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렇고 - 늘 행복할 수 있다
시련은 늘 지나갔다. 시련이 오면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도록 시련을 밀치며 살았다.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며 살았다. 돌아보면 겪은 대부분의 시련들은 쉽게 또는 스치듯 지나갔다. 큰 슬픔 중 하나를 죽음으로 본다. 주변에 지인이나 가족이 떠나면 화장터가 젖도록 슬피 운다. 하지만 다시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무의식 속에서 슬픔을 끝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산 사람이 주는 이별의 슬픔은 꽤 오랜 시간을 머문다. 같은 하늘 아래 살기에 길거리에서 스치며 볼 수 있고 찾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 때문에 산 사람이 주는 슬픔은 끝낼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눈물에 밥을 말아먹고 술잔에 눈물을 타마시며 죽음을 물색하기도다. 어떤 사람은 뭘 그런 걸 가지고 죽네 사네 염병을 떠냐고 비웃는다.
사랑에 목숨 걸어봤나? “목숨 걸고 사랑 해봤는가!” 말이다. 나는 걸어봤다. 젖내 나는 풋사랑도 육신의 욕망이나 호기심도 아닌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애무하는 사랑을 해봤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 내 사랑도 숭고하다.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마음으로 통하는 사랑을 했었다. 참으로 맑은 영혼과 영혼의 사랑은 ‘사랑박동’이 정지 되면 곧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맑은 영혼 사이의 사랑이 비난을 받고 욕을 먹고 저주를 받더라도 더 이상 깨끗한 사랑은 없다고 믿는다.
서점엔 위인전들이 있다.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손가락질을 받았다. 불경, 성경은 어떤가? 인간으로 숨 쉬며 살 때 그들은 비난의 종점이었다. 기업가든 철학자든 성공했다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작은 모두 주변의 우려와 비난에서 시작했다. 그 시선을 지극히 개인으로 돌려 보면 나를 향한 비난은 격려가 된다. 스스로 나를 마취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일에 맑음을 씌우면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관습의 눈은 어둡다. 그 어두운 시선이 내겐 힘이 되는 요즘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맑은 영혼의 사랑은 무엇인가. 맑은 영혼이라는 정의를 누가 내리며 기준은 뭘까? 없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없고 보편적인 맑은 영혼의 개념도 범위가 넓어 꼬집기 어렵다.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맑은 영혼의 사랑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그 사람의 돈, 지위, 학력 등 사회의 눈이 내리 꽂아 놓은 기준을 벗어나 바라보는 것이 맑은 영혼의 사랑 아닐까? 대표적인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사회에서 뭐라든지, 돈을 벌든 말든 내 자식이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사랑이 맑은 사랑이다. 가물가물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시계를 팔아 여인에게 머리띠를 사주고, 여인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남자에게 시곗줄을 사주는 이야기. 가난에 절어 있어도 사랑하나로 내게 남은 건 뭐고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아끼는 마음이 맑은 사랑이다. 장기를 떼어 남편에게 또는 아내에게 주는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행여 내가 잘못되어 목숨을 잃어도 그 사람 행복하면 한없는 사랑이 맑은 사랑이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며 자식들에게 그만 퍼줘라 해도 옥수수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 이혼하라고 처가든 주변인이든 아니면 당사자가 원해도 자신의 배를 열어 장기를 떼 아내에게 주는 마음에 탁함이 어디 있겠는가.
즉석에서 대화하나 지어 본다.
---
“행여 굶어 죽게 되면 꼭 끌어안고 같이 죽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뭔 소리여. 죽긴 왜죽어. 그것도 굶어 죽어? 산 입에 거미줄 치것어. 열심히 살믄 되는겨. 괜한 소리 말고 걱정 하덜덜 말어. 내가 있잖여.”
“당신 수입으론 병원비 감당 못해. 나도 알건 알아.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떠나도 좋아. 나 당신 원망 안 해.”
“당신이 움직이지 못하믄 나가 움직이면 되지 않것어? 우린 손발을 세트로 갖고 있어. 여분 많으니까 노후보장 끝난 겨. 고향집허고 이것저것 정리 허니까 널널혀. 돈 걱정 말고 일어날 생각만 혀. 1프로도 가능성 없는 병원 없어. 우리가 그 1프로여. 알것어?”
