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출토 - 나희덕 (1966~)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호박이 수도자이시구나. 그렇구나, 호박이 부처님이시구나. 호박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둥근 사리는 사랑이구나. 우리의 삶이 이 호박만 해도 고통과 절망이 어디 있겠는가. 가을 들판에 홀로 썩어가는 거룩한 호박의 사리를 수습하러 가야겠다. 같이 가지 않겠는가.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