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중론 - 용수(150? ~250?)
제2의 부처님이자 대승불교 8종의 조사로 불리는 용수의 초기작품으로 인도의 깊은 철학적 사색이 낳은 가장 난해한 저작이다. 대승불교의 반야경에 나타난 공 사상을 계승하여 이론적 기초를 명확히 한 용수는 이 책에서 모든 것은 어떤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서 유로든 무로든 파악될 수 있다는 중관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공과 연기의 문제를 유 또는 무로 단정하지 않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중론의 방법을 통해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의 중관학파와 중국 삼론종의 근본입장이다.
파우스트적 생애
일본의 한 출판사(고단샤)에서 펴낸 인류의 지적 유산 시리즈(전 80권)에는 불교에 관한 저서가 5권이 있는데, 석가, 용수, 세친, 달마, 선도 등이 그것이다. 이중 용수는 중관파의 연구에, 세친은 유식파 연구에, 달마는 선의 연구에, 선도는 정토교의 연구에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선종의 14대 조사이자 대승불교 8종의 조사, 그리고 중관학파의 개조인 나가르주나(용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의 전기가 전해오고 있으나,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어렵고 내용 또한 서로 다르다. 여기서는 유명한 번역가인 구마라습이 쓴 용수보살전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남인도 바라문 계급 출신인 용수는 천성이 총명하고 탐구욕구가 강한 파우스트적 인간 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천문지리예언 및 온갖 도술을 체득하여, 마음을 닦고 깨달아야 할 천하의 깊은 도리를 모두 통달했다고 자신했다. 하루는 친구 셋과 의기가 투합하여 앞으로 무엇을 하며 즐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은신술을 배워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기로 한다. 그래서 은신술의 대가를 찾아가 이를 마스터한 후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인들을 모두 범해버렸다. 얼마가 지나자 궁녀들 가운데 임신한 여자가 속출했다. 임금은 신하들과 상의하여 왕궁의 출입문에다 잔 모래를 뿌려놓았다. 이를 모르고 왕궁에 다시 들어왔던 네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게 되어 병사들이 휘두른 칼에 세 명은 죽고, 용수는 왕 옆에 숨어서 이를 피했다. 이때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욕망은 괴로움의 근원이며, 모든 재앙의 뿌리이다. 덕이 상처입고 몸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모두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만일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수행자에게 가서 출가의 법을 받겠다.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온 용수는 산으로 들어가 선종 13대 조사인 가비마라에게 출가를 한다. 출가한 지 90일만에 경율논의 삼장을 모두 독송했지만,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해 다른 경전을 찾아 히말라야로 들어간다. 거기서 대승불교 경전을 전해받는 등, 인도 곳곳을 돌며 아직 보지 못한 경전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불교 이외의 수행자들의 글이나 주장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들을 복종시킨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힌 그는 진리에 이르는 길은 아주 많다. 부처님의 경전은 절묘하여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 미흡한 점도 있다. 도리에 철저하지 못한 것을 헤아려 기술하여 그로 인해 깨달아서 후학들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자.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라고생각한다. 이때 대룡보살은 지적 오만에 빠져 있는 그를 딱하게 여겨 심오한 경전이 가득 찬 바다의 궁전으로 안내한다. 그는 90일 동안 경전을 탐독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진실을 체득한다. 이윽고 그는 여러 경전이 든 상자 하나를 얻어 깊은 무생법인, 즉 공인 진리를 깨달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보살은 그를 남인도로 돌려보냈다. 용궁에서 나온 그는 깨달은 진리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고 저서들을 남겼다. 그중 중론과 화쟁론은 그가 쓴 것이 확실한 것으로 산스크리트 어로 전해진다. 그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나무의 뿌리를 치지 않으면 가지가 기우는 일은 없다. 국왕을 인도하지 못하면 바른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왕의 경호대장이 되어 왕을 설복시킨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만 명의 바라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궁전에서 머리를 깍고 불교의 계율을 받았다. 그러고 난 후 조용히 방에 들어가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가 방을 부수고 들어가보니, 그는 매미처럼 허물을 벗고 죽어 있었다.
