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앞에서 - 홍윤숙
1
나무를 보면
까마득한 가지 끝에 가슴 설레어
무작정 기어올라가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2
이제 나무 앞에 서면
눈 감고 편안히
그 등걸에 기대서고 싶어진다
3
든든한 등걸에 기대어 서면
세상에서 지고 온 어두운 기억 바닥난 잔고 같은
뜬 세상 일 죄다 잊어버린다
4
잊어버리고 노을 진 西天이나 먼 강으로 나가
넓은 세계 낯선 나라들의 지도나 그려보고
한 생애 작은 허명에 매달려
큰 상심으로 달려온 돌밭길 돌아본다
5
이젠 눈 감고 세상 모든 일 세상에 맡기고
먼 여행 떠날 일이나 생각해야지
흙투성이 희망 풀지 못한 숙제 그만 땅위에 내려놓고
마음 하나 추스려 먼 길 떠날 일 생각해야지
6
나무를 보면
까마득한 가지 끝에 가슴 설레어
무작정 기어올라가고 싶었던 시절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