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1부 한문학의 대가들과 그 유산
고독과 한의 여류시인, 허난설헌
1. 가문과 규방 속에서 무르익은 시심
허난설헌(1563~1589)은 사대부 여류시인으로 조선조 국문학 사상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에게는「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여류 한문학은 기녀가 담당했지만, 일부 사대부 여성들 가운데서도 한시에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신사임당과 함께 허난설헌은 조선 중엽 사대부 남성 위주의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들이 다루지 못하는 여인의 한과 사랑의 정서를 올올이 시에 아로새겼다. 그녀는 진취적이고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후대까지 높이 평가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룩하였다.
어찌 그리 기재가 많은고
허난설헌의 이름은 초희이고 자는 경번이며,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다. 본관이 양천으로, 부친은 학자요 문장가로 유명한 초당 허엽이다. 초당공은 첫째 부인 한씨로부터 아들 허성과 두 딸을 얻었고, 둘째 부인 김씨로부터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얻었다. 난설헌은 부친이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강릉의 초당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국문이 창제되면서부터 한문 대신에 국문을 익혀 겨우 언해서를 읽거나 편지를 쓰고 제문을 짓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비록 사대부 부녀자라도 한문을 정식으로 익힐 수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배웠다 하더라도 남성들과 동등한 솜씨를 발휘하여 품격 높은 시나 문장을 지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류 한문학은 정통의 범주가 아닌 소위 방외인문학에 포함되는 예외적인 문학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기녀들이나 사대부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시조나 한시를 짓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난설헌은 본격적인 문학을 하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사 후에는 자신의 문집이 동생 허균의 손으로 출간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허난설헌의 문학적 소양은 우선 당대 문장가의 집안이라는 선천적인 토양에서 싹틀 수 있었다. 일찍이 서애 유성룡이 "허씨 문중에 어찌 그리 기재가 많은고"라고 탄식했듯이, 그녀의 문학적 재질은 이러한 가정적인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 그녀의 문학적 공간으로는 시집간 뒤에 거주했던 규방을 들 수 있다. 규방은 여성들에게 남편의 사랑과 배신, 시집살이의 온갖 설움과 갈등을 이겨내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삶의 공간이었다. 허난설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규방의 고독과 한을 시로 읊어냈다. 남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학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규방은 주목할 만하다. 허난설헌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로운 편이었다. 부친의 벼슬살이는 순탄한 편이었고, 오빠들도 순조롭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기 때문이다. 난설헌은 이러한 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빠들 틈에 끼여 한문을 익히게 된다. 이미 8세 때에 백옥루 상량문」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점으로 미루어 그녀의 문장 자질은 탁월했던 듯하다.
난설헌의 문학적 공간으로서 허씨 가문은 속칭 5대가로 대변된다. 부친과 두 오빠인 허성과 허봉, 남동생 허균, 그리고 난설헌 자신을 세상에서는 그렇게 부르거니와, 이들은 조선 중엽을 대표하는 명문장 가문의 일원이었다. 허균은 자신의 글에서 "형과 누님의 문장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라 하였다. 우선 부친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난설헌과 허균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도가적 분위기는 바로 아버지를 통해 내려온 서경덕의 영향 때문이었다. 난설헌의 시 가운데 선유시가 많은 것이나, 허균이「남궁선생전」,「장산인전」,「장생전」을 통해 도가적 취향을 보인 것 등은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난설헌이 글에 관심을 보이자 친오빠인 허봉은 누이동생을 직접 가르쳤다. 허봉은 난설헌과는 열두 살 차이로 18세 때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충분히 누이동생을 가르칠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더욱이 난설헌이 11세 때 허봉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에는 사가독서를 한 탓에 누이동생과 대면할 기회가 많았다. 허균은 친형 허봉이 소동파의 시를 익혔다가 나중에는 당시를 익혀 이태백의 시를 공부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로 미루어 허봉은 송시와 당시를 두루 익혔던 듯하다. 허봉은 누이를 자기의 글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때 허균도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오빠와 이달을 통한 문장수업은 그녀의 작품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첫째 난설헌이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직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이달은 어머니가 천류 출신인 탓에 능력이 있음에도 평생 불우하게 지낸 사람이었으니, 그녀는 스승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깨우쳐 갔다. 허균과 난설헌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실비판의 경향은 바로 스승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둘째로 중국의 당시를 익힘으로써 당시풍의 시를 짓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에는 대개 문인들이 소동파, 황정견을 숭상하여 송시풍의 시를 지었지만, 16세기 후반부터는 당나라의 시를 익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대표적인 사람을 '삼당파'라고 하는데 바로 이달, 최경창, 백광훈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이달의 시는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난설헌은 특히 이태백의 시를 좋아했다. 이태백의 시 가운데 악부시를 변형하여 직접 짓기도 했다.「소년행」,「대제곡」,「강남곡」,「출새곡」등은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던 시절에 쓴 것들이다. 또한 그녀가 당시를 배우던 모습은 다음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즘 들어 최경창과 백광훈 등이 성당의 시를 익혔나니 아무도 아니 쓰던 대아의 시풍이 이에 다시 한번 울리는 구나. 낮은 벼슬아치는 벼슬 노릇이 어렵고 변방의 살림은 시름만 쌓이네. 나이 들어갈수록 벼슬길은 막히니 시인 노릇 힘들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 - 「견흥」, 5
이 시에서 그녀는 삼당파 시인들이 시를 잘 짓는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아가는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여성답지 않게 당대의 시대적 사정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으면서 스승의 불운을 동정하고 있다. 난설헌이 가진 문학적인 자질은 허문에서 싹트고 닦아졌지만, 남성 문인들처럼 열려진 공간에서 발휘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작품을 가다듬고 만들어낸 공간은 다름아닌 규방이었다.
