽이고 노호왕(盧胡王)도 베었으며 전군을 짓밟아가며 혼야왕과 그 아들 및 상국과 도위 등 참수와 포로 8천여 명에다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내 때 사용하는 금상(金像)까지 얻어왔다. 이에 곽거병에게 2천 호를 증봉한다."
그 해 여름 곽거병은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북지군에서 진출해 길을 달리해 가서 적을 쳤다. 박망후 장건과 낭중령 이광은 우북평으로 출격해 역시 길을 달리해 가서 흉노를 쳤다. 이광은 4천 기를 거느리고 먼저 떠났고 장건은 1만 기를 거느리고 뒤에 있었다. 흉노의 좌현왕이 수만 기를 이끌고 이광의 군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를 이틀, 한군이 흉노 1만을 죽이면서도 이쪽 전사자 역시 절반이 넘고 있었다. 장건이 도착하자 흉노군도 퇴각했다. 그러나 행군을 머뭇거린 죄로 참형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풀려나 서민이 되었다. 한편 곽거병은 북지군에서 진출해 적진 깊이 침입한 뒤로는 공손오와 길이 어긋나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곽거병이 그대로 거연(居延)을 지나 기련산에 이르렀을 때쯤은 적을 참수하고 포로롤 얻은 것이 대단히 많았다. 돌아왔을 때 황제가 칭송했다. "곽거병은 거연을 넘어 소월지국(小月氏國:월지족이 서진하여 大月氏國을 세웠을 때 그대로 감숙성 서쪽에 남은 자들이 세운 나라)을 통과하여 기련산을 공격해 추도왕을 사로잡았으며 이때 무리지어 투항한 자가 2천5백이었고 참수된 자와 포로가 3만2백 명, 5인의 왕과 그들의 모친, 선우의 연지, 왕자 59명, 상국, 장군, 당호, 도위 63인을 잡았다. 거기에 비해 한군은 10분의 3을 잃은 데 불과했다. 곽거병에게 5천 호를 증봉한다. 교위로서 곽거병을 따라 소월지국으로 출정한 자는 좌서장(左庶長)의 벼슬을 내린다. 또 응격사마(鷹擊司馬) 조파노는 두 차례 표기장군을 따라가 속복왕을 베고 계저왕(稽且王)과 천기장(千騎將)을 잡고, 왕과 왕의 모친 각각 1인, 왕자 이하 41인을 잡았다. 포로가 3천3백30인, 그의 전위군은 포로 1천4백 인을 잡았다. 조파노에게 1천5백 호를 봉하여 종표후(從驃侯)로 삼는다. 또 흉노의 구왕(句王)으로 귀순한 교위 고불식(高不識)은 표기장군을 따라 호우도왕(呼于屠王)과 왕자 이하 11인을 잡고 포로 1천7백6십8인을 얻었으니 고불식에게 1천1백 호를 봉하여 의관후(宜冠侯)로 삼는다. 또 교위 복다(僕多)도 공로가 있으니 휘거후(煇渠侯)로 삼는다."
