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수상록 Les Sssais -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나는 무엇을 아는가(크 세 쥬? Que sais je)" 등의 구절로 유명한 이 작품은 몽테뉴가 오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독서와 사색에 몰두한 후 부담없이 쓴 지혜의 서다. 이 책은 특정하거나 일정한 논리나 순서없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랑욕망죽음등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쓴 책으로, 스토이즘회의주의 에피큐리어니즘을 거친 저자의 사상편력이 담겨 있으며, 그의 인간성 성찰은 후세의 도덕론자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고전여행과 명상 속에서 보낸 생애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 한 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몽테뉴는 르네상스 말기에 나타나 당시까지의 인류지성을 집약한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변화가 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후반기를 대표한 사상가였다. 몽테뉴는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의 신흥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피에르는 젊은 시절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진수를 체득하고 귀국한 후 가세를 확장시키고 마침내 보르도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체험한 부친은 어린 아들의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선 갓 태어난 그를 허름한 농가에 양자로 보내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했고, 4~5세가 되어 양자기간이 끝난 어린 아들에게 당시 지식인의 필수 코스인 라틴 어 교습을 위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인 가정교사를 초빙했다. 종들도 이 아이 앞에서는 라틴 어만을 사용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덕분에 몽테뉴는 6세 때 라틴 고전을 읽을 정도였고, 그때서야 모국어인 프랑스 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때 보르도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을 공부했으며, 16세 때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21세부터 페리그 시의 어용금재판소의 참사가 되어 3년 동안 근무한 후, 그 재판소가 폐지되자 보르도 고등법원의 참의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보에티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몽테뉴보다 몇 살 위인 그는 언어학자이자 문필가로서 금욕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반면, 몽테뉴는 아직도 자신에게 알맞은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독특하고 신비스런 방법으로 우정을 나누었고, 이런 교유는 심원한 인간관계에 대한 몽테뉴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4년 후, 몽테뉴가 "그가 곧 나다."고까지 말했던 친구의 요절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와의 우정이 지속되었더라면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2년간 숱한 연애를 했으며, 33세 때 결혼했다. 36세 때 부친이 죽자 몽테뉴는 몽테뉴 가의 영주가 되어 막대한 재산과 넓은 영지를 물려받았다. 38세에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라틴 고전 탐독과 명상으로 보냈다. 그후 10년(1570~1580)동안 <수상록> 1권과 2권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완전한 은둔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후 그는 곧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했으며, 여행 도중에 일찍이 부친이 역임했던 보르도 시장직에 선출되었다. 1858년까지 시장직에 재직하면서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1588년에 <수상록>을 대폭 증보수정하고 제3권을 넣어 새로이 간행했다. 그후 그는 성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수상록> 가필로 여생을 보내다가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정치적종교적으로는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이 꼬리를 물었고, 사회적으로는 흑사병이 나돌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도 몽테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시대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그는 <수상록>에서 모든 관점에서 문제를 검토하면서도 최종적인 해답은 유보했다.
종교전쟁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면 북방 르네상스는 새로운 종교를 낳았다. 종교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절대주의국가로 가는 도상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한 정치분쟁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독일의 30년전쟁이 유사한 성격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인 위그노와 구교도와의 대립이 왕위계승 문제라는 정치적 대립과 얽혀 30여 년간에 걸친 내란으로 발전했다. 전쟁은 처음 프랑스 왕의 신교도 탄압에서 비롯되었으나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이 신교도를 지원하고, 에스파냐, 로마교황군이 구교도를 원조하는 등 여러 나라가 간섭하여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말기에 왕위에 올라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공인함으로써 내란은 종식되었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재직시 양쪽으로부터 보르도 시를 보호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했으며 그 덕분으로 보르도 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흑사병의 유행
몽테뉴는 그 어려운 시장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운 불행이 덮쳐왔다. 1585년 여름에 발생한 흑사병이 보르도 일대에 만연하여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교외지역에서 주거하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몽테뉴도 가족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로 죽어가는 농민들과 그들의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때 우리는 단순한 서민들에게서 불굴의 본보기를 보았다. 그들은 삶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으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닌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자아성찰의 서
수상록은 1572년부터 1592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집필되었다. 본서는 총 3권 107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장 사이에 논리적 연결은 없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은 반드시 그 장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내기 위한 구실이거나 혹은 이야기를 결말짓기 위한 경우가 많다. <수상록> 제1권에는 로마의 세네카 등 고전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 이성에 따르고자 하는 스토아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자기 성찰이 깊어지면서 스토아적인 경향을 떠나 피론(Pyrrhon)의 회의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제3권에서는 회의주의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us)적인 쾌락주의가 가미되어 소위 자연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결국 그는 쾌락주의적 자연주의에 접근하게 되어 소크라테스를 스승 중의 스승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그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탐구라는 전제 아래 키케로,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세네카 등 로마의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성격행동체험주장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는 항상 흔들리고 기복이 심한 하나의 인간, 즉 자신을 책 속에 그려봄으로써 자기 이상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밝혀보려고 했다. 독자에게 드리는 서문에서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밝히면서, 독자들이 자기를 여기 묘사된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 것 아닌 그를 보아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제1권
제4장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그 열정을 그릇된 목표에 쏟는다>에서는 "바람은 울창한 숲이 그 진행을 가로막지 않으면 그 힘을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루카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요하는 영혼은 그 영혼에게 붙잡을 어떤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므로, 우리는 항상 영혼에게 그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에서는 빈부는 각자의 견해에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 또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만큼 행복하게 살기도 하고 불행하게 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구를 적절히 조절하고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며, 자신의 재산이 늘어나든 줄어들든 그것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일에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19장 <우리의 행복은 사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그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는 그의 행복을 판단할 수 없다"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명은 때때로 우리가 지나간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애를 판단함에 있어 나는 항상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나의 생애가 끝날 때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 즉 평온하고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20장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는 제1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이다. 철학의 연구와 사색은 우리의 영혼을 우리에게서 끌어내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육체 이외의 일에 분주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죽음의 연습이며 죽음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제26장 <어린이 교육에 관하여>에서는 "인간의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는 어린 아이의 양육과 교육이다"라고 그의 교육론을 서술하고 있다. 교사가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학생에게 생각하고 말할 기회를 주고, 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먼저 학생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점을 상기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된다"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교육론은 후에 루소에게 연결되어 루소의 교육학 명저인 <에밀>에 영향을 주었다. 제27장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제28장 <우정에 관하여>는 그와 보에티간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제33장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관능적 쾌락을 피해야 한다>는 초기의 금욕주의 철학인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었던 그의 심경을 보여준다.