규방에서 쌓이는 그리움과 한
그녀는 한 살 위인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그녀가 정확히 몇 살 때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 15세 무렵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성립의 집안 사람들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막상 그는 능력이 변변치 못했던 듯하다. 그는 난설헌이 27세로 죽은 해에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도 정8품인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다. 허균은『성옹식소록』에서 매부가 경전이나 역사의 문리는 잘 깨우치지 못하면서도 글은 지을 줄 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난설헌은 평범한 가정주부의 역할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듯하다. 우선 남편과의 금슬이 좋지 못하였다.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누이에 대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받들어 모실 아들도 하나 없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결혼생활 초부터 남편이 글 공부에만 매달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벼슬이 없던 남편은 똑똑한 부인을 외면하였다. 무엇보다도 난설헌은 시어머니와 갈등이 가장 고달펐다. 그녀가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했으니, 이런 며느리를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가에서의 고통과 불화는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체로 남들과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지내지 못했다는 지적 때문이다. 허엽, 허성, 허봉 등은 직언을 잘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적이 많았고, 허균도 경솔하고 경박하다는 평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가슴에 맺힌 한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넓은 세상에 하필 조선에 태어났는가, 또 하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마지막으로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심한 굴레를 이렇듯 한탄하였다. 어쨌든 그녀에게 결혼생활은 속박과 장애일 뿐이었다. 한편, 그녀가 의지할 곳은 자식밖에 없었겠지만 두 아이는 일찍이 차례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잃었다. 허균은 자신의 문집에서 그러한 누이의 처지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또 두아이를 잃었으므로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언제나 누님을 생각하면 가슴 아픔을 어쩔 수 없었다.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여인으로서 자식은 의지처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어린 두 아이를 잃었으니 그 슬픔이야 오죽했을까. 그녀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두 무덤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이야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도 아이가 있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기를 바라겠는가.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황대가]를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소리 삼킨다. - 「곡자」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이 절실히 우러난 시이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오직 자식들에게만 정을 붙이고 살던 그녀에게 자식의 상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써 내려간 고통스런 심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이러한 가정적인 불행은 허난설헌에게 삶의 고통과 좌절감을 가져다주었다. 원래 규방은 여인에게 닫혀진 공간으로서, 인고의 삶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배출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래요 시일 것이다. 따라서 규방에서 이루어진 여성문학이야말로 삶의 문학이자 끈질긴 생명의 문학임에 틀림없다. 난설헌은 가정적인 불행을 겪으면서 독서와 글짓기에 몰두하였다. 그녀가 지어낸 한시는 대부분 이러한 규방의 공간을 통해 배출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갇혀 있는 규방에서 사랑의 그리움과 울분을 시로 읊어갔다. 남편이 아내를 멀리하고 화류계의 여자들과 놀아날 때, 그녀는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남편이 한강의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음의 시를 지어보냈다.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 지어 날고 지는 꽃은 요란하게 비단옷 위를 스친다.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은 푸르러도 강남 가신 임은 여태 돌아오지 않네. - 「기기부강사독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해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남편이 글 공부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신혼 초부터 별거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그녀로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이 간절했을 것이다.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파란데 연꽃 우거진 곳에 예쁜 배[주]를 매었네. 물 건너 임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반나절 부끄러워했네. - 「채련곡」
연꽃은 그녀가 간절히 기원하는 사랑의 대상이다. 연꽃이 우거진 곳에 배를 띄우고 사랑하는 임에게 연꽃을 따서 던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 시를 이성에 대한 사랑을 그리워한 음탕한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이들 두 시가 바로 "음탕함이 흐르는 까닭에 문집에 실리지 못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 이성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난설헌도 여인인 이상 당연히 있었을 것이 아닌가. 진솔하고 솔직한 마음을 토로한 것을 두고 굳이 나쁘게 평가할 것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난설헌의 가슴 한켠에는 남편의 배신에 대한 미움의 정도 있었다. 이런 마음을 숨김없이 토로하며 남편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원컨대 이승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죽어서 길이 두목지를 따르리라.
