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7. 역생.육가열전
사신으로서 변설을 통해 제후들과 약속하여 그들을 회유했다. 그로 인해 제후들은 모두 친근감을 가지고 한(漢)으로 귀순해 번병(蕃屛: 먼 곳의 울타리, 혹은 대문 역할의 兵營)과 보신(輔臣: 보필하는 臣下)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래서 제37에 <역생.육가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역 선생 이기(食基)는 진류현(陳留縣)의 고양(高陽: 河南省 杞縣) 출신이다. 독서를 즐겨했으나 집안이 워낙 가난했으므로 먹을거리가 없어 이(里)의 감문리(監門吏: 마을 城門을 관리하는 官)로 있었다. 현 안의 현자(賢者)나 호걸들은 아무도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차라리 그를 두고 미치광이 선생이라 불렀다. 때마침 진승(陳勝)과 항량(項梁) 등이 봉기했다. 역이기는 초라한 고양의 문을 지키며 각지를 공략해 위세당당하게 고양 성문을 통과하는 장수들을 눈여겨보았다. 몸을 의탁할 만한 인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 아무도 마음에 드는 인물이 못 되었다. 하찮은 예의나 체면에 구애되는 올망졸망한 인물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역이기는 천하의 대계(大計)가 담겨 있는 가슴의 문을 굳게 닫아 두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그 이후 유방이라는 자가 군사를 이끌고 진류 땅 근처를 공략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체 그자는 어떤 인물이더냐?" 역생은 유방을 따르고 있는 고향 청년에게 슬며시 물었다. "한마디로 오만불손하기 그지없지요." "그런데도 넌 왜 그자를 추종하느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대단히 큰 포부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를 그자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겠느냐." "그것은 곤란한데요." "곤란하다니?" "역 선생께선 유자(儒者)가 아니십니까?" "유자가 뭐 어째서." "패공께선 유달리 선비를 싫어하시거든요. 어느 정도냐 하면 유관(儒冠)을 쓰고 찾아오는 빈객이 있으면 패공은 얼른 그 빈객의 관을 벗겨 그 속에다 오줌을 싸 버립니다." "미친놈이군." "얻어맞지 않고 욕만 얻어먹고 쫓겨나는 정도는 행운아지요." "뒷일은 내가 감당하마. 좌우지간 소개나 시켜라."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만......" "패공께 이렇게 말해라. '저의 고향에 역 선생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나이는 예순, 신장은 여덟 자(八尺: 曲尺으로 6자 가량),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고 미치광이라 하나 자신은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한다'고 말해 주게나." "낭패를 당해도 저는 모릅니다." "걱정 말게." 패공이 고양의 여사(旅舍)에 이르렀다. 그래서 역생의 고향사람이 패공에게 역생의 얘기를 했더니 만나 보겠다는 허락을 내렸다. 역생이 들어왔다. 패공은 역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역생이라 하오." 역생은 큰 절 대신 두 손을 마주잡고 가볍게 읍(揖)했다. 패공은 여전히 못 들은 척했다. "그대는 지금 진(秦)나라를 도와서 봉기한 제후들을 치는 중이오?" "무어?" "그렇게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데." "저 미친 선비놈이 있나!" "남들은 흔히 그렇게 말하지. 정작 나는 미치지 않았지만." "천하 사람들이 무도한 진에게 고통을 당해 온 사실도 모르는 자를 두고 어찌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토록 정의로운 인간이 의자에 퍼질고 앉아 오만불손하게 연장자를 맞이해?" 유방은 역이기의 눈을 마주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앞의 노인에게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다. 발 씻기던 여인을 물린 후 유방은 다소곳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을 물리치는 계략이라도 품고 있다는 얘기요?" "옛적 6국이 합종과 연횡하던 시대의 형세를 분석 평가해 볼테니 들어 보시겠소?" 유방은 역이기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옷깃을 여민 뒤 역이기를 상좌에 앉혔다. "장차 어떤 계략을 쓰는 게 좋겠소?" "계략이고 뭐고도 없소. 1만도 못 되는 오합지졸들을 거느리고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범의 아가리를 쑤시는 격이지." "그래서 지금 고민하고 있소이다." "내가 지금 백 마디 말로 설득한들 패공께서 믿기나 하겠소. 우선 나를 사자로 보내 주시오." "어디로?" "어딘 어디겠소. 여기 진류 성 얘기요. 근처를 잘 살펴보시오. 사통팔달의 평야가 널린 천하의 요충이오. 성내(城內)에는 무진장의 식량 또한 저축돼 있소. 내가 또한 현령(縣令)과는 친한 사이거든. 