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 정한용
여보,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당신과 우리 아이 레일라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내가 밤새 속삭였는데 물론 당신 귀엔 들리지 않았겠죠 기억해요? 우리가 나불루스로 가던 버스에서 남몰래 손 잡았던 일 그리고 다음 해 올리브 꽃이 흐드러졌을 때 새들 울음소리 들으며 첫 키스를 했던 일 딸이 태어나던 날 당신이 했던 말 기억해요? 눈은 날 닮고 코는 당신 닮았다고 그렇게 세상 전부가 우리 것 같았는데 절대 당신이 알지 못했던 게 있었죠 아니, 당신도 너무나 당연히, 그래서 우리를 감싼 검은 공기처럼 우리가 점점 팔레스타인의 숙명 속에 익숙해지고 우리 삶이 감옥이 되어 갔다는 것 어쩌면, 그래요, 어쩌면 당신은 나를 당신과 다섯 살 아이를 이승에 두고 먼저 간 나를 원망할지도 당신은 내가 세상 전부라 말했지만 죄 없이 죽어간 동생과 어머니를 통해 내가 바라본 세상은 가자지구를 넘어, 이집트와 지중해 국경을 넘어 생명이 있는 것들이 모두 폭탄이 되는 곳, 세상 저편까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요 이미 그 때 내 삶은 죽음과 손잡고 있었으니까 그리운 당신 내가 자폭했던 분수대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들은 이스라엘군 수십 구의 찢어진 살점만 확인했을 뿐 몰래 가르쳐 드릴게요, 당신이 준 반지 분수대 왼쪽 배수구 밑에 떨어져 있어요 아무도 못 찾았는데, 세월 지나 세상이 좀 가라앉거든 그 반지를 우리 레일라에게 전해주세요 엄마를 기억하라고, 슬픔이 희망으로 바뀌길 염원하며 나 때문에 당신,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얼굴도 해쓱해졌군요 다시 착하고 예쁜 여자 만날 거예요 미안해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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