하루빨리 남편과 헤어진 뒤 죽어서 시를 짓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였다.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이 이 정도였으니, 그녀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할 만하다.
연꽃 스물일곱 송이 떨어져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렇게 불행한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친정집의 불행까지 잇달아 닥쳐왔다. 부친 허엽은 그녀가 18세 때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오는 도중에 상주 객관에서 죽었고, 오빠 허봉은 그녀가 21세 때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허봉은 3년 만에 유성룡과 노수신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난설헌이 죽기 1년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벼슬에 뜻이 없어 백운산에 들어가 글을 읽으며 자연을 즐기다가, 술이 지나쳐 병을 치료하러 산을 나왔다가 금화현의 생창역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허난설헌은 오빠 허봉을 무척 따랐다고 하는데, 그녀의 문집에는 오빠에게 쓴 시 3편이 남아 있다. 다음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멀리 귀양 가는 갑산 나그네 함경도 길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겠네. 쫓겨가는 신하야 가의와 같겠지만 쫓아내는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의 회왕 같으랴. 가을 비낀 언덕엔 강물이 잔잔하고 고개 위의 구름은 저녁노을이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 예니 걸음을 멈춘 채 차마 길을 가지 못하네. - 「송하곡갑산」
오빠 허봉과 헤어지는 서러움을 이렇게 읊었다. 허봉은 동인으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선조 16년(1583)에 귀양을 갔다. 이 시에서는 장사에 귀양 갔던 가태부처럼 국왕 선조에게 상소하다 귀양가는 오빠를 그리고 있다. 그나마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게 되어 그녀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27세(1589)의 짧은 나이로 그만 꽃다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그 동안 자신이 써두었던 시문을 모두 태워버리라고 유언하였다. 따라서 그녀가 지어 직접 모아두었던 많은 시편들은 남아 있지 않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죽기 전(1589) 꿈속에서 선계인 광상산에 올랐다가 두 선녀의 청으로 시를 썼는데, 잠에서 깨어나 그때 읊은 시를 생각하며 다음의「몽유광상산」을 지은 바 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넘노니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아리따운 연꽃[부용] 스물일곱[삼구] 송이 붉게 떨어져 달밤 서리에 싸늘하네.
그녀는 나이 27세 되던 해에 홀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 9의 수(27세)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패림』의「이순록」(구상훈 지음)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연꽃 스물일곱 송이'는 그녀의 향년 연수와 같으니, 실로 자신의 죽을 나이를 예견한 '시참'이라 할 만하다. 난설헌에게 한을 남겼던 남편 김성립은 부인이 죽은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곧바로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요절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을 막다가 31세의 나이로 전사한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재혼한 탓에 남양 홍씨와 합장되었다. 허난설헌은 죽어서도 혼자 누워 있게 된 셈이다. 그런데 김성립은 생전에 뛰어난 벼슬을 하지 못해 기림을 받을 수 없었지만, 그가 그토록 박대했던 난설헌 덕분에 오히려 그의 묘역을 찾는 후세의 사람들이 많으니 인생유전이라고나 할까.
2. 허난설헌의 문학세계
난설헌 문집의 편찬 경위
난설헌의 작품은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작품들은 그녀의 친정에 보관되었던 것을 허균이 문집으로 엮은 것이다. 허균이 난설헌 시집을 처음 엮은 것은 난설헌이 죽은 지 1년 뒤인 1590년으로, 그는 유성룡의 발문을 붙여 아는 이들에게 몇 부 필사하여 돌렸다. 그 후 1598년 정유재란으로 원군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의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편을 외워주었다. 나중에 오명제는 중국에 돌아가『조선시선』을 엮었는데, 다시 이를 저본으로 삼아『열조시집』과 『명시종』등에 차례로 실렸다. 허균은 또한 1606년에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정사 주지번과 부사 양유년이 들어오자 종사관이 되어 접대하면서, 누님의 시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난설헌고』초고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하여 주지번에게는 「소인」을, 양유년에게는 「제사」를 얻게 되었고, 그는 이것들을 묶어서 1608년 4월에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도중 그곳에서 『난설헌집』을 출간하였다. 중국에서는 난설헌의 문집이 발간되어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명나라의 문인 조문기는 그녀의「백옥루상량문」을 읽고,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다. 현재 전해오는 대부분의 난설헌 문집의 판본은 1692년(숙종 18)에 동래부에서 중간된 것이다. 이 『난설헌집』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전해져 1711년(숙종 37)에 분다이야에 의해 간행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안왕거가 허경란의 『경란집』을 부록으로 붙여 신활자본으로 서울의 신해음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그는 여기서 "옛 판본의 글씨가 닳아지거나 잘못된 곳이 많아서 바르게 고쳤다"고 하였다. 문집에 전하는 작품을 보면 시가 210수, 부가 1편, 그리고 산문이 2편인데, 이 가운데 칠언절구 시가 142편으로 작품 수가 많은 편이다. 이 밖에도 다른 문헌에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 몇 편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문집 속에 있는 작품들이 진짜 난설헌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조선조 문인들이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신흠의 주장과, 일부 중국 시인의 작품이 첨가되었다는 김만중의 주장, 그리고 허균이 위작했을 것이라는 이수광의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면 중국인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문집을 간행할 때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현실 초탈의 염원을 시로
허난설헌의 남아 있는 한시 작품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이 발견된다. 첫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을 초탈하려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시에는 '신선'과 '꿈'이라는 낱말이 자주 등장한다. 시 속에 등장하는 선계는 가정적인 불운을 현실적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탈의 염원을 드러낸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210여 수의 시 가운데 이러한 '신선시' 계열이 무려 128수나 된다.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은 물론 허씨 가문의 도가적 취향과 무관하지 않다.
