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2장 동양문학
홍길동전 - 허균(1569-1618)
서자. 천민. 여자들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대동세계의 꿈을 가지고, 조선중기의 문인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 우리나라의 신화. 전설 등에 나오는 영웅소설의 대표작이다. 진취적이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일생을 통하여, 적서차별과 관리들의 부정. 부패, 그로 인한 민중들의 궁핍한 생활 등 봉건사회가 야기한 사회적 갈등을 문제화하고, 그 해결방법에 있어 기존질서와 체제를 뛰어넘는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서민들이 탐독한, 보이지 않는 베스트 셀러였다.
생애와 작품활동
역사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허균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최초의 국문소설가이고, 유. 불. 선에 통달한 학자였으며, 불꽃 같은 의지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개혁사상가였다는 평가는 오늘날의 평가이고, 당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반역과 이단의 표본이었다. 교산 허균은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높은 명문가문 출신으로, 특히 그의 부친인, 서경덕의 제자 허엽과 두 형인 성. 봉은 뛰어난 수재로 동인의 우두머리였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유성룡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출신으로, 당시 서자출신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허균은 재주가 많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 10세 전후부터 서울에 천재로 소문이 났고, 누이도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문은 그의 반대파나 심지어 중국인들까지도 인정하였다. 그는 이미 9세에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고 26세때에는 장원급제를 하였다. 황해도 군수 시절 관아 별실에 불상을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다 발각돼 파직당했으며, 외교사절로 임명되어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그가 관계에 발을 들여놓고부터는, 성품이 경박하고 여자를 좋아하여 부모의 초상을 당해도 기생들과 놀아난다는 비난이 일어 벼슬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고 당당했다.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을 하기보다는 불우한 문인들이나 서자. 승려들과 어울려 술로 나날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은 당시 왜곡된 사회구조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그의 제자였던 이식의 평을 들어 보자.
"세상에 전해지기를 수호전을 지은 사람은 삼대에 걸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는다고 했다. 도둑들이 그 책을 읽으며 높이 평가했다. 허균. 박엽 등이 그 책을 좋아해서 그 책에 나오는 도둑들의 이름을 따서 각기 불렀다. 허균이 또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 그들 무리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몸소 그들 행동을 답습하여, 한 마을이 시끄러웠다. 허균이 또한 모반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는 갚음보다 더욱 심했다."
이 글을 보면 허균이 이단이었다는 것과,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어 돌려 읽으며 반역을 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허균은 이런 따위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괴상망측한 사람들과 계속 어울려 다녔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그의 재주를 인정하여 공주목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많지 않은 녹봉으로 서자들을 뒷바라지했다. 선조와 광해군에 관한 잘못된 중국측 기록을 수정하기 위해 1614년 두 번째 중국에 가게 되는데, 많은 자금을 가지고 현응민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정작 그 돈으로 책을 몽땅 사와 강릉에 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하고 선비들에게 읽혔다. 현응민은 허균의 이런 일을 도왔고, 나중에 허균이 일대모반을 꾀할 적에 그도 함께 잡혀 죽었다. 그는 공주현감에서 밀려나 전북 함열에서 귀양살이하고 부안에 가서 살기도 했다. 당시 서양갑 등 서자들은 서자에 대한 차별해소를 조정에 건의했으나, 이것이 무시되자 그들은 무력봉기를 준비하다 적발되어 일망타진된다. 그 유명한 홍길동전은 이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9세 때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상황변화가 오는데, 인목대비 폐비 논의가 그것이다. 당시 형조판서이던 그는 인목대비의 폐비에 찬성하고 나섰는데, 이런 내용을 담은 글을 경운궁에 투서하기도 했다. 이때 남대문에 곧 난리가 일어나니 피하라는 격문이 붙었는데, 주모자가 현응민으로 밝혀지고 허균도 이에 연루되어 잡혀왔다. 이로 인해 그는 그의 일파인 김윤황. 하인준. 현응민. 웅경방 등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당했다. 역적이란 이유로 그에 관한 글들은 모두 불태워졌고 악한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그가 그의 다른 작품은 모두 한문으로 썼으면서 유일하게 한글로 쓴 홍길동전은 민간의 숨겨진 스테디 셀러이지 베스트 셀러로 계속 전승된다.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당쟁격화