몇 마디 말로써 그를 항복시키고 오겠소." "정작 그렇게 해 주겠소?" "현령이 내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소. 그 땐 병사를 몰아 공격하시오. 나는 안에서 내응하리다." "말씀대로 해 보겠소." "그럼 당장 시작합시다." 역생은 곧 사자로 파견되었다. 동시에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역생의 계획대로 진류성을 힘 안 들이고 항복받았다. 그 공으로 역생은 광야군(廣野君)이라 불렸다. "내 아우지만 쓸 만한 인물이오. 역상을 추천하오." "역 선생의 말이라면 뭐든지 듣겠소." 그래서 역생의 아우 역상이 패공의 수하로 들어왔다. 패공은 병사 수천을 역상에게 주어 남서쪽 토지를 공략케 했다. 역생은 역생대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세객(說客)으로서 제후들 사이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한(漢)의 3년 가을이었다. 항우가 한군을 격파하고 형양(滎陽)을 함락시켰다. 패주한 한군은 멀찍이 쫓겨와서 공(鞏: 河南省 鞏縣 남동)과 낙양 근처에서 웅거하고 있었다. 회음후 한신이 조나라를 격파하고 팽월이 양(梁) 땅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꾀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즉시 군대를 나누어 조와 양을 구원하도록 했다. 한신은 조나라에서 머물지 않고 즉시 동진하여 이번에는 제(齊)나라를 공격했다. 한편 유방은 형양과 성고에서 고전을 겪다가 성고 이동의 땅을 버려둔 채 공과 낙양에다 최후방어선을 구축해 초군을 막아 낼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 역생이 한왕 유방에게 간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하늘이 하늘인 것을 아는 자는 왕업을 성취할 수 있으나 하늘인 것을 모르는 자는 왕업을 성취할 수 없다. 왕자(王者)는 인민을 하늘로 삼고 인민은 양식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말입니다. 저 오창(敖倉: 河南省 成皐縣 북서 敖山에 설치한 창고)이라는 곳은 천하 양곡이 교역되는 중심지로 이용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초군은 형양을 함락시키고도 오창을 굳게 지키지 않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동진했으며 죄진 병사[適卒을 말하며, 謫成과 같음]들로 구성된 분견대(分遣隊) 따위로 성고를 수비케 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한나라를 돕는 증거입니다." "그럴 듯하오!" "그런데도 지금 초나라를 치기 쉬운데도 한나라가 오히려 퇴각하여 호기를 놓치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된 계략입니다. 양웅(兩雄)은 함께 설 수 없습니다. 초.한이 오랜 대치로 어서 결판이 나지 않으면 백성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농부는 보습을 버리며 여공(女工)은 베틀에서 내려옵니다. 원컨대 한왕께선 다시 진격을 개시해 형양을 탈환하고 오창의 식량을 확보한 뒤 성고의 험로를 막아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는 길목을 폐쇄하고 비호(蜚狐: 河北成 浹源縣 북쪽 黑石嶺)의 입구를 막으며 백마(白馬:河南省 滑縣 동쪽)의 나루터를 지켜 천하제후들에게 한나라가 천하를 제압하고 있다는 형세를 보여 주면 그 땐 천하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옳으신 생각이오." "현재 연과 조는 평정되었지만 제나라는 항복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의 전광(田廣)은 사방 천리를 지배하고 전간(田間)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역성(歷城: 山東省 歷城縣)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 전씨들은 세력이 강대하여 동해(東海)를 등지고 황하.제수(濟水)를 낀 채 방어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초와 가깝고 권모술수 또한 능합니다. 한왕께서 수십만 군사를 투입한다 해도 아직은 단시일 내에 격파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점이 두통거리요." "제가 그 두통거리를 해결하지요." "그대가?" "조칙을 받들고 제나라로 가겠습니다. 제왕을 설득해 제나라가 한나라의 동쪽 번병(藩屛)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계획대로만 되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럼 왕께서는 오창을 공격하십시오. 저는 그 동안 제나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되어 역생은 사신으로 제나라에 갔다. 역생은 제왕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왕께서는 천하가 어디로 귀속될지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것을 알고 계신다면 제나라는 존속될 것이되 어디로 천하가 돌아갈지 모르신다면 제나라도 존속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천하의 향방을 알고 있소?" "알고 있지요. 