난새를 타고 한밤중 봉래도엘 내려서 기린 수레 천천히 올라타고 향기론 풀잎을 밟는다. 바닷바람이 불어 벽도화 가지를 꺾었으니 구슬 쟁반에 가득 신선의 과일을 따다 담았네.
무지개 치마 위에 가벼운 옷 얹어 입고 학의 등에 올라타 찬 바람 내며 자부로 돌아오네. 바다엔 달빛이 밝고 은하수도 스러졌는데 옥퉁소 소리 속에 색구름 피어오르누나. - 「보허사」, 1,2
신선의 세계를 그녀는 난새, 기린 수레, 학의 등을 타고 자유로이 노닌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을 이상의 공간인 선계에 가서 해소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꿈은 따라서 날아다니는 매개물을 통하여 비약과 상승을 지향한다. 다음의 시에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어젯밤 꿈에 봉래산에 올라 갈파의 물에 잠긴 용의 등을 탔었네. 신선들은 푸른 지팡이를 짚고 부용봉에서 나를 맞아주었네. 발 아래로 아득히 동해를 굽어보니 술잔 속의 물처럼 조그맣게 보이는구나. 꽃 밑의 봉황새는 피리를 불고 달빛은 고요히 황금 물동이를 비춘다. - 「감우」, 4
그녀는 꿈에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에 가서 용의 등을 타고 신선들을 만난다. 선계는 그녀의 현실적 좌절감을 해소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녀의 이러한 신선시에서는 도가적 분위기를 띠는 시어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위의 시들만 보아도 자부, 벽도화, 신선, 봉래도, 신선의 과일 등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난새, 학, 용 등은 영원불멸성을 띠는 천상적인 매개체라 할 만하다. 신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신선시 계열의 작품은 위의 시들 외에도「동선요」, 「망선요」, 「유선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유선사」가 대표적인 것으로 무려 87수나 된다. 칠언절구로 된 이 작품은 특히 명나라 사신이며 시인인 주지번에 의해 명편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천년의 요지에서 주 목왕과 헤어지고 잠깐 파랑새에게 한 무제를 찾게 했네. 새벽에 하늘에서 피리소리 들려오고 시녀들은 모두 다 흰 봉황을 타고 있네. - 「유선사」, 1
「유선사」의 첫번째 작품이다. 많은 도가적 시어를 사용하면서 선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신선의 세계는 한가롭고 정겨운 공간만은 아니다. 이 세계는 현실세계와 겹쳐 있다. 다시 말하면 현실세계와 구분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그녀는 눈물과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다락은 붉은 노을에 잠기고 땅은 먼지가 가셔 양귀비의 쓰라린 눈물 비단 수건을 적시네. 아름다운 달은 은하수 그림자에 잠기고 추위에 겁 먹은 앵무새는 밤에 임을 부르네.
추녀의 풍경도 고요하고 대궐문 닫혔는데 돗자리에 바람이 이니 다락이 서늘하다. 외로운 학이 바다에 뜬 달에 놀래고 퉁소 소리 푸른 구름 속에 울려 퍼진다. - 「유선사」, 23,65
양귀비의 눈물은 비단 손수건을 적시고 임을 부르는 앵무새는 추위에 겁을 먹는다. 또한 문이 닫힌 서늘한 다락방에 외로운 학이 한밤중에 바다 위로 떠오르는 달에 놀란다. 눈물짓는 양귀비와 외로운 학은 아마도 난설헌 자신일 것이다. 현실의 처지가 꿈속에서도 여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이 시를 통하여 확인된다. 결국 신선세계를 지향해도 여전히 고독과 시름이 가득한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난설헌의 시를 보면 여성의 삶의 고뇌와 고민을 드러내며, 또한 다른 미천한 여성의 처지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시에는 여성 특유의 사랑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애정을 다룬 시들은 자식과 형제간의 사랑을 읊은 시들과, 남녀간 사랑의 감정을 읊은 시들로 다시 나누어진다. 먼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시인「곡자」는 어머니로서 진솔한 모성애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난설헌은 형제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시도 썼는데, 앞서 살핀 「송하곡갑산」이라는 시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다음의 시도 오빠에게 보낸 것이다.