여기서 우리는 홍길동전을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균이 살았던 조선중기 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균이 생존했던 선조 광해군 시절은 사림파 내부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상대 당과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상호비판 체제를 기본으로, 정치참여층의 확대와 정치운영의 활성화가 이루어진 반면, 국력의 낭비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정치적인 최초의 분당은 선조 때 사림파 내부에서 동인과 서인의 분열에서 비롯되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 직을 놓고, 먼저 심의겸과 김효원이 각각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다. 당시 선조의 첫 왕비인 박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는데, 후궁소생 중 가장 영특한 광해군이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세자의 물망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앞에 나서서 선조(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게 건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쪽 같은 성격의 서인출신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직언하여 선조의 미움을 샀다. 정철의 처벌을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맞서, 동인 내부에서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잠시 중단되었던 붕당정치는 전란 후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열되었다가, 선조 사후 정인홍 중심의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과 조카 능창군, 이복동생인 영창군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결국 광해군은 서인들에 의해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신분차별
사회적으로 양반계급들은 부국강병에 무익한 성리학적 사회질서만을 고집하여, 국가전체의 공익보다는 자기가 속한 정파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과거장엔 부정이 성행하고, 관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민심은 이미 이반되어 있었다. 거기에 조선초부터 시작된 적서의 차별은 조광조나 이이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능력있는 서자들의 관계진출을 막아, 국가적 차원의 능률의 극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회개혁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시 명문의 서자요 재사로 알려진 서양갑. 박응서. 이경준. 심우영. 박치인. 박치의. 김경손 등 7인은 임금께 서자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연명으로 상소하다 묵살되자, 이들은 여주강 가에 굴을 파고 무력봉기를 준비했으며, 이중 박응서가 거사자금을 마련키 위해 문경새재에서 은상인을 털던 중 잡혀, 모반계획이 탄로나 모두 체포되어 죽은 사건이 일어난다. 홍길동은 조선초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적의 두목이었다. 실존인물인 홍길동이 서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소설에서는 그를 서자로 만들어, 부정한 재물을 털고 끝내 성공을 거둔 후, 임금에게서 서자의 굴레를 벗고, 이어 온갖 차별이 없는 율도국을 건설한다. 홍길동은 바로 서양갑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홍길동전 은 이상과 같은 혼탁한 사회를 배경으로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사회소설이다.
작품의 주요내용
작품의 구체적인 배경은 세종 때로, 세종 때 홍재상의 서자 홍길동이 집에서 말썽을 부리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더니, 섬나라로 도망쳐 왕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현실을 개혁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인물의 일대기인데, 작품의 중심내용은 1.평등사상에 입각한 적서차별의 철폐, 즉 봉건 가족제도의 모순을 바로잡고 2.탐관오리의 척결과 빈민구제, 즉 유교 봉건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고 3.이상향을 실현하려는 이념을 소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는 세 부인이 있는데, 홍길동은 그중 시비 춘섬의 소생이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정실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춘섬과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 길동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첩의 자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이라 불러야 하며, 자신을 소자라 청하지 못하고 소인이라 해야 하는 현실에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 집을 나와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고, 활빈당이라 자처하며 도술로써 8도지방의 수령들이 불의로 취한 재물들을 탈취하면서, 아무 날 전곡을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 이라는 방을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는 데 실패하자, 조정에 장계를 올려 좌우 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우포장 이흡이 길동을 잡으러 나섰다가, 도리어 우롱만 당하고 만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내리니, 전국에서 잡혀온 길동이 300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호풍환우하고 둔갑장신하는 초인간적인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홍판서를 시켜 회유하고, 길동의 형인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주어,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 그곳에 살고 있던 울동 이란 요괴들을 퇴치하여, 볼모로 잡혔던 미녀 둘을 건지고 율도국 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마치고 율도국으로 돌아가, 이 두 미녀를 부인으로 삼아 3남 2녀의 자식을 두고 나라를 잘 다스린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최초의 한글소설
