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눈물과 미소 - 오영희 일제의 발악이 한창 심하던 1938년,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과 만나 결혼한 이후로 우리는 정말 수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남편의 정치 생활은 늘 감옥과 연결지어졌고, 덕분에 우리 집은 평균 닷새에 하루는 남편이 없는 쓸쓸한 집이었다. 나와 아이들은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저녁마다 <동심초>와 <별은 빛나고>를 불렀다. 아이들은 우울해 있다가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다시 웃음을 되찾곤 했다. 노래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또 여행을 가셨단다. 며칠 안 오실 거야" 하고 말해 주는 생활이 20년은 계속되었다. 한 번은 교도소에 있는 남편에게 KBS를 통해 내 노래를 보낸 적도 있었다. <꿈길>이란 노래였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도중에서 만나 볼지고.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던 그때이기에 나는 생각다 못해 노래라도 보내자고 결심한 것이 다행히 취침 전에 재소자들에게 들려주는 방송 시간에 나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이 노래 사건으로 며칠 동안 감방 친구들에게 즐거운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 집이라고 찾아왔을 때 우리는 신촌 어느 고아원 방에서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비가 오기만 하면 천장에 깡통을 매달아야 하는 오막살이였다. 그 모습에 남편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큰딸을 리더로 하는 가족 합창으로 남편을 맞이했다. 웃음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남편의 그때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웃음과 늘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이 어떤 황금의 재산보다 소중한 것임을 우리 가족은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Board 삶 속 글 2014.12.30 風文 R 12207
五里霧中(오리무중 ) 五(다섯 오) 里(거리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후한서(後漢書) 장해(張偕)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한(後漢)시대, 경전(經典)에 뛰어난 성도(成都)출신의 장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평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데다, 그와 교제하려는 황족들이나 귀족들까지 그를 자주 찾아왔다. 그는 이러한 붐비는 생활과 벼슬을 싫어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학문외에도 도가(道家)의 도술을 익혀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사방 5리나 안개를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곤 했다. 그 당시 사방 3리 정도의 안개를 일으킨다는 배우(裵優)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술법을 이용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 도술을 장해에게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이 바람에 장해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五里霧中 이란 거리가 5리나 되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듯 현재의 상태를 알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 五:다섯 오. 里:마을, 이수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동의어] 오리무(五里霧). [출전]《後漢書》〈張楷專〉 사방(四方) 5리에 안개가 덮여 있는 속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행방이나 사태의 추이를 알 길이 없음의 비유.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 대고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장해는《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宿儒: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는 학문뿐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주]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말은 ‘오리무’에 ‘중(中)’자를 더한 것인데 처음부터 ‘중’자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함. 방술 : 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方士)의 술법. 張楷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書人裵優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從學之 楷避不肯見.
Board 고사성어 2014.12.30 風文 R 10322
간판 문맹 “제가 모시는 여러 신 중에는 ‘소 신’과 ‘새우 신’이 있습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사람을 위해 온전히 바치어 주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찾은 일본풍 선술집 점원이 장난기 섞인 웃음과 함께 새우튀김을 내놓으며 한 말이다. 종업원의 재치있는 말 한마디가 자리를 환하게 빛내주었다. 그 집에 손님이 많은 것이 음식과 분위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맛깔스런 음식에 아기자기한 실내장식, 종업원의 친절과 재치가 돋보이는 그 집의 이모저모가 좌중의 화제에서 빠지지 않은 걸 봐도 그렇다. 모든 게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이 집 찾기 참 힘들었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 집에 초행이었던 네 명이 모두 그랬다. 이유는 하나였다. 가게 간판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흰색 네모꼴 간판에는 큼지막한 일본어와 그 아래 작게 쓴 영어만 적혀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자리 파하고 나와 그 동네를 둘러보니 한글 없이 외국어로만 쓴 간판이 새삼 눈에 많이 들어왔다. 옷가게와 커피숍, 아이스크림 전문점, 빵집 등은 영어로만 쓴 간판이 오히려 많았다. ‘세계 공용어’ 대접을 받는 영어는 접어두더라도 언제부터인가 부쩍 늘어난 일본어 간판 앞에서 ‘문맹’이 되는 경험을 한 사람은 우리뿐이 아닐 것이다. 중국은 소수민족 자치주에 거주민족 문자 표기를 의무화했다. 연변에서는 ‘한글(조선어)과 한자(중문)를 병기하되 한글을 먼저 표기’해야 한다. 프랑스어권인 캐나다 퀘벡주는 간판에 프랑스어 표기를 하지 않은 업주에게 강력한 행정처벌을 내린다. 관급공사 수주 자격을 박탈하고 고액의 벌금을 매기며 연속 적발될 경우 가중 처벌하는 것이다. 간판은 공공디자인이고 그에 담긴 언어는 공공성을 띤다. ‘한글 간판의 새로운 모색’을 주제로 전시회가 열린 까닭, ‘한글 간판 의무화 법 제정’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간판 문맹’을 없애자는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