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자연에 맡겨라 - 제물론
마음을 괴롭히면서까지 만물을 하나로 보려고 하나 그것이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이라 한다.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저공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말하기를, 아침에 셋을 주고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했더니 원숭이들이 성을 냈다. 그러면 아침에 넷을 주고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하자 모든 원숭이들이 기뻐했다. 이름과 실상이 변하지 않았는데, 기뻐하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한다.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천균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이라고 한다.
옛사람 중 지식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었다. 어디에까지 이르렀던가? 처음부터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이 경지는 완전 무결하여 더 이상 첨가할 것이 없다. 다음 사람은 만물이 존재하기는 하나 그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다고 말했다. 또 다음 사람은 만물 사이의 구별은 인정했으나 옳고 그름의 구별은 없다고 하였다. 옳고 그른 것의 구별이 생기자, 도는 손상되었다. 도가 손상된 곳에 집착심이 생기게 되었다. 과연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있겠는가, 아니면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없겠는가?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의 예는 소문이 금을 타는 경우이다. 또한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없는 예는 소문이 금을 타지 않는 경우이다. 소문은 금을 타고, 사광은 지팡이로 가락을 맞추며, 혜자는 책상에 기대어 담론했다. 세 사람의 재능은 매우 훌륭하여 후세에까지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들은 좋아하는 바가 옛 성인들과 달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도 밝히려 하였다.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단한 돌은 돌이 아니라는 따위의 어리석음에 빠졌다. 그리고 소문의 아들은 소문을 능가하지 못하고, 평생토록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사람들도 도를 이룬 것이라 한다면, 비록 나라도 도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도를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과 함께 나도 도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성인은 회의를 초월한 빛남을 지니고자 염원한다. 이를 위하여 선택함이 없이 자연의 떳떳함에 맡긴다. 이것이 곧 밝은 지혜에 따른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세상 사람들의 판단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같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같든 같지 않든 간에 서로 판단하는 것이니 세상 사람들의 판단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말을 해보려 한다. 처음이 있으면 처음 이전의 시기가 있고, 또한 처음 이전의 시기, 이전의 시기가 있게 된다. 유가 있으면 그 이전에 무가 있다. 무 이전에는 무가 없었던 상태가 있고, 또한 무가 없었던 상태 이전의 상태가 있게 된다. 유무가 홀연히 나타나나 어느 것이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사실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또한 알 수가 없다. 도에 비춰보면 가을철에 가늘어진 짐승의 털끝보다 큰 것이 천하에 없다. 태산도 그보다는 작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어린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없으니 팽조도 그보다 명이 짧다. 천지는 나와 함께 생겼고, 만물도 나와 하나가 된다. 이미 하나라고 하였으니 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이미 하나라고 말을 했으니 또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가 하나라는 말과 합쳐서 둘이 되고, 둘이 처음의 하나와 합쳐서 셋이 된다. 이렇게 수가 늘어가면 수에 능한 사람도 헤아리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보통 사람은 어떻겠는가? 무에서 유로 넘어가는 순간 셋이 되었으니 유에서 유로 향할 때는 얼마나 혼돈에 빠지겠는가? 차별의 세계로 향하지 말고 도에 의지해야 한다.
무릇 도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없고, 말에는 애당초 일정함이 없다. 말로써 도를 나타내려 하므로 한계를 두게 되니, 그 한계를 말하려 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있고, 떳떳함과 옳음이 있으며, 나눔과 따짐이 있고, 시샘과 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덕*이라 한다. 성인은 천지 밖의 현상이 있다고 하여도 논하지 않는다. 또한 천지 안의 현상을 논하기는 해도 밝히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실제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고, 참으로 따진다는 것은 실제로 따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성인은 일체를 받아들이나 사람들은 그것을 따지고 서로 내보이려 한다. 그러므로 따진다는 것은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큰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다. 큰 변론은 말하지 않고, 진실로 어진 것은 사소하게 어질지 않다. 지극한 겸손은 하찮은 일에 겸손을 보이지 않고, 큰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가 드러나면 도라 할 수 없고, 말로 따지면 진실에 미치지 못한다. 어진 것도 일정하면 인을 이룰 수 없고, 겸손도 지나치면 위선이 되며, 남을 해치는 용기는 무너진다. 위의 다섯 가지는 둥근 것이지만 지나치면 모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얇은 그 한계를 알아 거기에서 그쳐야만 지극한 것이다. 누가 말하지 않는 변론과 도가 아닌 도를 알겠는가? 만일 능히 아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경지를 천부*에 비할 수 있다. 퍼부어도 넘치지 않고, 떠내도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유래를 알지 못하니, 이것을 보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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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은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자기의 선택만 고집해 마음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조삼 모사'라는 말이 있다. 원숭이를 키우는 저공이 하루는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아침에 세 공기, 저녁에 네 공기씩 주기로 하겠다." 그 말에 원숭이들은 일제히 성을 냈다. 그래서 저공이, "그럼 아침에 네 공기, 저녁에 세 공기를 주겠다."하고 말하자 원숭이들은 금방 화가 풀어졌다고 한다. 사실은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성을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역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른 것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일체를 자연의 조화, 즉 천균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이라고 한다.
