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대성약결, 기용불폐. 대영약충, 기용불궁.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조승한. 정승열. 청정위천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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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다섯째 장
직역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것 같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비었는 것 같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큰 재주는 졸속한 것 같고, 크게 말하는 것은 어눌한 것 같다. 뜀으로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으로 뜨거움을 이기고, 맑고 고요한 것이 하늘 아래의 바른 것이다.
해석
크게 이루어진 것은 완성이 되어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진행형이다. 시대에 따라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그 틀에 이미 시대성을 초월한다. 그것이 큰 그릇이다. 성경과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가 말한 시대는 아주 오래 전이다. 현재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그 시대와는 생산 체제가 다르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말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인간 이해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그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식이 아니다. 진리 탐구에 대한 열망이다. 상식은 당장 이루어진 것 같다. 그리고 실생활에 매우 필요한 것이 틀림없다. 그에 반해서 진리에 대한 탐구는 매우 쓸모가 없고, 좀 덜떨어진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식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열망은 인류에게 아직도 남아서 굽이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이 아직도 읽히는 것이다. 그것이 모자라 보일지라도, 그 쓰임이 상식같이 일회적이고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의미의 해석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아직도 연구되는 것이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가. 바다는 차 있는가. 비어 있는가. 바다는 바닷물로 차 있다. 그러나 바다는 비어 있다. 크게 찬 것은 이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말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것은 그가 쉬지 않고 말을 쏘아 댄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을 잘할 뿐이다. 말이란 무엇인가. 서로간의 의사 소통이 아닌가. 말은 의사 소통의 도구이다. 따라서 서로간에 의사 소통이 잘되는 것이 목표이다. 진정으로 깊은 표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으로 몸으로 하는 것이다. 느낌이다. 그리고 말을 잘해도 상대가 감복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에너지의 낭비이다. 단 한마디의 말에도 상대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말을 잘한 것이다.
추우면 어떻게 하는가. 뛴다. 더위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조용히 있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어려운가. 고요함과 맑음은 하늘 아래의 바름이다. 움직이는 것은 열이 난다. 세상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열이 난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쉬어야 한다. 고요함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움직임에 치중한다. 세상이 움직이고 자신이 움직인다. 쉴 줄을 모른다. 노는 것도 쉬는 것이 아니다. 노는 것도 움직임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제는 쉴 때이다. 더울 때 열이 날 때 쉴 줄 아는 것이 도이다. 추우면 뛸 줄은 안다. 배고프면 움직일 줄은 안다. 그러나 열이 날 정도로 움직이면서 쉴 줄을 모른다. 그것이 욕망에 대한 추구이다. 이것은 쉴 줄을 모른다. 스스로 열에 받혀서 자체 폭발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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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가장 잘 이루어진 것은 오히려 모자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그 효용은 다함이 없다. 가장 크게 차 있는 것은 마치 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작용은 그침이 없다. 가장 크고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가장 흠잡을 데 없는 기교는 서투르게 보이고, 가장 유창한 웅변은 더듬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추위를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맑고 고요함으로써 천하의 바른 것이 되는 것이다.
주
대: 크다, 위대하다, 무한하다의 뜻임. 인간의 상식적 가치관을 초월하는 본체계를 말함. 노자는 '크다'는 말을 도와 동의어로 쓰고 있음.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 노자는 이 장에서도 특유의 역설적 수사법을 구사화여 도의 진면목을 바로 보지 못하는 상식적 가치판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역문에서는 대를 '가장 잘'로 표기하고 있음. 졸: 서투른 것, 졸열. 조: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것. 정: 바른 것, 바르고 곧은 것, 정을 우두머리의 뜻으로 풀이하는 이도 많음.
해
위대한 완성은 부족한 듯이 보이고,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탁월한 기교는 서투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도의 세계이다. 도의 세계가 이렇게 인식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경험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에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추사의 탁월한 작품도 서툰 글씨처럼 보게 마련이고, 미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은 칸딘스키의 추상화에 공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도는 완성되고 충만한 세계이지만 일반의 상식적 안목으로는 부족한 것으로만 인식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도 노자는 그 특유의 역설적 표현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우리의 상식적 가치판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노자를 읽고 있으면 우리의 상식적 가치관의 허와 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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