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2부. 문학과 이념의 거리
『삼국유사』의 위대한 서사시인, 일연
1. 스님의 행적을 밟으며
일연(1206~1289)이 찬술한 『삼국유사』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해서는 역사학, 국문학, 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쳐 실증적이고 치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일연에 대해 승려로서 그가 찬술한 저서를 중시하여 불교적 측면에서 그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사적 위치 등을 밝히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일연이 생존한 시기는 무신의 난 이후 대몽 항쟁기를 거쳐 원나라의 지배기로 이어지는 격동기라는 점, 그가 충렬왕의 비호 아래 당대의 불교계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교의 중흥에 힘쓰다 일연의 성은 김씨이며 처음의 법명은 견명으로,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언필은 미미한 한직을 거친 것으로 보아 지방의 향리층이었던 듯하다. 일연은 9세에 지금의 광주 땅인 해양 무량사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본격적인 승려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14세 되던 해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대웅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그가 본격적인 승려 생활을 시작한 진전사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의 속칭 탑골에 있다. 이 절은 본래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가 은거하던 사찰이었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밭 가운데 삼층석탑이 서 있을 뿐이다. 일연은 22세 되던 해인 1227년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 곧 장원에 급제하였다. 이후의 일연의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포산의 여러 사찰에서 지내던 시기(1227~1248), 둘째 정안의 초청에 의하여 남해 정림사에 거주하던 시기(1249~1260), 셋째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한 후 경상도 지역의 오어사, 인홍사 등지에서 주석하던 시기(1261~1276), 넷째 충렬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 주석하다가 그 뒤 국존에 책봉되고 인각사에서 입적한 말년까지의 시기(1277~1289)가 그것이다.
일연은 승과에 합격한 뒤 포산, 지금의 경북 현풍의 비슬산 보당암으로 옮겨 여러 해 동안 머무르며 참선에 몰두하였다. 1236년 10월 몽고가 고려에 침입하여 전주의 고부까지 이르자 병화를 피하여 무주암으로 옮겼다. 이때 그곳에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아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1237년에는 거처를 묘문암으로 옮겼는데, 이 해에 나라에서는 일연에게 삼중대사의 계급을 내렸다. 그리고 1246년에는 다시 선사가 되었다. 일연이 현풍 비슬산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던 이 시기는 대몽 항쟁기로, 최충헌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최우가 집권하던 때였다.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와 싸웠으며, 1245년에 선원사를 세워 그곳에서 두번째 대장경을 주조하였다. 그러나 일연은 약 22년간 비슬산에서 보내면서 뚜렷한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외침에 대하여 그와 그가 속한 선종인 가지산문의 소극적인 대응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1249년에 정안은 남해에 있던 자신의 사저를 정림사로 삼고 일연을 초대하였다. 정안의 부친은 최우의 장인인 탓에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실력가였다. 그러나 정안은 최우의 전횡을 싫어하여 남해에 은거하였고 사재를 희사하여 대장경 간행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최우가 죽은 뒤 최항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일연은 정림사에 머무르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의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일연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을 피하여 수행에 전념하다가, 정안과의 관계를 계기로 중앙의 정치무대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하여 일연은 최씨 정권의 마지막 실력자 최의를 제거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박송비의 지원으로, 1259년(고종 46) 그의 나이 54세에 대선사가 되었다. 이때는 대내외적으로 정치적인 격변기에 해당한다. 새로 즉위한 원종은 최씨 정권이 붕괴된 뒤 몽고에 항복하면서 화해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연은 1261년(원종 2) 왕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선월사는 아마도 최우가 세웠던 선원사임에 틀림없다. 이 절은 고려 당시에는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로 꼽혔지만, 조선 초에 이미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강화도의 선월사에 거주하면서 일연은 목우화상 지눌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자처하였다. 나아가 자신이 속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는 왕에게 간청하여 가지산문의 근거지인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찰에 거주하였다. 먼저 그는 1264년에 경북 영일군 운제산에 있는 오어사(지금의 영일군 대송면 항사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비슬산 인홍사의 주지 만회가 그 주석을 양보하므로 일연은 그 절의 주지가 되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1268년에는 조정에서 왕명으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백 명을 불러 개경의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를 베풀었을 때, 일연이 그 법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인홍사를 중수하면서 충렬왕으로부터 친필 사액을 받아 인홍사로 개명하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비슬산의 용천사를 중수하여 불일사로 고쳤다. 