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 노자.한비자열전 老子.韓非子列傳
노자(老子)는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자연적으로 감화시켜, 태연하면서도 올바른 행동을 하게 하였다. 한비(韓非)는 사태를 분석하여 시세가 움직이는 이법(理法)에 따랐다. 그래서 제3에 <노자.한비열전>을 저술했다. <太史公自序>
노자의 성은 이(李) 씨이고 이름은 이(耳)다. 초(楚)나라 고현(苦縣)의 여향 곡인리(廬鄕曲仁里: 지금의 河南省鹿邑縣에 해당) 사람으로서,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라 했다. 그는 주(周)의 수장실(守藏室: 王室書庫)의 사(史: 記錄官)였다. 공자(孔子)가 가르침을 받으러 노자를 방분했다. "예(禮)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예에 대해서라면 더더구나 나는 할 말이 없네." "그렇지만 선생님 같으신 분이......." "잠깐만 기다려 보게나. 딱 한 가지 얘기해 줄 말이 있기는있네만......."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대가 우러러보는 옛 성현들은 이미 살도 썩어 없어지고 뼈마저 삭았지." "그렇지만 말씀은 남아있습니다." "글쎄 그게 공언(空言)이란 말씀이야. 들어 보게. 군자라는 작자도 때를 잘 만나면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그 위에서 건들거리게 되는 몸이 되지만, 때를 잘못 만나 보라고. 어지럽게 바람에 흐트러지는 산쑥대강 같은 떠돌이 신세가 된단 말일세." "그렇겠군요......." "내가 아는 바로는 예를 아는 군자란 때를 잘 만나고 못 만나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면 예란 무엇인지요?" "내가 알기론 이런 것일 것 같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언뜻 봐선 점포가 빈 것 같은 것처럼,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법일세." "그러니까......."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 잘난체하는 병(病)과 헛된 잡념을 버리라는 얘길세." "그게 예입니까?" "그런 건 나도 몰라. 다만 예를 묻는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일세. 가 보게나." 공자가 돌아갔다. 그리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얘들아, 새는 잘 날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며 짐승이란 놈은 잘도 달린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글쎄 말이야. 달리는 놈이라면 그물을 쳐서 잡을 수가 있고, 헤엄치는 놈이라면 낚싯줄로 낚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이라면 화살이나 주살로 쉽게 쏘아 잡을 수가 있지 않겠는가 말일세." "그야 당연하지요." 제자 중의 하나가 말했다. "그렇지만 용(龍)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니 나로서도 그것의 행적은 알 길이 없지 않겠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새삼스럽게 하시지요?" "너희들이 예를 물었길래 하는 말이다. 나도 예의 진수를 몰라 노자에게 가서 물었거늘...... 다만 이렇다. 내가 만나 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었다." "......?" "내가 알기로는 그분은 모름지기 무위(無爲)의 도(道)를 닦으신 분인 것 같다."
역시 노자는 자신을 숨김으로써 이름이 나지 않도록 애썼다. 오랫 동안 주나라에 있었으나 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관(關: 函谷關 또는 散關 또는 玉門關)에 이르렀다. 이를 알아차린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노자를 붙들고 간곡히 아뢰었다. "선생님, 진정 은둔하시려 합니까." "그럴까 한다." "언제 만나뵙게 될지 모르는데 힘드시더라도 저를 위해 무슨 말씀인들 주시고 가십시오." "어허, 이런 변괴가 있나. 나로선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데." "그렇더라도 무위의 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놈 말 잘하네. 옛다, 이거나 가져라. 그나마 태워 버릴 작정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도덕의 깊은 뜻을 5천여 자로 새긴 상하(上下) 두 편의 <도덕경>이다. 그가 떠난 후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했다.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인 초나라 노래자(老萊者)가 15편의 책으로 도가(道家)의 운용(運用)을 논한 것을 보면 그가 노자의 제자일 법도 하다.