공손오는 행군이 지체되어 곽거병과 합류치 못해 그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한나라의 여러 노장들이 인솔한 병마(兵馬)는 언제나 그 공훈이 곽거병보다 못했다. 그것은 곽거병이 항상 정예병들만 골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용감했으므로 항상 선봉장이 되어 진격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언제나 천행(天幸)이 따라 단 한 번도 궁지에 몰린 적이 없었다. 그에 비해서 여러 노장들은 항상 행군이 지체되는 죄를 입어 불우했다. 이렇게 되니 표기장군 곽거병은 더더욱 황제의 신임을 입고 존중되어 대장군에 비견할 만하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선우는 표기장군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잃은 혼야왕에게 분노한 나머지 잡아 주살하려고 했다. 이에 놀란 혼야왕은 휴도왕과 공모해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했다. 그래서 가만히 변경으로 사자를 보내어 한나라의 의사를 타진했다. 이때 한나라의 대행(大行:특파大使) 이식이 황하 가에서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가 혼야왕이 보낸 사자를 만났다. 이식은 곧 역전마를 달려 혼야왕의 뜻을 조정에 알렸다. "혼야왕이 거짓으로 항복해 와서 변경을 급습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표기장군에게 군사를 인솔해 가게 해서 그 자들을 맞아오면 안심이겠다." 황제의 밀명이 떨어지자 곽거병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혼야왕들을 맞으러 나갔다. 그러나 혼야왕의 비장들 중에서는 한군에게 투항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많았다. "저놈들 보게! 도망하는 자들은 무조건 베어라!" 그래서 곽거병은 군사를 독려해 혼야왕의 진중으로 달려들어 도망하는 자들은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 숫자가 8천이었다. 곽거병은 혼야왕을 찾아 우선 황제의 행재소로 보낸 뒤 혼야왕의 군사를 수습해 황하를 건너 돌아왔다. 그때 투항한 흉노 군사는 수만이었으며 말하기를 10만이라 했다. 일행이 장안으로 도착하자 황제는 수십만 금을 상으로 주었다. 혼야왕에게는 1만 호를 봉해 탑음후로 삼고 그의 비왕(裨王:副王) 호독니(呼毒尼)를 봉해 하마후로 삼고 응피를 휘거후(煇渠侯), 금리를 하기후, 대당호 동리(銅離)를 상락후(常樂侯)로 삼았다. 그런 후 황제는 특별히 곽거병을 가상히 여겨 이렇게 말했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끌고 흉노를 공격해 서역(西域)의 왕인 혼야왕 및 그의 병사와 군사들을 모두 이쪽으로 투항케 했다. 장군은 적의 군량을 끌어다가 아군의 식량을 대었으며 투항한 궁수 1만 명을 통솔해 영악하고 거칠게 맞서는 자를 8천이나 목베고 사로잡았다. 이국의 왕을 32명이나 투항시키면서도 우리 군사는 부상자도 없이 흉노 병사 10만을 감복 복종케 했다. 그동안 정벌하느라 노고가 많았지만 이제부터 황하 유역의 요새 근방에서는 근심이 사라지고 평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1천7백 호를 표기장군에게 증봉한다." 그런 후 농서군, 북지군, 상군의 수비병 숫자를 절반으로 줄이고 부역을 경감시켰다. 또 항복한 자들을 변경 5군인 농서, 북지, 상군, 삭방, 운중 즉 요새선 밖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이 이주한 곳은 모두 하남이었으며 투항자 본시의 습속대로 살게 해 속국으로 삼았다. 이듬해 흉노는 우북평, 정양으로 침입해 한의 백성 1천 이상을 죽이고 납치해 갔다. 이듬해 황제는 여러 장군들과 대책회의를 가졌다. "적에게 투항한 흡후 조신은 선우에게 획책해 말하기를 우리 한군은 사막지대에서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던데 차라리 그쪽에서 안심하고 있을 때 대규모 군사로 공격한다면 행세로 보아 유리할 것 같소. 생각들이 어떻소." "좋은 성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해가 원수 4년이었다. 봄이 되자 효무제는 대군을 진발시켰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의 기병을 통솔케 했으며 그 뒤로 보병과 치중병 수십만을 따르도록 했다. 특히 선봉에서 적진 깊숙이 용감하게 돌진하겠다는 병사는 모두 표기장군에게 소속되도록 했다. 애초에 곽거병은 정양에서 출격해 선우와 대결할 작정이었으나 포로가 선우는 동진했다고 실토했으므로 황제는 곽거병을 대군(代郡)에서 출격하는 것으로 바꾸고 대장군을 정양으로 돌렸다. 낭중령 이광은 전장군이 되고 태복 공손하는 좌장군, 주작도위(主爵都尉) 조이기(趙食其)는 우장군, 평양후 조양(曹襄)은 후장군이 되어 모두 대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다. 병단은 즉시로 사막을 건넜는데 그 병력은 무릇 5만 기였다. 한편 조신은 선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한군이 사막지대를 건너게 되면 사람이나 말이 모두 극도로 지치게 됩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가 그들을 포로로 거두어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선우는 모든 치중(輜重:物資)을 멀리 북쪽으로 이동시킨 뒤 정예병들만 거느린 채 사막지대 북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과 맞부닥친 한군은 대장군 위청이 거느린 대군이었다. 