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2부. 문학과 이념의 거리
「도산십이곡」을 지은 동방유학의 스승, 이황
1. 세속과 자연의 갈림길에 서서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이황(1501~1570)을 두고 호암 문일평은 "불교사상에 원효가 대표자라면 유교사상에서는 퇴계가 대표자일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도 퇴계를 중국의 정주에 이어 유학의 정통을 잇는 한국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동방유학의 큰 스승인 퇴계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문인처럼 유학자이면서 문학자였다. 여기서는 문학인으로서의 퇴계에 관해 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
이황의 자는 경호요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산인이며, 본관은 진보이다. 그는 1501년 음력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 곧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의성 김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그런데 부인이 29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다시 춘천 박씨와 재혼하여 4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퇴계는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가르침과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자랐다. 왜냐하면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는 나이 40세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퇴계의 어머니는 32세에 과부가 되어 전처 소생의 자녀와 친자식을 혼자서 도맡아 길렀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농사와 누에치기로 집안 살림을 꾸리며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갔다. 퇴계는 아버지를 대신한 어머니로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퇴계가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분은 어머니"라고 했을 만큼 퇴계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에 못지 않은 훌륭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늘 자식들에게 "과부의 자식은 몇백 배 더 힘써야 조소를 받지 않는다" 면서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도록 훈계하였다. 퇴계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는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와 같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두 형제, 곧 퇴계와 그의 형인 해는 과거 대과에 급제하여 현달할 수 있었다.
퇴계의 생애를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한다. 첫번째는 대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학업에 몰두하던 수학기(1501~1534), 두번째는 3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비교적 순탄하게 중앙무대에서 벼슬을 하던 사환기(1534~1543), 세번째는 43세에 중앙정치의 폐해를 보고 벼슬을 단념하기로 마음먹은 뒤 귀향과 벼슬을 반복했던 학문과 벼슬의 반복기(1543~1549), 네번째는 50세 때 고향에 돌아와 한서암을 짓고 학문과 교육에 몰두하면서 70세로 임종하기까지의 학문전념기(1550~1570)가 그것이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퇴계는 일정한 스승을 두지 못하였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외에 그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던 분은 바로 숙부였던 송재 우이다. 퇴계는 12세에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는데, 송재공은 조카인 해와 황의 재주를 늘 칭찬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이우는 아들 수령과 두 조카 해와 황, 그리고 두 사위 조호연과 오언의를 청량산으로 보내 독서를 시켰다. 이 산은 그의 고향인 온혜리에서 약 4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의 5대조가 송안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산이다. 퇴계에게 청량산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는 중년에도 자주 이 산을 찾았으며 그의 제자들도 청량산을 좋아했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어찌하랴만 못 믿을손 백구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주자 알까 하노라
이 시조는 「도산십이곡」 외에 퇴계의 유일한 시조이다. 퇴계는 15세에도 숙부와 함께 이 산을 찾아가 공부하였다. 16세에는 사촌동생 수령과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퇴계의 나이 17세에 안동부사로 있던 그의 숙부마저 별세하였다. 이제 의지할 곳조차 없어진 그는 더욱 학업에 몰두하였다. 20세 전후에는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하여 병을 얻기도 하였다. 퇴계가 익히고 얻은 학문은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의 끊임없는 사색과 탐구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퇴계는 21세에 결혼한 뒤 23세에 서울의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주자전서』를 구해보았다. 이 책은 그에게 주자를 만나는 기쁨과 함께 본격적인 학문을 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후 27세까지 퇴계는 세 번의 과거를 보았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율곡 이이가 과거를 아홉 번 보아 모두 장원급제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퇴계는 분명히 '대기만성형 수재'였던 듯하다. 그는 27세부터 향시를 비롯하여 여러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34세에 드디어 대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가정의 불행도 함께 겪었다. 27세에 부인 허씨가 둘째 아들 채를 해산하고 죽게 되어, 30세에 권씨와 재혼하였다. 이처럼 퇴계는 가족들과의 이별이 잦아서, 가정적으로 상당히 불행한 삶을 살았던 듯하다.