노자는 160세 혹은 200세를 살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무위의 도를 지녔기 때문에 장수했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혹은119) 되는 해에 주의 태사(太史: 史官) 담(憺)이 진나라의 헌공(헌공): B.C.384-362 재위)에게 한 말이 있다. "처음에는 진(秦)나라가 주나라와 합류한 지 5백 년 만에 분리하며, 분리된 지 70년 만에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역사 속의 기록이다. 그렇게 말한 담이 노자라고도 하고 혹은 아니하고도 한다. 노자는 오직 숨어 살았던 군자이기 때문에 그 진위는 추측하는 자의 입장일 뿐이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노자의 아들은 종(宗)인데 위(魏)의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 山西省 安邑縣 近郊) 땅을 봉토(封土)로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궁(宮), 궁의 현손이 가(假)인데 가가 한(漢)의 효문제(孝文帝)를 섬겼다.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인 앙(仰)의 태부(太傅: 輔佐官)가 되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제(劑)에 살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는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儒學)을 배척한다. 유학자들 역시 노자를 이런 식으로 배척한다. "길이 같지 않으면 일을 서로 꽤할 수가 없다." 노자는 인위적으로 작위하지 않으면서도(無爲)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환케 하고, 조용하게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가르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장자(壯子)는 <어부(漁父)>, <도척(盜척>, <거협(거협)> 등의 글을 지어 공자의 무리들을 비판하면서 노자의 가르침을 밝힌 사람이었다. 몽(夢) 사람이며 이름은 주(周)다. 일찍이 칠원성(漆園城)의 관리가 되었다. 양(梁)의 혜왕(惠王)이나 제의 선왕(宣王) 시대 사람이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학문은 나름대로 무척 박학다식하면서 결국 요점은 노자의 학설로 귀착된다. 그래서 10만 여자의 그의 노작은 노자의 가르침에다 자신의 설명을 덧입힌 우화(寓話)로 일관하고 있다. '외루허(畏累虛)'라는 산 이름, "항상자(亢桑子: <莊子> 雜篇23,庚桑楚篇의 庚桑楚로서 畏累虛山에 살았다 함"라는 인명 등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가공적인 것이었어나 문장을 잘 엮어 세상 인정을 교묘히 이용해 유가나 묵가(墨家)를 절묘하게 공격했으므로 당대의 어떤 대학자라 할지라도 그의 비판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의 언사는 너무도 광대했고 자유분방했으며 아무한테서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초의 위왕(威王: B.C.339-325 재위)이 장주가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사자에게 후한 선물을 들려 장주에게 보냈다. "주군께서 선생님을 재상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장주는 웃었다. "천금이라면 막대한 금액인데다가 재상 또한 존귀한 지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마다하시지는 않겠지요." "자네, 교제(郊祭: 교외에서 지내는 天祭)에서 희생되는 소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소를 몇 년 동안 잘 먹이고 수놓은 옷을 입혀서 호화롭게 사육하지요." "아무리 그렇지만 끝내는 태묘(태묘: 종묘)로 끌려 들어가서 죽게 되지." "......?" "그 때를 당해 죽기 싫다면 갑자기 돼지새끼가 되겠노라 아우성을 친다 해서 소가 돼지로 변하던가?" "?" "어서 그냥 돌아가게. 나를 더 욕되게 하지 말고." "하지만......!" "차라리 나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유유히 놀고 싶다네. 왕에게 얽매인 존재는 되기 싫으이. 못 알아 듣겠나? 죽을 때까지 벼슬 같은 건 하지 않고 마음대로 즐기며 살고 싶단 말일세."
신불해(申不害)는 경현(京縣: 河南省 榮陽縣) 사람이다. 원래는 정(鄭) 나라에서 미관말직에 있었으나 형명(刑名 : 法家의 學.官吏 임용시 그의 논과 실제의 일치 여부를 간파하는 君主를 위한 政治學) 법술(法術)을 배워 한(韓)의 소후(昭侯: B.C.358-338 在位)에게 청하였고 소후도 그를 등용해 재상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신자(申子: 申不害)는 안으로 정치와 교육을 정비하고 밖으로는 제후들과 교응하기를 15년. 죽을 때까지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병력은 막강하여 한나라를 침략해오는 나라가 없었다. 신자의 학문은 황제(皇帝).노자에 기본을 두었으며 형명을 주로하였다. 책 두권을 썼는데 <신자(申子)>라 불린다.