한(漢)으로 돌아갑니다." "어째서 그렇소?" "유방은 항우와 힘을 합해 서진하여 진을 치면서 먼저 함양으로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랬었소." "유방이 먼저 함양으로 입성했으나 항우는 그 약속을 어기고 유방을 한중(漢中)으로 쫓아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게다가 의제(義帝)를 추방한 뒤 암살까지 해 버렸습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유방은 그 소식을 듣고 촉.한의 군사를 동원해 삼진(三秦)을 치고 함곡관 밖으로 나와 항우에게 의제의 소재를 힐책했던 것입니다. 유방은 천하의 병사를 거두어 제후의 후손을 옹립하고, 성읍을 항복시키면 공 있는 장군을 후로 삼았으며, 재물을 얻으면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같이 했으므로 영웅 호걸돠 현재(賢才)들이 유방을 위해 더불어 사역되는 일을 즐겁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후의 병사들이 사면에서 모여들고 촉.한의 양곡을 실은 배들이 줄을 지어 장강(長江)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항우는 약속을 어겼다는 악명과 의제를 죽였다는 죄과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남의 공은 기억하는 것이 없으며 남의 죄를 잊은 것 또한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장수들은 싸움에 이겨도 상을 받지 못하고 성읍을 함락시켜도 봉읍을 받지 못합니다. 항씨 일족이 아니고서는 요직에 앉을 수가 없으며, 남을 봉(封)하기 위해 인장을 새겨 놓고도 그것이 다 닳아 떨어질 때까지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결국은 봉읍 내릴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성읍을 공략해 재물을 뺏어 쌓아 놓아도 남에게 상을 주지 못하니 그래서 천하가 그를 배반하고 현재(賢才)는 그를 원망하여 그를 위해 사역되는 자가 없습니다." "그자의 인품이 그러하오!" "그렇다면 천하의 인사들이 유방에게로 돌아설 것이라는 사실을 앉아서도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잘 보십시오. 유방은 촉.한의 군사를 출발시켜 삼진을 평정하자 서하(西河: 陝西.河南.山西省境을 흐르는 黃河의 蠻曲部로 激流가 소용돌이친다) 밖으로 건너가 상당(上黨)의 병사를 끌어들여 정형(井형)에서 내려와 성안군(成安君: 東餘)을 처형하고 북방의 위(魏: 위표)를 격파해 32개의 성읍을 함락시켰으니, 이 같은 일은 신농씨(神農氏) 때의 명장 치우(蚩尤: 난을 일으켰다가 黃帝에게 敗한 齊의 전설적 軍神)의 군대이지 인간의 군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늘이 내려 준 복록이지요. 이제 한나라는 오창의 식량을 확보하고 성고의 험로를 막았으며 태행산맥을 넘는 길을 폐쇄하고 비호의 입구를 막았으니, 이런 차제에 뒤늦게 한나라에 항복하는 자는 남 먼저 멸망할 게 뻔한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과인은 어떻게 하는 게 옳겠소?" "왕께서는 일찌감치 앞장서서 한에 항복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제나라의 사직은 보존될 수 있습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전광은 비로소 무릎을 쳤다. "좋소. 가르침에 따르리다!" 전광은 역생의 말을 들어 역성(歷城) 근처에 주둔시켰던 방어군의 방어태세를 풀어 버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직이 보존된다니 무한히 흥겹소!" 전광은 마음 푹 놓고 날마다 역생과 주연을 베풀어 먹고 마시고 떠들며 즐겼다.
한편 회음후 한신은 역생의 공적을 들었다. "무어라고? 내가 평생을 걸려서 공략해도 못다할 제나라 70여 개 성을 그자가 세 치 혓바닥 몇 번 놀려서 빼앗아! 그렇다면 나에게는 아무 공적도 없잖은가. 좋다. 제를 정복하라는 한왕의 조칙은 아직 살아 있다!" 한신은 평원(平原: 山東省 平原縣)에서 야간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의 제나라를 삽시에 덮쳤다. 제왕 전광은 깜짝 놀랐다. "무어라고? 한군이 습격해 왔다고!" "역 선생, 이거 어찌된 거요?" "무슨 오해가 있은 듯합니다." "그대가 날 속였지!" "난 속이지 않았소." "잔말 말아! 네놈이 한군의 진격을 저지시켜 준다면 살려 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를 속인 죄값으로 널 삶아 죽이겠다!" "큰일 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신경쓰지 않는다. 덕이 많은 사람은 겸손 따윈 아무래도 좋다. 두 말 하지 않겠다. 나는 거짓말한 적이 없다." 전광은 드디어 역생을 가마솥에 삶아 죽이고, 병사를 인솔해 동쪽으로 튀었다.