이처럼 그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삼국유사』를 집필하다 일연은 그의 나이 72세인 1277년부터 충렬왕의 명에 의하여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1281년까지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듯하다.『삼국유사』의 정확한 집필 연대는 알 수 없는데, 학자들마다 그 추정 연대가 조금씩 다르다. 운문사에 머물던 시기에 썼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인각사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짐작컨애 일연은 남해의 정림사에 있을 때부터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곳 운문사에서 문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삼국유사』의 대부분을 집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인각사에서 이루어졌으리라. 『삼국유사』가 집필된 곳으로 여겨지는 운문사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560년 신라시대 때 한 승려에 의해 지어졌고 608년 원광법사가 크게 중건하였다. 그 후 거의 폐사가 되다시피했는데, 후삼국시대에 신라의 고승인 보양 스님이 중창하고 작갑사라하였다. 보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밀양의 봉성사에 있다가 청도까지 내려온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왔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이후로 이 절은 운문사로 불렸다. 보양 스님과 운문사의 관계는 『삼국유사』의 「보양이목」 조에 자세히 전해온다. 그 후 고려에 와서는 다시 원응국사가 1129년(인종 7)에 기거하면서 중창하여 당시로서는 밭 2백 결에 노비 5백 명을 둘 정도로 절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무신의 난 이후 운문사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 사찰의 화려한 영광도 끝나고 만다. 그들은 운문산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조직하여 관군에 완강히 저항하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당대의 대문호인 이규보도 이때 종군하였다. 반란이 끝나고 몽고의 간섭기로 들어가면서 일연은 1277년에 운문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내려왔다. 이곳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이미 지적한 대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가지산문을 크게 일으키면서 교육에 힘썼다.
몽고가 일본을 원정하기 위하여 고려에 많은 물자와 병사를 징발하는 어려운 수탈의 시기에 『삼국유사』를 집필하던 일연은 1281년(충렬왕 7) 6월에 충렬왕이 이러한 정벌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경주에 내려왔을 때 왕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왕의 행재소에 1년간 있다가 다시 왕의 간곡한 요청으로 개경의 광명사로 올라가 머무르면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국존'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연은 비록 출가한 몸이었지만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여 왕에게 옛 절로 돌아가기를 간청한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절 아래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가 96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가까이서 모셨다. 일연이 얼마나 인간적인 정이 넘쳤는지 알 수 있는 일화다. 모친이 죽은 1284년에 조정에서는 의흥, 곧 지금의 군위군 화산의 인각사를 수리하고 땅을 하사하여 일연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인각사에서 당시의 선문을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두번이나 개최했는데, 그 규모는 일찍이 유례가 없었다. 이는 일연이 속한 가지산문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의 선종계, 나아가 불교계의 전체 교권을 장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연은 충렬왕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의 교단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고려 말기에는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연은 1289년 6월에 병이 들었다. 그리고 7월 7일 왕에게 올리는 글을 쓴 뒤 다음날 입적하였다. 향년 84세였다. 나라에서는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해 10월에는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이 세워졌다. 인각사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의 고승 원효가 창건하였는데, 절 입구의 바위가 흡사 기린이 뿔을 얹은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웠다 한다. 이 절은 일연이 중창한 뒤로 조선 중기까지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할 정도로 크게 번성하였으나, 그 뒤로는 쇠락하여 지금은 법당과 두 동의 요사채만 있다. 지난 1996년 7월경에는 이 절에서 주지를 공모하여 중흥을 꾀하는 노력을 보임으로써 불교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일연의 부도와 비는 본래 절에서 떨어진 마을 뒷산의 부도골에 있었던 것인데, 한말(1898~1910년경)에 일본인들이 사리를 훔치면서 파손되었다고 하며, 부도는 196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석은 두 동강이 나 심하게 손상된 채로 절의 경내에 남아 있는데, 비문의 글자체는 왕희지의 행서와 초서체를 집자하여 새겨진 것이다. 이 때문에 그 탁본이 서첩용으로 널리 유행하였으며, 금석학 연구자들의 관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 동안 이 비 전체 내용의 부분적인 영인과 탁본이 소개되어 그 완전한 면을 알 수 없었지만, 최근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완전한 탁본이 영인되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비문은 고려 당대의 문장가인 민지가 찬한 것이며, 그 뒷면에 있는 비음기는 일연의 제자인 진정대선사 청분(곧 혼구, 1251~1322)이 1295년(충렬왕 21)에 스승의 행장과 함께 이 비를 건립함녀서 찬술한 것이다. 이 비음기 역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이 비음기 비문에는 일연의 생애가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비음기에는 그 밖에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즉 일연은 입적한 뒤에 사람들이 그의 사리탑을 세울 때, "인각사에서 5리 떨어진 숲속에 고총처럼 생긴 곳이 길상의 땅이므로 안치할 만하다"고 일러주는 영험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탑은 애초에 놓여 있던 곳으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원래의 장소가 일연이 말한 대로 길지이기 때문이다.