한편 위청의 군단은 요새에서 진발해 1천여 리 지점으로 나아갔을 때 선우의 군사가 포진해 대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위청은 무강거(武剛車:뚜껑이 있는 裝甲車)를 본영 주변에 고리 모양으로 둥글게 배치하고 나서 5천 기를 놓아 흉노군에게 돌진시켰다. 그러자 흉노 쪽에서도 1만 기 가량으로 돌진해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때마침 돌개바람이 불어 모래와 자갈이 얼굴을 휘갈겨 때렸다. 더구나 해질 무렵이었으므로 양쪽 군사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위청은 목소리를 높여 독려했다. "좌우익 양쪽 군사들은 날개를 벌리듯이 선우를 목표로 조여들어가라!" 증원된 군마가 난전 속에서도 가까스로 선우군을 조여들어갔다. "안 되겠다. 한군의 기마대가 몹시 사납다. 땅거미를 뚫고 일단 튄다!" 선우는 흉노군의 세불리를 느끼고 육두마차를 때려가며 근위병 수백 명을 데리고 일직선으로 한군을 돌파해 나갔다. 한군에서는 어둠 때문에 선우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피차가 뒤엉켜 싸우느라고 크게 상하고 지쳤다. 한군 좌익 쪽의 교위가 포로를 족쳤다. "너의 선우는 어디 있느냐?" "선우는 해지기 전에 벌써 북서방으로 달아났습니다." 위청은 경기병(輕騎兵)들을 시켜 선우를 추격케 했다. 위청의 본대도 뒤따르자 흉노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한군은 동이 틀 무렵까지 2백여 리나 추적했으나 선우를 끝내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1만여 참수, 포로라는 전과를 거두며 기련산의 조신성(趙信城)에 도달했다. 위청은 흉노가 비축한 양곡을 한군에게 먹이며 거기서 하룻동안 휴식한 후 양곡을 거둔 뒤 조신성을 불사르고 회군했다. 대장군 위청이 선우와 회전할 무렵, 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의 군사는 본대와 떨어져 동쪽길로 진격했는데 가다가 길을 잃어 선우와 접전할 즈음에는 전쟁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위청이 철수하여 사막지대 남쪽을 통과할 때 비로소 이광과 조이기를 만날 수가 있었다. 위청은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사(長史)를 시켜 이광에게 군사를 지체시킨 사유서를 써내도록 독촉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이광은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조이기는 장안에 도착해 형리에게 넘겨졌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위청이 요새선 안으로 들어와 점검해 보니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1만9천이나 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흉노군들은 선우를 열흘 이상이나 잃었으므로 우곡려왕이 자립해 선우가 되었다가 진짜 선우가 나타나자 그 자리를 되돌려 주고 자신은 다시 우곡려왕으로 돌아갔다.
한편 표기장군 곽거병도 5만 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전차와 치중대는 대장군의 군단과 대등했으나 비장이 없었다. 그래서 이감(李敢:이광의 아들) 등을 대교(大校:部隊長)로 삼아 비장 구실을 하게 했다. 곽거병은 대군, 우북평군에서 1천여 리를 진격해 흉노의 좌익 군사와 대결했다. 그때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숫자가 이미 대장군의 그것보다 많았다. 군단이 모두 귀환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렸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우리 군단을 통솔함과 동시에 사로잡은 훈육(흉노) 군사까지 이끌면서도 대사막과 물을 가볍게 건너 장거(章渠:선우의 근신)를 잡고 흉노왕 피거기(比車耆)를 주살했으며 돌아서서 좌대장을 쳐서 그의 깃발과 북을 빼앗았다. 이후산(離侯山)을 넘고 궁려수(弓閭水)를 건너 둔두왕(屯頭王)과 한왕(韓王) 등 3인과 장군, 상국, 당호, 도위 83명을 잡고 낭거서산(狼居胥山)에서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고연산(姑衍山)에서는 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그리고 한해(翰海:바이칼湖)의 부근에도 올랐다. 노획물은 수없이 많고 포로를 잡은 것만도 7만4백43인이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는 10분의 3이 줄었을 뿐이다. 식량을 적에게서 탈취했으며 그럼으로써 먼 곳까지 진격하면서도 군량은 떨어지지 않았다. 5천8백 호를 표기장군에게 증봉한다. 우북평군의 태수 노박덕은 표기장군에 소속돼 여성(與城)에서의 합류시기를 잃지 않았고 도도산에 이르러 2천7백을 참수, 포로로 했다. 1천6백 호를 노박덕에게 봉하여 부리후(符離侯)로 삼는다. 북지군의 도위인 형산(邢山)은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해 흉노의 왕을 잡았다. 1천2백 호를 형산에게 봉하여 의양후(義陽侯)로 삼는다. 흉노에서 귀순해 온 인순왕(因淳王) 복육지(復陸支), 누전왕(樓專王) 이즉건은 둘 다 표기장군을 따라 전공을 세워 1천3백 호로 복육지를 봉해 장후(壯侯)로 삼고 1천8백 호를 이즉건에게 봉해 중리후(衆利侯)로 삼는다. 종표후 노파노, 창무후 조안계(趙安稽)도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해 군공이 있었으므로 3백 호씩 증봉한다. 교위 이감은 적의 깃발과 북을 탈취했으므로 관내후로 삼아 식읍 2백 호를 주며, 교위 서자위(徐自爲)에게는 대서장(大庶長)의 작위를 준다.