한비자(韓非子)는 한나라 공자 가운데의 한사람이다. 그도 형명.법술의 학문을 즐겼으며 바탕은 역시 황제.노자(法家)에 두었다. 날 때부터 말더듬이었기로 유세가 어려운 것으로 알고 대신 글짓기에 열중했다. 진왕(秦王: 후에 秦始皇)이 어느 날 승상인 이사(李斯)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한비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오?" "녜에, 잘 압니다.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하신 스승 순경(筍卿: 筍子)아래에서 동문 수학했습니다." "아아, 그러하오? 짐이 그의 <고분(孤墳)>과 <오두(五두)>를 읽었는데 내가 이 책의 저자와 만나서 사귈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소." "하오나 불행하게도 그는 말더듬이올시다." "그러하니 유세는 어렵겠구료." "모르긴 해도 언젠가는 대왕께서 그를 만나실 날이 있을 겁입니다." "한비에 대해서 좀더 알려 주오." "변론이 불가능했던 그로서는 오로지 저술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저서가 또 있소?" "기왕의 두 권 외에 <내외저(內外儲)><세림(說林)><세난(說難)> 등을 십만 글자로 저술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관심이 많소. 그의 학풍(學風)은 어떠하오?" "형명(刑名) 법술(法術)의 학문을 좋아하여 황제(皇帝).노자(老子)의 도를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한비는 항시 한왕(韓王)께 불만이 많았습니다." "임용되지 못한 불만이었소?" "그런 셈이지요. 타국의 침략으로 영토가 깎이고 국세가 약화되는 것을 보고 자주 글을 보내어 한왕에게 간하였지요." "한왕은 그의 의견을 활용하지 않았겠다?" "한나라에는 불행이며 진국에게는 다행입니다." "어떤 내용을 간하였소?"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법제를 정비하고 군주로서의 권세를 쥐고 그 신하를 제어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병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인재를 찾아 임용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경박하고 음탕하여 독충같은 소인을 뽑아 쓰니 울화통이 치밀었겠지요. 그가 남긴 것 중에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유자(儒者)는 문(文)으로써 국법을 어지럽히는 자이며 협자(俠者:遊俠의 무리)는 무(武)로써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이다. 그런데 군주는 평상시에 명예로운 유자를 총애하고 비상시에 갑옷 입은 무사를 등용한다. 이래 가지고는 평상시에 후대하여 양성한 자는 비상시에 쓸모가 없고 비상시에 쓸모가 있는 자는 평상시에 후우(厚遇)한 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청렴 강직한 선비라 부정한 권신들 때문에 군주와의 사이가 가로막히는 것을 슬퍼한 거겠지......." "한비자(韓非子)의 <세난>도 읽어 둘 만합니다." "유세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요?" "여기 있습니다....... 특히 제 12장이 유명합니다."
-무릇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이 불충분하여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며 내 변설이 서툴러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고 내 용기가 부족하여 감히 해야 될 말을 자유자재로 다하기 어렵다는 것도아니다. 문제는 상대의 심정을 파악해 내 주장을 거기에 적중시키는 데에 있다. -높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하다가는 절조(節操)와 견식이 낮고 천박한 인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반대로 큰 이익을 탐하는 자에게 명성을 높이도록 설득했다가는 세상 물정에 어둔 자라며 경원될 것이다. 속으로는 후한 이득을 얻고자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높은 명성을 원하는 척하는 자에게 높은 명성을 설득하면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멀리하며,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하면 가만히 그 연설을 속으로만 채용한 뒤 겉으로는 그 사람을 버린다. -무릇 만사는 은밀히 진행함으로써 성취하고 말이 새어 나감으로써 실패한다. 설사 유세자가 상대방의 비밀을 들출 의도가 전연 없으면서도 부지중에 상대의 비밀을 언급하면 유세자의 신상은 위태롭다. 상대자의 과실의 단서가 엿보일 때 유세자가 주저없이 잘못을 들추어 내면 비록 그 논의가 정당하더라도 역시 자신의 신상은 위태롭다. -아직 충분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혜택을 입을 경우도 아니면서 온갖 지식과 지혜를 기울여 설득하면 설사 상대가 그 설을 실행하여 공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설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였을 경우에는 오히려 상대는 유세자의 설을 취택하지 않아 그가 방해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도 자신의 신상은 위험하다. -또한 어떤 계획을 고안한 귀인이 자신의 공적을 독점하려 하고 있는데 유세자가 인지하여 관계하게 되면 신상에 해롭고, 상대가 겉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은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을 때 