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을 돌리면 깎이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땐가 다하고,
나무를 심고 기르면 자라는 것이 눈에 띄지는 않아도 어느새 크게 자란다.
덕을 쌓고 거듭 실천하면 당장은 훌륭한 점을 모르나 언젠가는 드러나고,
의리를 버리면 그 악한 것을 당장은 모른다 해도 언젠가는 망한다.
사람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면
큰 그릇을 이루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이것이 고금(古今)에 변치 않는 도(道)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보편적 이성을 갖춘 상태에서 생활하며 생각하고 사람을 대(對)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을 예절이라 표현해도 되겠으나, 나는 예절대신 배려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배려가 예절이 아니냐는 말을 하지만 뭉뚱그려 말하는 것에 나는 별 취미가 없습니다. 보편적 이성은 무엇이고 나는 그것을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합니다. 스치는 교육과 어른의 훈계 그리고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성립되어갔지만 한계가 있지요. 나는 지금 독특한 유아독존의 길을 오래 걷고 있습니다.
근래, 보편적 이성을 굳이 갖출 필요가 있는가 하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데 복잡해집니다. 되레 복잡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름을 채우고 고속도로를 타고 장거리를 간다면 운전자는 유량계의 바늘만 쳐다보고 가지 않습니다. 반 정도 가면 기름이 어느 정도 남았나 가끔 확인할 뿐입니다. 봐야할 것은 전방의 도로 사정이고 표지판일 것입니다. 여기서 신호나 표지판은 교육을 통한 지식으로 우리는 구분합니다. 도로는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다양한 목표를 향한 길입니다. 그러나 광주로 갈지 평택으로 갈지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요즘 나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출발도 안한 것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얼추 왔다 싶은데도 갈 길은 멀다 느껴지고 기름은 떨어져 가는데 기름값도 없습니다. 나는 요즘 고속도로고 뭐고 폐차 하고 어디론가 숨어들어갈까 생각 중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은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 아닌가합니다. 위에서 말한 보편적 이성을 갖출 필요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목적지를 갖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상통합니다.
이런 글을 읽고 신세편한 소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목적지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목적지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도착했다는 사람 본 적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자는 그저 걸어온 길에 만족하다는 유언 아닌 유언으로 만족감 없는 만족감으로 종지부를 찍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