어둑한 창가에 촛불은 깜박거리고 반딧불은 높은 집을 날아갑니다. 시름 겨운 밤은 깊어 쌀쌀하고 가을이라 나뭇잎은 우수수 집니다. 가서 계신 변방에선 소식이 멀고 끝없는 근심만 풀 길이 없죠. 멀리 청련궁을 바라보니 쓸쓸한 산에는 달만 밝습니다. - 「기하곡」
반딧불은 날아가고 낙엽이 떨어지면서 가을 밤이 쓸쓸하게 깊어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공산을 비추는 달은 그녀와 오빠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그녀는 오빠가 있는 곳을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머무는 궁으로 미화했다. 청련은 이태백의 호이니, 그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귀양온 '적선'임을 연상하며 사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처럼 그녀의 시에 곧잘 등장하는, 떨어지는 낙엽이나 꽃, 그리고 쓸쓸함 등은 그녀의 규방의 고독과 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다음으로 남녀 사이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들을 보면,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남들은 강남이 좋다지만 나는야 강남이 슬프기만 하네. 해마다 이 포구에서 애끓이며 돌아오는 배 바라본다네.
호수에 달빛 환히 비칠 무렵에 연밥 따서 한밤중에 돌아왔죠. 배 탄 채로 언덕 가까이 가면 안되요 금슬 좋은 원앙새 놀라 날아가니까요. - 「강남곡」, 2, 3
「강남곡」네 수 가운데 두 수로서, 당나라 이익의「강남곡」을 변형시킨 소위 '의고시'이다. 이익의 작품에서는 장사꾼에게 시집을 간 여인이 남편이 떠난 뒤, 돌아온다는 날짜를 항상 어기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차라리 뱃사공에게나 시집갔으면 하고 후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난설헌의 이 시에서는 이별을 모르고 자란 여인이 열다섯 살에 뱃사공에게 시집을 가서 항상 이별 속에 살게 됨을 한탄하고 있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병치시키고 있는 작품이거니와, 여기서는 '물'이 사랑의 즐거움과 이별의 서러움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연못엔 자욱이 봄비 내리고 쌀쌀한 냉기가 스며든다. 시름 겨워 병풍에 기대어 바라보니 담장 위의 살구꽃이 지누나.
세 편으로 된 「효최국보체」라는 시 가운데 셋째 수이다. 첫째 수에서는 비녀를 임에게 정표로 주고 이별했다 하였고, 둘째 수에서는 가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셋째 수인 위의 작품에서는 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는 임을 기다리다 지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봄비와 떨어지는 살구꽃이 조화를 이루면서 쓸쓸한 심정을 돋우고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그리움의 심정은 끝내 눈물과 원망으로 가득 찬다.
비단띠 비단치마 위에 눈물 자국이 겹쳤으니 해마다 봄풀을 보며 임 오시길 그렸기 때문일세. 거문고를 옆에 끼고서 강남곡을 타니 배꽃은 비에 지고 한낮에도 문은 닫혔네. - 「규원」, 1
규방에서 원망하는 마음을 토로한 작품이다. 해마다 오지 않는 임을 그리다 지쳐 눈물을 흘리는데, 문 닫힌 집에 비가 오고 배꽃만 진다는 쓸쓸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규방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곧고감은 오직 눈물을 자아낼 뿐이라는 그녀의 상황인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외로운 심정을 주로 난이나 연꽃 등으로 밝히고 있으며, 금분, 귀고리, 분, 등잔, 거울과 같은 여성 특유의 장신구를 시적 소재로 활용하면서 그리움과 외로움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심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이 밖에도「춘일유회」, 「한정일첩」,「견흥」,「사시사」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난설헌은 시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에서 더 나아가 미천한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녀는 가난하게 자란 적이 없으면서도 가난한 여인에 대한 노래를 읊었다.
얼굴 맵시야 어찌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길쌈 솜씨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쟁이는 나를 몰라주누나.