유세자가 그런 사정을 알고 있어도 신상이 좋지 않고, 귀인이 이것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세자가 실행을 강요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그만두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그만두게 하면 역시 유세자의 신상은 위태하다. -군주를 상대로 명군현주(明君賢主)를 논하면 자기를 헐뜯는다는 오해를 받게 되며, 우자(愚者)에 관해 논하면 남을 헐뜯음으로써 자기 장점을 돋보이게 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으며 군주가 총애하는 자를 칭찬하면 아부한다는 오해를 받고 미워하는 자를 헐뜯으면 얼마나 미워하는가를 시험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는다. -말을 간결하게 하면 무지하다며 무시하고, 광범하게 예증을 많이 들면 그 장광설에 싫증을 낸다. 사실에 입각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면 자설을 피력하지 못하는 소심한 비겁자라 오해받고, 대담하고 거침없이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예의도 없는 거만한 촌놈으로 찍힌다. -무릇 유세의 요령은 군주의 장점을 칭송하고 그 단점을 건드리지 않는다. 군주가 자신의 계획을 지혜롭다고 여기고 있을 때 구태여 그 결점을 지적해 궁지로 몰지 않는다. 군주가 용기 있는 결단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구태여 반대 의견으로 노하게 해선 안 된다. 군주가 자신의 실력을 위대하다고 믿고 있을 때 구태여 군주의 미력함과 곤란한 점을 들어 막지 않는다. -군주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을 때 다른 일로 같은 계획안을 가지고 있는 자를 칭송하고, 군주와 같은 실패를 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실패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뚜렷이 감춰 준다. 군주의 뜻한 바를 거역하지 말며 군주의 말을 공격 배척하지 않고 비위를 잘 맞춰 두면 훗날 자신의 변지(辯知)를 떨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군주와 친근하게 되어 의심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자설을 다할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해서 세월이 지나면 군주의 신용과 은택도 두터워지게 마련이니 깊고 큰 계획을 올려도 의심받지 않으며 군주와 마주앉아 간사(諫事)해도 죄 받지 않으니 그 때 국가의 이해를 분명히 따지면 공적은 내것이 되고 사물의 시비를 솔직하고 사실대로 지적해도 작록을 얻는다. 이같이 군주가 의심하지 않고, 죄 주지 않으며, 공적을 내것으로 하여 작록을 받는 데까지 이르면 그 유세는 성공이다.
이윤(伊尹: 殷 湯王의 재상)은 처음에 요리사였고 백리해(百里奚:秦의 재상)가 노예였던 것은 임금에게 등용되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다.
-송나라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비가 내려 담장이 무너졌을 때 아들과 이웃집 주인이 담을 다시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든다는 말을 했다. 과연 밤에 도둑을 맞았는데, 주인은 아들의 선견지명을 칭찬했고 이웃집 주인을 도둑으로 의심했다. 정(鄭)나라 무공(武公)이 오랑캐를 칠 계획으로 공주를 호(胡)의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나서 신하에게 물었다. 어떤 나라를 치는 게 좋으냐고 했을 때 대부 관기사(關其思)가 호를 치자는 주장을 하자 형제국을 치자는 주장을 했다 하여 관기사를 사형에 처했다. 소문을 들은 호는 무방비로 있다가 정나라의 침략을 받고 나라를 빼앗겼다. 이웃집 주인과 관기사의 의견은 꼭 같이 정당한 것이었으나 한 자는 의심을 받고 한 자는 목숨을 잃었다. 이는 곧 한 사물의 진상을 지혜로써 안다는 건 어려운 게 아니나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어렵다는 뜻이다.
-위(衛)나라 군주 영공(靈公)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美少年)미자하가 모친의 병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군명(君命)이라 속이고 군주의 수레를 몰아갔다. 위의 법률에는 허가 없이 군주의 수레를 탄 자는 월형(월刑: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월형을 감수하면서까지 효성을 다했다 하여 미자하는 오히려 군주로부터 기특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군주를 따라 과수원에 갔다가 맛있는 복숭아를 먹다 말고 군주에게 올리자, 미자하는 나를 사랑하여 제 입맛을 참고 나에게 주는구나하며 더욱 사랑했다. 용색(容色)이 쇠하고 군주의 총애를 잃었을 때 미자하는 아주 사소한 죄를 지었다. 이 놈은 일찍이 나를 속여 수레를 탓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놈이라며 군주는 이제까지의 죄를 한꺼번에 몰아 참형에 처했다. 군주에게 사랑을 받으면 그 지혜가 군주의 마음에 들 것이고 미움을 받으면 죄를 얻어 더욱 멀어진다. 고로, 간언하고 유세하려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잘 살핀 후에 해야 할 일이다. 용이라는 짐승은 잘 길들여 친하면 등에도 탈 수 있으나 목에 붙은 한 자 가량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물어 죽인다. 인주(人主)에게도 역린이 있거늘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한 유세자의 유세는 거의 성공한 것이다.......
