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13. 내 운명은 나의 것 - 시지프스
위대한 의식의 순간
야근을 끝내고 돌아오는 캄캄한 밤,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또는 간간히 책장 넘기는 소리밖엔 들리지 않는 독서실 한구석에 앉아 시험 공부를 하다가 돌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는가?, 내 삶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에 따라선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느닷없이, 또 강렬하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그것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아니라 습격 이라고 해야 온당할 정도이다. 내 삶의 의미를 묻는 그런 회의에 습격당하면 이제까지 너무나 익숙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나 전철을 향해 뛰는 그 분주함도, 수험서의 중요한 대목에다 밑줄을 긋는 손길도, 질탕한 술자리의 그렇고 그런 소란도, 승진을 향한 피말리는 경쟁도, 밤늦은 귀가 때의 종종걸음도... 요컨대 똑같은 리듬으로 월·화·수·목·금·토 계속되는, 이제까지는 아주 자연스럽고 수월하던 그 모든 일상이 갑자기 무의미해 보이고, 지루하고, 역겨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바깥 세계가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정물처럼 서먹서먹해지고 나아가선 두렵기까지 하다. 내 삶은 무의미한 일상의 궤도를 습관적으로 따라 돌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에 아득바득 쫓기며 살아온 이제까지의 자신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우리를 성큼 떼놓고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세계로 찾아든 이방인처럼 만들어 버리는 이 돌연하고도 비참한 순간을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위대한 의식의 순간이라 칭했다.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생의 부조리에 눈뜨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란 다른 말로 무의미함, 허망함을 뜻한다. 카뮈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철학적 에세이<시지프스의 신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에에 대답하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 문제 에 대한 카뮈의 결론은 이렇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얼핏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이 두 문장 사이에 가로놓인 긴 사유의 과정을 알고 싶은 사람, 실존을 자각해 본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 본 사람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러자면 그에 앞서 시지프스에 대해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가장 현명한 인간 시지프스
시지프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프스는 인간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한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뜻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 찍힌 존재였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형인 아폴론의 소를 훔쳤다고 한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는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웠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를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이 완전 범죄를 망쳐 놓은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시지프스였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지프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임을 일러바쳤던 것이다.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지프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여하튼 신들의 일에 감히 인간이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눈밖에 나 있던 차에 뒤이어 시지프스는 더욱 결정적인 괘씸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느 날 시지프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잠시 궁리한 끝에 시지프스는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신 아소포스를 찾아갔다. 딸 걱정에 천근 같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소포스에게 시지프스는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 준다면 딸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노라 했다. 시지프스는 그때 코린토스를 창건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엇다. 그러니 코린토스에 있는 산에다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게 시지프스의 청이었다. 물줄기를 산 위로 끌어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쨋거나 딸을 찾는 게 급했던터라 아소포스는 시지프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시지프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휘치를 가르쳐 주었고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냈다. 자신의 떳떳찮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어바친 자가 다름아닌 시지프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신 타나토스(죽음)에게 당장 그놈을 잡아 오라고 명려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보복하리라는 걸 미리 헤아리고 있던 시지프스는 타나토스가 당도하자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 명계의 왕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출하게 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섰다간 온 코린토스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지프스는 이번엔 순순히 항복했다. 그런데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가면서 시지프스는 아내 멜로페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릴 것이며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일렀다.
영겁의 형벌
저승에 당도한 시지프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읍소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시지프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생불사하는 신이 아니라 한번 죽으면 그걸로 그만인 인간인 그로서는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도 소중했던 것이다. 하데스가 몇 번이나 타나토스를 보내 을러대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시지프스는 갖가지 말재주와 임기웅변으로 체포를 피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후로 오랫동안을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별빛이 되비치는 바다와 금수초목을 안아 기르는 산과 날마다 새롭게 웃는 대지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하고 신중하다 한들 인간이 어찌 신을 이길 수 있었으랴. 마침내는 시지프스도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 명계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명계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다.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 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시지프스는 바위보다 강하다
다시 굴러 떨어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 끔찍하지 짝이 없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시지프스의 무익한 노동 앞엔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카뮈는 시지프스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인 까닭이 바로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노동이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알면서도 수백, 수천, 수만 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에 있다고 갈파했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절망스럽고 참혹할 듯한 순간-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 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이기는 승리의 순간 이다.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시지프스가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이 휴식의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영역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그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시지프스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시킬 수 있다. 자신의 노동이 헛되고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위안 삼을 헛된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슬픔과 비탄에 빠지지 않고-말하자면 신들이 정해 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굴러 떨어질 바위를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 카뮈는 그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불안하고 가파른 실존을 대면하는 인간의 응당한자세를 읽어낸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조류이다. 실존주의를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명제는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데, 이 말 속에는 실존주의의 특징뿐만 아니라 실존주의를 잉태한 20세기 전반적인 사회 상황이 그대로 녹아있기도 하다. 18·19세기는 신념과 희망의 시대였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며, 이성의 빛에 따라 사회와 역사는 진보·발전해 간다는 낙관적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일찍이 없었던 위기와 혼돈, 불안과 동요에 빠지게 되었다. 근대 시민 사회의 모순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세기말의 혼랑과 뒤이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이제까지의 믿음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증오와 투쟁, 무의미한 전쟁과 대량 살육,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야수적인 면모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따위의 본질은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맞닥뜨린 불안·허무·두려움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삶, 즉 실존이었다. 실존주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무의미하게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신의 소명을 받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심오하고 아름다운 본질을 실현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본질이라거나 의미 같은 건 애초에 없다. 그러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기에도 원래부터 주어진 정답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기자신일 뿐이다. 일단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자기를 의식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들은 우연적이며 부조리하다. 나무나 돌은 자신의 생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장하고 소멸할 따름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이 있는 존재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만아니라 자기 자신도 의식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선험적으로 주어진 의미 따위는 없다. 결국 인간은 주어진 상황, 주어진 순간 속에서 스스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마치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듯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본질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자유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인간의 존재 양식 그 자체임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이기를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으며, 자유 안에 던져져 있다.
참을 수 없는 실존의 무거움이여!
실존주의는 이처럼 개개인의 철저한 자각과 창조적인 주체성을 강조하고 그 역할을 한껏 높이 샀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한 개별적인 존재 조건뿐만 아니라 넓게는 사회·역사적 상황도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개인의 적극적인 선택과 행동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운명과 역사의 유일무이한 주체로 세웠다. 실제로 카뮈와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비롯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사회·정치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자평에 하등의 이의를 달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철학과 이론, 주장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또한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선택은 수많은 사회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전후좌우에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얽혀 있고, 그의 내면에는 이미 자기화된 사회적과 도덕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의 선택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으며, 나의 판단 은 어떤 기준과 근거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은 역사로부터 물려받거나 사회로부터 배운 것이기 십상이다. 사르트르도 이 점을 인식하고 어떤 개인도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완전히 자유로운 실존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구원은 불가능하다 고 고백하였다. 본질만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힘들 듯이 실존만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관계 속에 놓인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삶과 역사의 주체로서 끊임없는 선택과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실존주의의 명제는 거역할 수 없이 아름답다. 굴러 떨어진 돌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처럼. 더구나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까지 듣고 나면 인류의 일원으로서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게 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에 전세계의 무게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내 어깨 위에 놓인 전세계라니, 참을 수 없는 실존의 무거움이여!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고 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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