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3장 서양사상
정부론(Two Treatises of Civil Goverment) - 로크(John Loke, 1632-1704)
로크가 명예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작성한 이 책은 정치사회의 성립이 각자의 생명, 자유, 재산 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들의 상호 합의적인 사회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 서술된 로크의 정치이론은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유산자적 정치이론으로서, 그리고 법치국가. 대의제.민주주의. 권력분립. 입법권 우위. 저항권등을 주창하고 있는 현대 자유민주주의 선구적 이론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생애와 작품활동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존 로크를 가리켜 가장 행복한 철학자 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의 정치사상이 드물게 동시대인의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을 대표하는 정치사상가이며 철학자인 존 로크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옮아가는 17세기의 대변혁기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근대정치이론의 확립자. 철학에 있어서는 인식론을 창시한 계몽사상의 개척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로크는 브리스틀 근교 링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찰스 1세에 대항했던 의회법학자였고. 양친 모두 근실한 청교도였다. 웨스트민스트 학교에서 6년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수학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했다. 20세인 1652년 옥스퍼드에 입학하여 철학, 의학, 수학, 자연과학등을 배웠다. 당시의 옥스퍼드의 분위기는 스콜라 철학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는 이에 흠미를 느끼지 못하고, 데카르트나 홉스의 철학을 더 좋아하였다. 이 무렵 그는 한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가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던 것도 이 연애에 실패한 때문인지 모른다. 1666년부터는 옥스퍼드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학위는 받지 못했으나 능력은 인정받았다.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대법관 출신의 샤프츠베리 경을 만난 것도 의사로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특히 그를 수술한 것이 성공하여, 그의 주치인 겸 가정교사가 되고, 그의 저택에서 찰학과 정치학을 발전시켜나갔다. 이와 같은 의사라서의 경력과 그의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은 그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을 모두 배격하고, 모든 지식의 원천을 경험 에서 얻고자 하는 경험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1681년 샤프츠베리 경은 반역죄로 몰려 위험에 처하자 네델란드로 피신했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로크도 네델란드로 망명해서 스투어트 왕의 폭정이 끝날 때까지 철학연구와 인간오성론 의 저술에 힘썼다. 1688년(57세)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큰딸인 메리와 그의 남편 월리엄 3세가 공동으로 국왕이 되자, 로크는 새 여왕이 된 큰딸과 함께 같은 배로 런던에 돌아왔다. 귀국 후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한직에 있으면서 권리장전 의 작성에 협력하였고 통치론(2편) 인간오성론 등을 잇따라 출판하였다. 전자는 위대한 자연법사상과 근대정치사상의 근원지가 되었고, 후자는 영국 경험론의 근원지가 되었다. 이때쯤 뉴턴과도 알게 되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오츠에 있는 프란시스 경과 마샴부인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도 대화와 토론을 주제하여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마샴 부인이 성경에 있는 시편을 읽어주는 가운데, 1704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종을 지켜본 마샴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의 죽음은 바로 그의 생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경건하고 동시에 자연스럽고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시대적 상황과 로크의 사상
로크의 사상은 시대적 상황과 깊은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파란이 많은 시기에 일생을 보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영국사회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이라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겸험했다. 이와 같은 격변 속에서 영국의 정치는 절대왕정으로 부터 공화정으로, 그리고 그 공화정의 지나친 진전에 대한 반동으로 말미암아 다시 국왕주권으로 복귀되었다. 그러나 결국 명예혁명을 통해서 국민주권, 제한 군주제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 혁명의 이론적 사상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로크이다. 정치사상, 정부론에서 보이는 그의 사상적 의의는 매우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자유와 평등의 기본적 인권사상과 의회정치와 권력분립으로 대변되는 현대 민주정치제도의 원리를 공식화 시켰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어 절대왕정을 반박하였다. 신으로부터 평등하게 부여받은 자기보존권, 즉 자연권이 왕에 의해 유린당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연합권으로 분립시키고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여 명예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옹호 하였다. 이러한 저황권 사상은 19세기 독일혁명에, 권력분립론은 몽테스키외에게, 사회계약설은 루소에게, 그의 자유주의는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명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그의 사회계약설은 루소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으나. 대의제나 다수결에 대해서는 견해차이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철학적 급진파인 벤덤주의자들에게는 안내자의 역활을 했다. 벤덤의 공리주의적 목표 및 인간관은 그대로 로크의 경험적 연구방법을 따랐다.