2. 『삼국유사』의 특징과 국문학사적 업적
일연과 국문학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는 『삼국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선승 일연의 선시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아마도 그의 시가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학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삼국유사』속에 있는 각종 설화와 그가 지은 찬시를 거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그 특징을 살펴보자.
민족문화의 보고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일연이 말년에 찬술한 것으로,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개 그가 운문사에 주석한 70대 후반부터 84세로 세상을 떠나기전까지 집필했다고 보는데, 집필 자료는 젊어서부터 수집된 것이었다. 이 책은 그의 제자 무극에 의해 1310년대에 간행되었는데, 그것이 초간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현재 보물 제419호로 지정된 송은본은 완본이 아니고 3, 4, 5권만 남아 있다. 1512년(중종 7)에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 또는 정덕본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인쇄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한다. 5권의 완본인 순암수택본은 이계복이 판각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된 것으로 순암 안정복이 소장하면서 가필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 이마니시가 1916년부터 소장하였는데, 현재는 일본의 텐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귀중분으로 남아 전해온다.
『삼국유사』는 전체가 5권 2책이며, 여기에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며, 「기이편」(57항목)은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로 분량이 가장 많아서 1,2권에 이어진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이유를 밝히는 서문이 있다. 「흥법편」(6항목)에는 삼국의 불교 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이, 「탑상편」(31항목)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이, 「의해편」(14항목)에는 신라 고승들에 대한 전기가, 「신주편」(3항목)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이야기가, 「감통편」(10항목)에는 신앙의 신령한 이적담이, 「피은편」(10항목)에는 현실을 초탈한 고고한 인물의 행적이, 「효선편」(5항목)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담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제는 정사인 『삼국사기』나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과도 다르다. 이 책은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의 영향을 받았지만 「왕력편」, 「기이편」, 「효선편」 등은 중국의 것들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며, 또한 삼국의 불교를 전반적으로 포괄한 불교사서도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의 성격을 역사서나 불교사서로 특별히 한정시킬 수는 없다. 한마디로 일연이 관심을 가진 분야와 그에 관한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하고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 불교사서, 설화집, 잡록적 사서, 야사 등의 지적이 나온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먼저 사학사적 측면의 경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사에 관한 사서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사기』가 왕명에 의한 관찬사서라 한다면 『삼국유사』는 개인이 편찬한 사서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을 엄밀히 구분하면서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곧 일단 전거를 밝혀 인용하면서 거기에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일연은 이 책의 집필을 위해 많은 사료를 수집하였다. 심지어 향전과 같은 민간 전승기록을 참조하거나 자신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 책에는 역사, 불교, 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 사지, 비갈, 인첩 등의 고문적에 이르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었다. 특히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사서적 측면을 지니는 『삼국유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인다는 점이다. 개국신화로서 단군신화를 맨 처음 거론하면서 단군을 중국의 요나라와 동시대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일연은 한국사의 기원에 대하여 '고조선-위만조선-마한'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한국사의 자주적 역사 전개 과정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체계는 유학자들의 사고방식이나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적 사관과는 다른 것으로, 그 후 우리나라의 통사에 오랫동안 적용되었다. 둘째, 강한 민족의식과 이에 따른 서민 전통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재평가를 하고 있다. 일연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과시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국가와 왕권에 대해 기술하면서도 서민생활과 그 문화에 대한 서술의 양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일연이 살았던 당대의 귀족적이고 고답적인 문화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 소산이다. 