퇴계는 과거에 합격한 뒤 승문원 부정자라는 벼슬에서 출발하여 43세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중앙무대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벼슬살이를 하던 중 37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고향에 내려가 3년상을 치렀다. 다시 중앙에 올라가 벼슬하던 그는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갈 결심을 하게 된다. 이 무렵 10년 연하의 친구 하서 김인후가 낙향하는 것을 보고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43세 되던 해 10월 종3품인 성균관사성에 오르자 성묘를 핑계삼아 고향에 내려갔다. 순탄하게 벼슬을 하던 퇴계가 귀향을 서두르게 된 것은 이미 어지러워지고 위태로운 조정의 당쟁과 분란 때문이었다. 더이상 중앙 관료생활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 것이다. 이후로 퇴계는 52세까지 벼슬살이와 고향에서의 학문 생활을 반복한다. 45세 되던 해에는 서울로 올라가 벼슬을 하던 중 을사사화가 일어나 이기에 의하여 벼슬이 삭직되는 아픔도 겪었지만 곧 복직되기도 하였다. 더 이상 벼슬에 뜻이 없어진 그는 46세에 병을 핑계로 다시 귀향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쪽가에 양진암을 세우고 독서와 사색의 학문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토계'를 '퇴계'라고 고쳐 부른 뒤 스스로 퇴계를 호로 삼았다. 퇴계에는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해에는 두번째 부인 권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상은 퇴계가 자연에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금 계속해서 벼슬을 제수받던 그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벗어나고 싶어 외직을 지망하였다. 47세에는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고향의 벼슬살이라 내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48세가 되어서야 충청도 단양군수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단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둘째 아들 채마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이태 전에 잃고 다시 자식을 잃은 그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집안 일로 가슴앓이를 하던 퇴계는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자원하여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형제가 한 고을에 벼슬을 하지 않던 관례를 그가 지켰기 때문이다. 단양에서의 근무는 9개월로 끝났다. 그러나 이때 퇴계는 관기 두향과 따뜻한 정을 나누었던 듯하다. 엄격한 도학자인 퇴계에 어울리지 않을 이러한 로맨스는 소설가 정비석에 의하여 소설화(『명기열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과 사랑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상상으로만 그칠 뿐이다. 이것을 양반 사대부의 호기로운 연애담으로 보지 않고, 중년의 도학자가 한 여인을 통하여 마음의 상처를 위로받은 만남쯤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두향은 퇴계가 풍기군수로 전근 가자 평생 수절하면서 그를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중 퇴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선대 기슭에 묻어 달라고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나중에 충주댐이 생기면서 그곳은 물에 잠기게 되었고 퇴계의 후손들이 그 묘소를 찾아내어, 단양 팔경 가운데 하나인 옥순봉의 맞은편 제비봉 기슭에 이장하였다. 퇴계의 후손들은 해마다 퇴계의 제향이 끝난 뒤 두향지묘라는 묘표가 있는 곳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다음은 정비석이 소개했던 영조 때 문인 이광려의 '두향시'이다.
외로운 무덤이 국도변에 있어 흩어진 모래에 꽃이 붉게 비추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강선대의 바위도 없어지리라.
도산서원에서 학문에 몰두하다 단양에 있을 때 백성들의 흉년을 구제하고 단양천에 둑을 막아 수리사업에 힘썼던 퇴계는, 풍기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마련하였다. 풍기는 고려 말 주자학의 시조인 순흥 태생의 안향이 공부하던 곳으로, 전임 군수 주세붕이 그곳에 백운동서원을 창설했었다. 그런데 퇴계는 이 서원에 편액과 서적, 그리고 공부할 땅을 조정에 청원하여 하사받은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렸으나 회답이 없자 명을 기다리지 않고 근무한 지 1년 2개월 만에 그만둔 것이다. 50세가 되던 새해에 퇴계는 감사로부터 2계급 강등 처분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제는 살 것 같다고 기뻐했다 한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퇴계 냇가에 한서암을 짓고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해에 퇴계는 가장 가까이 따르고 친했던 형인 온계 해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형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주동자 이기를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고 매를 맞아 유배를 가는 도중 양주에서 죽었다. 일찍이 충청감사로 부임하던 형을 퇴계는 풍기군수로 전근 간 뒤 죽령의 촉령대의 소혼교에서 맞이하여 배웅한 바 있다. 퇴계는 이때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천지 개벽할 때 축대를 만들어 우리 형님 감사 행차 맞이하고 보내노라. 맑은 물소리는 반가운 정 넘치는 듯 우뚝 솟은 봉우리는 이별의 한을 쌓는구나. 안영협 골짜기에 둘로 나뉘 그림자 소혼교 위에 애끊는 그때 심정 험한 재를 부디 잘 넘으시고 명년 다시 오실 언약 저버리지 마소서.