손으로 가위를 잡느라고 밤은 추운데 열 손가락 곱아온다.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지만 해마다 나는 홀로 잠을 잔다오. - 「빈녀음」, 1, 4
「빈녀음」네 수 가운데 두 수로, 단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시집을 못 가는 여인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가난하니 길쌈하고 바느질해서 생계를 보태야 하지만, 시집을 가지 못해 나이만 든다. 이 시에 등장하는 가난한 여인은 난설헌 자신과 똑같이 외로운 존재이다. 그녀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려 했을 것이다. 셋째로 난설헌은 당대의 사회적인 현실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곧 백성들의 다양한 군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장사꾼들의 애환을 그리거나, 유흥가 내지는 유곽가를 노래한다. 더러는 변방에 출정나간 군사들의 사정이나 성을 쌓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대사회적인 관심은 규방에서 지내는 사대부 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일부 논자들은 난설헌이 이들 시를 과연 진짜 지었을까 하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의 시는 장삿배 선원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침 나절 의주성 물가를 떠나자 북풍이 거슬러 불어온다. 뱃머리에서 제각각 맘껏 마시고 달밤에 일제히 노 저어 가네.
바람이 거세고 물살이 빨라서 사흘 남짓 여울에 묶여 있네. 젊은 아낙은 뱃전에 걸터 앉아 향불을 피워 놓고 돈셈[산전] 배우네. - 「가객사」, 1, 2
이 시는 세 수 가운데 두 수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장삿배 선원들의 노래이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장사꾼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거센 바람 때문에 배를 띄우지 못하고 여울에 머무는 동안 젊은 여인은 돈 세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바람이 잔잔하면 다시 배를 띄우는 떠돌이 삶 속에서도 뱃길의 안전과 많은 이익을 위하여 기도하는 여인의 끈질긴 삶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동쪽 집 세도는 불길과 같아 높은 다락에선 노랫소리 울렸지만 북쪽 이웃은 가난해 입을 옷이 없어 굶주리며 오막살이 신세였다오. 그러다 하루아침에 세도집 기울어지자 도리어 북쪽 이웃 부러워하리니. 흥하고 망하는 거야 거듭 바뀔 뿐 하늘의 이치를 피하기는 어려울 걸세. - 「감우」, 3
동인의 세도가 극에 달했을 때는 풍악소리 높았지만, 몰락하자 도리어 북쪽 이웃을 부러워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당시 동인 계열에 속한 오빠 허봉이 유배되면서 몰락하게 되는 상황을 빗대고 있다. 그러나 우의적으로는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지만 양반 세도가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당대의 시대적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울러 그녀는 이러한 부귀의 흥망은 다만 바뀌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이치에 해당한다고 갈파한다. 규방의 여인으로서 뛰어난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작품적 성과가 인정된다.
천 백성이 모두들 달공이 쳐들고 땅 다지는 소리 땅 밑까지 쿵쿵. 힘을 모아 잘 쌓는다지만 운중 땅엔 위상 같은 원님이 없다네.
성 밖에다 또 성을 쌓고 있으니 성이 높아 도적을 막긴 하겠지. 엄청난 도적이 쳐들어와서 성 두고도 못 막으면 어쩌지요. - 「축성원」
「축성원」의 '원'은 원래 악부의 시체로 풍자가 섞인 원망 또는 하소연을 읊은 것이다. 첫째 수에서는 아무리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아도 위상 같은 훌륭한 원님이 없다고 말한 뒤, 둘째 수에서는 아무리 성을 쌓아도 위상 같은 원님이 없으니 그 일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위상은 한나라 문제 때 운중 태수를 지낸 인물로, 자신의 녹봉을 군사들에게 먹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흉노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중국의 고사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조선에는 위상 같은 인물조차 없음을 간접적으로 비꼬고 있다. 이처럼 허난설헌의 시에는 뛰어난 시대적인 문제의식이 드러나 있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감정의 노출이 극심하여 시구마다 원한과 눈물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일부 평자들은 그녀의 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태백과 같은 당나라 시인들의 시들을 변형한 소위 '의고시'에서 그녀의 시적 가치를 찾으려 하고 있다.
논란이 일고 있는 난설헌의 국문 가사
난설헌은 또한「규원가」와 「봉선화가」를 남긴 작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그녀가 지은 것으로 보는 데에는 아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규원가」의 경우『고금가곡』에서는 그녀의 작품이라 하였지만, 홍만종의『순오지』에서는 허균의 첩인 무옥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가람 이병기는 난설헌의 한시 「소년행」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봉선화가」는 『정일당잡지』에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 처음 소개한 가람 이병기는 내용상 난설헌의「염지봉선화가」, 「선요」, 「선사」,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의 일부 구절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정일당 김씨가 지었다는 주장도 많은 편이어서 쉽게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허균은 누님의 유고를 모으면서 이들 가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성수시화』에서 송강 정철의 가사작품인 「사미인곡」, 「권주사」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따라서 만일 난설헌의 국문가사가 당시 있었다면 어떠한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전혀 그러한 모습을 남기고 있지 않은 점이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이들 두 국문가사를 난설헌의 작품이 아나라고 무조건 단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다.「규원가」는 일명 「원부사」 또는 「원부사」라고도 하는데, 규방에서 지내는 여인의 한을 노래하고 있다.
