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可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천지상합이강감로, 민막지령이자균,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지지가이불태.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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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둘째 장
직역
도는 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으나, 하늘 아래 신하로 삼을 자가 없다. 제후와 제왕이 능히 이것을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스스로 질서 지워질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합하여 단 이슬을 내리듯이, 백성들에게 령(법)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고르게 된다. 제동을 처음 거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이 이미 생겨난 연후에는 대저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 도가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온갖 계곡의 시내가 강과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에 비유된다.
해석
도는 이름이 없다. 노자는 계속해서 위정자들에게 충고를 하고 있다. 노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군왕들에게 충고를 하는가. -왜 그럴까?-
통나무는 작으나 누구에게도 복속하지 않는다. 왕이라고 해서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모든 인간은 통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개개인은 우주적 존재이다. 그 자체로 존귀하다. 그는 누구의 신하가 되지 않아도 된다.
남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때 자신은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비천하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나 이것은 폭력이다. 도의 행이 아니다. 자신에게 강제되기 싫은 것은 남에게 강제하지 마라. 통나무는 통나무의 삶을 살게 놔두어라. 이것이 정도이다. 왕이 강제로 사람들을 복속시키려 하면 반발이 일어난다. 백성들을 자연스럽게 놔두어라. 그러면 자체적으로 질서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이렇게 하고 있는가. 타율에 의한 규제에 대해서 노자는 거부하고 있다. 자율에 의한 규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스림이다. 법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정도이다.
제도, 법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있고 난 후이다. 이름은 규격품이다. 나는 유재용이다. 이때 나는 더 많은 이름을 가진다. 동양철학과 학생이다. 경기도인이다. 이제 다른 사람과 구분을 짖는다. 나는 동양철학과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과 사람보다 뛰어나다. 내가 하는 학문은 최고이다. 이제 자신은 특별해 지려고 한다. 아니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자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 자신에 비해서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분을 두지 마라. 이름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도는 바다와 같다. 그것이 낮은 계곡이건-낮은 신분이건- 높은 계곡 이름난 산에서 흘러나온 약수이건 가리지 않는다. 일단 바다에 들어오면 무슨 산 무슨 약수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바다에서 자신이 무슨 산 무슨 약수임을 고집해 보아라. 그때 그 물은 바다와 단절이 된다. 우리는 바다에 떠다니는 약수이다. 자신이 누구임을 고집한다. 그것이 이름이다. 그 이름을 버릴 때 바다 가된다. 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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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도는 영원히 이름이 없다. 박은 비록 작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신하로 부리지 못한다. 만일 임금이 도를 간직 할 수 있다면 천하 만물은 스스로 그에게 물려들 것이며, 하늘과 땅은 서로 사랑하여 단이슬을 내릴 것이며 백성들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가지런하게 될 것이다. 원목이 갈라지고 다듬어져서 여러 가지 기물이 만들어지듯이 만물은 생성되면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유한 자로서의 한계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만족할 줄 알고 그쳐야 할 시점에서는 그쳐야 하는 것이다. 만족과 그침을 알면 결코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도가 천하에 머물러 있는 것은 비유하면 시냇물과 골짜기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
도상무명: 도는 인간의 감각 작용에 포착되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어떤 구체적인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도라는 명칭도 편의상 임시방편적인 것에 불가하다. 그러므로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고 기술한 것이다.
감로: 단 이슬, 현명한 천자가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이루면 하늘이 감명을 받아 상서로운 징조로 단 이슬을 내린다고 함. 자균: 저절로 가지런하게 된다. 모든 일이 질서와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음. 지지소이불태: 만족하여 그칠 줄 알면 결코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과도한 욕망은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이 노자 생활 철학의 일관된 생각이다. 지지가이불태로 된 판본도 있다.
해
도는 형상이 없으니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소리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고 형체가 없으니 잡을 수도 없다. 그러한 도를 우리는 딱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의 지각을 거부하고 있는 그것은 만물의 배후에 스며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그것을 없다고 말한다면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만물은 도에 의하여 생성되고 유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할 수 없는 세계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근원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도는 산에서 갓베어낸 통나무와 같이 인위적인 요소가 없는 순수하며 소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적은 존재로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지배하거나 예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임금이 도를 체득하여 무위자연의 다스림을 베풀 수 있다면 천하의 만백성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 것이다. 천지, 음양은 서로 화합하고 친화하여 단이슬을 내릴 것이며 만백성은 위에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잘 다스려 질 것이다. 원목이 잘라지고 다듬어지면 우리가 일상생활에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그릇이 만들어진다. 도에 의하여 생성된 만물도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유한성에 대한 지각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한계성, 유한성에 대한 깨우침은 만족과 그침을 알게 해준다. 만족과 그침을 모르는 인생은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도가 천하에 머물러 있는 것은 강과 바다의 시냇물과 계곡 물의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냇물과 계곡 물은 저절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다. 무위자연의 정치에는 천하 만민이 스스로 몰려와 제도 행정을 마련하지 않아도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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