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1959~ ), '사랑을 놓치다'
…내 한때 곳집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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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에 유의하자. 보은군 내속리와 명사산 돈황여관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 상거 삼만 리.
몇 번이고 윤회와 전생을 통해 '그대'를 만나려 하나 번번이 어긋나고 또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
한다. '귀촉도'의 정한이 현대적으로 계승된 이 시편 속 불운한 사랑은 전혀 칙칙하거나 어둡지 않
고 외려 밝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세속의 그 흔한 남녀 감정을 초월한 데서 비롯된다. 평이
한 어법 속에 깃든 깊은 사유가 놀랍다.
이재무 <시인>