그의 손톱 밑으로 닦아내지 않은 시멘트가루가 보였다. 가루는 물을 먹고 이미 굳어 있었다. 수목원과 고향집은 이미 사라졌음을 그의 갈라진 손톱이 말해주고 있었다. 베게 밑에 손톱깎이를 넣어두고 그의 코고는 소리를 기다렸지만 밤새 그는 코를 골지 않았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숨죽여 일어 선 후 물소리가 들렸고 곧 현관이 닫히는 쇳소리가 들렸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손톱깎이를 감아쥐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이 소설 속 여인은 살았을까? 그렇다면 이 부부의 미래는 예상할 필요도 없는 행복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여인을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네 삶은 수시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선택하는 것은 미래가 되어 내게로 온다. 모든 선택은 행복을 원한다. 선택이 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생각들 하지만 고통이 내포한 행복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고통이 행복을 품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건 그렇고,
행복도 늘 지나간다. 그러나 행복이 오면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이의 본능이다.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권리. 행복추구권이 내게 있다. 난 꿈이 있고 그 꿈이 실현 되면 다른 꿈을 꾸며 살 것이다. 물도 고이면 썩는다. 정지 된 지식, 수도(修道)의 의미를 잃어버린 수도, 타인을 배제한 자아도취는 生이 아니라 死다. 혼자 즐거운 수도는 독도(獨道)다. 어차피 수도는 ‘나’라는 개인의 문제다. 그 길을 걸을 때 깨달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눠야한다. 그러나 그 밑거름이 행복이 돼야만 한다.
우리는 고통 받을 때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지만 행복할 땐 고통 받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으려한다. 행여 그 고통이 간접적으로라도 내게 오지 않기를 바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은 것이다. 그 고통이 지금의 행복을 만들었고 다가올 고통을 맞이하는데 좋은 거름이 된다. 그러나 고통이 아닌 행복을 거름으로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행복한 것이 뭔지
그건 그렇고,
돈 없이 살 수 없지만 돈 때문에 살지 않는 것이 내 수도다. 나는 그 수도를 모든 인간이 가야할 길이라 본다. 노후보장에, 자녀교육에, 문화생활에, 치료에, 사회적 지위를 위한 줄과 빽(?)을 위해, 지금보다 더 풍요로움을 위해 돈에 절어 살도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교육비는 나날이 증가하는데 왜 살인, 강간, 폭행, 유괴 등 흉악범죄는 증가하고 자살률은 세계 1위인가. 교육비가 적어서? 교육을 받았는지 아닌지 종이로 확인하도록 만든 우리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버스나 지하철을 타보라.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을 포함해서 욕설을 빼면 아이들은 대화가 안 된다. 얼마나 교육비를 더 들여야 할까?
돈 안 되는 인문학과는 각 대학에서 퇴출대상 1호 학과다. 취업준비를 위해 가는 학원에 인문학이 무슨 필요가 있나? 누가 아이들을 누가 우리를 옥죄는가. 그래서들 유학 가는 게다. 교육이 이미 아이들이나 부모에게 고문이 됐기 때문이다. 날고 긴다는 대학 나온 정치인들의 국정감사장을 보라. 돈과 관련 없는 비리는 없다. 비리의 벼룩시장이다. 그런 인간들이 “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돈 없이 살 수 있냐?”라고 묻는 것들이다.
그건 그렇고,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잡글’의 매력인가?
그건 그렇고,
네 편의 수필을 써야하는 즐거움이 왔다. 아마도 시 공부가 부족한 내 시들이 격이 떨어져 수필로 왔나 한다. 그런데 음...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면 일본어의 경우 배우기가 쉽다. 그런데 중반에 접어들면 일본어는 매우 어렵다. 영어도 문학번역은 나 같은 초짜는 큰 산이다. 수필도 그렇다. 편하게 쓰다보면 점점 어려워진다. 매 해가 지날 때마다 수필의 격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다. 지난날의 수필들을 보면 ‘잡글’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래서 어려운가? 요즘 단편들을 쓰고 있다. 상당히 버겁다. 쓰면서 “소설은 내 영역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인다. 내가 주장하는 주제를 무슨 국가기밀문서도 아니고 밑에다 깔려다보니 켁켁 댄다. 그러나 하루의 모든 시간을 글과 함께 하기에 행복하다. 잘 쓰든 못 쓰든 읽든 안 읽든 나는 글과 산다.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리 잡으면 잘 일어나지도 않으니 집중하면 소주와 쌀도 아낄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많은 돈을 만져보는 행복도 있었지만 지금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가끔 스승님을 좀 만나면 좋겠는데 일생이 독학이니 포기한지 오래고 그저 수도하는 마음으로 산다. 이것이 나의 행복이다. 하루에 돈을 떠올리는 때는 거의 없다. 고로 돈을 만지는 일도 드물다. 그러나 돈을 혐오하지 않는다. 돈 싫어하는 사람 어데 있나. 돈이 있어야 소주를 사지. 안 그런가? 조금 더 만족하고 지금 더 만족하고 조금 부족해도 만족하고 많아지면 나누며 만족하면 된다. 행복한 것이 뭐 별건가?