그러나 이 시는 이별의 마지막 노래가 되고 말았다. 이듬해 형이 죽었기 때문이다. 소혼교 위치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현재 퇴계학회 경북지부가 세운 '퇴계선생 죽령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퇴계가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일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은퇴 후 2년이 지난 52세 때 다시 조정에서는 퇴계를 홍문관 교리로 임명하였다. 3년 11개월의 비교적 긴 벼슬살이를 거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오르자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처럼 벼슬에 임명받은 뒤 나아가지 않거나 사퇴를 한 것이 43세 이후로 무려 20여 차례나 된다. 이러한 형식적인 임명과 사퇴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말년에 퇴계가 이처럼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학문과 교육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퇴계가 50대 이후에 탁월한 연구와 저술서를 내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며, 이는 그가 고향에서 암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60세에는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한서암이 비좁아지자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퇴계는 호를 '도옹'이라 하고, 이 서당을 중심으로 후진을 지도하고 학문과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명종이 자주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퇴계가 67세 되던 해, 명나라에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고 사절단이 우리나라에 오자 조정에서는 사신의 영접을 위하여 또다시 퇴계를 불렀다. 하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갔던 그는 그것도 잠시뿐(2개월) 또다시 병으로 귀향을 하고 말았다. 새로이 임금에 오른 선조는 퇴계의 명성을 듣고 그를 간곡히 불렀고, 68세의 나이에 그는 다시 의정부우찬성을 제수받아 서울로 갔다. 이때 그는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으며,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가 된 퇴계는 이조판서의 벼슬을 물리치고 왕에게 귀향을 허락받았다. 고향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던 퇴계는 1570년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종가의 시제에 무리를 하여 병을 얻었다가 악화되어 음력 12월 8일 오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정에서는 사흘 동안 정사를 피하고 영의정의 예로 장사를 치렀다. 무덤에는 그의 유언대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 새긴 묘비만이 세워졌다.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제자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575년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서액이 내려졌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인데, 영남 유림들의 정신적인 중추 구실을 하고 있다. 1969년과 1970년에 걸쳐 정부가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성역화하였는데, 현재 이 서원은 사적 제 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퇴계의 문학과 「도산십이곡」
퇴계는 뛰어난 성리학자이면서도 2천여 수에 달하는 한시와 시조 등을 남겼다. 그 동안 학계에서도 유학자로서 퇴계의 학문에 대한 논의와 함께 문학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를 통하여 퇴계는 자신의 문학 행위를 다름 아닌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색했음이 확인되었다. 조선조 대부분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퇴계 역시 문학을 단순히 하나의 여기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정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시 퇴계는 평생 도학을 일으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가 벼슬을 사양하고 굳이 고향의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것은 자연과의 화합을 체험하고 심성을 기름으로써 학문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문학이 이러한 심신의 함양과 계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변치 않는 자연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깨우치고, 자연은 사물과 자신과의 간격, 안팎, 거칠고 세밀함의 구분이 없는 상태를 느끼게 해준다고 보았다. 곧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서 만물의 원리요 핵심인 이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물아일체의 즐거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도의의 근본을 체득한 감격으로 이해하였다.