이 작품은 소설을 백안시하던 시대에 이런 소설, 그것도 한글로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우선 의의를 가진다. 그 구성이나 스케일, 그리고 인물의 성격묘사는 근대문학에 미치지 못하지만, 혁명적 사회소설로서 당시의 사회모순을 대담하게 폭로하고, 민중에게 미래의 이상세계를 열어 준 우리 나라의 계몽문학, 또는 저항문학으로서 금자탑을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은 우선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그 이후의 소설에서 찾기 어려운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소설, 양반가정의 모순을 척결하고 서얼차별의 불합리성에 항거한 사회소설,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사상소설, 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 등을 담은 도술소설 등의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개혁을 염원하는 사회소설이다. 사상적으로는 수호전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고, 도술적인 표현방법은 서유기를 모방하였으며, 길동의 요괴물 퇴치작전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주인공의 모델은 국내 실존인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이 주축이 되고 있으며, 그후로도 명종 때의 임꺽정, 선조 때의 이몽학의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국 건설에 대한 당시 선비들의 관념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점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비판소설
15세기 중엽에 금오신화로 출발한 한문소설은 그동안의 쓰라린 현실적 체험을 통해 공상적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설로 약진하게 되었는데, 금오신화 이후 약 150년 후에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이 나온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가 비현실적인 성격의 괴기와 염정을 주제로 한 여성적 문학을 열었다면, 홍길동전은 서얼문제. 탐관오리 문제 등 비교적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문학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길동이 도술로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기는 하나, 과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문제, 즉 적서차별의 가족제도 문제와 탐관오리의 숙청과 빈민구제라는 사회적인 문제에 있다고 하겠다.
영웅소설
한편, 서사시나 전기소설적인 전체의 흐름은 영웅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한국소설의 전통적인 면에서, 설화시대와 소설시대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도술적 요소는 이후의 전우치전, 서화담전 등의 군담소설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우리 소설문학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대동세계 묘사
이 작품은 인간가치의 평등을 전제로 펼쳐지고 있다. 적서차별의 철폐도 결국 정실 자식이든, 첩의 자식이든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보인 것이요, 권력자들의 재산을 털어 빈민에게 나눠주는 빈민구제사상도 결국 인간적 권리의 동등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국을 찾아나서는 줄거리를 굳이 설정한 것은 현실에서는 이런 이념이 실현되기 어렵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이런 동등하고 균등한 인간가치를 제약하는 요소가 바로 모순 이라면 이 모순을 극복하고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대동사회를 그린 소설이 바로 홍길동전 이라 하겠다.
조선의 3대 의적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소설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이들은 역사상 실존인물이다. 홍길동은 연산군 때 충청. 경기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의적이고, 임꺽정은 명종때 황해도를 누비면서 조정을 위협했던 대도였다. 황해도 구월산의 영웅 장길산은 숙종 때 용맹하고 신출귀몰한 도적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대의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에 반기를 들었기에, 정부에게는 반역자였으나 민중들에게는 통쾌한 대리만족을 주었다는 점이다. 민중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이들은 훗날, 당대 최고의 작가들에 의해 소설로써 형상화되어,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다. 즉, 홍길동은 광해군 때 허균이 소설화했고, 임꺽정은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천재 로 불렀던 월북작가 홍명희가 소설화하여, 한국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장길산은 70-80년대에 황석영에 의해 10권짜리 역사 대하소설로 출판되어, 현재 판매부수가 50만 질 500만 권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아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한데 작가는 지금 어디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