그건 그렇고,
직업에서 찾든 가족에서 찾든 아니면 지금 찾든 행복할 수 있는 길은 통계가 없다. 그저 지금 우울하면 바로 고통이고 지금 행복하면 참삶이다. 단, 하나 말하고 싶은 건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행복추구권엔 ‘표현의 자유’가 들어간다. 말하고 쓰면 된다. ‘표현의 자유’가 내포하는 큰 의미는 혼자가 아니라는, 우리가 나눌 자유다. 서로가 서로를 나누고, 모호하면 만만한 상대에게 표현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내게 표현하면 된다. 표현하는 시대 아닌가? 추하지 않도록 누리면 된다.
요즘, 온갖 사상들이 누리터에 올라온다. 동영상, 이론, 반박자료 등 넘쳐난다. 뭔 종교도 새로 생기나보다. 하여간 별난 그리고 재미난 글들이 많다. 수많은 책들과 논과 서들 사이에 흔들리지 말고 바로가면 된다. 무엇이 바른가만 찾으면 답이 온다. 간단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에 비추어 맑고 밝으면 된다. 보편적인 바름을 바탕으로 더 맑은 바름을 찾아 살다보면 사회의 잣대나 손가락질이 얼마나 한심한지 알게 된다.
그건 그렇고,
수도(修道)는 타도(他道)와 독도(獨道)를 포함한 극도(極度)로 가는 길이다. 도통(道通)하면 도(道)가 아니다.(후에 묵언에 관해 쓴다.) 수도(修道)하는 자는 도(道)를 반드시 안내해야 한다. 그렇다고 나를 노자의 도가도비상도를 만끽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위하지 무위하지 않는다. 혼자 도를 닦다가 혼자 좋아서 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도인들 중에 후세를 위해 남긴 책들을 남긴 분들이 많다.
혼자 수도하다가 홀로 가면 책이 남겠나? 들은 이도 말함을 적는 이도 없는데?
간단하다. 남을 위하지 않으면 혼자 죽으면 된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면 된다. 아니라면, 그것이 아니라면 서로 누리다가 가는 삶이 좋다. 행복해야 하는 우리의 본능을 따라서 죄가 되는 언행 대신에 남을 살리는 언행은 어떤가? 시련으로 고통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입이나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야 그것이 도(道) 아닌가? 해보시라. 새로운 인연들이 생기며 가슴이 뿌듯해진다.
당신은 어떤가?
혹시 도(道)를 아십니까?
그건 그렇고,
요즘 느낀 건 선입견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진 일이다. 내가 보는 그 사람만 보지 사회가 규정짓는 사회 구성원 중 일부로 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이 말해주지 눈에 보이는 사람은 동물과 같다. 태어나 먹고 싸고 입고 떠들며 자다 죽는 게 사람이다. 사람임을 증명하는 건 마음뿐이다. 그 마음이 그르면 동물보다 못한 것이고 마음이 마음다우면 사람이다. 나쁜 마음이 행복을 추구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죄를 짓더라도 행복감이 든다면 그 행복은 나누지 못하는 외톨이 행복이 된다. 맑아지도록 닦으며 사는 마음이 행복을 추구하면 스스로 나누지 않아도 주변이 행복해지게 된다.
혈액형이나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책들이 나와 있다. 그 책을 통해 인간을 분석해서 사회에서 성공한단다. 믿는가?
얼마 전 믿을 수 있는,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공인 된 사람에게 속내를 털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어떻게 아나. 마음이 보이나? 그래서 맑고 정직한 깨끗해야만 한다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실망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떤 감정이 일까? ‘다시는 저 사람에겐 말하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탁해진다. 내 마음이 탁해지면 내 주변도 탁해진다.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이 미워지고 내 마음 한 곳에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 자리를 잡기 전에 털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을 갖췄다는 저 사람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저 사람과 같을까? 그런 생각이 선입견이 되기도 하지만 당연히 아니다. 지위가 뭐든 역할이 뭐든 사람들이다. 사람은 사람이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행여 내게 실망을 안겨준 그 사람이 탐탁지 않다고 해도 그 사람이 더 맑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내 행복을 그 사람이 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해야 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 행복이 방해를 받을 이유는 없다.
판단은 맑은 마음으로 말은 그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그래서 공부하는 게다. 조금 더 맑아지기를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공부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끝없이 글이 길어진다. 이러다 또 하루 간다. 오늘은 약속이 있다. 흔치 않은 일이다. 크게 구멍 난 양말들을 정리하고 나니 양말 찾기가 참 어려워 졌다. 부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한다. 지하철을 타본지가...... 생각나지 않는다. 몇 달 된 듯한데. 들으며 갈 음악 CD좀 만들고 만만한 책도 골라 가방에 넣고 면도도 좀 하고 간만에 양치질도 좀 하고...... 머리를 감을지는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뭐 그렇게 가렵지 않은 걸로 봐선 그냥 가도 될 듯하다.
겨울바람이 분다. 가을이 끝나가고 있다. 낙엽 좀 밟아보련다.
하늘도 한번 보고 숨도 크게 들이마셔 보러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
2010.10.27. 13:59 윤안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