청산은 엇뎨하야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엇뎨하야 주야에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호리라. - 「도산십이곡」, 5
누르고 탁한 물이 도도히 흐르면 형체를 감추고 고요한 물이 잔잔히 흐를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가련하구나, 이와 같이 거센 물결 속에서 견디며 천고의 반타석은 굴러서 기울어지지 않는구나. - 「반타석」
첫번째 시조를 보면 만고에 푸른 청산과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흐르는 물을 보면서 그러한 자연과 일체를 이루면, 세상에 혼탁해진 마음이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도의의 근본이 드러나게 된다고 노래한다. 이러한 의식은 두번째 한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탁한 물과 고요한 물의 대비를 통하여 자연의 참된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천고의 세월에도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반타석을 예찬하고 있다. 이 돌은 자연의 질서이며 우주의 원리인 도의요 이가 된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찾아지는 아름다움을 사람이 본 받을 때 비로소 심성이 고와지고 학문은 완성될 수 있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노래한 이러한 시를 읊으면서 퇴계는 심성을 도야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가 생각하는 문학은 본격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문장의 수식에 힘쓰거나 과거를 위한 글을 배격하였다. 문장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이지 그 자체로서 숭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시는 사람의 심성을 기르는데 소중하다고 했다.
시는 비록 말기이나, 성정에 근본을 두며 체와 격이 있으므로 참으로 쉽게 여겨 할 수가 없다. (글을 쓰는) 일은 능하다 해도 계속 익혀야 하는데, 더욱이 말을 조심해서 하거나 마음의 도를 수습하는 데 방해가 되니, 마땅히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마땅히 고금명가의 저작을 취해서 착실하게 공들여 스승으로 삼고 본받으면, 타락하지 않는 데 가깝게 된다. - 「여정자정」
퇴계는 시가 비록 말단의 기예이나 성정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문학을 독창적인 창작으로까지 나아가게 함을 반대하고 있다. 고금명가의 저작물들을 익히고 배워서 그것을 본받아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퇴계는 유학의 경전뿐만 아니라, 도잠(도연명)과 주희(주자)의 시를 좋아하여 늘 애송하였다고 한다. 그가 고금의 성현이 쓴 경전이나 시에 의거하여 시를 지으려 했다는 데서 그의 문학사적 의의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나 학문적 영향을 크게 받았던 영남의 사대부들에게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국문 시가만을 보더라도 퇴계 이후의 영남문인들(영남가단)에게는 도학적인 분위기와 지나치게 고전의 전거에 치우친 작품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퇴계가 시를 짓고 시를 중시한 것은 이처럼 성리학적 도리인 이를 실현함으로써 성정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시가 본질적으로 갖는 감흥, 즉 내면적 정서의 고양을 통하여 도의를 실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목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퇴계의 시 창작은 곧 학문적인 수양의 방편이었던 셈이다. 그는 "『시경』을 배워야 이학을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시란 학문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거나 조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시가 성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창작되는 시에 담긴 내용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면 안된다.
훌륭한 곡식은 돌피 익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는 티끌도 오히려 거울 닦는 산뜻함을 해치게 되니, 정에 지나친 시어는 모름지기 깎아버릴 것이요, 노력해서 공부하여 각자 날마다 새로울지니라. - 「증이숙헌」
퇴계는 율곡 이이에게 이 시를 주었다. 이 시에서 그는 정에 지나친 시어는 성정의 도야에 해가 된다고 하였다. 정이 지나치다는 것은 마치 산뜻하게 닦인 거울을 더럽게 하는 행위와 같다고 보았다. 퇴계는「도산십이곡」의 발문에서 교만하고 방탕하며 아울러 비루하게 희롱하고 친압하거나, 세상을 희롱하는 불손한 것을 배격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시가 갖는 서정적 측면인 감정의 발로를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퇴계의 시는 "활기가 없고 담담"하다거나 "차갑고 담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의 시를 보면, 자연을 대할 때 일어나는 감흥을 노래한 것이 많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규범성'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의 감흥은 단순히 술과 노래와 춤을 통해 일어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눈에 가득한 뭇 봉우리들이 나를 맞이하기에 기뻐하고 치솟는 구름이 모습을 지어 맑은 읊조림을 돕는구나. - 「약여제인유청량산마상작」
요즈음 나 스스로 깨닫노니, 시내와 산이 도와서 시골은 우뚝하고 붓은 술 솟는 샘이로다. - 「춘천향양구」
그것은 이들 시에서처럼 자연을 대할 때 일어나는 순수한 기쁨이다. 퇴계는 자신이 말년에 거처한 도산을 시로 읊은 뒤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길러서 즐긴다"고 하였다. 그가 자연을 대하면서 얼마나 즐거워하고, 자연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를 다시 한번 짐작하게 한다. 자연과 자아가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은 순수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자연의 경치는 하나가 되어 한 편의 시를 이룬다. 자연을 매개로 한 시가 도의와 성정을 가꿀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춘풍에 화만산하고 추야에 월만대라 사시 가흥이 사람과 한 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 운영천광이야 어늬 끝이 있을고 - 「도산십이곡」, 6
퇴계는 이 시조에서 자연과 인간의 성질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곧 중장에서 "사시가흥이 사람과 한가지"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자연의 본성은 지극히 선한 것이니 인간의 본성도 역시 선할 것이다.