이밖에도 표기장군의 군관과 병사들은 관위도 얻고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대장군에게는 증봉도 없었고 그의 부하들 역시 후작의 봉을 받은 자가 없었다. 두 장군이 요새선에서 출발할 때는 관마(官馬)와 사마(私馬) 합쳐 대략 14만 필이었는데 다시 요새로 돌아온 것은 3만 필도 되지 못했다. 대장군에게 책임을 지우는 듯했다. 이때 대사마(大司馬)의 관위를 신설하고 대장군 위청과 아래 계급인 표기장군 곽거병을 동시에 대사마에 임명했다. 그로 인해 대장군과 표기장군의 서열과 봉록이 동등해져 버렸다. 이로부터 대장군의 권위는 날로 쇠퇴해지고 표기장군은 날로 더욱 존귀해졌다. 대장군의 친구와 문하인들은 속속 빠져나가서 표기장군을 섬기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벼슬을 얻은 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임안(任安:사마천의 친구)만은 그렇게 의리없지는 않았다. 곽거병의 사람됨은 과묵하여 비밀을 흘리는 일이 없었으며 기골이 있어 어려운 일을 도맡아 과감히 실천했다. 황제가 일찍이 곽거병에게 손자(孫子), 오자(吳子)의 병법을 배워 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면하여 어떤 전략을 쓸 것인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굳이 지난날의 병법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황제가 그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하고는 가서 보라고 권했다. "흉노가 아직 괴멸되지도 않았는데 집을 가져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황제는 더욱더 그를 중히 여기고 총애했다. 그렇지만 곽거병은 젊은 나이에 이미 시중(侍中)이 되고 존귀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부하들의 어려운 처지를 살필 줄 몰랐다. 그가 종군했을 때 황제는 그를 위해 태관(太官:궁중의 요리官)이 만든 수십 수레의 음식을 보내 주었는데 사졸들 중에서 굶주리는 자가 있어도 그들에게 넘겨줄 줄을 몰랐다. 요새 밖에 있을 때는 사졸들이 식량 결핍으로 시달렸는데 곽거병은 기력이 없어 일어설 수도 없는 사졸들을 일으켜 땅에다 줄을 긋고 공차기를 즐길 정도로 무심했다. 개선한 뒤에도 치중거에는 좋은 곡류와 육류가 남아 썩어 버릴 정도가 되었는데도 그는 그것을 굶주리는 사졸들에게 줄 줄을 몰랐다. 그런 사례들이 그에게는 수없이 많았다. 대장군 위청의 인품은 사람됨이 인자하였고 선량했으며 겸손하였고 부드러웠다. 또한 양보심도 많았다. 그런 어진 성품으로 인해서 황제의 환심을 샀다. 그런데도 천하에서는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 곽거병은 원수 4년의 흉노 토벌이 있은 지 3년 뒤인 즉 원수 6년에 죽었다. 황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가 속국으로 세운 변경 5군의 철갑병을 동원해 장안에서 무릉(茂陵:효무제의 壽陵, 섬서성)까지 행진시켰으며, 거기에다 기련산을 본뜬 무덤을 만들었다. 그에게 시호를 내려 무용(武勇)하다는 뜻의 경(景)자와 땅을 넓혔다는 뜻의 환(桓)자를 합해 경환후(景桓侯)라 했다. 그의 아들 곽선이 대신해서 후작이 되었다. 곽선은 어린나이로 자후(子侯)라 했다. 황제는 그를 사랑해 자라면 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6년 후 원봉(元封) 원년에 죽었으므로 애후(哀侯)라 시호했다.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가계는 단절되고 봉국도 없어졌다. 곽거병이 죽은 직후 위청의 아들 의춘후 위강이 법에 저촉되어 후작을 잃었다.