한나라 12년이었다. 곡주후(曲周侯) 역상은 승상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경포를 쳐서 공을 세웠다. 고조는 역생의 죽음을 몹시 애석해했다. 열후.공신의 논공을 할 때 고조는 맨 먼저 역이기를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역개가 비록 후(侯)에 봉해질 정도의 큰 공을 세운 적이 없지만 그 아비의 공을 생각해 역개를 고량후(高梁侯)에 봉하고 뒤에 다시 무수(武遂)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런 식으로 3대째 계승되었는데, 효무제의 원수(元狩) 원년에 무수후 역평이 칙령이라 속이고 형산왕(衡山王)한테서 황금 백 근(百斤: 약 25킬로그램)을 횡령 착복했다. 기시(棄市: 목을 베어 길거리에 버림)죄에 해당하였으나 곧 병들어 죽었기로 처형하지는 않았다. 봉국만 몰수되었다.
육가(陸賈)는 초나라 사람이다. 빈객으로서 고조를 따라다니며 천하평정을 도왔다. 구변이 능해 사람들이 변사(辯士)라 했으며 그로 인해 제후국들에 부지런히 사신으로 다녔다. 중국은 고조 때에 비로소 평정되었다. 그 무렵 남월(南越)에서는 위타(尉他)라는 자가 그 곳을 평정해 왕노릇을 하고 있었다. 고조는 육가에게 인장을 주어 보내 위타를 남월왕으로 삼으려 했다. 육가가 남월에 도착했다. 위타는 남만(南蠻)의 풍습대로 북상투(아무렇게나 막 끌어올려 짠 상투)를 하고 거만하게 양다리를 뻗은 채 육가를 대했다. 육가는 모른 척하고 위타에게 말했다. "그대는 중국사람입니다. 친척과 형제와 조상의 분묘도 진정(眞定 : 河北省 正定縣)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지금 본성(本性)을 어기고 중국의 의관과 속대를 버린 채 구구한 월나라를 믿고서 천자와 맞상대하여 적국이 되고자 하고 있으니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까짓 한나라쯤이야!" "진(秦)나라가 정치에 실패하자 제후와 호걸들이 일시에 봉기 했습니다만 그중에서 오직 한왕만이 먼저 관중으로 돌입해 함양을 점령했습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그러나 항우는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서초(西楚) 패왕이 되어 천하 제후들을 휘하에 귀속시켰으니 그의 위세는 막강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파.촉에서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천하를 채찍질하여 제후를 정복하고는 드디어 항우까지도 주멸했습니다. 불과 5년 동안에 이룩해 낸 위업입니다. 이것은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일으켜 세워 준 위업입니다. 천자는 당신께서 남월의 왕으로서, 천하가 모두 폭도와 반역자를 쳐 무찌를 때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하여 군사를 동원해 당신을 주멸하라고 대신과 장군들이 주장했으나 백성들이 새삼 다시 고통당할 것을 불쌍히 여겨 당분간 토벌을 중단하고 당신에게 왕인(王印)을 주고 할부(割符)를 갈라 평화롭게 살자고 이토록 사절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천자의 사절인 나를 마땅히 교외까지 마중 나와 환영하며 북면(北面)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갓 만들어진 허약한 남월이 자신의 능력도 모른 채 강대한 한나라에 대하여 이토록 초강경으로 나오니 웃겨도 예사로 웃기는 일이 아니올시다. 만일 이런 사실이 한나라에 알려지면 한에서는 즉각 당신네 조상의 분묘를 파헤쳐 버리고 일족을 몰살한 뒤 부장(部將)한 사람에게 십만 병력을 주어 남월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이쯤 되면 남월사람들은 당신을 죽여 버린 뒤 서둘러 한나라에 항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도 좋겠습니까?" 듣고 난 위타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용서하십시오. 오랫동안 오랑캐 나라에 살다 보니 이렇게 예의를 까맣게 잊었습니다!" 위타는 육가에게 엎드려 빈 뒤 다시 이렇게 물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나를 소하와 조참과 한신을 비교하여 누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더 현명한 것 같군요." "황제와 비교해서는 어떻게 되오?" "황제는 풍.패에서 일어나 포악한 진을 치고 강력한 초를 주멸한 뒤 천하를 위하여 이익을 가져오고 폐해를 제거했을 뿐 아니라, 삼황(三皇).오제(五帝)의 대업을 계승해 중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 인민은 억(億)으로 헤아리며 영역은 사방 만리이고 천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구는 조밀하고 수레는 들끓고 만물이 풍성한 데다 정치는 황제 일가의 손으로 좌우되니 이런 일은 천지개벽 이래로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네 나라는 인구 기껏 수십만이며 모두가 미개한 오랑캐인 데다 산과 바다 틈새에 끼여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껏 한제국의 일개 군(郡)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왕이 어찌 한제국의 황제와 비교해 보려 합니까." "내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왕이 된 것이오. 내가 중국에 있었다면 어찌 한의 황제만 못했겠소? 물론 이건 농담이오." 위타는 크게 웃었다. 