국문 시가에 대한 진정한 인식 퇴계의 문학에 대한 생각은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의 창작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한시와 시조가 성정을 기르는 데 같은 구실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시조 「도산십이곡」 발문은 그의 시가에 대한 생각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의 노래는 대부분 음란하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한림별곡류나 이별의 「육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들 작품이 지니는 내용적인 문제를 들어 비판하였다. 그 문제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천박하며 세상을 희롱하는 불손함을 지칭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인들이 우리말로 노래를 지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이별의 「육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해 내려오는 「어부가」계열의 작품을 몸소 수집하면서 농암 이현보가 지은 「어부가」를 "강호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칭찬하였다. 이 발문에서 중요한 것은 퇴계의 국문 시가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한시는 노래로 부를 수 없고 읊는 데 그쳐야 하지만 시조는 노래로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시조의 중요성을 그가 인정한 것이며, 성정을 기르는 데도 시조가 훨씬 긴요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문에 그는 이 시조를 지은 뒤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춤을 추게 하여 일어나는 감흥을 정서적으로 서로 통하도록 하였다. 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효과를 그가 통찰한 셈이다. 이러한 국문 시가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퇴계 이후에도 많은 선각자들이 깨달았는데, 홍만종이나 김만중에게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런 점에서 퇴계의 이 발언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지은 12수의 연시조로서 발문에 의하면, 이 시조는 그의 나이 65세 곧 1565년(명종 20)에 쓴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전육곡과 후육곡으로 나누고 전자를 '언지', 후자를 '언학'으로 불렀다. 이 가운데 언지는 천석고황의 강호에 은거하면서 성현의 도를 체득해 가는 보람과 기쁨을 읊었고, 언학은 학문과 수양을 통한 성정의 순수함을 읊었다. 이 시조에 등장하는 자연들은 모두 천리와 구의 구현물이다. 그는 자연에 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속에 담긴 도를 터득함으로써 자연합일,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는 후에 사림파 시가의 지표가 되었거니와, 이 시조의 목판본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3. 시조 감상
퇴계의 국문 시가는 「도산십이곡」이 중요하다. 원문을 제시하되 가능한 한 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대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시조의 발문도 함께 싣는다. 그것은 퇴계의 국문 시가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문학관을 아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원문은 한자로 적혀 있지만 여기서는 괄호 안에 넣고 음을 먼저 달았다.