5년 뒤 위강의 아우 음안후 위불의와 발간후 위등 두 사람은 모두 주금(酎金:임금이 처음 익은 술을 종묘에 바칠 때 제후 모두가 헌금해 제사를 도왔는데 이때 헌금의 양이 적든가 질이 나쁘면 영토를 박탈했다)법에 저촉되어 후작을 잃었다. 그 후 2년이 지나 곽거병의 영지였던 관군후의 봉국도 아들 곽선의 사거로 몰수되었다. 4년이 지나 대장군 위청이 사거했다. 시호를 열후(烈侯)라 했다. 아들 위강이 대신해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대장군 위청은 선우를 포위한 지 14년 만에 죽은 것이다. 그동안 한에서 끝내 흉노를 치지 않은 것은 군마가 적었기 때문이며 또 남방으로 동월, 남월을 치고 동방으로 조선, 강족(羌族)과 남서방의 만족들을 치기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장군 위청이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평후 위강이 대신해서 후작이 되었지만 6년이 지나 법에 걸려 후작을 잃었다.
이하에서 두 장군과 여러 비장들에 대하여 기술한다.
대장군 위청은 일곱 차례 흉노로 출격해 참수, 포로가 5만여이고 한 번은 선우와 싸워 하남 일대를 거둔 뒤 삭방군을 두었다. 두 차례 증봉되어 도합 1만1천8백 호이고, 세 아들이 봉을 받아 후가 되고 후마다 1천3백 호를 받았으니 모두 합치면 1만5천7백 호가 된다. 교위나 부장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진하여 후가 된 자가 9명, 그의 비장이나 교위로서 이미 장군이 된 자가 14명이었다. 비장이었던 부하 가운데 이광(李廣)이 있는데 그는 따로 열전(列傳)이 있다. 열전이 없는 부하들은 아래와 같다.
장군 공손하는 의거(義渠:秦에게 멸망한 西戎의 國名)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흉노족이다. 공손하의 아버지 혼야(渾邪)는 효경제 때 평곡후(平曲侯)가 되었으나 법에 걸려 후를 잃었다. 공손하는 효무제가 태자시절이었을 때 가신이었는데 효무제가 즉위하자 8년에 태복 자격으로 경거장군이 되어 마읍(馬邑)에 주둔했다. 4년이 지나자 경거장군으로 운중군에 출격했다. 5년이 지나서 경거장군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쌓고 봉을 받아 남교후가 되었다. 1년이 지나 좌장군으로 재차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4년이 지나 주금법에 걸려 후를 잃었다. 8년이 지나서 부저장군(浮沮將軍)으로 오원(五原)에서 2천여 리를 진출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8년이 지나자 태복에서 승상이 되어 갈역후(葛繹侯)로 봉해졌다. 공손하는 일곱 차례 장군으로 흉노에 출격했지만 대공(大功)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후가 되고 승상이 되었다. 그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은 양석공주(陽石公主:효무제의 皇女)와 밀통하고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었고 후사도 끊어졌다. 장군 이식은 욱질(감숙성 慶陽縣) 출신으로 효경제를 섬겼다. 효무제가 즉위한 지 8년이 되어 이식은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서 마읍이 주둔했다. 6년이 지나 장군이 되어 대군에서 출격했다. 3년이 지나자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군에서 출격했으나 모두 군공은 없었다. 무릇 세 차례나 장군이 되었다. 그 후로는 늘 대행(大行:特派大使)의 직에 있었다.