위타는 육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수개월 간이나 그를 머무르게 하면서 주연을 베풀었다. "실상 이 곳에서는 더불어 얘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없소. 선생께서 자주 오시어 새로운 소식을 듣게 해 주시오." 위타는 송별금으로 육가에게 천금 어치의 재보가 든 주머니를 주었는데 그것도 두 번씩이나 선물했다. 육가는 위타에게 대신 벼슬을 주어 월왕으로 삼아 한나라에 신하로서의 맹약을 받들게 했다. 육가가 귀환하여 보고하자 고조는 크게 기뻐하며 태중대부(太中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육가는 때때로 고조 앞에 나아가 <시경>과 <서경> 등 고전의 훌륭함을 역설했다. 그러자 고조는 짜증을 냈다. "짐은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소. <시경> <서경>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천하는 마상에서 얻었지만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역도(逆道: 放代.武力)로 천하를 얻었지만 순도(順道: 道理를 따름. 文德)로 이것을 지켰습니다. 문무를 병용하는 것이 국가를 장구히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옛적 오왕 부차나 진(晋)의 지백(智伯)은 무(武)를 극도로 사용하여 멸망하였고, 진(秦)은 형법(刑法) 일변도로 일관하다가 제실(帝室)의 조씨(趙氏) 일가가 자멸했습니다. 앞서의 진(秦)이 이미 천하를 통일한 뒤에 만일 인의(仁義)의 정치를 행하고 성천자(聖天子)를 모범으로 삼았더라면 폐하께선 어떻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고조는 여전히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약간의 부끄러워 하는 기색을 띈 뒤 이렇게 말했다. "짐을 위하여 책을 지어 주겠소?" "어떤 책을?"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짐이 천하를 얻은 이유를 서술해 보는 게 어떻겠소?" "하겠습니다. 옛 고대국가가 성공하고 실패한 사례들까지도 아울러서 원인분석을 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육가는 고조를 위하여 국가가 흥망한 특징을 12편으로 약술한 저서를 냈다. 저작을 한 편씩 올릴 때마다 고조는 좋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좌우 근신들도 만세를 불러 축하해 마지않았다. 책의 이름을 <신어(新語)>라 했다.
효혜제(孝惠帝) 시대에는 여태후(呂太后)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여씨 일족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음모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공신이나 언변 좋은 인사들을 그들은 싫어했다. 육가는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여태후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집 안에 들어앉아 버렸다. 그는 호치(好치)에 있는 전답이 비옥하다 생각되어 그쪽에다 집을 짓고 정착할 작정을 했다. 육가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다. 남월로 사신갔을 때 얻은 주머니 속의 재보를 풀어 천 금을 받고 팔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각각의 2백 금으로 생업을 유지케 했다. 육가는 언제나 안락한 사두마차를 타고 가무를 즐겼으며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시종 열 명을 거느리고 백 금짜리 보검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하루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너희들과 약속을 하자. 내가 너희들 중의 누구 집에라도 방문하게 되면 나의 일행에게 주식(酒食)을 주고 말에게는 먹이를 주어라. 결코 열흘 이상씩은 한 집에 머물지는 않겠다.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보검과 수레와 말 그리고 시종들을 소유해라. 그러나 내가 유람도 떠날 것이고 친구 집에도 방문할 터이니 너희들 집을 찾는 일도 고작 두어 서너 번이 아니겠는가. 자주 만나도 신선미가 없지. 또 오래 묵으면서 너희들을 번거롭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씨 일족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했다. 어린 황제를 위협해 제실(帝室)인 유씨(劉氏)를 위태롭게 했다. 우승상 진평(陳平) 역시 사태를 우려했으나 여씨와 상쟁할 힘이 없다고 판단되어 화가 몸에 미치지 않도록 언제나 조용히 들어앉아 있었다. 어느 날 육가가 진평의 집을 방문했다. 무슨 문제를 두고 심사숙고하고 있었다가 앞좌석으로 가서 앉았는데도 깊은 생각에 빠진 진평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뭘 그토록 골똘히 생각하시오?" "어? 언제 오셨소.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시오?" "그대의 지위가 재상이니 폐하 다음에는 최상이오. 식읍이 3만 호나 되니 부귀 역시 극에 달했구려. 