도산십이곡발 「도산십이곡」은 도산노인(이황)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것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노래 곡조는 대부분 음란하여 족히 말할 것이 없다. 한림별곡류는 입에서 나왔으나 교만하고 방탕하며 아울러 비루하게 희롱하고 친압하여, 더욱이 군자가 숭상할 바는 아니다. 오직 근세에는 이별의「육가」가 세상에 유행하는데, 그것이 이것(한림별곡류)보다 더 좋다고는 하나 세상을 희롱하는 불공한 뜻이 있고, 온유돈후한 내실이 적음을 애석하게 여긴다. 노인은 볼래 음률을 모르며, 세속의 음악은 오히려 듣기를 싫어했으나, 한가하게 살면서 병을 요양하는 여가에, 무릇 정성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으면 번번이 시로 나타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서, 읊기는 해도 노래로 부를 수는 없으므로 노래로 부르려고 하면 반드시 이속의 말로 엮어야 한다. 대개 국속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이별의 「육가」를 본떠서 「도산육곡」을 2편 지었다. 그 하나는 '언지'이고, 그 둘은 '언학'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익혀서 부르게 하고, 궤석에 기대어 듣는다. 또한 아이들을 시켜서 스스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뛰게 하여, 비루한 마음을 다 씻어버리고 감흥이 일어나 마음이 서로 흡족하게 통한다. 노래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유익함이 없을 수 없다. 돌아보니 스스로 발자취가 자못 어그러져 있으니, 이처럼 한가로운 일이 어쩌면 시끄러운 실마리를 일으킬지를 알지 못하겠다. 또 그것이 강조에 들어가 음절에 맞을지 맞지 않을지를 알지 못하겠다. 임시로 하나를 베껴 협사에 넣어두고 때때로 가져다가 즐겨 스스로 돌이켜 살피면서, 또 다른 날에 보는 이가 이것을 버리거나 혹은 취하여 가지기를 기다린다. 가정 44년 을축년(1565, 명종 20) 늦은 봄 16일에 산노(이황)는 쓴다.
도산십이곡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료 초야 우생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물며 천석 고황을 고쳐 무삼하료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버들 삼아 태평성대예 병으로 늘거 가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업고쟈
순풍이 죽다 하니 진실로 거즈마리 인성이 어디다 하니 진실로 올흔마리 천하에 허다영재를 속여 말솜할가
유란이 재곡하니 자연이 듣디 됴해 백운이 재산하니 자연이 보디 됴해 이 중에 피일미인을 더옥 닛디 몯하얘
산전에 유대하고 대하애 유수로다 떼 많은 갈매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다 교교백구는 멀리 마음 하는고
춘풍에 화만산하고 추야에 월만대라 사시 가흥이 사람과 한 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 운영천광이야 어늬 끝이 있을고
천운대 도라드러 완락재 소쇄한데 만권 생애로 악사 무궁하얘라 이 중에 왕래풍류를 닐어 므슴할고
뇌정이 파산하야도 농자는 못 듣나니 백일이 중천하야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 총명 남자로 농고 같지 마로리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당시예 녀든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야 도라운고 이제나 도라오나니 년듸 마음 마로리
청산은 엇뎨하야 만고애 푸르르며 유수는 엇뎨하야 주야애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 호리라
우부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듕에 늙는 줄을 몰래라
작품 해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말년에 치사하고 고향에 내려와 도산서당에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퇴계는 60세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모두 48수의 「도산잡영」을 지었으며, 그것에 대한 기문을 61세에 붙였다. 그리고 우리말로 「도산십이곡」을 지었는데, 발문에 의하면 65세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당과 거기서의 생활을 한시 「도산잡영」과 산문 「도산기」, 그리고 국문의 노래 「도산십이곡」으로 지은 것이다. 한시와 산문으로 읊고 기술한 것을 굳이 국문의 노래로 읊은 것은, 발문에서 밝힌 대로 마음의 느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한시는 읊조릴 수 있지만 노래할 수 없어서, 노래하고 싶을 때는 우리말로 엮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고전문학의 국문 시가가 대체로 가창되어 왔으니, 대유학자의 이러한 진술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고전시조는 대개 유흥적, 유희적 공간에서 불렸고 창작되어 왔다. 그러나 퇴계의「도산십이곡」은 이러한 시조 창작과 전승의 일반적, 보편적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발문을 통해 확인한 바 있지만, 퇴계는 한림별곡류와 조선시대 초기 이별의 「육가」를 유흥적이고 세상을 희롱한다는 이유를 들어 나름대로 비판을 가하였다. 퇴계는 그러한 전통 시가의 내용적인 측면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내면적인 윤리와 질서의 엄격함을 유지하는 내용의 국문 시가를 지었다. 한마디로 유흥적이 아닌 진지하고 본격적인 문학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고전 시가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퇴계는 자연과의 친화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감흥을 표현했고, 그것을 노래로 부르기 위하여 「도산십이곡」을 지었다. 그러므로 퇴계는 부르는 자나 듣는 자가 이 노래의 효용성 때문에 더러움을 씻어내고 서로 감흥이 일어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노래의 기능은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데 있다'는 퇴계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12곡으로 된 연시조 형태의 평시조「도산십이곡」은 발문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육곡과 후육곡으로 나뉜다. 