동시에 원나라의 정치적인 간섭이 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주체적인 저항 의식의 발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사실에는 신이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일연은「기이편」 서문에서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합리주의를 반대하면서, "장차 제왕이 일어날 때는 부명과 도록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남보다 다른 일이 있음"을 전제하였다. 그리고 중국 고대 제왕들의 신이한 일들을 소개한 뒤에 "우리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하게 탄생한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자국의 역사 전통의 자주적 대등성을 말하는 일이며,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한 적극적, 긍정적 인식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은 당대의 신진사류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며,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도 그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삼국유사』의 가치를 역사 속의 신이한 일을 기술하지 않은 『삼국사기』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넷째, 불교사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삼국유사』에는 전체적으로 일종의 불국토사상이 흐르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을 제석으로 보았고, 신라의 왕통을 불타와 같은 종족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와 고구려가 전세에 불국토였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의 불교사서, 고승전, 불교설화집, 탑상 및 사찰연기집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고대의 불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력」과 「기이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7편이 불교와 관계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의 연구를 위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기도 하다. 바로 「탑상편」은 불교사찰, 탑, 불상에 대한 기본 사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불교 자료는 고고학의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일연은 불교의 서민대중의 신앙이나 생활 습속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이는 그가 대승적, 구세적 입장에서 불교의 이상을 온 세상에 퍼뜨리려는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섯째, 『삼국유사』는 구비문학을 비롯하여 물질전승과 행위전승 등에 관한 민족지학적인 자료를 제공하여 한국민속학이나 인류학 등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에는 신화, 전설, 민담과 같은 설화 자료 외에도 풍속, 장례, 제례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고유문화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보고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여섯째, 국문학사적 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어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책에는 향찰로 표기된 향가, 서기체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각종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 고대어의 연구에 기초가 되는 자료가 풍부하게 산재해 있다. 또한 국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향가 14수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이미 상당히 진척이 되었으며 이것이 한국시가문학사에서 갖는 가치와 의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면모 한편 문학가로서의 일연의 면모는 어떠한가. 선승으로서 일연의 선시나 개별적인 문학작품이 현재 따로 전해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문학가로서 일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삼국유사』는 전체가 민족의 생활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일대 서사시'라는 평가가 있다. 곧 신화와 전설 외에도 신이한 영험담, 신앙과 생활풍속이 실려 있는 민족문화의 총체적인 서사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연은 다름 아닌 위대한 서사시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모두 44편의 칠언절구 한시를 창작하고 있다. 소위 '찬시'가 그것인데, 해당 항목의 이야기 말미에 자신의 감흥을 불교적인 입장에서 시로 읊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시라고 볼 수 없는 뛰어난 서정적인 풍취를 보이는 시임에 틀림없다. 향가 가운데 「천수대비가」, 「풍요」, 「도솔가」, 「제망매가」, 「원가」, 「우적가」등에는 이들 가요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곁들인 그의 찬시가 실려 있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달 속의 선녀)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 「월명사 도솔가」조
재 마치니 법당 안의 석장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피운다. 남은 불경 다 읽으니 더 할 일이 없어 불상을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 「양지사석」조
앞의 시는 경덕왕대의 월명사가 일찍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지었다는 향가「제망매가」의 가사 끝에 붙여진 것이다. 월명사는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하는데 피리를 불 때면 달이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고 한다. 「제망매가」의 내용을 활용하면서도 월명사에 얽힌 이야기를 적절히 시속에 인용하는 시인의 재주가 놀랍다. 뒤의 시는 승려 양지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 때 여인들이 흙을 나르며 불렀다는 「풍요」의 가사 끝에 붙여진 것이다. 이를 보면, 법당 안의 한가한 정경과 함께 불상을 손질하고 향불을 피우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절에서 뒷일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승려일 수도 있다.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의 평안함이 느껴진다. 이처럼 이 시는 「풍요」의 가사와는 다른 한 편의 훌륭한 서정시로 다가온다.