인간으로서 이상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겠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이 있다면 딱 한 가지겠구려." "딱 한가지......" "어린 군주를 걱정하는 게 아니겠소." "맞았소.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천하가 안온하면 사람들은 재상을 주목하고 천하가 위급하면 사람들은 장군을 주목하오. 장군과 재상이 화친하면 선비들이 사모하여 따르고 선비들이 따르면 천하에 이변이 생긴다 하더라도 권력은 분산되지 않소. 국가의 대계(大計)는 지금 오직 두 분[승상 진평과 장군 주발]에게 달렸소. 내가 늘 태위 강후(絳侯: 周勃)께 의논하려 했지만 둘 사이가 농치는 친한 사이라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승상께서 직접 강후와 친교하여 깊은 우정을 만들어 놓는 게 어떻겠소." "아, 옳으신 말씀이오. 그리 하리다!" 그 때 육가는 진평을 위하여 구체적인 대책 몇 가지를 일러 주었다. 진평은 곧 육가가 일러 준 대로 5백 금을 풀어 주발의 장수를 비는 축하연을 차려 주었다. 주발은 몹시 즐거워했다. 주발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진평에게 꼭 같은 식으로 답례했다.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이 알려졌다. 그렇게 되자 여씨 일족의 음모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의 계략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진평은 육가에게 노비 백 명, 거마 50승, 돈 5백만 전을 보냈다. 육가는 그것을 가지고 조정의 공경(公卿)들과 교제하는 비용으로 부지런히 써 댔다. 그로 인해 육가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공신들이 화기애애하게 똘똘 뭉쳐 있으니 아무리 여씨 일족이 술수를 부려 보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여태후가 죽은 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여씨 일족을 주멸한 뒤 효문제를 세웠다. 육가의 힘이 지대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효문제가 즉위하자 남월로 사신을 보내려 했다. 그 때 승상 진평이 건의했다. "육생(陸生: 陸賈)을 남월로 사신 보내십시오. 태중대부가 되기 전에 위타에게 사신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황제의 거개(車蓋)인 황색 수레덮개를 위타가 사용 못 하도록 한 것이나, 제(齊: 황제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를 칭하는 등의 참월한 행위를 못 하도록 해 중국 제후와 다름없게 하는 등 그 모두가 육가의 공로였습니다. 폐하께서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기사는 <남월열전(南越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육가는 행복하게 살다가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평원군(平原君) 주건(朱建)은 초나라 출신이다. 한때 회남왕 경포의 재상이 된 적이 있으나 죄를 짓고 관직에서 떠났다가 사면되어 다시 돌아와 경포를 섬겼다. 경포가 반기를 들려 할 때였다. 가부를 물었을 때 주건은 반대했다. 경포는 듣지 않고 양부후(梁父侯)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어코 모반했다. 나중에 한나라에서는 경포를 주살했다. 그러나 주건은 모반에 관계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모반에 반대까지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간신히 주살을 모면했다. 이런 사실은<경포열전>중의 기사에도 있다[현재의 <경포열전>에는 평원군의 기사가 없다]. 주건의 사람됨은 변설의 능란하고 엄정.청렴.강직했다. 장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성격이 각박해 굳이 남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고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또한 절대로 가담치 않았다. 벽양후 심이기(審이其)는 행실이 좋지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여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이런 심이기가 주건과 사귀고자 했으니 주건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주건의 모친이 죽었다. 평소에 주건과 친한 육가가 문상을 갔다. 그랬는데 주건의 집은 너무도 가난해서 상(喪)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남에게 가서 상구(喪具)까지 빌리려 하고 있었다. 육가는 기가 찼다. 잠깐 궁리한 뒤에 우선 주건에에 상부터 발표하라고 했다. 그런 후 육가는 곧장 심이기한테로 갔다. "축하하오. 주건의 모친이 돌아가셨소." 심이기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별일이군. 