철학사상 : 로크의 철학사상은 인간오성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영국의 사상적 전통 속에 내려오는 경험주의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 그는 인간인식의 기원을 분석하여 1. 데카르트가 말하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는 본유관념 을 부정하고, 2.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상태로서, 지식이 형성되는 것은 경험의 결과라 하였다. 3. 지식이란 감관, 즉 지각, 성찰, 기억, 비판 등과 같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았다. 교육사상 : 교육에 관한 몇가지 견해에서 로크는 그의 교육론을 전개했다. 좋은 교육은 (심신)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고. 좋은 교육자는 운동과 놀이와 충분한 수면을 강조한다. 어린이의 감정발산은 구속되어서는 안되고 교육자는 지식에 앞서 덕성과 지혜를 심어주어야 한다. 부모의 모범 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교육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정부론의 주요 내용
정부론은 두 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이 잘 드러나고있는 고전적 명저이다. 제1논문의 제목은 로버트 필머 경과 그 일파의 잘못된 논리에 대한 반박 이고, 제 2논문은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과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소론으로 되어있다. 제1편은 1680년에 출판된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1681년경에 저술된 것이고, 제2편은 로크가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89년에 귀국할 때까지 망명지에서 저술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청교도혁명에 뒤이은 왕정복고의 반동이 점차 격심해지고 필머의 왕권신수설이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제임스 2세하에서는 토리 당의 전제정치가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으나. 휘그 당은 결국 1688년 제임스를 추방하는 데 성공, 이윽고 명예혁명을 성취시키게 되는데 정부론은 로크가 이 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집필한 것이다.
제1논문 : 로버트 필머는 가부장론에서 왕권신수설을 기초로 하는 전제군주제를 옹호하고 있다. 이 저술을 통해 필머는 가정과 왕국, 아버지의 권력과 국왕의 권력과의 일치를 논거로 하여, 국왕의 권력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그 후계자들의 부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로크는 제1논문에서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필머의 이러한 주장을 성서를 근거로 하여 아담에게는 무제한적인 절대권력이 없었고, 신은 인간에게 이성과 자기보존의 수단을 부여하였다고 반박했다.
제2논문 : 정치권력과 자연상태, 이 제2논문이 속칭 시민정부론으로, 로크의정치 사상이 명백하게 논술되어 있다. 먼저 로크는 정치권력을 자연상태의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 즉 자연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로크이 자연상태는 홉시가 말한 만인대 만인이 투쟁상태가 아니라 평화로운 상태 이며, 각자가 자기보존의 권리를 보호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타인의 생명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자연법의 제한을 받는 상태다. 그런데 자연상태와 정치사회의 차이점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연법의 해석과 집행이 각자에게 위임되어 있기에 권위를 가진 공적인 재판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나 예속 상태는 아니다. 자연권과 자연법, 이어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가닝 어떤 권리를 보유하는가(자연권)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그 내용을 생명, 자유, 재산 이라 규정한다. 이러한 자연권은 정치사회 이전부터 존재하는 권리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권력도 이것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런데 로크가 말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기보존권, 즉 자연권은 자연법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로크는 자연법을 이성에 입각한 법, 즉 인류상호간의 안전을 위하여 인간의 행동을 규제한 영원한 법칙이라고 규정했다. 자연권은 이러한 자연법의 테두린 안에서 인정되는 것이다. 이 전 인류의 보존이라는 목적과 개개인의 권리보존이라는 목적은 로크에게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를 모순없이 조화시키는 것이 제2편 5장 재산권에 대하여 에서 제시된, 노동이 부를 만든다는 생산력적인 사고방식이다. 즉, 로크에 의하면 세계는 모든 인류공동의 재산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각자는 노동을 가함으로써 사유재산을 만들었고, 이것이 전체적인 세계의 부를 증대시켰다. 따라서 화폐에 의한 부의 불필요한 축적이 없는 한 각자의 사유재산권은 서로 남을 침해하는 일 없이 조화있게 존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로크는 말한다.