압록강에 봄은 깊어 물풀은 곱고 백사장 갈매기는 한가로이 졸기만 한다. 문득 저 멀리 노 젓는 소리에 놀라니 어느 곳 어선인지 길손이 도착했네. - 「순도조라」조
금교에 눈이 쌓여 얼고 풀리지 않으니 계림에 봄빛이 아직도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네. 예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서 먼저 모랑의 집 매화나무에 꽃이 피게 하였네. - 「아도기라」조
삼국시대 때 이 땅에 불교를 전래시킨 순도와 아도에 관한 항목에서 뽑은 시들이다. 앞의 것은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가사 끝에 붙어 있다. 이를 보면 순도를 길손에 비유하면서 봄을 맞아 푸르름을 더해가는 강변의 한가한 정경을 그리고 있으니, 이는 한 편의 훌륭한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뒤의 것은 고구려 사람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기사 끝에 붙어 있다. 아도화상을 '봄의 신'으로 묘사한 것도 눈부시지만, 계림에 아직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상황에서 모례의 집에 먼저 불교를 전파시킨 아도화상의 노력을 '모례의 집 매화나무에 먼저 꽃을 피우게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연의 시적 자질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일연은 삼국시대 때 전승되어 온 시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가 전해준 고대가요는 신라가요 향가 14수 외에도 한역가 2편, 가사 미상의 노래 9편 등 25편에 이른다. 또한 당시에 구전되는 가요를 수록하면서 작품에 얽힌 배경설화와 함께 창작 동기도 같이 싣고 있다. 우리가 고대 국문학의 실상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일연의 우리 가요에 대한 관심과 깊은 이해 덕분이다. 한마디로 일연은 뛰어난 시인이자 비평적 안목을 갖춘 비평가이면서 문학사가로서 면모를 여실히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3. 일연이 전해준 건국신화
『삼국유사』 전편에는 신이가 바탕이 되고 있다. 괴상하고 신이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합리주의를 일연은 서두에서부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장차 제왕이 일어날 때 신이한 일들이 일어남을 예로 들어 우리나라의 제왕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 덕분에『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민족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를 일연은 맨 첫머리에 실었던 것이다. 일연의 신화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기이편」의 서문을 먼저 소개한다. 또한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의 것이 온전하다. 그 밖의 다른 문헌에도 실려 있지만 『삼국유사』의 것이 신화연구에서는 기초자료가 된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참다운 모습, 완전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이편 서 서하여 말한다. 대체로 옛 성인은 예절과 음악으로 나라를 세웠고, 인과 의로 가르쳤다. 그런데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을 얻고 도록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연후에야 큰 변화를 타고 대기를 잡으며, 대업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하수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에서 서가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를 두르더니 복희를 낳고, 용이 여등과 교접하여 염제를 낳았다. 황아가 궁상 들에서 놀 때 장차 백제의 아들이라는 신동이 나와서 황아와 사귀면서 소호를 낳았다. 간적은 알을 삼켜 설을 낳고, 강원은 한 거인의 발자국을 밟은 뒤 기를 낳았다. 요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요를 낳았고, 패공의 어머니는 큰 못에서 용과 교접하여 패공을 낳았다. 이 후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서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곳에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할 수 있겠는가?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 『위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그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이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이다. 『고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세를 탐내어 구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 3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으로 내려가서 이곳을 신시라 불렀다. 