주건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데 왜 나보고 축하한다 그러시오?" "전날 당신은 주건과 사귀고 싶어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그는 모친의 엄명으로 그대와 사귀지 못했던 거요. 그러나 이제는 모친이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정성껏 조의를 표하면 주건은 당신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을 거요." 옳은 얘기다 싶어 심이기는 조문한 뒤 부의금 백 금을 내었다. 그랬더니 다른 열후와 귀인들도 심이기의 체면을 보아 조문하고 후한 조의금까지 내었다. 도합 5백 금이나 걷혔다. 그것으로 주건은 후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어떤 자가 효혜제에게 심이기를 비방했다. 황실의 처지에서는 너저분한 사건이었기로 황제는 크게 노해서 심이기를 형리에게 넘겨 엄히 다스리라 했다. 여태후는 자신의 난행이 부끄러워 아무말도 못 하고 있었다. 심이기를 살리고 싶었으나 방법도 없었다. 대부분의 대신들 역시 심이기의 행실을 평소에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심이기가 주살되기를 바랐다. 심이기는 다급했다. 청렴.강직으로 소문난 평원군 주건이 간청만 해 주면 자신이 살아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건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렇지만 주건은 깨끗이 거절했다. "이미 끝난 판결을 가지고 그런 자를 만나 보면 무얼하겠소." 심이기는 분했다. 모친 사망 때 정성스런 조문까지 했는데 주건한테서 깨끗이 배신당한 것이다. 한편 주건은 엉뚱하게도 효혜제의 총신 굉적유(굉유가 옳음. 男娼으로 효혜제의 동성연애 상대자)를 만나러 갔다. "당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유를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지금 심이기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하여 형리에게 넘겨졌는데 길거리에서는 모두가 당신이 중상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라고 떠들고 있소." "내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이 없소. 지금 만일 심이기가 정작 죽게 되면 나중에 당신인들 온전할 수 있겠소?" "내가!" "여태후는 분명히 무슨 방법으로든 당신을 죽일 거요."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남겠소?" "그를 살려야 당신이 살아남소." "내가 무슨 힘으로......" "어째서 당신은 윗도리를 벗어 버리고 황제께 나아가 심이기를 위해 빌지 않소?" "그렇다면 심이기를 살려 주실까?" "폐하께선 틀림없이 당신의 간청을 들어 줄 거요. 어디 그뿐이겠소. 태후도 당신에게 몹시 감사할 거요. 결국 황제나 태후 모두가 당신을 총애하게 되어 당신의 부귀는 몇 배로 더 늘어나게 될 거요." 굉유는 속절없이 주건의 계략에 따라 황제에게로 가서 심이기의 죄를 빌었다. 과연 심이기는 석방되었다. 심이기는 처음에 주건을 몹시 원망했으나 그의 계략에 의해 풀려난 사실을 알고는 몹시 놀라고 또 주건에 대하여 감사했다. 여태후가 죽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주살했다. 그렇지만 심이기는 여씨 일족과 밀접한 관계였는데도 주살을 모면했다. 물론 육가와 주건의 힘 때문이었다. 심이기는 효문제 때 회남의 여왕에게 죽었다. 여씨 일족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효문제는 심이기의 빈객 주건이 한때 심이기를 위해 계책을 자주 세웠다는 소문을 들었다. 형리를 시켜 체포해 죄상을 규명하려 했다. 형리가 문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건이 자살하려 했다. 그러자 형리도 자식들도 모두 말렸다. "사건의 흑백도 가리지 않고 판결의 결과도 알 수 없는데 어찌 미리 자살하려 합니까?" "그것은 중요치가 않다. 내가 죽으면 화근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지." 그러고는 서슴없이 목을 찔러 죽었다. 효문제가 그 소식을 듣고 질색했다. "그를 죽일 생각이 도무지 없었는데......!" 그래서 즉시로 주건의 아들을 불러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아들은 흉노로 사신갔다가 무례한 선우(單于: 匈奴의 王)를 꾸짖고는 결국 흉노의 땅에서 죽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부터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앞줄까지는 후세인들이 첨보한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 유방이 병사를 이끌고 진류 땅을 지날 때 역이기가 군문(軍門)으로 가서 명자(名刺: 명함)를 내밀면서 말했다. "고양 땅 천민 역이기는 패공께서 햇빛에 바래지고 찬이슬을 맞으면서 군사를 이끌어 불의한 진나라를 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삼가 패공의 종자(從者) 제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며, 더불어 패공을 뵈옵고 직접 천하대사에 관한 양책(良策)을 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사자가 들어가서 그 뜻을 전했다. 