사회계약 : 이상과 같이 로크는 자연상태를 고찰한 다음(부권)과 정치권력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어 정치권력 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로크는 정치사회의 목적이 자연권의 보존 에 있다면서, 그를 위해 공동의 법률과 재판권을 설정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절대군주가 지배하고 백성은 소송조차 못하는 국가를 정치사회라 볼 수 없으며, 그 같은 국가는 여전히 자연상태에머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는 오직 그 구성원의 동의 에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사회계약설의 전제는 1. 모든 인간에게 어떤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것, 2. 정부는 이 권리를 보호할 의사와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전제 아래 사람들은 사회나 정부를 구성하는 데 합의를 보게 된다 로크에 있어서의 합의는 국가의 기초이며 주권성립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로크는 정부의 실제 운영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사에 따르는 대의제 를 주장하였다, 바로 이점에 불만을 느낀 루소는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행사하는 전제의 위험을 극복하고자 그 자신의 사회계약론 을 제시하였다. 책임있는 정부와 국민, 그러나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이 함의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정부 쪽에서나 국민 쪽에서 상호간의 의물르지킬때만 유효한 것이다. 즉 국민은 이성과 책임을 가지고 방종에 흐르지 말아야 하며, 정부는 위탁된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만일 정부가 기본권인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방자해진다면 물러나야 하며, 극단의 경우 혁명에 의해 타도 될 수도 있다, 즉 책임있는 정부와 책임있는 국민을 강조한다.
2권분립과 저항권 : 로크는 사회계약에 의해 정치사회가 일단 성립하면 다수결 원리가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 다수자가 스스로 정치권력을 행사할 때는 민주정제가 되고, 소수자에게 이것을 위임할 때는 과두정체 가 된다, 한 사람에게 위임할 경우에는 군주정제가 된다, 로크는 입법권과 행정권 및 연합권(외교권)이라는 세 가지 권력을 내세웠는데, 이는 소위 3권을 분립시킨 것이 아니고, 입법권이 기타 권력에 우선한다고 보았다. 단지 혁명정국에는 행정권이 입법권을 우선하는 경우도 인정(국왕의 대권)하고 있으나. 어느 경우에도 국가를 구성한 원래의 목적, 즉 개인의 자연권을 보존한다 는 목적은 어떤 한 권력에 의해서도 침범받지 않으며, 이것을 침해받을 때에는 국민이 저항 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주장한다.
사상적 의의
로크의 사상은 단지 영국혁명을 물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의 일절은 바로로크의 정치사상의 간결한 요약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음, 그리고 그들에게는 창조주로부터 만인에게 양도해줄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국민들 사이에 세워지는 것이므로, 그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 에 유래하는 것이다. 정부가 어떤 모양으로라도 이러한 목적들을 파괴하게 되면 국민은 그러한 정부를 변경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며, 그리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원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시의 인권선언 속에서도 권리의 보장이 학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되어 있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니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로크의 정부론 은 근대헌법의 기본원리를 최초로 명확히 제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같은 정치사상이 기초가 되어 민주주의 사상이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인간의 자유와 권력의 문제는 벤덤, 래스키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중요한 민주주의적 정치원리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또한 그의 경험론은 18세기 계몽주의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독립선언 과 프랑스의 인권선언 속에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 은 20세기에 있어서의 로크 사상의 빛나는 승리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로 근대민주주의 정치이론의 위대한 건설자였다. 그의 사상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현대인의 가슴 속에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근대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담은 로크의 정부론 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