불교사에서 용수의 위치
인도불교는 시대별로 석가 생존 당시의 원시불교, 석가 입적 후 부처사상에 대한 제자들의 다양한 집단이 형성된 소승불교 시대, 그리고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생긴 대승불교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원시불교
석가는 출가 수행하기 전 태자 시절에 매우 관능적인 궁중생활을 했다. 이에 회의를 느낀 그는 출가하여 고행을 했으나, 고행이 결코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후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걷는다. 이 중도를 통해 통찰하고 인식한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르렀다. 중도란 구체적으로 8정도(바른 견해, 판단, 말행위, 생활, 노력, 생각, 명상)를 말하고, 그 이론적 근거로 4성제를 설했다. 4성제란 첫째 인간의 삶은 괴로움이고, 둘째 모든 괴로움의 원인 번뇌이며, 셋째 모든 번뇌를 없애며, 넷째 열반의 길에 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참모습을 고통으로 보고 4고(생노병사)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애별이고, 미워하면서도 함께 살아야 하는 원증회고, 구해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 인간 육신의 구조 자체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오음성고를 합쳐 8고라 했다. 이런 고뇌의 원인을 소멸시키고 고뇌가 없는 열반으로 이르기 위해서는 계정혜를 닦아야 한다고 설했다. 이것을 3학 이라 한다. 불교의 경전은 결국 이런 뜻을 전하고자 한 불타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다.
부파불교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하나로 집결하는 작업을 하고,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교단을 세우기 시작한다. 석가모니의 대제자 마하가섭이 그 일을 주도적으로 시작하여, 석가모니가 45년간 설법했던 가르침(법)과 계율(율)들을 하나로 정리한다. 이것을 제1차 결집이라고 하는데, 5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렇게 결집된 법과 율은 화합된 교단에 의해 잘 전승된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100년 후부터 이러한 법과 율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데 견해 차이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로부터 직접가르침을 받았던 10대 제자들이 모두 죽고 난 뒤부터는 법과 율에 대한 통일성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점차 보수적인 흐름과 진보적인 흐름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그 차이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킬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표현하기로 할 것인가의 차이었다. 또 자신의 깨달음을 최고의 목표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중생구제를 최고의 목표로 할 것인가의 차이였다. 전자가 보수적인 흐름이고 후자가 진보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흐름과 보수적인 흐름을 배격하면서 제2차로 경전과 계율을 결집하게 되면서 이 두 견해는 상좌부(보수파)와 대중부(진보파)로 분열한다. 그뒤 상좌부에서 11파가 나뉘어지고 또 대중부에서 9파가 나뉘어진다. 이때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하는데 각 부파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체계화하여 각각의 논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경율논의 삼장이 형성된다. 그런데 각각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훈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은 논을 형성하는데 주력하다 보니 불교의 교리는 난해해지고, 출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승불교
부파불교가 이렇게 민중들로부터 유리되자 민중 속에서 대중적 불교운동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이러한 민중적 불교운동과 대중부 계통의 혁신적인 승려들이 결합하면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대승불교 운동은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함께 추진하려는 불교운동이다. 그래서 위로는 진리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는 말이 대승불교의 표어가 되었다. 대승이란 큰 수레 라는 뜻으로,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반면 이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라 불러, 특히 보수적인 상좌부가 자기만의 깨달음 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당연히 보수적인 상좌부 승려들은 이러한 대승불교의 폄칭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정통불교 라고 부른다. 이 상좌부의 대표적인 불파는 '설일체유부'다. 그후 대승불교는 북인도,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고, 상좌부의 소승불교는 주로 스리랑카태국 등 동남 아시아로 전파된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이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가면서, 서로간에 깊이 있는 논쟁들이 발생한다. 논쟁을 통해 서로의 정통성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 과정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와 핵심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다보니 약점을 보완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체계적인 교리를 갖추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수가 중론을 통해 보수적인 상좌부의 설일체유부와 벌이는 논쟁이다.
힌두교, 소승불교 비판한 대승불교 기본서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소승불교의 번잡한 교리연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에 반발하여 대중적인 종교운동으로 일어났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승불교도 자신을 철학적으로 무장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소승불교와 같은 논을 쓰게 되는데 공무, 자성, 연기, 중도 등의 대승불교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한 사람이 용수이고, 대표적인 저작이 중론이다. 총 2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론은 주로 소승불교의 여러 부파들의 사상을 비판하는, 그중에서도 특히 소승불교의 대표적 학파인 설일체유부를 공격하고 있는 논쟁서다. 중론의 내용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면 이제 중론의 핵심사상인 공 사상을 설일체유부의 사상과 구별하면서 정리해보자.
