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3장 서양사상
정치학(Politica)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les, BC 384 - 322)
고대 그리이스의 학문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관한 저서로, 최초의 정치학 교과서이다. 정치공동체의 국가의 기원과 본질,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등 정치체제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리고 그 이외의 서양 정치학의 초석이 되는 기본개념과 문제들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정치란 무엇이냐가 문제될때 항상 다시 논의되고 조회되는 서양 정치철학의 고전이다.
생애와 작품활동
만학의 비조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17세기 말까지 서양지성사의 방향과 내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최대제자였으나 사상에 있어 스승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인 스승과는 달리 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였는데 이 두 철학자의 긴장과 균형관계는 그리스 철학의 큰 매력이라 할 수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흥왕국인 마케도니아의 궁정의사인니코마코스의 아들로 부유하게 태어났다. 어릴 적 당시 풍습에 따라 가업을 잇기 위해 해부학 등 생물학 방면의 연구에 흥미를 가졌는데, 훗날 그의 현실적인 사유체제가 형성된것은 이러한 유년시절의 영향인듯 하다. 그의 용모는 키와 눈이 작고, 대머리인데다 말까지 더듬어 보잘것 없었는데, 그는 이 같은 신체적인 결함을 보완하려고 화려한 의복을 입는 등 남다른 치장을 했다 한다. 성격적으로는 겁이 많고 우유부단하고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0세 전후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에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작품을 주로 읽었고,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하였다. 그는 거기서 학문에 전념하여 젊은 나이에 강의를 맡기도 하였는데, 독서의 폭과 깊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한다. 스승인 플라톤은 이런 학구적인 제자를 총애하여 간혹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할 때면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아카데메이아에서 그는 책벌레 또는 독서광으로 유명했으며,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점자 자신의 독자적 입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 스승과 견해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로인해 플라톤은 '어미젖을 다 빨아먹고 발로 걷어차는 망아지 같다'고 그를 비난하였다 한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 유명한 진리와 우애는 함께 사랑할지라도 우애보다는 진리를 더 존중할 것을 경건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사로운 인정보다는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생각한 것 같다.
아카데메이아에서 18년 동안 공부한후 플라톤이 죽자. 플라톤의 조카가 아카데메이아 원장 자리를 상속했다. 그는 곧 아데네를 떠나, 마케도니아 왕의 왕자인 알렉산더를 3년간 개인지도하게 된다. 당시 13세의 왕자는 술마시기, 말타기 등을 좋아했고 성격이 난폭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곧 염증을 느꼈으나, 왕실의 극진한 대우와 왕자의 개심으로 의욕을 내어 정치학, 윤리학, 수학, 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알렉산더를 전통적인 그리스 정신의 상징인 호메로스이 작품으로 교육했는데, 알렉산더는 스승에게 배운 일리아드 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읽었으며, 원정중에 신기한 동식물을 보면 스승에게 보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왕이 된 후 동방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자. 그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인 리케이온을 열고 무보수로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알렉산더가 보내주는 막대한 연구자금과 연구자료로 리케이온은 아카데미아를 압도하고 날로 번성하였다. 늘어나는 제자들과 함께 학원안에서 함께 식사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숲속을 산책하며 학문을 논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학파를 소요학파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오르가논, 형이상학, 정치학, 시학, 니코마스, 윤리학, 영혼록, 자연학 등 엄청난 저술을 하였고대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는 이때의 강의 노트다. 그러나 그를 돌봐주던 알렉산더가 죽자, 아테네 시민들로 부터 알렉산더의 측근자로 지목되어 고소당했다. 이에 그는 리케이온을 측근에게 인계하고,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몰았던 아테네 시민들로하여금, 철학자들에게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저지르지 않도록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1년만에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서양의 학문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역학을 한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정치학 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문이 그에 의하여 학의 원천을 이루었고, 특히 그의 철학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원용되어 중세를 지배하였다.
논리학
그는 (오르가논)에서 논리학을 집대성하고 있는데, 모든 판단에 작용하는 개념들을 10개의 범주로 구분하고 3단논법의 추리형식(연역법의 초기모습)을 체계화함으로써, 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확립하였다. 연억법 이란 과학적 탐구방법의 하나로 일반적 원리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으로(후에 데카르트에 의해 비판받음), 영국의 베이컨은 그의 저서(신기관)에서 이와 대립되는 귀납법을 창시하여 밀이 완성하였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테렐스는 그의 저서(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질료는 다 함께 중요하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에 본질적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라 하였다.