제2권
제5장 <양심에 대하여>는 "죄인의 가장 큰 형벌은 재판관인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방면될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유베날리스의 말을 인용하고, "양심이 우리를 공포로 채우듯이, 양심은 또한 우리를 확신과 신념으로 채운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29장 <덕에 대하여>에서는 "한 인간을 아주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그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했다. 제31장 <분노에 관하여>에서 "분노만큼 우리의 판단의 정확성을 감소시키는 감정은 없다 분노로 인해 우리의 맥박이 세차게 뛰고 우리가 흥분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꾸짖는 일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가라앉아 평온해지면 사물은 정녕 다르게 보일 것이다. 분노에 싸여 있는 동안에는 명령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인 것이다"라고 분노의 악영향을 경계하고 있다.
제3권
제3장 <3가지 교제에 대하여>는 우정사랑독서의 기쁨을 기술하고 있다. 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로는 점잖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들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덕있는 여자들과의 사랑도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의 측면에서는 전자만큼 즐거움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교제에 있어서는 경계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두 차례에 걸친 성병도 언급하고 있다. 세번째는 책과의 교제를 들고 있는데 "책은 나의 인생행로에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 나를 도와준다"라며 독서를 예찬하고 있다. 제8장 <대화의 기술>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말도 즉석에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한두 번쯤 그 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음미해보고 그가 무슨 의도로 그 같은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학문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왕의 홀이 되기도 하고 바보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다"는 언급도 나온다. 고전지식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교양서로 환영받고 있는 이책은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과 과학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교육사상은 루소로 연결되어 한층 심화되었다. 또한 그 이후의 휴머니스트에게는 그의 인간성 성찰방법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몽테뉴의 지적 편력
"프랑스의 근대정신은 몽테뉴로부터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그가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추구한 다음 나아가 자기 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예리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각기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자기 성찰을 계속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보편적 인간>을 묘사하고자 했고, 현실적인 생의 관찰을 통해 생의보편적 모럴>을 탐구하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몽테뉴의 위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
금욕주의
초기에 씌어진 에세이 중에는 도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제1권 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19장 "우리의 행복은 죽은 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 20장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39장 "고독에 관하여", 42장 "우리들 사이의 불평등에 대하여" 등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이들 제목이 나타내고 있듯이 이들은 죽음행복불행 등 고대철학이 가장 일반적으로 다루었던 도덕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그가 공감하고 있던 도덕론은 스토아 학파의 도덕론이다. 그가 존경하는 친구 보에티와의 교제를 통해 깨끗한 청교도적인 그의 자세에 감명을 받고 스토아적인 극기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도덕의 본질은 <이성>으로써 정념을 억제하는 데 있다. 정신에 의해 육체를 지배하고 의지의 힘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면 초연한 <무감동상태<apatheia)>상태에 달할 수 있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
그러나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크와 회의주의 철학자인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저술을 읽은 후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멀어진다. 플루타크의 <윤리론집>은 <플루타크 영웅전>과는 달리 범인을 다루고 있어, 그동안 그리스로마의 영웅들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구하던 몽테뉴에게 자기 주위의 주변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차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괴이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회의파 개설>을 읽은 후 사상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피론<Pyrrhon>으로부터 시작된 회의파 철학은 <사물은 본디 불확실한 것이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는 항상 부정과 긍정의 양론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형태로 표현했다.
자연주의
그러나 제 3권에 들어오면서 자연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연의 행복 중에서도 몽테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다. 그는 한때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쾌락을 피할 것>에 찬성했지만 그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를 둔 육체적 쾌락을 피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인데 이것을 둘로 나누어 어느 한 편에 편중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며, 자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편력을 거쳐 그는 점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갔으며 이러한 자기 묘사가 <수상록>의 중심과제가 된다. 그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다가왔다. 자기를 묘사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고정화하는 일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자기를 관찰하고 연구검토함으로써 이제가지 알지 못했던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갔다. 이런 의미에서 <수상록>이 그를 만들고 그가 <수상록>을 만든 상호작용이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묘사하고 자기를 아는 몽테뉴에게는 훌륭하게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비판
그의 주된 관심사가 항상 자기라는 소우주를 완성해가는 것이었기에 일부 비판자들은 그를 <이기주의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몽테뉴의 도덕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도덕의 원리를 실제의 행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수상록> 전체를 보면 그의 사상과 행동의 기저에는 개인주의를 훨씬 초월한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한 박애주의와, 회의주의로부터 얻은 합리주의 정신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록>은 개인을 초월한 넓은 의미의 인간연구서이며, 현대의 살아 있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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