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기 - 정진규 (1939~ )
우리 집 김장날 내가 맡은 일은 항아리를 비워내는 일이었다 열 동이씩이나 물을 길었다 말끔히 말끔히 가셔내었다 손이 시렸다 어디서나 내가 하는 일이란 비워내는 일이었다 채우는 일은 다른 분이 하셔도 좋았다 잘하는 짓이라고 신께서 칭찬하셨다 요즘 생각으론 집이나 백 채쯤 비워내어 그 비인 집에 가장 추운 분들이 마음대로 들어가 사시게 했으면 좋겠다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셨으면 좋겠다
산다는 것은 결국 비워내는 일이다. 남을 사랑하는 일도 미워하는 일도 결국은 나를 비워내는 일이다. 비워내기 위해 그토록 아등바등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비워내야 채우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안타깝게도 육신은 시들고 죽음은 가깝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