엊그제 젊었더니 / 하마 어이 다 늙거니 소년행락 생각하니 / 일러도 속절없다 늙어야 설운 말씀 / 하자 하니 목이 멘다
이 작품의 서두 부분으로서, 늙은 여인이 늘그막에야 자신의 서러운 신세를 말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첫머리의 "엊그제 젊었더니/하마 어이 다 늙거니"라는 구절은 바로 난설헌이 지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2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이 작품을 지었다면 27세 이전에 썼을 텐데, "늙어서야 자신의 서러운 신세를 한탄하는 사정"을 토로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작품은 난설헌의 작품으로 보는 데 곤란한 점이 있다.「봉선화가」는 봉선화로 손톱에 물들이는 풍속을 노래한 것으로, 이와 다른 내용의「봉선화가」가 따로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화자가 봉선화를 대하게 된 연유와 봉선화라는 이름의 유래, 그 아름다움과 함께 향기가 없는 점, 춘삼월에 이 꽃을 심는 일 등을 먼저 서술한 뒤 밤에 봉선화 물을 들이는 모습을 노래하고, 꿈속에 여인이 나타나자 깨어나 꽃신선일 것이라고 여기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봉선화가」는 난설헌이 지었음을 전제로 할 때, 시기상으로 조선조 규방가사의 첫 작품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작자 문제가 걸려 그 사적 의의는 보류된다. 다만 여인의 섬세한 생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으며, 규방에 살면서 꽃을 키우고 꽃과 함께 살아가는 여인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방가사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은 꽃노래 계통의 가사 가운데 원형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문학사적 가치가 높다.
3. 한시 작품 감상
난설헌은 여성 특유의 이별과 기다림, 그리움 등을 시로 그려냈다. 따라서 그녀의 시적 정조는 주로 고독과 한으로 모아진다. 여기서는 결혼생활의 고독과 외로움이 잘 드러난 작품 가운데 네 계절별로 그리움을 토로한 「사시사」를 소개한다. 모두 4수로서 『난설헌집』의 칠언고시 조에 수록되어 있다.
네 계절의 노래
봄의 노래: 춘
뜨락이 고요한데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목련꽃 핀 언덕에선 꾀꼬리가 우짖는다. 수실 늘인 장막에 찬 기운 스며들고 박산 향로에선 한 가닥 향 연기 오르누나. 잠에서 깨어난 미인은 다시 화장을 하고 향그런 허리띠엔 원앙이 수 놓였다. 겹발을 걷고 비취 이불을 갠 뒤 시름없이 은쟁 안고 봉황곡을 탄다. 금굴레 안장 탄 임은 어디 가셨나요 정다운 앵무새는 창가에서 속삭인다. 풀섶에서 날던 나비는 뜨락으로 사라지더니 난간 밖 아지랭이 낀 꽃밭에서 춤을 춘다. 누구 집 연못가에서 피리소리 구성진가 밝은 달은 아름다운 금술잔에 떠 있는데, 시름 많은 사람만 홀로 잠 못 이루어 새벽에 일어나면 눈물 자욱만 가득하리라.
여름의 노래: 하
느티나무 그늘은 뜰에 깔리고 꽃 그늘은 어두운데 댓자리와 평상에 구슬 같은 집이 탁 틔었다. 새하얀 모시적삼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부채를 부치니 비단 장막이 흔들린다. 계단의 석류꽃 피었다가 모두 다 지고 햇발이 추녀에 옮겨져 발 그림자 비꼈네. 대들보의 제비는 한낮이라 새끼 끌고 약초밭 울타리엔 인적 없어 벌이 모였네. 수 놓다가 지쳐 낮잠이 거듭 밀려와 꽃방석에 쓰러져 봉황 비녀 떨구었다. 이마 위의 땀방울은 잠을 잔 흔적 꾀꼬리 소리는 강남 꿈을 깨워 일으키네. 남쪽 연못의 벗들은 목란재 타고서 한아름의 연꽃 꺾어 나룻가로 돌아온다. 천천히 노를 저어 채련곡 부르니 물결 사이로 쌍쌍이 흰 갈매기는 놀라 날으네.