패공은 발을 씻고 있다가 사자에게 물었다. "어떤 인물이더냐?" "용모로 보아서는 당당한 유자(儒者)인 것 같았습니다. 유자의 옷을 입고 측주(側注: 儒冠, 일면 高山冠)를 쓰고 있었습니다." "거절해라. 천하대사를 논의 중이니 유자를 만날 여유가 없다고 전해라." 사자가 나가서 전했다. "패공께서는 천하대사를 논의 중이셔서 유자를 만날 여가가 없다시며 사절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이기는 눈을 부릅뜨고 칼을 당겨 잡으면서 소리질렀다. "뭐야, 이놈아! 다시 들어가 패공께 말해라!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유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기겁한 사자가 명자를 손에서 떨어뜨렸다가 얼른 다시 주워 가지고는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객은 천하장사입니다. 저를 꾸짖는 바람에 너무 놀라 명자를 떨어뜨릴 정도였습니다. '이놈아, 다시 들어가 말해라. 나는 고양 땅의 술꾼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범상치가 않은 듯하다. 안으로 모셔라." 패공은 서둘러 발을 씻고 세모창을 짚고서 말했다. 역이기가 들어와 패공에게 읍했다. "귀하는 의복을 햇볕에 쬐고 관(冠)에 우로(雨露)를 맞으며 병사를 이끌어 불의의 진을 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 분이 어찌 혼쾌히 인재를 맞지 않으시는지요. 제가 대사(大事)를 가지고 뵙고자 했는데도, '천하대사를 논의 중이니 유자를 만날 여가가 없다'고요. 귀하께서 천하의 대사를 일으켜 그 공업을 성취하려 하시면서 사람의 거죽만 보고 인물을 판단하려 하시니 이래서는 천하의 능사(能事)는 모조리 잃고 맙니다. 제 생각으로는 귀하의 지혜는 저만 못하며 용기 또한 저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귀하께서 재능있는 저를 놓친다는 것은 곧 천하를 도모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됩니다." "사과하오. 아까는 선생의 용모를 들었으나 지금은 선생의 마음을 들었소이다." 유방은 역이기를 끌어들여 좌석에 앉게 하고, 어떻게 하면 천하를 얻겠는가고 물었다. "귀하께서 큰 공을 성취하시려면 진류에 머무는 것이 제일입니다. 진류는 천하 공격을 위한 최적의 요지로서 제후국의 병사가 모두 모이기 쉬운 곳입니다. 축적한 양곡이 수천만 석이고 성의 수비는 매우 견고합니다. 저는 본시 진류현 현령과는 친한 사이입니다. 그러니 귀하를 위해 그를 설득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귀하를 위하여 그를 죽이겠습니다. 귀하께서는 진류의 병사를 이끌고 진류 성에 웅거해 그 축적된 양곡을 군량으로 하여 귀하를 따르는 천하의 병사들을 부르십시오. 따르는 병사가 이미 모일 때 귀하는 천하를 횡행해도 아무도 귀하를 방해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말씀대로 따르겠소." 그래서 역이기는 밤을 도와 진류 현령을 만나러 갔다. "무릇 진나라는 무도한 정치를 했기로 천하가 배반한 거요. 지금 그대는 천하 제후와 합종함으로써 대공을 이룰 수가 있소. 혼자서 지금 망해 가는 진나라를 위해 농성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위태로운 일이라 생각하오." 그러자 진류 현령이 대꾸했다. "진의 법령은 엄하오. 망언을 해서는 안 되오. 그랬다간 일족이 몰살되는 것이오." "그래서 응할 수가 없다는 뜻이오?" "그렇소. 그대가 가르치는 바는 나의 뜻이 아니오. 두 번 다시 재촉하지 마오." 역이기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야반에 현령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성을 타고 넘어간 역이기는 유방에게 현령의 목과 함께 계략을 설명했다. 유방은 병사를 이끌어 성을 공격하면서 현령의 머리를 긴 장대에 매달아 성 안의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어서 항복하라. 보다시피 현령의 목은 이미 베었다. 지금 항복을 주저하는 자는 모조리 도륙할 것이다." 진류 성 사람들은 현령이 죽은 것을 보고 드디어 성문을 열어 패공에게 항복했다. 패공은 진류의 남성문(南城門) 부근에 숙영하면서 그 병기고의 무기를 접수하고, 축적된 양곡을 이용해 군사를 주둔시킨 것이 3개월. 따라서 모여든 군사가 수만이 되자 그제서야 관중으로 들어가 진을 격파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있는 역이기의 전기에는 대부분이 '한왕이 이미 삼진(三秦)을 함락시키고 동진하여 항우를 치고 공.낙양 사이로 철수하자 역이기가 유복(儒服)을 입고 가서 한왕에게 말했다'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패공이 관중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우과 작별하고 고양에 도착하여 역생의 형제를 얻었다'가 맞다. 지금 육가의 저서 <신어> 12편을 읽어 보니 참으로 당세 일류의 변사라 할 만하다. 주건의 아들은 나와 친교가 있었기로 평원군 주건을 상세히 기술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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