태고적에 최고의 지혜를 지녔던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 그대로의 존재였고, 그들의 의식은 주객이 아직 나눠지지 않은 이른바 혼돈 상태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혼돈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었으나 객체로서의 사물에 구별을 두지는 않았다. 다시 시대가 내려오자 사람들은 사물의 구별을 의식하게끔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가치 관념은 생겨나지 않았다. 이윽고 가치 관념이 생겨나자 도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간에게 집착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도에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성휴의 구별이 있는 것일까?금의 명수인 소문의 연주를 생각해보자. 소문의 연주는 분명히 신묘한 가락을 이루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연주되지 않은 무수한 가락들을 잃게 되었다. 소문의 연주, 즉 인간의 작위가 성과 휴의 구별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비단 소문의 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광(진나라의 약사)의 작곡이나, 혜자의 논리학은 모두 인간 능력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불후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은 위대했다. 그러나 자기의 재주나 지혜의 힘을 과시하고,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도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그 결과 헤자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한낱 궤변에 그치고 말았다. 소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기술에 얽매여 이상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소문, 사광, 혜자의 세 사람이 성취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는 일 모두 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휴에 불과하다고 단정해버린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물론, 사물의 변화마저 휴 아닌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념 무상의 상태를 최고의 지혜로 알고, 선택하는 일없이 자연에 맡길 뿐이다. 바로 이것은 밝은 지혜에 따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물에는 본래 구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나의 주장 역시 옳고 그른 것을 따진 것이라는 견해도 성립된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든 따지지 않든, 그것이 판단인 이상 양자의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에 항상 있게 마련인 한계를 염두에 두고 다시 인식 문제에 대한 고찰을 더 해볼까 한다.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운동(시간)과 형식(공간)의 두 범주로 크게 구별된다. 먼저 운동을 살펴보면, 어떤 운동이든 '처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처음이 없으면 운동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처음은 모든 운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처음이 전제되고, 일단 '처음이 있다'라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면, 이에 대해 '아직 처음이 없었던 때'라는 부정판단이 성립된다. 이러한 부정판단이 성립되면 다시 계속해서 '처음이 없었던 때'라는 이중 부정판단이 성립된다. 다음 형식을 살펴보자. 어떤 형식에서든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존재하지 않으면 형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형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되고, 일단 존재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이것에 대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라는 부정판단이 성립된다. 다시 계속해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없었던 상태'라는 이중 부정판단과,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없었던 상태마저 없었을 때'라는 삼중 부정 판단이 성립된다. 이같이 모든 사물이 일단 의식의 영역 속에서 판단을 형성하면 즉시 그것에 대한 부정판단이 성립된다. 그리고 부정은 다시 부정의 부정을 이끌어내고, 다시 또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 이끌려온다. 이렇게 부정의 무한한 연쇄 반응은 끝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나 나름대로의 판단을 말해왔다. 그러나 이 판단 역시 긍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초월한 도의 세계에서는 큰 것을 대표하는 태산도 짐승의 잔털보다 작으며, 8백 년을 살았다는 팽조도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어버린 갓난아기보다 명이 짧다. 천지와 나는 한몸뚱이요, 만물과 나는 하나인 것이다. 이 '하나', 즉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되는 주객 일체의 세계에서는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라고 판단한다면 벌써 거기에 하나라는 개념에서 둘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 둘이라는 개념과 하나라는 개념으로부터 셋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이렇게 수 개념이 끝없이 늘어나게 되면 아무리 계산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밝혀낼 도리가 없다. 무에서 유를 향해 내딛는 그 순간에 벌써 셋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유에서 유를 향해 나가는 경우에 어떻게 분화되어갈 것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차별과 혼돈의 세계를 지향하지 말고 자연의 본모습인 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도는 본디 무한한 것이기에 말(개념)에 의한 구분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말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사물을 구분하는 관념이 생긴다. 그 구분에 대한 관념을 검토하려 한다. 먼저 사물을 비교 대립시키기 때문에 왼쪽과 오른쪽 따위의 상대적인 구분이 생긴다. 이 구분을 바탕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이 질서는 필연적으로 선택과 경쟁을 인간 사회에 초래하였다. 인간이 사고를 통해 얻은 수확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천지 밖의 현상은 내버려둔 채 논하려 하지 않으며, 천지 안의 현상은 논하기는 하나 세세히 캐고 들지 않는다. 또 옛날 선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춘추>에 대해서도 사실을 자세히 따지기는 하나 시비를 가리려 들지 않는다. 결국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구분하는 것이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구분을 두지 않고,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일반 사람들은 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서로 시비를 가린다. 이처럼 말을 절대시하는 것은 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위대한 변론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한다. 대인은 사소하게 어질지 않으며, 진정한 겸손은 작은 일에 겸손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는 그것이 드러나면 이미 도라 할 수 없다. 말을 변론하면 사물의 실상에서 멀어진다. 인은 특정한 대상에 고정되면 인이 될 수 없으며, 겸손이 지나치면 거짓이 된다. 또한 용기를 믿고 남을 해치려 하면 용기라 부를 수 없다.
위에 말한 다섯 가지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둥근 것을 더욱 둥글게 하려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고 노력이다. 그러나 둥근 것을 더욱 둥글게 하려는 노력은 결국 둥근 것을 모나게 만들고 만다. 즉 인간의 최고의 지식은 앎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표현하지 않는 변설과 도가 아닌 도를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것을 체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 경지는 한없는 천부에 비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내주어도 마르지 않으나, 왜 그런가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것이 밝음을 의식하지 않는 밝음, 즉 보광인 것이다.
* 여덟 가지 덕: 좌우, 윤의, 분변, 경쟁의 여덟 가지 덕. * <춘추>는... 않는다: 원문은 '육합지외.... 성인의이불 변'인데, 이 대목의 뜻이 분명치 않다. 후세 사람들의 주가 본문에 삽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 천부: 천신의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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