"절묘하구려!" 진왕은 한비의 저작에 재삼재사 감탄했다. "하오나 한비의 다른 저서를 보면 유가(儒家)인 순자의 문하에서 저와 함께 배웠으나 차라리 그는 유가와 정반대로 갔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인정(人情)의 개입을 철저히 배격하는 그의 형명법술(刑名法術)은 차라리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그게 더욱 좋소. 그를 불러 오시오." "그가 오더라도 한의 공자 중 하나이니 진을 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가 보고 싶소. 묘책이 없겠소?" "딱 한 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한비를 그리워하여 한을 치신다 소문을 내십시오. 그가 반드시 사자(使者)로 올 것입니다." 이사의 말에 진왕은 무릎을 쳤다. "묘책이오!" 진왕은 한을 한비 때문에 친다는 소문을 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군사를 보냈다. 한에서는 다급했다. "한나라는 약하고 진은 강하오. 위태로움을 일시라도 모면하려면 진왕이 기리는 비(非)를 사자로 보낼 수 밖에 없소." 한비는 등용되지 못한 한을 품고 있었다. 단 한 가지의 계책도 들어 주지 않는 한왕을 원망하면서 내심 하나의 계책을 세우며 진나라로 들어갔다. "거기에 친구 이사가 있다. 진왕은 야망이 크며 현명하다. 나를 필히 크게 등용할 것이다......." 한비의 짐작은 옳았다. 진왕은 한비의 내방을 크게 기뻐하면서 중용할 계획을 세우며 그를 위해 매일 잔치를 열었다. 그 때 이사는 재상이 되어 있었는데 한비의 중용이 기정 사실화 되어 가자 더럭 겁을 내고 있었다. "이것은 얘기가 다르다. 설마 한비가 중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의 우수한 재능을 안다. 실상 나는 그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한다. 진왕도 그의 재주를 미리 알아보고 있다. 그의 됨됨이에 홀딱 빠져 국정을 모조리 맡길 심산인 것 같다. 이것은 곤란하다. 한비의 출세는 곧 나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를 제거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즈음에 구경(九卿) 중의 하나인 요가(姚賈)가 이사를 은밀히 찾아들었다. 그 역시 한비의 뛰어난 재능을 알고 있어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참이었다. "승상, 어떻게 하실 참이오?" "대왕의 신임이 저토록 두터우니 나로선들 별수가 있겠소."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힘을 합쳐 한비의 등용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막을 수가 있단 말이오?" "승상은 대왕께서 한비를 아끼고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등용치 않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의 공자이니 아직도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점을 침소봉대시켜 대왕께 상주하도록합시다." "침소봉대라면......." "한비는 등용해도 한을 위하지 진을 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으로서야 당연한데...... 대왕께서 그 점을 곧이들으실까요. 저토록 한비에게 빠져 계시는데." "그렇대서 대왕께서 그를 등용치 않고 오래토록 진에 잡아 두었다가 나중에 한으로 돌려보내면 그 역시 원한을 품고 진을 멸하는 데 모든 지모를 짜 낼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립시다." "결국은 서둘러 그를 중용하라는 말씀 아니오?" "이 때 슬쩍 하나의 계략을 꾸며 놓는 겁니다. 한비가 사자로 처음 왔을 때 대왕께 무슨 계략을 드렸는지 그것을 알고 계시지요?" "한이 침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진을 약화시키는 꾀를 여러 개 내놓았지요." "특히 한비는 이렇게 말했소이다. 진의 강대함에 비한다면 제후들은 군현의 군신처럼 약소하다. 그러나 만약 제후들이 합종(合從)해서 공동으로 불시에 침범하면 진으로서도 속수무책이다. 이는 바로 진(晋)의 지백(智伯), 오왕(吳王) 부차(夫差), 제(齊)의 민왕(민王)이 멸망한 까닭이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말고 제후와 중신들에게 뇌물을 보내 진을 치려는 모계(謀計)를 교란시켜라. 약간의 재물을 허비함으로써 제후들은 모조리 진의 지배하에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주장했소이다." "오래 전에 내가 대왕께 드린 똑같은 계략이오. 한을 지키기 위해 나라도 별수 없이 그렇게 말했을 거요. 