장군 공손오도 의거 출신이다. 낭관(郎官)으로 효무제를 섬겼다. 무제가 즉위한 지 12년에 기장군(騎將軍)이 되어 대군에서 출격했으나 사졸을 7천이나 잃어 참죄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5년이 지나 교위로서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세워 합기후(合騎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서 중(中)장군으로 대장군을 따라 재차 정양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2년이 지나서 장군으로 북지군에 출격해 표기장군과의 약속기일에 지체돼 참죄에 해당됐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다시 떨어졌다. 2년이 지나서 교위로 대장군을 따라 출격했지만 군공은 없었다. 14년이 지나 인우장군으로 수항성(受降城)을 구축했다. 7년이 지나서 다시 인우장군으로 흉노를 쳤으나 여오수(余吾水)에 이르러 많은 사졸을 잃었다. 형리에게 인도되어 참형을 당했으나 거짓 죽은 척하다 도망해 5, 6년 동안 민간에 숨어 살았다. 뒤에 발각되어 다시 옥에 갇혔다. 그의 아내가 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었다. 무릇 네 차례 장군이 되어 흉노를 쳤고 한 차례 후가 되었다. 장군 이저(李沮)는 운중군 출신이다. 효경제를 섬겼다. 효무제가 즉위한 지 17년에 좌내사(左內史)로서 강노장군이 되었다. 1년이 지나서 다시 강노장군이 되었다. 장군 이채(李蔡)는 성기(成紀:감숙성 泰安縣 북쪽) 출신이다. 효문제, 효경제, 효무제를 섬겼다. 경거장군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쌓고 낙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그 후 승상이 되었다가 법을 범하고 사형당했다. 장군 장차공은 하동(河東:山東省) 출신이다. 교위로서 위청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세워 봉을 받아 안두후(岸頭侯)가 되었다. 그 후 태후(太后:효무제의 어머니)가 붕어하자 장군이 되어 상중(喪中)의 비상사태에 대비해 북군(北軍)을 거느렸다. 1년이 지나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격했는데 두 번이나 장군이 되었지만 법에 걸려 후의 지위를 잃었다. 장차공의 아버지 융(隆)은 근위병의 사수(射手)였다. 궁술에 능하여 효경제는 그를 가까이 두고 총애했다. 장군 소건은 두릉(杜陵:長安 남쪽 50里) 출신이다. 교위로 위청장군을 따라 출격해 평릉후(平陵侯)가 되었다. 장군으로 삭방군에서 성새를 구축했다. 4년이 지나 유격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으로 출격했다. 1년이 지나 우장군으로 다시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격했다. 흡후 조신이 도망하고 군사도 많이 잃어 참죄에 해당됐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후 대군의 태수로 있다가 죽었다. 그의 분묘는 대유향(大猶鄕)에 있다. 장군 조신은 흉노의 상국으로서 귀순해 흡후가 되었다. 효무제가 즉위한 지 17년에 전장군이 되어 선우와 싸우다 패배해 흉노에 항복했다. 장군 장건(張騫)은 사신으로 대하(大夏)로 가서 대하와 교통을 열고 귀환하여 교위가 되었다.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쌓아 박망후에 봉해졌다. 3년이 지나 장군이 되어 우북평에서 출격했으나 약속기일을 지키지 못해 참죄당할 뻔하다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 뒤에 사신이 되어 오손(烏孫)과 국교를 맺고 돌아와 대행(大行)이 되어 죽었다. 그의 분묘는 한중(漢中)에 있다. 장군 조이기는 대우(狹西省 耀縣 동쪽) 출신이다. 효무제가 즉위한 지 22년에 주작도위에서 우장군이 되었다. 대장군을 따라 정양군에서 출격했다.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었으므로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장군 조양(曹襄)은 평양후로서 후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격했다. 조양은 조삼(曹參)의 손자이다. 장군 한열은 궁고후의 서손(庶孫)이다. 