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책 속에서 “장르를 갈래로 부르자.” 라고 주장한 사람을 봤는데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이었다. 그의 글을 요즘 다시 보게 됐는데 나는 나 나름대로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우리네 사용언어에서 남용하지 말자는 뜻으로 갈래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 전에 조동일 선생이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선생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창피했다. 책 속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 갈 때 반성과 함께 내가 어떻게 말하고 써야하는 가를 느낀다. 미안한 감마저 든다.
그건 그렇고
요즘 나는 뭔가 결심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예를 들면 전장에서 수십만의 부하를 거느린 장수가 궁지에 몰려 이대로 지체하다간 사랑하는 내 모든 부하들뿐 아니라 나의 목숨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면 된다. 반드시 선택해야하는데 피해를 감수하는 결정이냐, 아니면 피해 없이 서로가 행복해지느냐다.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내 꿈은 하나다. 미친놈처럼 쓰다가 가는 것. 아니 글 쓰는 미친놈. 그 하나뿐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오로지 글 하나만 쓸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그러나 삶은 나를 글에 몰두하게 두질 않는다. 매우 슬픈 나날이며 심한 갈등에 신경이 예민해져 하루하루 성질이 더러워진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매우 괴로우며 고통스럽다. 이대로라면 나는 글쓰기를 포기해야 할 듯 싶다.
그건 그렇고
다독에 대해 말하고 싶다. 시인이 시 한 편을 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보는가. 사람들은 시가 짧아 별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시인이 시 한편을 쓰려면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의 시집을 읽어야 한다. 또한 소설가가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의 단편 하나 내려면 가늠이 불가능한 독서량을 필요로 한다. 엄청난 시간과 공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 한편 나오는데 일이년이 걸린 사람은 문학신동이란 뜻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읽고 써야 한다. 예를 들면, 도공이 예술품이라 칭송받는 도자기 하나를 만들어 낼 때, 대체 몇 개의 도자기를 박살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 시인 스스로 셀 수 없이 깨버린 도자기의 수를 생각해보라.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깰 수준에 이르렀다면 도자기를 보는 눈이 보통 수준은 넘었다는 뜻이다. 관련된 이야기는 차후 수필을 통해 할 말이 많다.
그건 그렇고
나는 늘 반성하려 애쓴다. 성질이 더러워 되도록 실언하지 않으려 애를 무던히 쓰는데 쉽지 않다. 남이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더라도 참아야하는데 쉽지가 않다. 모함을 해도 그리고 그것이 억울해도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는 것은 나의 그릇이 작기 때문이다. 내게 매우 실망스럽다. 나는 상대가 도를 넘더라도 참을 줄 아는 내 그릇을 원한다. 공부가 부족하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께 가봐야 하는데 약속드린 며칠 후엔 못갈 듯싶다. 몸도 시간도 허락을 거부한다. 어떻게 말씀드려야할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