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골수에 스며든 손 기운 - 이주홍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아름다운 여자도 알기 전에 맨 먼저 내 어머니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보다 유난히 가난했던 어머니는 한 번도 남들처럼 고운 옷 입으신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으셨고, 보름이나 한 달 만에나 끓일까말까 한 고깃국이었음에도 고기를 아버지와 내게 사양하시고 혼자서는 언제나 뼈다귀만 쫄쫄 소리내어 빠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셨다.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착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착실히 해야 한다는 따위의 재촉은 하지 않으셨다.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공부를 하는가 어쩌는가 하여 미소 지은 눈으로 내 하는 양을 지켜보고 계실 뿐이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선 나를 자랑하는 일이 없다가 내가 보이지 않는 데에서만 이웃 어머니들에게 내 장점을 자랑하시던 어머니였다. 어릴 적부터 양친을 여윈 아버지는 고아처럼 삼촌 밑에서 설움으로 지내 왔기 때문에 어머니 역시 같은 운명에 휩싸여 무진한 설움을 참아 내지 않으면 안되셨다. 아버지의 삼촌 곧 나의 종조부께서는 엄할 땐 엄해도 아낄 땐 아껴 주셨지만 숙모, 아버지의 숙모 곧 내 종조모만은 천하의 보기 드문 악녀였다. 어머니께서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 매구(마귀) 할망이 나오면 그 매구가 바로 종조모로 상상이 되었을 만큼 그녀는 못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거위를 겁내어 소스라쳐 옆으로 비켜나면 일부로 거위를 부채질해 나를 물게 해놓고 혼자서 웃으며 좋아하던 징그러운 여자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한 마디의 말씀도 없이 그 집에 가서 부엌일을 하고, 방아를 찧고, 빨래를 해주면서 천 날이 하루같이 말없이 시중을 들어 주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깜깜해져서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드릴 밥을 이고서 10리 길이나 되는 무서운 귀신바위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느 고대 소설의 불행한 여주인공보다도 더 가련했던 어머니! 그러나 그 어머니의 손에 잡혀 어두운 고갯길을 넘어지며 자빠지며 함께 걸어 다닌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행복한 아이였다. 거위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나를 물어뜯어도 행복은 아주 나를 외면해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골수에까지 스며들던 어머니의 그 따스한 손 기운이 지금까지 내 팔목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평생을 괴롭히던 가난을 욕 주고, 부른 밥 편한 잠으로 모시고 싶어도 어머니는 이미 이 누리에 계시지 않는다. (작가)
Board 삶 속 글 2020.05.02 風文 R 1199
Board 고사성어 2020.05.02 風文 R 1375
살인 진드기 ‘전신이 나른해지고, 구역질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 후 고열과 설사 등 증상을 보이는 한편, 혈소판이나 백혈구가 급감한다. 2011년에 병원균이 확인된 전염병이다.’(위키백과)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Severe fever with thrombocytopenia syndrome, SFTS)의 설명이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지난주 국내에서도 이 전염병 감염으로 의심되던 환자가 숨졌다. “이 병의 위험성이 일본 뇌염 등 많이 알려진 곤충 매개 감염병에 견주어 더 큰 것은 아니다”라는 질병관리본부의 발표에도 불안감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야외 활동이 잦아지는 시기인데다 매개체가 이른바 ‘살인 진드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에스에프티에스(SFTS)로 의심되는 환자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공포를 느꼈다. “매개 진드기 중에 전염시킬 바이러스를 지닌 개체는 ‘100마리 중 1마리 미만’이라는 전문가의 설명도 두려움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신문기사를 ‘읽는 것’과 뉴스를 ‘듣는 것’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인(사람 죽이는) 진드기’라는 표현이 영화 <연가시>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으니 말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것의 원이름은 ‘작은소참진드기’다.‘ 신증후군 출혈열’(유행성 출혈열)을 옮기는 설치류나 조류독감의 하나인 ‘H5N1’을 옮기는 조류, 뇌염과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따위를 두고 ‘살인 쥐’, ‘살인 새’, ‘살인 모기’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맹독을 지녔다는 이유로 ‘살인 뱀’이나 ‘살인 벌’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 진드기’ 의심 1명 사망” 같은 기사 제목은 어색하고 ‘살인 진드기’라는 표현은 왠지 섬뜩하다. ‘살인 진드기’의 따옴표를 드러낼 수 없는 라디오에서는 앞에 ‘이른바’, ‘속칭’을 붙이고,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SFTS)이 길어서 부담스럽다면 영어 약자 ‘에스에프티에스’를 쓰는 것도 방법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