그리고 전육곡은 '언지'로 불리며, 후육곡은 '언학'으로 불린다. 언지는 사물에 접하는 감흥을 읊은 것이고, 언학은 학문과 수양에 임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니, 이들 시는 퇴계가 말년에 이룩한 원숙한 수양과 학문의 정신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조의 내용을 보면, 먼저 첫번째 수에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고 싶은 마음의 고질병을 고칠 수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두번째 수에서는 연기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을 벗 삼아 태평한 세월에 병으로 늙어가니 다만 허물이나 없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한다. 연기 노을은 여기서 자연의 풍치를 말하며 바람과 달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함이니, 작자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할 것이다. 세번째 수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순박한 풍속이 죽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며 사람의 본성이 어질다는 말은 옳은 말이니, 이 진실을 천하 영재에게 속여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퇴계가 순박한 풍속과 사람의 본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인성이 세상에 그대로 드러날 때 순풍이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네번째 수에서는 난이 골짜기에 있으니 자연히 듣기 좋고 흰 구름이 산봉우리에 걸리니 자연히 보기 좋다면서 이 가운데 아름다운 임을 잊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유란과 백운은 자연물인데, 퇴계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미인, 즉 임금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심화시키고 있다. 다섯번째 수에서는 산 앞에는 낚시터요,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많은 갈매기가 오고 가는데 어찌하여 하얀 망아지는 멀리 마음을 두는지 모르겠다고 노래한다. 산수가 자유자재하며 갈매기가 왕래하고 있지만, 망아지는 이를 버리고 다른 데 뜻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갈매기는 자연에 합일되는 자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망아지는 이에 합일되지 못하는 자아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여섯번째 수에서는 봄바람에 꽃이 온 산 가득이요 가을밤에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니 이는 네 계절의 흥취가 사람과 똑같은 것인데, 연못에 띄는 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처럼 인재들이 가득하고 구름의 그림자며 햇빛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야 어디 끝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꽃과 산, 그리고 달과 누각이 하나이며 이러한 사시의 흥취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결국 작가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합일의 상태를 긍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일곱번째 수에서는 완락재도 깨끗한데 책 속에 묻힌 생애로 즐거움이 무궁하며, 소요하는 즐거움도 대단함을 밝히고 있다. 천운대는 도산서원 근처의 경치 좋은 곳이며 완락재는 퇴계의 서재를 가리킨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 속에 둘러싸인 서재에서 학문하는 생애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여덟번째 수에서는 천둥소리가 산을 무너뜨려도 귀머거리는 못 듣고 밝은 해가 중천에 있어도 소경은 볼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귀눈 밝은 사람이 되어 소경과 귀머거리가 되지 말자고 노래한다. 여기서 "이목이 총명한 사람"이란 학문의 도를 닦아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아홉번째 수에서는 옛 성인이 못 보았던 길이 내 앞에도 있음을 확인하고, 자기가 이 길을 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옛 성인이 가던 길은 곧 변치 않는 도를 말함인데, 작가는 여기서 성인이 닦으려던 인간의 도리를 작가도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열번째 수에서는 성인이 추구했던 도리의 탐구를 몇 해 동안 그만두었다가 이제야 돌아왔으니, 다시는 다른 곳에 마음을 돌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길'이 벼슬살이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학문하는 일이었음을 여기서 노래하고 있다. 열한번째 수에서는 푸른 산이 만고에 항상 푸르며 흐르는 물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학문하는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에 푸르자고 다짐하고 있다. 산과 물의 변하지 않는 속성, 즉 불변의 미덕을 본받아 사람들도 학문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에서는 인간 본연의 도리는 어찌보면 어리석은 자도 쉽게 알 수 있고 성인조차 모를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알 듯 말 듯한 이러한 인간의 도리를 닦으면서 늙어간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는 곧 끊임없는 학문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마지막 노래에서 작가는 우부와 성인이 인간의 도리를 닦는다는 점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로 미루어 그는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합일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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