교위로서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공을 세워 용액후가 되었다. 주금법에 걸려 후작을 잃었다. 원정 6년에 대조(待詔:天子의 조칙을 대기함)하다가 횡해장군(橫海將軍)이 되어 동월(東越)을 쳐서 그 군공으로 안도후(按道侯)가 되었다. 태초(太初) 3년에 유격장군이 되어 오원(五原) 북방의 여러 성에 주둔했다. 광록훈(光祿勳:官名)이 되어 무고(巫蠱)의 난 때 위태자(衛太子:戾太子)의 궁 밑에서 목인형을 캐냈다가 위태자에게 피살되었다. 장군 곽창(郭昌)은 운중 출신이다. 교위로서 대장군을 따라 출격했다. 원봉 4년에 태중대부로서 발호장군(拔胡將軍)이 되어 삭방에 주둔하고 곤명(昆明:西南夷의 國名,雲南省 昆明縣)을 공격했으나 군공이 없어 장군의 인수를 빼앗겼다. 장군 순체는 태원군 광무(廣武) 출신이다. 마차를 모는 기술이 뛰어나 황제를 가깝게 모시는 시중이 되었다. 교위가 되어 자주 대장군을 따라 출격했고 원봉 3년에 좌장군이 되어 조선을 쳤으나 군공이 없었다. 누선장군(樓船將軍:楊僕)을 체포한 죄로 법에 걸려 사형당했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여섯 차례 출정해 흉노를 공격했다. 그 중에서 네 차례는 장군으로 출격해 포로, 참수 11만을 얻었으며 혼야왕과 그 무리를 이끌고 수만 인과 함께 귀순시켰다. 드디어 하서(河西), 주천(酒泉) 일대를 개척해 서방 흉노의 침공을 훨씬 줄어들게 했다. 네 차례나 증봉되니 1만5천1백 호였다. 그의 수하 장군으로서 군공으로 후(侯)가 된 자가 무릇 6명, 뒤에 장군이 된 자가 2명이었다. 장군 노박덕은 평주(平州:河北省 盧龍縣) 출신이다. 우북평군의 태수로서 표기장군을 따라 출정해 군공을 세워 부리후(符離侯)가 되었다. 표기장군이 죽은 뒤 노박덕은 위위(衛尉)로서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남월을 격파하고 증봉되었다. 그 후 법에 걸려 후를 잃었다. 강노도위(彊弩都尉)로서 거연(居延)에 주둔해 있다가 죽었다. 장군 조파노는 본시 구원(九原:오르도스) 출신이다. 한때 흉노로 도망했다가 다시 한으로 들어온 뒤, 표기장군의 사마(司馬)가 되어 북지군에서 출격했다. 그때 군공이 있어 종표후(從驃侯)가 되었다. 주금법에 걸려 후를 잃었다. 1년이 지나 흉하장군(匈河將軍)이 되어 흉하수(水)까지 흉노군을 쫓아갔으나 군공은 없었다. 2년이 지나서 누란왕을 공격해 그를 사로잡아 다시 봉을 받아 착야후가 되었다. 6년이 지나서 준계장군(浚稽將軍)이 되어 그만 2만 기를 이끌고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했다. 어울려 싸우다가 조파노는 오히려 좌현왕의 8만 기병에게 포위되었다. 조파노는 사로잡히고 그의 군사는 전멸했다. 그는 10년 동안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흉노 태자 안국(安國)과 함께 한으로 도망쳐 왔다. 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었다. 위(衛)씨가 일어나면서 대장군 위청이 제일 먼저 봉을 받아 후(侯)가 되었다. 그 후로 일족 중에서 5인이 후가 되었으나 25년 동안 5인 모두가 후를 빼앗겼다. 그 뒤로는 위씨로 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소건(蘇建)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대장군에게 충고한 적이 있었소. '대장군께서는 지극히 존귀한 위치에 계십니다만 어찌 천하의 현대부(賢大夫)들로서 대장군을 칭찬하는 이가 없습니까. 옛날 명장들이 모름지기 현인들을 골라 초빙했던 사실을 본받아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랬더니 대장군은 내 말을 강력하게 사절합디다.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이 빈객들을 초빙해 후대한 일을 가지고 천자께서 얼마나 이를 갈며 분해하셨는 줄 알기나 하오? 사대부를 가까이 하거나 현자들을 초빙하거나 어리석은 자를 물리치거나 하는 일들은 오로지 황제의 고유 권한일 뿐이오. 모름지기 신하된 자는 국법을 준수하고 직책에 충실하면 그뿐인 것이오. 어찌 내 주제에 선비들을 불러 모으겠소.'" 표기장군 곽거병도 역시 이런 의견을 본받고 있었다. 그들 장군으로서의 몸가짐이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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