유부철학의 객관적 실재론
설일체유부의 핵심사상은 삼세실유 법체항유 인데, 이를 '일체유'라는 말과 합쳐 말하면 일체의 실유인 법체가 삼세(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항유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법이 있는데, 그것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법에 인연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것은 주관적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 실재인 법은 사물을 사물되게 하는 이법을 말하는 것으로 자성을 가져야만 한다. 즉 자기 독립적 실재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색(육신)수(감각)상(사유)행(행위)식(인식)의 여섯 가지에 인연하여 비로소 존재하며, 주관적인 관념이지만 그 5가지 구성요소는 다른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무상하며 자아 역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무아이지만, 이러한 생멸변화로 인한 무상과 무아는 법이 실재하므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는 자성을 가지고 있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 다섯 가지가 결합하여 사물이 생기며, 흩어지면 사물이 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관념에 기초한 집착을 버리고, 법의 실상을 관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현실적경험적으로 드러나는 생활의 모습보다는 그 이면에 가치를 부여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용수의 공사상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으로, 여기에서는 유부의 실재였던 법조차도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용수가 대승불교에 대한 철학적 원리를 제시한다. 중론에서 용수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그 반대의 논증인 자신의 의견이 자연스럽게 인정되도록 하는 방법인 프리상기카(귀류법, 파사현정)을 사용한다. 용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용수의 사상은 중론의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우주에서는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고(불멸), 어떤 것도 생기지 않고(불생), 어떤 것도 종말이 없고(부단), 어떤 것도 항상함이 없고(불상), 어떤 것도 그 자신과 동일하지 않고(불일의), 어떤 것도 그 자신으로부터 나누어진 별개인 것이 없고(불이의),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해 오지 않고(불래), 우리로부터 가지 않고(불거), 희론(형이상학적 논의)의 소멸이라는 훌륭한 연기의 도리를 설하신 부처님을 모든 설법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으로 경배한다."
이 부분은 '팔불중도'라 하여 중론의 중심사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와 무의 양극을 피하는 석존의 기본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불생불멸), 사물이 생멸변화하므로 무상하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무상한 것 속에 무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것을 또다른 집착 이라며 그것은 생멸변화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공이 옳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생이 있기에 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과 멸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생이면서 동시에 멸인 것이요, 그래서 그는 논리적으로 변화를 부정한다. 생과 멸은 서로 의존 하고 있을 뿐, 변화의 과정이 아니다. 이것은 연기를 시간적 인과의 문제로 본 유부의 입장과는 달리 상호의존 문제로 보고 있다. 이처럼 용수는 연기를 상호의존성 으로 파악했다. 즉 인간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다섯 가지 역시 사람에 의해 구성된다. 다시 말해 이 다섯 가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또 이 다섯 가지의 요소도 사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들 요소는 자성을 갖는 실재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과 변화는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자연의 여러 요소들과의 상호의존과 상호제약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상한 것이다. 즉,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상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공이다. 세계의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지만 공은 결코 무가 아니며, 다만 자성 없이 조건적으로 생기하는 현상세계의 실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공이란 비유^비무이며 중도인 것이다. 또한 공은 연기라는 제법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일단 제법의 실상이 공임을 알면, 그 법들이 아무것도 아닌 무가 아니라 공한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고 표현했다.
중관학파유식학파의 대립과 원효
위에서 본 것처럼 대승불교, 특히 용수를 시조로 하는 중관파에서는 어떤 것도 참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은 겉모양뿐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여러 가지 사상이 상호의존해서 성립하고 있다는 공사상을 정립했다. 하지만 공이란 영원불변하는 무엇이 없다는 것이지, 결코 아무것도 없다는 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불교는 허무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불교 내부에서도 있었는데, 이는 공과 무상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공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며 실상이다. 실로 공으로부터 모든 존재가 비롯된다. 따라서 어떤 조건(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연 이라 한다)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공이요, 이 공이 바로 세계의 참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이 공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로 나뉘어진다. 중론을 기본서로 하는 중관학파는 모든 존재란 그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연이란 관계에서만 성립된다고 보아 공을 특히 강조했다. 반면 미륵이 지은 해심밀경을 근본사상으로 하는 유식학파는 모든 존재가 공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식학파는 모든 사물현상은 오직 인식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우리의 인식활동을 떠난 사물의 개관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식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인식활동만 존재한다는 유식무경의 철학이다. 즉, 중관학파는 세계의 모든 것은 공 이라 하여 부정적인 입장이 강했고, 유식학파는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다 식 이라 하여 긍정적인 입장이 강했다. 이를 흔히 공유의 대립 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인도에서 두 학파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자, 그 해결의 과제는 중국과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신라의 원효라는 사실은 본서의 제1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