그런데, 그게 어째서 우리들의 계략이 되지요?" "가만히 사람을 한비한테 보내 진왕이 당신을 모해하려 한다는 귀띔을 주면 한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만일 달아난다면......?" "달아나면 다행이며 달아나지 않을 것에 대비해 한비가 대왕 욕보이는 말을 이렇게 저렇게 하더라는 소문을 대왕의 귀에 들어가도록 슬쩍 흘려 놓는 거지요." "어떤 내용의 소문이지요?" "한비는 이렇게 말하더라. 진왕의 사람 됨됨이를 찬찬히 보면 콧마루는 높고 눈꼬리는 길게 찢어져 언뜻 영웅의 기상으로 보이나 실은 독수리처럼 가슴이 튀어나오고 목소리가 승냥이 같아 남에게 은덕을 끼칠 관상이 못 된다. 호랑(虎狼)과 같은 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곤궁했을 때에는 자신을 거침없이 낮추고 지금 무위무관(無爲無官)의 필부인데 진왕은 나를 보면 언제나 자신을 낮추니 이는 필시 진왕이 천하를 호령하는 뜻을 얻었을 때 나를 잡아먹겠다는 조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소리쳤다는 소문을 그렇듯하게 내는 겁니다." "대왕께서 그런 풍문을 믿어 주시는가가 문제겠지요." "그렇대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정당(政堂)의 계하(階下)에서 조회가 열릴 때마다 한비를 비방하면 별수 없이 대왕께서도 최소한 그를 의심하여 등용시키지는 않겠지요." "밑져야 해로울 게 없으니 그렇게 해 봅시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던 요기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띠고서 이사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말이오. 한비가 죽게 되면 유세의 어려움을 설파하고서도 끝내 자신만은 비명에 죽어 세난(說難)의 어려움을 헤쳐 나오지 못한 것이 되는구려......." 한비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열화와 같자 진왕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 그의 죄가 무엇인지 다루어 보기라도 하오. 그런 후에 죽여도 늦지 않소......." 한편으로 이사는 독약을 들려 서둘러서 가만히 옥중으로 사람을 보냈다. 한비를 지극히 아끼는 진왕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를 제거하는 게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옥으로부터 돌아온 부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한비는 죽었습니다." "맹독을 마시고 죽은 건 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더냐고 묻는 중이다." "대왕께 마지막으로 알현하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직권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옛 친구로서의 정의(情誼)가 있으니 승상을 만나 뵙게 해 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그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가 독배를 스스로 들었다는 말이지." "하늘 우러러 외치고 나서 잔을 들었습니다." "무어라 외치더냐?" "나 한비는 먹줄을 친 것처럼 분명하고 깔끔하게 법규를 제정하여 모든 세사(世事) 인정(人情)에 절실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시행하지도 않은 법제를 시비(是非)의 별(別)을 분명히 갈라 놓아 궁극적으로 너무 각박하여 인정미가 없다는 죄 하나로 나는 죽는다. 내가 <세난>을 저술했으면서도 자신의 화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못내 슬퍼할 따름이다......." 역시 진왕은 한비의 투옥을 뉘우치고 사자를 보내서 그를 사면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렇지만 진왕의 정책은 한비의 학설에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노자가 존귀하게 여기는 도(道)라는 것은 허무이다. 자연에 순응하여 그 변화에 따른다. 그의 언사(言辭) 역시 미묘하여 해독이 어렵다. 장자는 그 도덕을 더 넓혀 분방하게 논했는데 그 요체는 결국 무위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신자는 도덕을 손쉽게 형명.법술에 적용했다. 한비자는 먹줄을 친 것처럼 깔끔하게 법규를 제정해 모든 세사.인정에 절실하고 시비의 별(別)을 분명하게 갈라 놓았다. 그러나 너무 가혹해서 은혜가 없었다. 모두들 도덕에 근원을 두고 있는 학설이지만 역시 노자가 가장 심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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