이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때 신(단웅)이 신령스런 쑥 심지 1개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변하여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받아먹었는데, 금기한 지 삼칠일(21)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그 금기를 참을 수 없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곰녀(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일 단수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하였다. 이에 웅이 잠깐 변하여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이곳 이름은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 한다. 그는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당의 『배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고구려는 본디 고죽국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나라가 삼군을 나누어 설치하되 현도, 낙랑, 대방이라 하였다. 『통전』에도 또한 이 말과 같다. - 「기이편」, 고조선 『단군기』에 이르기를, "단군이 서하 하백녀를 맞아 들여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다"는데, 지금 이 기록(해모수와 하백녀의 관계 기사를 말함)을 살펴보니 해모수가 하백녀와 사통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 한다. 단군기에 이르기를,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다" 하니 부루와 주몽은 이모형제일 것이다. - 「기이편」, 고구려
작품 해설 고조선조에는 『위서』, 『고기』, 『배구전』등 세 문헌이 인용되고 있는데, 신화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고기』이하의 내용이다. 이 『고기』의 내용을 보면, '환웅의 치세담'과 '단군의 탄생과 건국담'으로 크게 나뉜다. 환웅천왕의 이야기는 전체 사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단군 이야기가 오히려 부수적이어서 환웅이 국조이자 신화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전자의 이야기는 '환웅신화'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의 이야기는 '단군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웅신화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고 그 아버지로 환웅이 설정되면서 신화적 고유성은 단군신화 속에 합쳐지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는 환웅신화의 고유성 내지는 독자적 전승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전체를 하나의 '단군신화'로 처리하고 있다. 이 점은 앞으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단군신화에 관한 전승 문헌은 주지하듯이 상당히 국내에 많다. 『삼국유사』외에도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이 대표적인 문헌들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고려시대의 문헌과 조선시대의 문헌 사이에는 기록된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단군의 아들인 '부루 탄생담'이다. 조선시대의 것에는 이 이야기가 단군신화 속에 곧장 함께 나오는데 비하여,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이 '부루 탄생담'이 단군신화 속에 있지 않고 부여나 고구려 관련 기사 속에 분리되어 나타난다. 『제왕운기』에도 그러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거니와, 『삼국유사』에서는 이것이 위에서 보듯이 고구려조에 실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루는 엄연히 "단군이 하백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들에도 이러한 내용은 한결같이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단군신화 속에도 환웅신화와 단군신화, 그리고 단궁의 아들인 부루에 관한 이야기가 중층적으로 합쳐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환웅-단군-부루'의 세 이야기가 합쳐진 것을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단군신화'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문헌의 실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환웅신화는 단군신화와 그 구조가 다르다. 이것은 건국시조가 천상에서 직접 하강하여 나라를 세운다는 신화인 소위 '직접하강형' 신화에 해당한다. 반면에 단군신화는 천상에서 하강한 부친이 지상에서 모친과 신성한 결혼을 하여 거기서 시조를 낳고 그 시조가 나라를 세운다는 신화인 '천부지모형' 신화에 속한다. 천부지모형 신화에는 「단군신화」 속에 있는 '부루 탄생담', 동부여의 해부루신화, 고구려의 주몽신화, 유리신화 등이 있다. 한마디로 이 신화 유형은 북방계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향유 전승되는, 동일한 줄거리를 갖는 '보편적인 신화구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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