자연학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자연학)등의 저서에서 그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면서 여기서 4가지 원인을 들었다. 첫째, 질료인(사물이 그것 으로부터 생기는 소재) 둘째, 형상인(사물이 그것 으로부터 형상되어지는 것, 즉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셋째, 동력인(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 넷째, 목적인(사물형성의 운동이 그것 을 지항하여 이루어지는 목적)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둘째, 세째, 네째는 자연물에 있어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에 의하여 자연물이 이루어지고, 자연의 존재는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가는 생성발전의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질료는 여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즉 디나미스(가능태)로서 궁극적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궁극적 목적인 엔텔레케이아(완성태), 에네르게이아(현실태)야 말로 자연존재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윤리학
만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폈던 그는 인간의 윤리적 목표(지고선)을 행복 이라 보고, 행복은 중용의 덕에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아. 중용의 덕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적인 인간관이 그의 철학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그의 윤리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정치학
아리스토테레스는 정치학, 아테네 국가제도에 관한 저술로 정치사상의 세계를 세웠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고, 인간의 선은 공공생활 속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윤리학은 정치학과 분리될 수 없고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재산과 가정이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긍정하였으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노예의 존재를 합리화하고 인간 불평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그리이스 민주주의의 후기에 해당하여 사회적 질서가 불안하였던 때이므로 그는 강력한 1인지배를 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정치학의 내용
본래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부터 공간할 목적으로 어떤 주제(도시국가)에 대해 일관적으로 집필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주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각각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강의나 논술을 뒤에 편집한 것인 듯하다.
제1권 가족론 : 국가의 정의와 국가의 구성부분으로서의 가족이 탐구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호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는 당시의 소피스트적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혀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각의 최초 구성단위로서 가족의 부분, 즉 아버지와 아들, 부와 처, 주인과 노예의 관계 및 가정과 관계되는 재산의 문제가 논의된다. 제2권 이상국가론 : 그의 스승인 플라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상국가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철학자와 왕의 기능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왕이 철학자가 되는 것은 필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다. 오히려 왕은 참된 철학자들의 충언을 들어야 한다. 나아가 스파르타, 크레타, 카르타고의 국가제도를 비판한다. 제3권 시민과 헌정질서에 대한 이론 : 국민의 정의, 국민의 덕, 그리고 이 덕으로 보아 국민이라 할수 있는 사람들을 정의하고 있다. 국가의 목적은 국가 공통 이익을 실현함에 있다. 이 견지에서 3가지의 선한 정체와 타락한 3가지의 정체를 논하고 있다. 선한 정체는 왕정, 귀족정, 시민정(적절한 민주정), 옳지 못한 정체는 참주정, 과두정, 극단과격한 민주정, 등을 들고있다. 좋은 통치체계는 지배자들이 자유시민 전체의 이익 에 따라 통치하는 반면, 나쁜 정치체제에서는 단지 지배자의 이익 만이 관심사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4권 실제적 헌정질서와 변형 : 정치학이 다룰 과제로서 주요한 정체의 종류와 여러가지 형태를 살펴보면서 보통국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최선의 정체와 특수사정아래서의 최선의 정체의 조직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제5권 혁명의 원인과 헌정질서의 변화 : 정체변혁과 그 일반적 원인, 각 정체의 변혁에 있어서의 특수원인과 그 변혁의 방지책 등이 논의 되고 있다. 제6권 안정질서를 위한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건설방법 : 민주제와 과두제의 여러 형태와 특징 및 각각 정당한 조직방법을 적고 있다. 제7권 정치적 이상과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건설방법 : 그는 국가의 목적을 전제로서의 공동체의 선을 보장하는 것임을 재확인한다. 최선의 정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가정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나 행복은 덕성 있는 행동에 근거하며, 그러기에 사람이 얼마만큼 행복을 누릴수 있는가는 그가 덕을 얼마만큼 실행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국가의 목적은 그 성원들로 하여금 덕을 위한 그들의 갖가지 능력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국가가 아니라, 실현 가능성을 가진 최선의 국가를 묘사한다. 그는 시민의 수, 국가의 크기와 본질, 도시계획 및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가의 계급들간의 관계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있다. 제8권 청소년의 교육 : 교육의 문제, 특히 음악 및 체육에 관하여 논하고 있으나 이것은 미완이다.
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제 1에서 3권, 4에서 6권, 7에서 8권으로 그룹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다소 중복된 부분과 의견의 차이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씌어진 시대의 차이와 그 동안의 저자의 사상적 발전 때문인 듯하다. 그 주제와 관한 연구방법은 주로 실증적, 귀납적이기는 하나 동시에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이론에 의하여 방향을 결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저작은 정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저술로 평가되며, 근세에 와서는 국가계약설이 부활될때까지 고대와 중세를 통해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 것은 아니며 구미 대학에서는 여전히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다.
비판적 평가
플라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년기를 지나면서 점차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같은 철학을 둘러싸고 이들은 독자적인 관점과 생각을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나갔다. 이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상적 대립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따. 플라톤이 이상주의자, 이론원, 이데아계와 현상계, 전체주의적 귀족정치주의자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 일원론, 형상과 질료 개인지향적 민주주의자의 성격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그리스철학의 완성자라는 점, 논리학의 집대성자, 중용에 의한 행복의 실현, 정치학, 자연학 등 여러학문들을 체계화했다는 점, 그리고 빈곤은 범죄와 혁명의 양어버이라는 현대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권위는중세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여성은 본래 열등적 존재라고 믿었던 점 등은 그도 역시 그가 속한 시대적 사고와 인습의 벽을 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광범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 갈릴레이 등에 의해 불가피하게 수정을 받는 등 그의 사상의 일부는 현대에 상당히 뒤지는 경향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