가을의 노래: 추
비단 장막으로 찬 기운 스며들고 새벽은 멀었지만 텅 빈 뜨락에 이슬 내려 구슬 병풍은 더욱 차갑다. 못 위의 연꽃은 시들어도 밤까지 향기 여전하고 우물가의 오동잎은 떨어져 그림자 없는 가을. 물시계 소리만 똑딱똑딱 서풍 타고 울리는데 발 밖에는 서리 내려 밤벌레만 시끄럽구나. 베틀에 감긴 옷감 가위로 잘라낸 뒤 임 그리는 꿈을 깨니 비단 장막은 허전하다. 먼길 나그네에게 부치려고 임의 옷을 재단하니 쓸쓸한 등불이 어두운 벽을 밝힐 뿐.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 써놓았는데 내일 아침 남쪽 동네로 전해준다네. 옷과 편지 봉하고 뜨락에 나서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별만 밝네. 차디찬 금침에서 뒤척이며 잠 못 이룰 때 지는 달이 정답게 내 방을 엿보네.
겨울의 노래: 동
구리병 물시계 소리에 찬밤은 기나길고 휘장에 달 비치나 원앙 금침이 싸늘하다. 궁궐 까마귀는 두레박 소리에 놀라 흩어지고 동이 터오자 다락 창에 그림자 어리네. 발 앞에 시비가 길어온 금병의 물 쏟으니 대야의 찬물 껄끄러워도 분내는 향기롭다. 손 들어 호호 불며 봄산을 그리는데 새장 앵무새만 새벽 서리를 싫어하네. 남쪽 내 벗들이 웃으며 서로 말하길 고운 얼굴이 임 생각에 반쯤 여위었을 걸. 숯불 지핀 화로가 생황을 덮일 때 장막 밑에 둔 고아주를 봄술로 바치련다. 난간에 기대어 문득 변방의 임 그리니 말 타고 창 들며 청해 물가를 달리겠지. 몰아치는 모래와 눈보라에 가죽옷 닳아졌을 테고 아마도 향그런 안방 생각하는 눈물에 수건 적시리라.
작품 해설
'봄의 노래'에서는 잠 못 이루는 봄밤의 외로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봄의 정겨운 모습을 그리면서 임과 나와의 유희를 꿈꾸지만 임은 그 자리에 없다. 앵무새가 정답게 속삭이고 나비가 꽃 속에서 춤을 추는 광경이며, 어느 집 연못가에서 벌어지는 구성진 피리소리는 임을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더욱 쓸쓸하게 할 뿐이다. 여기서 원앙새와 앵무새는 '외로운 나'와 대비되며, 나비가 날아오르고 피리소리 흩어지는 것은 흘리는 눈물과 자못 대비된다. 서로 상치되는 심상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외로운 작자의 심정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여름의 노래'에서는 한여름의 정경 속에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앞부분부터 중간까지는 여름날의 정겨운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무 그늘 밑에 댓자리 깔고 무더위에 부채를 부치는 모습, 제비가 새끼를 돌보고 한낮에 벌이 약초밭에 모여 있는 모습 등은 여느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다. 사물을 세세하고 정겹게 묘사하는 시인의 관찰력이 뛰어나다. 한낮 무더위에 졸음이 밀려오고 오수를 즐기는데, 꾀꼬리 소리에 깨어보니 친구들이 노래를 부른다. 맨끝의 쌍쌍이 갈매기가 노는 모습을 통하여 임이 없이 홀로 지내는 작자의 처지를 대비시키고 있다. 쓸쓸함, 외로움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임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가을의 노래'에서는 차가운 가을처럼 쓸쓸한 풍경을 그리면서, 시름 많은 작자가 밤에 임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을의 모습이 온통 차갑고 텅 비었으며 쓸쓸하다. 임 생각 꿈을 꾸지만 깨어보니 장막만이 여전히 허전할 뿐이다. 임은 가을이 되도록 오지 않고 소식도 없다. 임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옷을 지어 부치려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달이다. 잠 못 이루는 나를 달빛이 정답게 비추는 것이다. '겨울의 노래'의 전반부에서는 궁중 궁녀의 외로운 마음을 그렸으며, 후반부에서는 규방 여인의 고독을 그려냈다. 궁중에 사는 궁녀는 밤이 깊지만 임금의 은총이 없어 원앙 금침만 비어 있다. 여기서는 물시계 소리와 두레박 소리가 정겨운 대상이 아니다. 또다시 하룻밤을 지낸 뒤 차가운 물로 얼굴 씻는 일은 앵무새가 새벽 서리를 싫어하는 것과 같다. 외로운 궁녀의 심사와 앵무새를 적절히 대비시키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변방에 수자리 떠난 임을 그리는 규수의 고독을 그려냈다. 난간에 기대어 임을 그리는데, 그 임은 추위와 바람에 가죽옷조차 다 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임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작자는 네 계절의 풍경 속에서 외로운 여인의 심정을 대입시키는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자연이 돌고 돌듯이 인간의 사랑도 돌아오고 풍요로워야 한다. 그러나 네 계절을 노래한 시들에 공통되는 정서는 한마디로 외로움뿐이다. 난설헌은 규방 속에서의 고독과 한을 여기서도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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